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멀리서 보면 장소는 무심하고 자명하며, 가까이서 보면 장소는 비밀스럽고 남루하다. 생의 매 순간 우울과 설렘 속에서 자리잡은 특별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장소가 문득 지울 수 없는 뉘앙스로 마음에 새겨질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 낯선 시선 속에서 특별한 장소로 전환되는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무감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고유한 장소가 남아 있을까?’ (10~11쪽)

 

 어느 시절 서울은 내 삶의 일부였다. 길지 않는 날들이었다.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기 위해 도착한 서울은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공포도 서울에서만 이뤄지는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 앞에 무감해졌다. 병원과 터미널 주변이라는 제한된 공간이었지만 우리는 짧은 만남의 긴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장소는 여전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어떤 장소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광호의 말처럼 내게 서울이란 공간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용산이라는 공간으로 다가오겠지만 내게는 서울로 대치된다. 때문에 이광호가 부여하는 용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어느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간이란 그런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 몰랐던 그곳의 역사와 아픔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니 나는 여행객이 된다. 선명하고 담담한 말투의 용산 안내자 이광호를 따라서 말이다.

 

어떤 장소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곳의 시간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너의 장소를 벗어난다 해도 너의 부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88~89쪽)

 

 방송을 통해 만난 용산과 글의 골목을 따라 마주하는 용산은 묘한 슬픔이 감돈다. 현재 용산역의 화려함이나 고급스러운 동부이촌동으로 가려진 용산엔 여전히 눈물로 얼룩진 삶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현재의 용산을 쌓은 수많은 상처의 조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 속 전자상가 사람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이태원, 남산, 한남동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진다.

 

 이광호의 애련하고도 청아한 문장으로 태어난 용산은 아름다운 슬픔이 풍경으로 피어난 공간이다. 용산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용산은 어떤 삶의 부재를 증명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첫 발을 내딛는 당신이라면 이광호가 이끄는 동선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해도 좋겠다. 책에서 만난 어느 장소, 어느 공간 앞에 머물러 잠시 멈춰도 좋으리라.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무심하면서도 웅숭깊은 용산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현듯 떠오르는 특별했던 공간과 해후하게 될지도 모른다. 설령 이제는 평범한 장소로 전락했더라도 말이다. 분명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과 오롯이 마주한 나처럼.

 

‘어떤 지독한 기억은 이 생애가 끝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지만 반드시 망각의 순간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아름답고 참혹한 얼굴도 마침내 지워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최후의 순간에도 망각은 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너를 잊게 된다는 것’은 ‘네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152~15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8-14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6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EBS 다큐프라임
정지은.고희정 지음, EBS 자본주의 제작팀 엮음, EBS MEDIA / 가나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자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한 번쯤 돈을 물 쓰듯 쓰고 싶은 욕망이 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노예가 아닌 주체로 살기는 힘들다. 나름 열심히 저축하고 소비를 줄여도 언제나 마이너스인 통장이 서민 대부분의 모습이다. 모두가 잘 사는 자본주의를 꿈꿀 수는 없을까? <자본주의 사용설명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는지 확인하다.

 

 책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쉽게 말하자면 돈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해야 돈을 모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과소비를 하지 않는지 알려준다. 어렵게만 여겼던 자본주의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우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일상에 파고든 금융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남의 돈을 내 돈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은행 직원이 특정한 상품을 권한다면 그것은 본사의 판매 지시에 따른 것이거나 판매 인센티브가 많은 상품일 경우가 많다. 수익률이 최고이며 안전성이 좋다는 달콤한 말로 고객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도 자신이 권하는 상품이 어떻게 될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26~27쪽)

 

 주식, 펀드, 보험까지 투자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월급으로 생활하기도 버거운 이들에게 저축은 꿈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미래를 보장한다는 보험에는 약해지고 만다. 외국병원이 들어오고 의료 민영화가 된다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유입으로 우리는 과거보다 편리한 삶을 살지만 그 미래가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정말 무서운 일은 의료 민영화가 의료보험 민영화로 가는 중간 단계라는 점이다. 의료보험 민영화까지 이뤄지면 상위 20%를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미국의 국민들처럼 치료비가 많이 드는 병에 걸리는 건 파산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 수밖에 없다.’ (69~70쪽)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선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해야 할까. 이미 우리는 수많은 상품의 유혹에서 살고 있다. 소비 중독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물건들,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의 물건들. 유행을 따라 멋지게 살고 싶은 욕망도 매일 자란다. 신용카드로 이뤄지는 소비는 경제 개념을 무디게 만든다. 백화점은 소비자의 감정과 심리를 파악해 시계도 창문도 만들지 않았고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를 염두에 둔 영리한 방법으로 상품을 배치한다.

