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3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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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설정과 교묘한 은유와 상징으로 나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다르게는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소설 보다: 여름(2023)』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반갑지만 그 첫 만남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니까. 조심스럽다는 생각, 그러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다. 그냥 끌리는 소설의 읽고 그 작가를 기억하면 그만인 것을.


『소설 보다: 여름(2023)』는 대체로 좋았다. 특히 좋았던 소설은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이었다. 제목이 암시하는 우울과 절망의 분위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주는 게 좋다. 소설 속 ‘희주’와 ‘주호’는 성인 기초 수영반에 등록했다. 기초에 주목하자. 그러니까 수영을 처음 배우는 것,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수영을 잘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열심히 해도 그 자리인 경우가 있다. 희주와 주호는 후자라 할 수 있는데 강사나 다른 회원의 눈에는 둘은 성실하지 않게 보인다. 눈치가 없는 주호는 특히 그렇다. 잘 하는 사람은 앞에 서라는 강사의 말에도 주호는 맨 뒷자리로 가지 않는다. 그런 주호를 희주가 뒤로 이끈다.


수영장 밖에서 주호와 희주는 어떤 사람인가. 주호는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희주는 10년의 교사 생활을 끝으로 퇴직했다. 희주는 환경을 생각해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버리는 만큼 필요한 것들이 늘어났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서 희주는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교사 시절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에게도 우리는 물에 잠기고 인간은 다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말한 것도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괴롭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주호의 직장에서 사출성형기에 끼어 동료 하나가 죽었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사고 후에도 공장을 돌아갔고 주호는 이건 아니라며 기계를 컸다. 누가 봐도 돌방행동이었다. 지속되는 주호의 행동에 회사는 주호를 쉬게 만들었다. 어떤 죽음과 어떤 사건에 대해 적당한 기준의 애도와 추모가 가능한가. 그만하면 됐다는 그 선은 누가 정하는가. 주호에게 침묵을 강요한 건 누구인가.


네가 왜 난리냐,라는 말을 듣고 주호는 그러게, 왜 내가 난리일까, 싶었다. 곽주호는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았다.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그 생각에 사로잡혔고, 무슨 일을 대하든 습관처럼 이 질문을 마주했다. 점점 주호는 자신과 상관없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물속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21~22쪽)


어쩌면 희주와 주호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 남들처럼 살지 않고 유난을 떠냐고 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환경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싶었던 희주와 이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느낀 주호. 그들은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일까. 수영을 배운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지만 수영을 배우는 이들이 다양한 것처럼 수영에 대해 다가가는 방법이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여러 각도에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사회 속 우리의 모습을 수영장에서 수영장의 그것으로 비유한 점이 탁월하다. 수영장은 다른 어느 곳으로든 치환된다. 내가 속한 작은 모임, 공동체 그 안에서 어떻게 의견을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생각하게 만든다. 공현진의 다음 소설도 꼭 읽고 싶다.


김기태의 「롤링 선더 러브」는 세태소설로 무방하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해 출연한 37세 독신 ‘조맹희’의 이야기다. 너도 나도 사랑을 외치고 찾지만 정작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고 할까.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소설이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큰 의미나 재미는 없다.


서울에서 고향 울산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해 엄마 ‘추자 씨’와 ‘나’ 사이의 시간과 둘 사이의 관계의 변화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들려주는 하가람의 「재와 그들의 밤」도 나쁘지 않다. 20년 동안 살았던 한울 아파트가 산불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가 챙겨온 앨범에서 ‘나’ 가 마주한 건 ‘추자 씨’ 사진뿐이다. ‘나’ 가 모르는 진짜 엄마의 모습. 재와 그들의 밤이 지나면 ‘추자 씨’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나’의 열망으로 가득한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둘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결말이 탁월하다.


나는 바랐다. 바람이 굳게 닫힌 투명한 창문을 깨뜨리기를.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오래된 발자국들을 뒤덮기를. 깨진 창문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기를. 또 바랐다. 바람이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기를. 옷장과 서랍 속을 뒤집고 흔들어 부질없는 내용물들의 무덤이 만들어지기를. 산에서 시작한 불길이 빠르게 번져 한울을 집어삼키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구호도 장비도 무용해지기를. 모든 것이 까맣게 재가 되어 사라지기를. (「재와 그들의 밤」, 150~151쪽)


한 쪽을 기운 편향적인 리뷰지만 취향의 차이일 뿐 장맛비 쏟아지던 여름에 만난 『소설 보다: 여름(2023)』는 장맛비처럼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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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7-05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분간 소설은 안 읽으려구요. 대기 작품 쌓아놓은 책탑만 100권은 족히 넘는데...ㅜㅜ
현대미술 책들 읽어야 해서 아마도 내년에야 좀 많이 읽지 않겠나 생각합니다..ㅎㅎ

자목련 2023-07-06 11:54   좋아요 0 | URL
그림을 그리시니 예술 분야의 책을 많이 읽으시겠지 싶어요.
늦었지만 미술대전 입상 축하드려요!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레삭매냐 2023-07-05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사키 아타루의 책
을 어렵사리 읽고 있는데...

