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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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불순물과 찌꺼기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내버려 둔다. 상념과 상심, 복잡한 것투성이다.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 그 마음에 누구가 자리를 잡는다. 그에게는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의 불순물과 찌꺼가 따위는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만 남는다.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이꽃님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화된 마음의 반짝임을 보았다고, 연두와 초록으로 가득한 여름을 닮은 싱그러운 마음이었다고.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기대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꽃님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말처럼 나도 이 소설이 제일 좋았다. 상처를 치유하고 한 단계 나가는 성장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그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 이꽃님이 그려내는 소설의 특징이다. 속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용기라고 할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속 찬과 지오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그러하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 버거운 마음, 비밀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 일, 그리하여 비밀이 비밀이 아닌 조금 특별한 일상이 되고 편안해지는 것.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설 속 찬과 지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린 그 여름, 그 여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오는 엄마에게 전학을 통보받는다. 유도부가 유명한 고등학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온다. 그곳에서 한 아이를 만난다. 5년 전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사는 아이 유찬. 외지에서 온 자신에게는 찬바람이 부는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아이. 그 아이가 자꾸 지오 앞을 맴돈다. 교실에서도 유도부에서도 찬은 지오 곁에 머문다.


찬은 5년 전 화재 사고 후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소음이었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오가 곁에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좋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지오도 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열여덟에 혼자 자신을 낳은 엄마가 아픈 것도, 몰랐던 아빠의 등장으로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도. 화풀이처럼 내뱉은 말은 찬은 가만히 들어준다.


“그깟 마음 좀 들린다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마음? 네가 들린다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어. 하루는 조금 괜찮았다가, 그래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또 하루는 미칠 것처럼 화가 나 죽겠다고.” (57쪽)


그렇게 찬과 지오는 이제껏 혼자만 감당했던 마음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지오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들었던 상처가 된 말들, 엄마가 좋아해서 엄마를 지키기 위해 유도를 시작한 일을 찬에게 들려준다. 찬은 자신을 살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방화의 범인을 용서하는 동네 사람들을 향한 미움을 말한다. 지오와 찬이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닌데도 지오와 찬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쌓였다.


지오가 아빠 없이 엄마와 살아온 일, 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살게 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바라봐 주면 되는데 어른들은 애정과 관심이라는 이유로 숱한 말과 시선으로 거든다. 그 말과 시선이 지오와 찬을 아프게 하고 비밀을 만들고 그 세계로 파고드는 걸 모른다. 그런 어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 나는 미안하다.


지오와 찬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이꽃님은 너무도 예쁘고 담아냈다. 단 하나의 여름으로 남은 여름이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느 여름이 특별한 이유는 그 여름을 보낸 누군가 때문이다. 지오와 찬이 그런 것처럼. 찬의 뜨거운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어 찬을 지켜주겠다는 지오의 다짐처럼.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뭇잎이 초록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어떤 잎은 아주 연한 연두색이었고 어떤 잎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또 어떤 잎은 쨍한 초록색이었고 어떤 잎은 연둣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떤 잎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그 모든 잎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순간 유찬의 머리 위로 그토록 다양한 초록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85쪽)


지오와 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질문들을 꺼내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마음을 어림한다. 그것들의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찬과 지오는 성장할 것이다. 지오와 찬이 맞이할 앞으로의 여름을 기대한다. 벅차고 아름답게 빛나는 여름, 싱그럽고 맑은 마음의 열매가 단단해지는 눈부신 여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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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0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예쁜 소설이겠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싱그러운 아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절로 정화될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3-09-06 08:38   좋아요 0 | URL
아리면서도 예쁜 소설이었어요. 여름과 잘 어울리는 그런 소설이라고 할까요^^

페넬로페 2023-09-0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단락의 문장들!
그저 예술입니다.
이 문장만으로도 소설의 느낌을 알것 같아요.

자목련 2023-09-06 08:4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 님의 댓글로 즐거운 하루 시작합니다!