 

 ‘영수증 관리를 통해 소비습관이 파악되면 보다 경제적인 소비를 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경제적인 소비란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지출을 막고 그만큼의 돈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244~245쪽)

 

 이처럼 소비를 유도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소비 생활을 점검하라고 조언한다. 필요에 의한 소비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영수증 관리나 가계부를 쓰는 일은 귀찮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참해진다. 그러나 분야별로 지출의 크기를 알 수 있고 계획도 세울 수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책은 아이들에게 금융교육을 시키는 이야기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말한다. 돈의 가치와 돈에 대한 책임감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거대 자본의 세상에서 모두가 교육, 복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 PD의 미식 기행, 여수 - 제대로 알고 마음껏 즐기는 오감 만족 우리 맛 여행
손현철.홍경수.서용하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기차, 붉은 동백, 스물한 살로 이어지는 나의 여수엔 어떤 맛도 담겨 있지 않다. 분명 무언가를 먹었을 터. 기억 어디에도 여수의 맛은 없었다. 갓김치, 장어, 굴, 부추는 모두 방송을 통해 만난 여수의 특산물이다. 다시 여수에 갈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책으로나마 여수의 맛을 탐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식 기행이다. 여수와 인연이 있는 다큐멘터리 PD 세 명이 들려주는 여수의 맛 이야기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맛은 갓김치다. 예능 프로 1박 2일에서 갓김치와 메밀국수의 조합은 정말 침이 고이게 만들었다. 눈으로 보는 맛이 아닌 글로 만나는 맛 역시 다르지 않다. 세 명의 저자는 아주 탁월하게 맛을 표현한다. 갓김치, 돌게장, 갯장어 샤브샤브, 장어탕까지 당장이라도 식당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여행지의 토속음식을 먹어야만 제대로 된 여행을 했다는 말을 몸소 보여준다.

 

 여행이 일상이 된 요즘 여행지 정보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는 찾는 일은 어렵다. 이 책은 정말 정직하다. 음식 재료에 대한 자세한 설명뿐 아니라 맛 평가도 아주 솔직하다. 무조건 좋고 맛있다는 게 아니라 맛이 없으면 없다고 말한다. 책은 친절하게 가격도 알려준다. 때문에 인터넷으로 여수 맛 집을 검색하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책을 들고 여수로 향해도 좋다.

 

 유명한 해산물도 잠자는 미각을 자극하지만 나는 싱긍벌글빵집에서 파는 빵이 먹고 싶다. 세상에나, 싱글벙글빵집이라니. 정말 행복한 빵을 만드는 빵집임에 틀림없다.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빵을 먹이는 마음으로 만든 빵. 여행지에서 어머니의 맛을 만나는 기분은 어떨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셨던 풀빵을 생각한다.

 

 ‘크루아상도 없고 쿠키도 없고 식빵도 없다. 투박한 찐빵과 야채빵, 햄빵, 도넛이 전부다. 가격도 착하다. 모든 빵이 하나에 600원. 그 맛도 훌륭하다. 집에서 직접 만든 빵 같다. 특히 팥소가 가득한 찐빵에서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 준 맛이 느껴진다.’ (214~215쪽)

 

 미식 기행이라 해서 여수의 맛만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여수의 역사와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여수 근교의 많은 섬에 대한 설명도 있다. 거제도에 위치한 구십 년 된 고가(古家) 여관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풍 건물은 역사의 아픈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섬은 특별하다. 육지에서는 아무리 산간 오지라 해도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지만, 섬은 비바람이 조금만 세져도 고립되어 버린다. 국토이면서 마음대로 닿을 수 없는 곳, 섬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삶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를 때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섬이다. 섬은 반도의 끝에서 뚝 떨어져 육지인의 애환을 받아주는 곳이다.’ (246쪽)

 