왜 소설을 쓰냐는 말에
소설을 읽었으니까라는
글이 나왔던가요.

세상이 망해도 소설을 읽어
야지 싶습니다.

자목련 2023-07-06 11:59   좋아요 2 | URL
소설을 쓰지는 못하니 계속 읽어야겠지요. ㅎ
날이 덥네요. 사무실은 시원하겠군요. ㅎ
그랟도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은오 2023-07-06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좋겠네 자목련님이 널 이렇게 좋아하신단다!

자목련 2023-07-06 12:00   좋아요 2 | URL
은오 님도 좋을까요?
제가 은오 님을 무지 좋아하는데!!

은오 2023-07-06 22:13   좋아요 1 | URL
무지무지 좋아요!!!! 😆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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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기존에 만났던 느낌이 좋아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렇다. 다수의 팬을 지닌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란 이름이 주는 영향력,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한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를 읽은 기억이 나를 이 책을 이끌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도 한 몫 거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가 아닌 취재기라고 해야 맞다.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1991년 3월 12일 심야에 후지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기초로, 방송 이후 다시 취재를 거듭하여 쓴 것이다. 그 방송은 그가 스스로 기획한 첫 다큐멘터리이고 처음으로 이십 대에 쓴 책이라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가 기획한 다큐멘터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한 고위 관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관료의 죽음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환경청 소속 관료 ‘야마노우치 도요노리’로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53세의 야마노우치는 당시 일본 사회를 뒤흔든 ‘미나마타’병의 국가 측 책임자였다. 오래 이어진 정부와 피해 환자 간 소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야마노우치의 일생과 미나마타병의 시작과 보상 문제 진행과정에 대한 상세한 취재가 이 책의 중심이다. 잠시 쉬겠다는 말을 남긴 채 2층 자신의 방에서 가족과 직장 동료에게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연 최초 발견자는 아내 ‘도모코’였다. 그 황망함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2층에 빨리 갔더라면, 조금이라도 남편을 귀찮게 했더라면, 일에 대해 물어봤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책한다. 아내의 인터뷰가 이 책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애도하는 마음 말이다.


야마노우치의 아버지는 전쟁중에 죽었고 어머니는 그전에 자신을 떠났다. 불운한 가정환경에서 그는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가 지는 시, 편지, 메모를 통해서도 그가 어떤 감성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성향이었기에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는 일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집에 와서는 아내나 아이들에게 한 번도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미나마타병(화학공장에서 방류한 수은으로 인한 중독)을 맡은 후로는 귀가도 늦었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책임감이 뛰어난 그였고 정부와 피해 환자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로 보인다. 수은중독이라는 걸 밝히는 과정부터 패해 보상까지 길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국가를 대변하고 있지만 그 역할은 그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았던 건 아닐까. 야마노우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가 남긴 글과 그가 한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에요. 이건 복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정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기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 대처하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입장만으로 판단하면 복지 업무는 안 됩니다.” (116쪽)


그는 미나마타병의 발병지로 가는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목숨을 끊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한 인간의 내면을 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아내 도모코조차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남편의 죽음 이후 괴로운 그녀를 주변 이들이 떠받쳐주었고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조금 바꾼다.


사람은 고독하다. 철저하게 혼자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만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고독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259쪽)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지만 어떤 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회문제와 복지제도의 허점은 바로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와 개인 간의 분쟁, 화해와 보상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쓸쓸함이 감도는 책에서 유난히 눈에 밟히는 건 바로 소개로 만난 아내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분하게 써 내려간 편지에 좋아하는 것 가운데 “바라보는 것 - 구름”이라는 부분이다. 그가 편안하게 구름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외로움과 슬픔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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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 관계에 지친 당신을 위한 심리 코칭
황은정 지음 / 포르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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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에서 당신은 누구일까? 지정한 1명일 수도 있고 복수의 누군가 일 수도 있다. 이 책이 궁금했던 건 제목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소개가 아닌 오직 제목이 나를 이끌었다. 누군가 죽기를 바랄 정도의 증오는 어디서 발현되었는지 정말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지 궁금했다. 이토록 폭력적인 제목은 불편한 내용이라는 걸 예고한다.


