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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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몰라서 더욱 매력적인 세계가 있다. 바로 시의 세계가 그러하다. 닿을 수 없기에 나만의 그릇에 담기라도 하고 싶은 욕망에 항상 시집을 찾는 것 같다. 어쩌면 황인찬의 시집을 읽는 일도 그런 나만의 방식은 아닐까 싶다. 황인찬의 시를 읽노라면 단조의 음악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부러 기쁨은 감추고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건 황인찬의 시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황인찬의 고유한 무엇이라고 할까.

혼자만의 독백, 혹은 방백, 아니 고백처럼 들리는 시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뭐라 대답을 하고 싶어지는 거다. 시 속 너는 내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시인의 목소리에 뭔가 물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이라고 하면 맞을까. 이런 시를 읽노라면 아련한 기억 속 아담한 학교와 작은 운동장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나와 편지를 나눴던 친구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 같은 게 쌓인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하고 괜한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놓았던 나의 편지는 사라지고 없겠지만 우리의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너는 장화

나는 화분

꽃바구니를 생각했는데

물병만 깨졌지

지난겨울 우리가

학교 뒤편에 묻어둔 비밀은

이제 썩어 없어졌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

그럼 되잖아

마치 다음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분수, 말하자

한낮이 어두워지고

이제 우리에게 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여름 나는 불안

나는 망각 너는 모과

교문 너머에서

다음이 오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전문)

이런 시를 읽으면서는 그 새의 어떤 빛깔이었냐고 묻고 싶다. 새의 슬픔까지 온전하게 묻어두었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의 두려움과 슬픔을 말이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그래, 죽음은 멈춤이지. 호흡이 멈추고 손끝의 작은 움직임도 멈추고 머리를 채운 어떤 생각들과 가슴에 담김 모든 감정이 멈추는 일. 누군가는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다행일까. 그러니 이런 황인찬의 시를 읽는 일도 다행인 것이다.


며칠 전에는 새를 묻고 왔다

굳어가는 새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너는 정원을 청소하는 중이었고

죽어버린 새를

손에 쥐고 있는 내게

너는 뭘 하느냐 물었지

새가 멈췄어,

너무 놀라서 얼결에 그렇게 답해버렸다

그후로 무엇인가

자꾸 멈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야,

그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 네가 했던 말이고

맞아, 그냥 다 생각이야,

이건 나의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정원의 나무에는 새들이 많았다

날아가고 또 날아가도

새들이 다시 가지에 앉고,

또 어떤 새는 떨어지고, 그냥 그랬다 (「낮 동안의 일」, 전문)

천천히 시집을 읽으면서 여름과 여름 사이를 생각했다. 잔인한 여름과 성장하는 여름, 열매를 맺기 위해 바람과 뜨거움을 삼켜야 하는 어떤 나무들을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두가 등장하는 시를 오래 읽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또 어떤 성장을 할까,” 란 시의 제목이 「재생력」이라서 나는 울컥했다. 황인찬의 시가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마치 그것 같아서 말이다.


다 함께 모여서 방학숙제를 했지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

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아이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이 장면은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

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물론 중간에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 탓에 결국 숙제는 끝

내지 못할 테지만

뭐 어때, 숙제는 언제나 남아 있는 거잖아(웃음)

사건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마을은 돌아가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거야

여름 내내 모험에 도움을 주었던,

온갖 사물에 깃든 신령들에게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지

지금의 일상을 소중히 하자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결국 애들은 싸우기 시작하고,

한참을 씩씩대다 서로를 바라보다

다 함께 웃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난다

그리고 기나긴 스태프롤

검은 화면을 지나면

다시 첫 장면이다

앞으로 벌어질 마음 아픈 일들을

알지 못하는 방학 직전 어느날의 교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또 어떤 성장을 할까,

그것을 궁금해하며

카메라는 천천히

여름의 푸른 하늘을 향해 움직인다 (「재생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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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끈질긴 서퍼 - 40대 회사원 킵 고잉 다이어리
김현지 지음 / 여름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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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주하는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어떤 얼굴, 피곤하거나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 일부러 웃어 보이거나 화가 난 표정을 짓는 얼굴. 바로 나의 얼굴이다. 양치질을 할 때, 세수를 할 때 나를 본다. 가끔 거울 속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 공간에 혼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삶이라는 규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루하루. 누군가는 과감히 그 틀을 던져버리고 다른 항로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러나 곧 나는 나를 찾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때로 지치고 슬프고 우울하니까.