 떠나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여수로 향하게 만드는 책이다. 멀지 않은 그곳에 여수가 있다고 말이다. 다시 여수를 떠올린다. 아직 예정되지 않은 어느 날, 여수행 기차에 올라탈지도 모른다. 그날을 상상하며 버스커 버스커가 부른 여수 밤바다를 듣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eeze 2014-08-1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수는 중학교때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곳인데, 이 년전엔가 여수 오동도를 갔어요. 오래전에는 그렇게 크고 넓어보였던 오동도가 아주 조그맣더군요. 저도 이 책 읽으려고 하고 있어요.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밤바다' 때문에 여수가 가고 싶은 도시로 될 것 같아요. ^^

자목련 2014-08-13 19:12   좋아요 0 | URL
아무 계획없이 떠난 여수는 무척 강렬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수는 너무 멀어요. 해서 여행기로나마 이렇게 여수를 만나요.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는 여수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요. 즐겁게 읽으세요^^
 
어느 특별한 재수강 - 자네, 참삶을 살고 있나?
곽수일.신영욱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는 바쁜 생활을 하느라 안부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다.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승을 찾게 된다. 성공한 제자(신영욱)와 은퇴한 노교수(곽수일)의 대담을 담은『어느 특별한 재수강』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컨설턴트 제자가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떠올린 건 바로 스승이었다. 스승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자신의 나무농장으로 찾아온 제자의 질문에 답을 해준다.

 

 제자의 질문은 삶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삶인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사랑과 결혼, 자녀에 대한 고민,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한 12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질문이다. 경쟁에서 뒤질까 동동거리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의 모습과 마주하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때문에 책에서 들려주는 답에 집중하게 된다.

 

 첫 번째 만남에서 제자는 원하는 일에 대해 질문한다.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면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속하는 이들이 가장 궁금한 질문이다. 스승이 들려주는 말은 이렇다. 일의 본질에 집중해야지. 직장인(職場人)이 되지 말고 직업인(職業人)이 되어야 해.” (69쪽) 한 번도 직업인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과연, 일의 본질에 집중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조건 취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앞선 수많은 취업준비생에게 새로운 길을 열에 만드는 답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우선은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간절함은 때로 독이 된다. 간절하게 원해 소유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스마트폰, 자동차를 예로 설명한다. 편리하다는 이유도 어디든 자동차로 가야 한다는 생각, 1분 1초도 스마트 폰이 없으면 안 된다는 불안. 물건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반대의 경우로 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하는 본질적 목적과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본질적 효용을 나만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어떤 물건을 가지게 되더라도 우리의 불행함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86쪽)

 

 그러나 나만의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자녀에 대해서다. 스승과 제자 역시 부모로 이와 같은 고민을 나눈다. 부모의 뜻대로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녀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또한 실수와 실패를 받아들이고 응원해야 한다는 스승의 말은 모든 부모에게 제대로 된 뿌리냐고 질책하는 것만 같다.

 

 “모든 가지를 다 쳐내더라도 뿌리만 있으면 나무는 살 수 있어요. 사람에게는 부모나 가족의 믿음과 지지가 바로 뿌리인 거고 살면서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뿌리가 굳건하게 받쳐주면 나무가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은 그 역할을 부모와 가정이 해줘야 한다고 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212~213쪽)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는 믿음과 지지 대신 부담과 강요로의 뿌리였다. 그러니 나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승은 나무농장에서 나무를 키우며 경험한 것들을 고스란히 우리 인생에 적용한다.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나무가 자라는 이야기, 욕심을 내어 틈을 주지 않고 나무를 심으면 결국 나무가 죽게 된다는 이야기는 색다른 교훈으로 다가온다.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대화는 죽음이다.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갑작스럽게 맞이한 이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승의 답은 정리하는 마음이다. 죽음을 염두에 둔 정리가 아닌 살아 있는 순간의 정리, 그것은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나중으로 미뤄둔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순간에 품어야 한다.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정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사람들은 일을 벌이는 데는 관심들이 많은데, 막상 정리하는 데는 소홀한 것 같아. 혼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예감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다고 이런 정리를 꼭 죽음의 예감이 들 때 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 삶에는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리가 필요한 거야.” (2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퀼트, 퀼트
양선미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화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이 아름답다. 자신의 소리가 아닌 상대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노력 말이다. 삶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관계라는 화음을 위해 누군가는 내 소리를 줄여야 하고, 누군가는 본연의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를 내야 한다. 양선미의 소설집 『퀼트, 퀼트』이 그랬다. 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이 가득했다. 10편의 소설은 하나같이 가족의 불화를 보여준다.