구단씨 2023-09-0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마음이 들리면 참 속이 시원하겠구나 싶었거든요.
근데 찬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는 것을 소음이라고 느끼는 순간, 제가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했는지 알았어요.
듣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듣게 되니, 그게 소음이고, 찬이에게 정말 괴로운 일이겠구나 싶더라고요.
더위가 먼저 생각나는 여름이지만, 이 소설 읽으면서 이 말이 가장 많이 떠올랐어요. 싱그럽다... ^^

자목련 2023-09-11 09:07   좋아요 0 | URL
그쵸?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마음이라는 게 참 어렵죠. 말씀처럼 이 소설, 참 예쁘고 반짝이는 싱그러움이었어요^^
 
커피와 담배 말들의 흐름 1
정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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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이었던 작은 언니는 시험기간에 커피를 마셨다. 잠들지 않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언니가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는지 그래서 시험을 잘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커피 본연의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의 맛이라 할 수 있는 달달한 그것. 커피의 영역은 나의 영역이 아니었고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언니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거의 어른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커피는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이고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 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 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18쪽)


커피를 마시는 일, 술을 마시는 일도 아닌 커피를 마시는 일이 내게는 어른의 증표처럼 여겨졌다. 정확히 언제 커피를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교 시절 마셨던 캔커피와 대학에 들어와 이공관 앞의 자판기 커피가 생각날 뿐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사 먹는다는 것, 그러니까 분위기가 좋은 가게에 들어가 근사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는 일은 미팅이나 데이트를 할 때 가능했다. 지금처럼 유명한 체인점도 없었고 커피를 골라 마시는 일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허상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지만 때때로 커피는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완벽하게 느끼게 한다. 그 순간은 내가 만들어낸 ‘커피를 마시는 나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커피는 내 몸으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58쪽)





정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는 그런 아련한 기억과 추억을 불러왔다. 가장 보편적인 기호식품인 커피와 담배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궁금했다기보다는 『산책을 듣는 시간』의 작가 정은의 글이라서 선택한 책이었다. 그 책이 좋아서, 그 안에 담긴 다정한 동그라미 같은 감각이 좋아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나쁘거나 별로였다는 건 안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


작가가 들려주는 커피와 담배로 시작되는 기억, 느낌, 공간, 사람, 의미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커피믹스가 나오기 전 커피, 프림, 설탕을 담은 단단한 유리병 세 개의 이미지부터 할아버지의 은하수 담배는 내 기억 속 저편에 자리한 검은 물을 마시던 고모와 수정 담배를 피우던 젊은 할머니와 겹쳐졌으니까. 담배의 경우는 비흡연자인 독자에게는 교집합을 찾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 그것들은 안정감 같은 특수한 감정의 형태로 몸에 잠시 내려앉는다. 그것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들,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67쪽)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하는 이들 중에는 흡연자가 많겠지만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반해 그와 함께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부분과 나중에 그와 연인이 되면서 그를 따라 금연을 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삶에 미치는 의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욕심내지 않고 사들이지 않았을 나의 잔들. 멋진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도 집에 돌아와 친구와 믹스커피를 마시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눈과 코로 마시고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커피. 요즘은 하루에 세 네 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숙면을 했던 과거의 내가 부럽다. 가능한 줄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커피향의 유혹을 참기란 어렵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잠시 내려두고 커피 한 잔 마셔야 한다. 분위기 좋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멋진 음악이 흐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커피와 나,둘만의 시간이면 족하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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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8-2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는 대학가서 먹기 시작한거 같아요 담배 피우는 선배들이 자판기 앞에서 뽑아주던 달달한 커피가 생각나네요^^

자목련 2023-08-31 14:09   좋아요 1 | URL
커피의 처음은 그냥 커피를 마시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자판기 앞에는 늘 선배들이 있었죠. ㅎ

미미 2023-08-2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배나 커피가 주는 위로는 저마다 다를텐데 올려주신 인용문을 보니
그걸 글로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ㅎㅎ

자목련 2023-08-31 14:1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어떤 형태로든 위로를 주는 존재, 그 가운데 커피와 담배가 가장 많지 않을까 싶어요.
직접 마시고 피우지 않아도 글로 전해지는 분위기를 잘 전달한다고 할까요^^

은오 2023-08-2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거 읽으셨군요! 😆 저는 커피 좋아하긴 하지만 커피 마시는 시간을 즐기고 온전히 음미한다기보다는 그냥 씁쓸한 맛이 좋아서 그리고 카페인 도핑용으로 마시는지라.. 저자가 커피에 대해 쓴 부분 읽고 신기했어요. ㅋㅋㅋㅋ 아 커피 마시는걸 저렇게 좋아하고 저렇게 느낄 수 있구나...
담배에 관해서는 담배 피우는 시간은 고립이 아니라 고독이 된다고 했던가 그부분이랑, 기억이랑 감정 소환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담배로 하루가 분할된다 이런건 엄청 공감했고요. ㅋㅋㅋ 왜 이걸 십대 때부터 피우지 않았나... 후회했다는 말엔 헐 난 아닌데 했습니다 ㅋㅋㅋㅋ