그런 감정들이 높아지는 벽으로 나를 가둘 때 나는 책을 읽었다. 그 벽들을 부수기 위해, 아니면 다른 재료로 벽을 쌓기 위해 나는 책을 읽고 뭔가를 썼다. 그게 일기든, 중얼거림이든, 리뷰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쓴다는 게 중요했다. 어떤 목표나 결과를 얻기 위한 적도 있었고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몰려드는 잡념에도 단단해지려고 한다. 나는 그러려고 한다. 이런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는 건 김현지의 『가장 끈질긴 서퍼』를 읽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제목만 보고 정유미, 최우식의 <여름방학>을 생각했다. 파도를 타는 서퍼, 다음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서퍼. 서퍼를 배우는 과정인가, 생각한다. 보기 좋게 어긋났다. 40대 직장인의 일기였다. 하루 일과의 기록이었다가, 여행의 이야기였다가,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는 글이었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고백이자, 연서 같은 그런 글들이었다.


어떤 글은 더욱 몰입했고 어떤 글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싶었고 어떤 글은 가만히 반복해서 읽었다. 글이란 이래서 좋다. 글과 대화할 수 있고, 혼자 독백할 수도 있다. 계절의 흐름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처음 미술 학원에 간 봄이 지나고 다시 다음 해 미술 학원에 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부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찌릿함이 몰려온다. 어느 여름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M이 떠올라서다. 우리는 감자, 책,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름마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는다. 좋은 소설은 왜 여름에 읽어야 할까. 읽을 때마다 운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대부분 미끄러뜨리는 일을, 노인이 되기 위해 달릴 뿐인 생을 사랑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권태 아니면 비극인 날들 와중에 어떤 문장들은 시간을 견딘다. 물처럼 고인 여름의 빛, 나의 작은 블랙홀, 사랑했던 나라로 떠나는 짧은 여행. (95쪽)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고 특별히 부러울 만한 일상이 아니다. 딸이 있는 상사가 자신과 딸이 나누는 대화를 들려주고 그걸 가만히 듣는 이,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벽지를 바라는 부부의 대화를 통해 서툴고 다정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친구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리는 그런 글이다.

고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서 우리의 세계는 넓어진다는 것을, 결국 고통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단지 시간과, 견딜 수 있는 작은방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시간은 결국 당신의 편이고,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을 거니까. (197쪽)

그냥 버티고 있다. 요즘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뿐 아니라 사는 게 버티는 거 아닐까. 버틴 걸로 이미 미루게 되는 일들이 있다. 지속하는 것은 때로 그 자체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288쪽)

삶이란 여전히 알 수 없다. 내가 체험하지 않을 것들은 모르는 세계가 된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다른 삶을 이해하려 하는 시간이 온다. 그게 참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 힘든 일이 생기고 겨우 해결하면 야속하게도 다른 일이 터진다. 한숨을 쉬며 시간을 견디는 일, 질끈 눈을 감고 잊어버리는 순간들, 그 모든 게 나를 이루고 나를 감싸는 다정한 손길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뭉클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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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도 되고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자목련 2020-11-10 09:38   좋아요 0 | URL
^^*
11월의 남은 날들이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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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늦은 시각에 방영하는 프로를 즐겨 시청했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작가가 나오기도 했고 배우나 성우가 등장해서 책을 읽어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디오북의 원조라고 할까.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최근 생각나는 프로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가 가장 비슷할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그 방송을 통해 몰랐던 시인과 작가를 만났다. 시인 김행숙도 그러했다. 『타인의 의미』를 구매했고 그 안에서 「목의 위치」란 시를 많이 읽었다

김행숙의 시는 내게는 좀 난해하고 어렵지만 그냥 이상하게 끌린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그녀의 시집을 나는 다시 방송을 통해 구매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독립영화에 나온 그녀의 시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다정함의 세계」로 『이별의 능력』이란 시집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시집은 구매했다가 정리한 이력을 지녔다. 결국엔 재구매로 이어진다. 아, 시집은 정리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데. 다정함의 세계라니,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당장 그곳으로 가고 싶다. 영화 속 사춘기 소년, 소녀의 감정과 잘 어울리는 시였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때때로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 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 전문)


시를 만나는 방법은 이처럼 다양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시가 반가운 이유로 그렇다. 그러나 내심 바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시인의 시가 아닌 시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너무 큰 욕심일까. 하긴, 나만 알고 싶은 시도 있으니 그건 또 다른 욕심일 것이다. 김행숙의 시집에서 이런 시도 오래 읽었다.


발이 보이지 않게 달리기를 하지요, 점점 빠르게.

아아아 느리게. 마지막 숨결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가까운 듯,

나는 달리기예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모레 새벽에는 국경을 넘게 되지요.

총성이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자주 들리는 곳,

이곳에서는 점치는 여인들만이늙어서 죽습니다.

탕, 탕, 탕,

총알을 피하듯, 나쁜 음식과 나쁜 꿈을 피했습니다.

지금은 말이야, 가족이 만들어지는 혼돈의 밤을 정

리하기 위해 세 번째 총성이 너의 귀를 흔드는 시각, ,

눈을 흐리게 하고, 탕! 거울 앞에서 서보 아라. 노파는, 탕! 거울 앞에서 서보아라.

노파는 혼례복을 입은 손녀를 불러 마주하였습니다.