 

 소설 속 불화는 폭력에서 비롯된다. 교통사고 조서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 「조서」의 주인공 은수는 고등학교 논술 강사다. 어머니가 죽고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피해 숨어산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찾아낸다. 아버지와 은수 둘 중 하나의 삶이 끝날 때까지 불안과 공포를 떨쳐낼 수 없다. 때문에 목격자의 증언으로 은수가 조서를 쓰고 풀려나지만 진짜 아버지를 차로 친 건 은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화자는 가정의 강자인 부모부터 폭력을 당한 자녀였다. 장애를 가진 딸과 손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홍시」의 할아버지, 삶의 유일한 목표가 개를 때리는 것인 듯 살아가는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해피는」의 아버지, 자신의 욕망을 쫓아 남편과 딸을 버린 「물고기들」의 어머니, 신체적 장애를 지닌 딸을 버린「산책 일기」속 어머니,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늙고 병든 존재에 불과하다. 어떤 이유로 폭언과 폭력을 가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쌍하다. 손자가 좋아했던 홍시를 따다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 딸이 풀어준 해피 대신 다른 개를 데려와 함께 자는 아버지. 하지만 자녀들이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를 한 건 아니다. 그저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할 뿐이다.

 

 ‘방문 틈으로 보이는 아버지와 개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당혹스러웠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선가 얻어 장롱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병원용 담요를 용케도 기억해내고 꺼내서 거실 바닥에 펼쳐놓은 아버지의 움직임은 풍을 맞았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만큼 산드러졌다. 꼬리를 흔드는 털북숭이 개마저도 아버지의 신호를 따르는 듯했다.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새삼 한기가 드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털끝에 매달린 물기를 털어낼 때에는 그 안에 바글대던 벼룩이며 진드기들이 집 안 곳곳에 박히겠지 싶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해피는」중에서, 85쪽)

 

 양선미는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는 존재인 가족을 낱낱이 해부한다. 치유나 용서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삶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 공동체의 모습도 들려준다. 낡고 오래된 장미연립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풍경의 안쪽」는 특히 흥미롭다. 장미연립은 군수가 벌인 사업으로 단장을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고 이름도 로즈빌로 바꾸고 새로 페인트도 칠한다. 주민들은 반상회를 통해 감시카메라도 설치한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살기 좋은 빌라처럼 보이지만 주민들 사이의 교감은 점점 줄어든다.  집값이 올라가는 대신 사람 사는 냄새가 사라졌다. 감시카메라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제목처럼 풍경의 안쪽에는 삭막해진 삶이 있었다. 과연 그들이 원한 삶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로즈빌은 점점 더 한가로워졌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주거지가 한결 쾌적해진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민들은 빌라 주변을 걷거나 계단을 오를 때, 문득문득 근원을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감정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심심하달 수도 있고 섭섭하달 수도 있는, 어쩌면 허전하달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풍경의 안쪽」중에서, 203쪽)

 

10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표제작 「퀼트, 퀼트」였다. 소설의 주인공 운혜는 기억을 잃었다. 현재를 잃어버리고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정작 운혜는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돌아가신 엄마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시누이는 6년 전이 아니라 3일 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런 운혜를 지켜보는 주헌의 말은 언젠가 기억을 잃을 모두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거야. 버스를 타고 가는데 펑크가 났어. 그럼 걷는 거야. 걷다가 지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그러다 힘이 나면 다시 걸어. 배가 고프면 아무데나 들어가서 눈에 띄는 걸 먹고, 재수 없어서 배탈이 나면 병원에 갈 수도 있고, 가게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움켜잡고 한없이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심심하면 다시 걸어. 걷는데 저쪽에서 버스가 오면 올라타. 올라탔는데 아까 탔던 버스의 승객들이 이번에는 다 이 버스에 있는 거야. 분명히 행선지가 다른데. 그런데 또 펑크가 나. 문득 시계를 봤는데 아까 펑크가 났던 시간에서 멈추어 있는 거야. 그럼 생각하겠지. 어떤 시간이 진짜이고 어떤 시간이 가짜일까.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퀼트, 퀼트」중에서, 98~99쪽)

 

 어쩌면 우리는 상처로 얼룩진 삶의 시간이 끝날 때, 진짜 화음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우리 삶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불협화음을 만들며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아름다운 화음이라 믿으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