자목련 2023-08-31 14:16   좋아요 0 | URL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하루에 주어진 담배 개피를 조절하는 이야기는 지인에게 들었기에 흡연자에게는 모두 같은 생각이구나 싶었어요. 역시나 은오 님도 ㅋㅋ
커피 마시는 그 짧은 시간은 온전히 휴식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 마신 잔을 오래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ㅎ

coolcat329 2023-08-3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부터 20년 마시던 커피를 끊었습니다. ㅠㅠ 금단증상으로 엄청난 두통, 변비, 무기력, 심지어 불면증까지 겪고 거의 삼 주만에 회복되었어요.
그동안 내가 카페인의 엄청난 지배를 받았었구나 싶으면서도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커피‘를 못 마시니 가끔 우울합니다. ㅠㅠ

자목련 2023-08-31 14:20   좋아요 1 | URL
커피를 끊는 일, 아직은 어려운 것 같아요. 금단증상 어마어마하네요. 말씀처럼 그만큼 커피가 몸을 지배하고 있었구나 싶네요. 제 몸도 다르지 않을 것 같고요 ㅋ
커피를 대신 할 음료를 찾지 못하신 걸까요? 저는 요즘 꽃차를 눈여겨 보고 있어요. 시도는 아직이고요.

책읽는나무 2023-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가 맛있는지 모르고 살다가 애 낳고 애들 키우면서 이웃집 언니들에게 맥심 커피를 배웠더랬죠.^^
지금은 그 분들보다 제가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있구요.
한 25년 카페인 중독이네요ㅋㅋㅋ
커피를 끊어보려 해도 잘 안되더군요.
집에 커피가 떨어져 이참에 끊어볼까? 생각하다 어제 급히 알라딘 커피 주문했어요.
내일 온다는 문자에 손이 덜덜.....ㅋㅋㅋ
몇 번이나 집 앞 카페에 달려가 커피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는데 올려주신 책과 커피 사진에 또 손이 덜덜덜 떨립니다.ㅋㅋㅋ

자목련 2023-08-31 14:23   좋아요 1 | URL
저도 카페인 중독입니다.
커피가 떨어지는 일, 상상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나름 맥심 커피를 줄이는 노력은 하고 있어요. 잔을 사는 일의 가장 좋은 이유 커피가 좋아서고요!
우리 커피로 짠 한 번 할까요?

2023-09-0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eosy 2023-09-0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사는 지역에 에스프레소 맛집이 있어서 그 낙으로 6개월째 삽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3-09-03 13:39   좋아요 0 | URL
낙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커피처럼 진한 오후 이어가세요^^
 
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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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직감 같은 건 아니고 연락과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 때 선뜻 연락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다면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그냥 문자를 보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이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얇으면서도 단단한 막이 형성된다고 할까. 단숨에 걷어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선뜻 막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혼자 아파하거나 마음을 조이고 앓게 되는 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그렇다. 좋아하는 마음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 마음은 이유도 모른 채 허물어지는 것일까.


김화진의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 경로』는 그런 마음에 대해 말한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마음을 어떻게 숨기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한 마음은 무엇인지 말이다. 간절하게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점차 다른 마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을 붙잡고 싶지만 그저 기다리기로 하는 마음. 누군가 그 마음을 사랑이나 우정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서툴렀던 마음 혹은 다가가지 못한 마음 덕분에 헤어진 친구나 지인이 생각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룡의 이동 경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모임을 갖게 된 주희, 솔아, 지원, 현우와 특별한 친구가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작소설이다. 주희가 화자인 「사랑의 신」은 사랑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라고 할까. 주희가 바라본 솔아와 지원의 모습, 현우와의 비밀연애를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 사람을 만나면서 감추었던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평범하면서도 뻔한 일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인지 알려준다. 소설이지만 일기 같고 편지 같은 방식을 택한 김화진의 영리함이 돋보인다고 할까. 거기다 김화진의 문장은 독자의 마음도 열리게 만든다. 아주 편하고 쉽게 읽히지만 무척 공들여 고른 문장이라는 게 느껴진다.