저자는 귀걸이를 훔치다 들킨 일화로 들려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부모에 대한 반항이었다. 저자와 부모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무감각해진 엄마, 상처받은 아이를 돌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절로 낫는 상처는 없었다. 공무원이 되었지만 민원인의 폭력에 노출된 저자를 보호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아이를 낳고 퇴사를 했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를 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남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 부모가 우리를 돌보던 방식은 우리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이 된다. (35쪽)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고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한다. 자신 안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내면의 아이와 만나는 일은 상담이나 심리 치료에서 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받고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 저자는 글쓰기 수업을 통해 위로받는다. 그러나 긴 시간 쌓여 온 상처가 글쓰기 수업 하나로 온전하게 치유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을 돌아본다.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아이와 남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부부 상담으로 남편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 이를테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르고 대화의 주제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가볍고 사소한 대화를 원했고 저자는 깊이 있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를 원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계속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지만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것. 그게 다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68쪽)


내가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고통을 알아보고 인정하자 처음으로 나만큼 고통스러운 타인의 아픔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나만의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시간이었다. (79쪽)


저자는 치유 전문가에게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직시한다. 그때 그 시절 저자가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면 아이의 상처, 그것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아야 했던 것들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그때의 그 아이를 이제라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에서 시작되었고 과거를 잘 정리해야 현재를 잘 살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분노를 건강하게 밖으로 흘려보내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분노가 나간 자리에 사랑을 채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그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미치도록 화가 나는 이유가 정말 눈앞의 그 사람 때문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 안에 있다. (130쪽)


『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에서 말하는 것도 관계와 심리에 대해 다루는 기존의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나아지는 과정이 같은 상황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내면 아이를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면 아이를 안아주고 볼보는 일의 중요함과 그로 인해 어려웠던 관계가 나아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이해하고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침묵으로 듣기’를 실천해 보라.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몸짓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 찬찬히 바라보자. 내가 입을 닫으면 상대방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 (194쪽)


나도 모르는 분노로 가득하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과 묵힌 감정으로 힘들다면,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책이 그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 준다. 누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옅어지고 허물어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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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7-03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으니 두둥실 천국같은, 에세이 생각나네요. 작가도 엄마에게 어린 시절 폭력학대를 당했는데 엄마한테 맞으면 학교 일기장에 엄마한테 맞었다라는 말을 쓸 수 없어서 맞었다는 말 대신에 이런저런 글을 일기장에 쓰면서 글솜씨가 늘은 것 같다고.. 아마 작가에게는 그게 치유 아니였을까 싶네요!!

자목련 2023-07-04 09:23   좋아요 0 | URL
어떤 형태든 쓰는 일은 좋은 것 같아요. < 두둥실 천국같은>은 검색해보니 표지가 참 예쁘네요.
기억의 집 님, 비가 온다고 하지만 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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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나 먼저 읽은 이의 리뷰를 읽어도 내가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는 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라는 걸 나는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봄이 되면 이 소설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풀베개』는 봄꿈처럼 아련하고 잡으려 애써도 잡히지 않는 꽃잎으로 남은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는 이전에 읽었던 다른 소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뭐랄까, 소설이 아닌 산문 같다고 할까. 소설 곳곳에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가 많이 등장한 탓도 있겠지만 소설 속 화자의 생각이 나쓰메 소세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예술에 대한 생각 말이다. 첫 문장부터 언급되는 예술에 대한 정의와 이해가 그렇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게 하는 근심을 없애고, 살기 힘든 세상 세계를 눈앞에 묘사하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또는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묘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솟아난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쪽)


화자인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소설은 ‘나’가 만난 길에서 만난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그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하이쿠로 채워진다. 봄날의 풍경, 몽환적인 여인 ‘나미’, 스님, 러일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는 ‘나미’의 사촌의 느낌들. 어쩌면 하이쿠도 한 편의 그림이라고 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와 ‘나미’ 사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둘이 나누는 하이쿠 대화가 아름답다. 연애나 사랑, 현실의 고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진정한 삶은 따로 있다는 듯한 ‘나미’의 말투가 인상적이다. 온천장 주인의 딸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나미’,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만 정작 미친 건 러일전쟁이 일어난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나쓰메 소세키의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 녹아있으면서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봄날의 모습을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붉은 동백에서 아름다움이 아닌 독기를 발견하는 부분은 지독하게 아리다. 서른의 청춘 ‘나’가 바라보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짧은 분량임에도 여전히 수월하지 않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지만 사랑받는지 알 것도 같다.