사람을 상상하는 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전부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그 안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일. 나는 그런 걸 그만둘 수 없는 것 같아.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 이렇게 매번 실패하고 실패하면서도 계속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엿보거나, 내 주머니를 슬쩍 열어 그 속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다. (「사랑의 신」, 43쪽)


소설에서 주희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마음, 그 마음이 단단해지거나 옅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연인인 현우보다는 지원과 솔아, 두 언니에게 더 크게 작동한다. 그래서 지원과 솔아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주희는 그들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을 섣불리 관여할 수 없으니 둘 사이를 그저 지켜볼 뿐이다. 솔아의 마음은 「나의 작은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타투이스트 지원은 솔아의 팔에 작은 공룡 ‘피망이’을 그려준다. 자신과 다르게 말이 적고 조용한 지원과 솔아는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솔아의 바람과 다르게 지원은 점점 멀어진다. 어느 날 사라진 피망이에 대해서도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 선택하는 차선은 사랑하기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나의 작은 친구에게」, 62쪽)


솔아는 피망이가 사라진 게 마치 자신의 잘못같이 느껴지고 지원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원이 모임을 떠나고 이사를 가면서 지원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묻지 못한 게 속상하고 복잡하다. 주희를 통해 지원의 사정과 상처를 알게 되고 솔아는 서운함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고민한다. 고민과 걱정을 반복하는 솔아를 향한 지원의 마음을 들려주는 「나 여기 있어」는 가장 아프고 아린 마음이었다.


우울증을 앓는 고향 친구 효진과 다시 연락이 닿으면서 지원의 마음은 중심이 사라졌고 길을 잃었다. 효진이 사고로 죽은 후 지원은 연인과 헤어지고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나서야 지원은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그제야 솔아의 마음도 볼 수 있었다. 마음이라는 게 다 다르니 그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르다는 걸 지원을 통해 확인한다. 간신히 모서리에 있는 지원의 마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거기 있다고 말해주는 지원이 고마운 건 독자인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나 여기 있어. 아직 모서리에. (「나 여기 있어」, 127쪽)


현우가 바라본 주희의 모습과 그런 주희를 사랑하는 현우의 마음을 들려주는 「이무기 애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사랑과 비례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특별한 친구 피망이의 시선인 「공룡의 이동 경로」는 다정하면서도 따뜻하다. 솔아의 팔에서 눈꺼풀로 이동해 솔아가 보는 것들을 바라보며 솔아의 마음을 헤아리며 선캣처로 이동해 솔아의 공간과 솔아를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솔아에게 연락을 해온 지원이 보낸 부채로 이동하여 솔아 곁에 머문다. 누군가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가까웠던 마음이 조금씩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 모든 마음이 그럴 수 없겠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김화진의 마음을 보는 탁월한 감각이 나쁘지 않다. 예쁘고 잘 생긴 단정한 마음만 골라 보여주지 않고 날이 선 마음, 흐트러진 마음, 못생긴 마음이 모두 우리의 마음이라고 알려준다. 하나의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걸. 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속상하고 힘들지만 언젠가 돌아오기도 하니 그 자리를 비워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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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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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잊고 싶을 때 선명한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나는 잠으로 도피했다. 자고 자도 또 잘 수 있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잠에 취에 입맛이 사라질 때까지 잤다. 그러나 잠은 묘약이 아니었다. 무기력하게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이었다. 효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고 깨어나서도 다시 잠으로 도망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꿈을 꾸는 일은 좋지 않았다. 악몽이나 흉몽, 길몽을 따지기 전에 나는 꿈을 꾸는 게 싫었다. 끊어진 인연이 등장하는 꿈, 가족이나 지인이 무작위로 등장하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기분이 별로였다. 혹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용준의 짧은 소설 『저스트 키딩』은 그런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건 꿈이니까 괜찮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지만 잠시라도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다른 내가 되어 도달하고 싶은 어떤 상상의 공간 같은 것, 꿈꿀 수 있는 미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동화, 소설이기에 맘껏 소리 지르고 화를 표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그 모든 게 허용되어 후련해지는 느낌. 설령 그것이 한낱 망상이나 환상일지라도.


그러나 이야기의 시작이 마냥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마냥 농담이나 잠깐의 소동으로 치부할 수 없다. 세신사로 일하는 신 씨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돌멩이」 속 소년의 일도 그렇다. 평일에 목욕탕 온 소년을 주목하는 신 씨. 학교에 가야야 할 시간에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공짜로 때를 밀어주며 몸을 살핀다. 멍이 든 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신 씨의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 학교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될 뿐이다. 가방 가득 돌멩이를 채워 학교에 간 마음을, 창문을 깨고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분노를 말이다. 아들을 전학시키고 적금을 깨고 이사를 했야 했다. 신 씨가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마사지 값에 대한 제안을 한다. 돌멩이를 들고 만 있으라고, 내리치지 말라고 했는데 소년은 유리창을 깼다. 소년의 행동은 옳지 않지만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소설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시원했다. 목욕탕을 다시 찾은 아이가 신 씨에게 조폭이냐고 물었을 때 신 씨의 답변은 명확하게 아름답다.


“세신사. 씻을 세洗. 몸 신身.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돌멩이」, 31쪽)


거창하게 정의 구현을 가르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려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실적인 방법도 필요하다. 그저 돌멩이를 들고만 있으라고 알려주는 어른도 있어야 할 세상이다. 더 나쁜 쪽으로 가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은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도 등장한다.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와 아빠를 차례로 잃고 혼자 남은 ‘소산’은 엄마와 아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엄마를 찾으러 떠난 아빠를 기다릴 뿐이다. 그런 소산에게 톨게이트 요금소 정산원은 요금소에 앉아 있으면 아빠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돌봄과 안정이 필요한 소산을 이용한 것이다. 톨게이트를 지나던 트럭 운전사 여성 주윤만이 소산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아빠를 찾으러 가자고, 먼바다로 가자고 말하며 함께 떠난다.


저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갈 수 있어요. 바다로 향하는 모든 톨게이트를 알고 있지요. 이 톨게이트를 지나 저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이 세상은 저 세상으로 변한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다」, 142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의 부재를 생각한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사회적 울타리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런 기대를 품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힘을 키운다. 표제작 「저스트 리딩」속 인물 ‘모자’처럼 말이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직원에게 자신이 몇 시간 전에 물건을 훔쳤다고 말한다. 직원은 물건을 돌려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점장이 알면 귀찮아질 게 뻔한 직원은 모자와 잘 해결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모자는 편의점에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강도라고 직원에게 알려준다.


모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직원. 경찰이 출동하지만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일 밝혀진다. 모자는 화가 난 직원을 도발하고 직원은 모자를 폭행한다. 합의를 위해 병원에 찾아간 직원은 모자가 자신의 유튜버 콘텐츠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지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을 모자가 계획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통쾌하면서 마냥 산뜻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자의 삶이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그냥 장난이었다는 것으로 무마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닿을 수 없는 꿈을 좇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들려주는 「시간 도둑」, 애잔하고 자신은 과거를 지불해 얻은 영원한 꿈속에서 사는 삶이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지루한가 보여주는 「너무 아름다운 날」, 유령이 나오는 펜션에서 생을 끝내려고 했다가 죽은 동생을 만나는 「브라운 펜션」 은 인간의 욕망과 죽음을 보여준다. 모든 게 꿈이라면 괜찮을까. 죽음이 있기에 생은 고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지 모른다.


한 마디 툭 내던졌을 때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유쾌할 때 농담은 빛이 난다. 정용준은 그걸 아는 작가인 것 같다. 그래서 단지 농담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닌 농담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꿈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꿈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조금은 우울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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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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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복잡하다.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얻기 어렵고 알기는 더욱 어렵다.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 없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공부한다. 소설 읽기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난달에 읽은 『마음』에 이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행인』을 읽으면서 마음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새삼 확인한다. 어려워서 포기하고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도.


사실 『행인』은 다른 소설에 비해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여름을 배경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소설 속 더위가 익숙하게 다가오고 화자인 ‘지로’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문에 열중하지만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 않았던 인물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직장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초입에 지로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한량이라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소설 초반은 지로와 친구 ‘미사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그 여자’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온다. 과연 그 여자와 지로가 만나게 될까, 혹은 지로도 미사와처럼 그 여자에게 끌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건 소세키가 심어 둔 마음에 대한 복선이자 키워드였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아니라 미친 그 여자, ‘미친’이 중요했다. ‘미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 혹은 그 미친의 기준과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아니,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우울증’이라는 것보다 한 수 위의 단어가 필요하다.