확 피었다가 툭 지고, 툭 졌다가 확 피고, 수백 년의 성상(星霜)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산그늘에서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다. 단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끝! 본 사람은 그녀의 마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빛깔은 단순한 빨강이 아니다. 도륙된 죄수의 피가 저절로 사람의 눈을 끌어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듯한, 일종의 이상한 빨강이다.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 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고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137쪽)


‘나’는 계획했던 그림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으로 그려진다. ‘나’의 그림의 완성도는 모르지만 『풀베개』란 그림은 자꾸 보고 싶은 한 편의 수채화이자 읽고 싶은 담백한 산문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 읽으면 더 황홀하겠지만 장마와 열기로 뜨거운 여름에 봄을 그리며 읽어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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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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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자매가 있다. 투정 비슷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 제발 모든 걸 끝내고 떠나주었으면 한다. 그게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매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라고. 설마 그런 딸들이 있을까 싶지만 오랜 시간 자식들 집을 오가며 지냈던 할머니를 떠올리면 고모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즈무라 미나에 장편소설 『어머니의 유산』 속 ‘나쓰코’와 ‘미쓰키’도 그랬다. 자신밖에 모르는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자매의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녀를 위해 희생하거나 인내하는 어머니가 아닌 모든 일의 우선이 자신이었다. 허영과 사치가 가득했고 자신이 원했던 삶의 욕망을 딸들에게 투영시켰다. 그럴 수 있다. 그 덕분에 자매는 피아노를 배우고 파리로 유학도 다녀왔다. 언니 나쓰코는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부유하게 살고 미쓰키도 교수인 남편을 두고 자신도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늙은 어머니를 챙기고 다치면 병원에 모시고 간병을 하는 일, 당연한 자식의 도리 같지만 미쓰키 혼자서 감당하는 일은 벅찼다. 어려서부터 언니만 예뻐하고 차별했던 어머니를 어쩌다 자신의 몫이 되었을까? 어머니를 ‘그 사람’이라 칭하는 언니 나쓰고.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한 나쓰코는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른 남자가 생겼다.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지 않았고 나무랐다. 그 이후로 둘 사이는 거리가 생겼고 대신 미쓰키가 어머니를 더 챙기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곁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자식에게 닥친 남편의 외도로 고민하는 오십 대 미쓰키의 복잡한 내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막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어머니의 유품을 챙기며 자매는 어머니를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틋함이나 그리움 따위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의 인생을 떠올리면 같은 운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 게이샤였던 외할머니, 사생아로 태어난 어머니를 위해 하녀처럼 살았던 외할머니와 그런 엄마에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영악했던 어머니. 첫 결혼에서 낳은 딸을 버리고 아버지를 선택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 노년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고로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인생에는 계절이라는 것이 있다. 인생의 봄에서 한여름까지는 뭔가를 요구하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어머니에게 미래를 주고 있었다. 그것은 딸들에게도 미래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단풍이 짙어지고 나서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겉돌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이 되어도 계속해서 허덕이는 어머니는 어쩐지 섬뜩했다. (197쪽)


미쓰키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비유를 맞추고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사 나르고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위한다. 강의와 의뢰받은 번역도 쉬지만 미쓰키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고 어머니와 같이 왔던 호텔에 시간을 보내면서 미쓰키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프랑스 유학에서 만난 시간, 다락방에서의 프러포즈, 몇 번의 외도와 현재의 외도까지.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있어 남편과 이혼을 해도 괜찮다. 지금처럼 좋은 맨션에서 살 수 없고 강의도 해야 하고 번역을 하면 살아야 하지만 충분하다고 여긴다.


젊은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뿌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 (491쪽)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걸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고 포기한 기억은 응어리처럼 남는다. (533쪽)


『어머니의 유산』은 처음에는 어머니와 딸의 지지부진한 관계가 식상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점차 읽을수록 여성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이며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진하게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의 죽음과 모녀 삼대의 이야기를 『이방인』과 『마담 보바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녹아낸 점도 인상적이다. 노년을 향하는 삶, 노년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이 이 소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유산』이란 제목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의미, 절대 단순할 수 없는 특별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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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한 리뷰를 느낄 수 있네요.

자목련 2023-06-28 12:28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 그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3-06-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지만 그러지 않는 부모도 많으니까요^^

자목련 2023-06-28 12:29   좋아요 2 | URL
딸은 엄마의 마음을, 엄마는 딸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겠지 싶어요. 부모와 자식,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