『행인』은 지로의 마음이 아니라 지로의 형 ‘이치로’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건 결국 이치로란 인물을 통해 우리가 나 아닌 타인을 알고자 하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소설 속 이치로는 학자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아내 ‘나오’ 사이에 딸을 하나 둔 가장이다. 형수와 사이가 좋지 않다. 지로의 어머니는 나오를 탓하지만 지로가 보기에는 둘 사이에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치로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형이 학자라 더 예민한 거라고 여긴다. 사실, 지로는 귀찮고 피곤할 뿐이다. 이치로의 마음을 모른척하고 싶다.


“형님한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무척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마음 같은 건 아무리 학문을 한다고 해도,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님은 저보다 뛰어난 학자니까 물론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형제라도 해도 마음과 마음은 그냥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고, 실제로 상대와 자신의 몸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닐까요?” (139쪽)


하지만 이치로가 자신과 나오 사이를 의심하며 둘 사이를 증명해달라고 부탁하자 지로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세상에나, 어떤 형이 시동생과 형수의 관계를 의심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로는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순간 형수와의 관계를 인정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형의 부탁을 들어준다. 형수와 여행을 다녀오라는 제안이다. 물론 형수와 지로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둘이 여행을 떠난 날 폭우로 인해 계획과 다르게 하룻밤이 지나고 돌아온다. 이 밤이 이치로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라 생각한다. 의심하는 마음에 짐작이 더해서 이치로를 괴롭혔을 게 분명하니까.


지로는 그런 형을 보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혼자 지내고 싶어 하숙을 구해 독립한다. 직장을 구하고 미사와를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본가를 방문하는 일도 줄어든다. 그러나 이치로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가족 모두가 형을 걱정하고 있어 지로는 미사와의 지인 H를 통해 형의 근황을 살핀다. 그리고 H에게 형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를 부탁한다. H의 제안이라면 형이 여행을 갈 것 같아서다. 형의 여행이 결정되고 지로는 H를 만나 여행 기간 동안 이치로를 관찰해 줄 것을 부탁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치로와 여행을 떠난 H가 지로에게 보낸 편지로 이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H와 이치로가 나눈 대화, 이치로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들려준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 가족(특히 아내와의 관계), 우울감, 신경쇠약, 종교,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내게 이 부분은 무척 어려웠다. 이치로가 안쓰럽게 여겨지면서도 그의 마음을 채운 고독과 허무의 실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느껴졌다. 기질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환경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고유한 기질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노력이 중요하다 것을 말이다.


구름이 하늘을 아득하게 덮었을 때 비가 내리는 일도 있을 거고 또 비가 내리지 않는 일도 있을 거네. 다만 구름이 하늘에 있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네. 자네나 어르신들은 형님이 곁에 있는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며 딱한 형님에게 다소 비난의 의미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네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을 행복하게 할 힘이 있을 리 없네. 구름에 싸인 태양을 보고 왜 따뜻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그렇게 다그치는 쪽이 억지일 걸세. 나는 이렇게 함께 있는 동안 가능한 한 형님을 위해 그 구름을 걷어내려고 하고 있네. 자네나 어르신들도 형님에게 따뜻한 빛을 바라기 전에 우선 형님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주는 게 좋을 걸세. 만약 그걸 걷어낼 수 없다면 가족과 자네나 어르신들에게 슬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형님 자신에게도 슬픈 결과가 되겠지. 나도 슬플 거네. (413쪽)


H의 편지처럼 이치로에게는 태양보다 구름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니 우선 구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걷어낼 수 있도록 이치로를 도와야 한다는 것. 어디 이치로의 마음뿐일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구름을 갖고 있다. 다만 어떤 이는 구름을 숨기는데 탁월한 반면 어떤 이는 구름을 걷어내는 걸 도와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구름을 보고 ‘미친’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상대의 구름을 보면서 구름에 관심을 갖는 일은 어렵고도 조심스럽다. 그러니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닐 것이다. 온 맘 다해 정성으로 노력해야만 알 수 있는 게 마음이다. 일방적인 노력이 아니라 협력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지로가 H의 편지를 통해 이치로의 구름에 대해 알게 된 것처럼 소세키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나의 구름과 저마다의 구름의 존재를 인식한다. 구름이라 이름 붙이고 설명해도 마음은 복잡하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소세키는 연구하고 분석한다. 왜 마음에 이토록 집중하다 못해 집착했던 것일까. 그가 알고 싶었던 마음은 누구의 마음일까. 아마도 그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고자 마음에 관한 소설을 썼던 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놓는 다리가 되어 줄 그런 소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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