아름답구나, 처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 년 후, 왼발 다음에 오른발, 나는 달리기예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세월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나갔어요. 가장 슬픔 마음도 나를 붙잡지 못해요. (「세월」, 전문)

우리는 오늘도 왼발 다음에 오른발, 구령을 외치며 달리는 건 아닐까. 무엇을 피하고 싶은 것일까.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빨리빨리 빠르게 달려서 그것들을 지나간다면 한숨을 돌릴 수 있을까. 이어달리기를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 누가 나를 이어 달려줄 수 있을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주자,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는 마음은 심각하게 슬프다. 슬픔 마음을 달래는 건 이런 시를 읽는 일.


며칠 늦게 일요일이 찾아왔다. 햇빛은 일요일의 뒤에 있었고,

몇 덩어리의 구름은 일요일의 느리고 느리고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내린 비는 일요일의 가득한 눈물처럼, 앞에 있는 햇빛처럼.

나는 토요일 밤의 송별회를 지나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 밤,

나쁜 일은 영원히 생기기 않을 것 같은 날들이 멀리 흐르지 않고 가까이 향월 여인숙에서 잠이 들고 다음 날 다시 새 이불을 덮는다.

나는 화요일 밤을 지나 수요일 아침 그리고 목요일 아침 순서로 일요일을 기다린다.

일요일은 제멋대로 다리를 뻗고 두드리고 발을 주무른다. 일요일이 쓰고 온 넓은 모자가 넓은 그늘을 만들고, 나는 금요일 저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구두들이 글썽거리며 웃음을 물고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금요일 저녁에서

발이 녹는다. 발부터 일요일까지. 토요일이라는 누구누구의 이름까지. (「일요일」, 전문)

오늘은 월요일이고, 일요일은 어제 지나갔다. 내가 보낸 일요일은 어떤 풍경인지 잠깐 어제, 일요일을 그려본다. 예배를 드리고 낮잠을 자기도 하는 시간, 일요일까지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다. 김행숙의 시는 매력적이다. 그 매력에 빠져든다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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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 문지아이들 163
김려령 지음, 최민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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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지나도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가 그랬다. 그 후에 작가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내게 김려령은 여전히 완득이로 통한다. 그건 작가에게 어떤 기분일까. 좋기도 하면서 나쁘기도 할 것이다. 대표작이 하나만 있다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뭐 나에게만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다. 김려령 작가의 신작 장편동화에 대해 궁금했던 건 제목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라니,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걸까. 어딘가 아픈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녀석들의 사연이 궁금했다.


녀석들이라니,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닌 게 맞다. 동화 속 녀석은 두 명이다. 첫 번째 만날 아이는 현성이다. 현성이는 최근에 이사를 왔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공간이라고 해다. 꽃집으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 괜찮았다. 잠깐 동안에만 사는 곳이니까 불편해도 참을 수 있었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집을 비우라고 말하는 아저씨들이 찾아와도 괜찮았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삼촌이 사기를 쳤다고 했다. 엄마는 다시 일을 해야 했고 아빠는 삼촌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갔다. 전학을 오고서 친구도 없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젠 진짜 혼자가 된 것 같다. 엄마는 늦게 오고 아빠는 연락도 안 되고.


이런 현성이 앞에 나타난 아이, 장우다. 같은 반이라는 걸 알았는데 근처에 사는지 몰랐다. 엄마의 심부름을 가던 중에 만났다. 장우는 아빠와 산다고 했다. 장우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와 엄마의 이혼을 말하고 새엄마가 생겼다는 말도 한다. 현성이는 명쾌하게 말하는 장우가 부럽다. 현성이와 장우는 꽃집들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를 탐험하기로 한다.


현성이의 아빠가 집을 나간 사이 장우의 집에도 일이 생겼다. 새엄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집을 정리하면서 장우의 물건을 동의 없이 마구 버린다. 장우는 소중한 것들을 비닐하우스로 옮겨왔다. 폐가나 다름없이 흉측한 비닐하우스에서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현성이가 온 것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현성이는 학원에 간 장우를 비닐하우스에서 기다린다. 장우랑 컵라면도 끓여먹는다. 그래도 심심하다. 가족이 있는데도 고아처럼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가만히 있으래서 꼼짝도 못 했다. 도대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왜 찍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물론 나는 원래도 혼자 가만히 잘 있다. 한 시간쯤 가만히 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도 누가 시키니까 힘들었다. 괜히 코도 가렵고 앞머리가 자꾸 이마를 긁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그러다 현성과 장우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영상을 찍어 올린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동영상 조회 수가 천을 넘긴다. 앞으로 현성과 장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른들의 선택과 잘못으로 인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현성이와 장우는 우리 주변의 아이들이다.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혼과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면서 느끼는 감정들.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 때문에 힘든 아이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김려령이 유머와 감동으로 어떻게 그려낼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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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조금 지쳤다 - 번아웃 심리학
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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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에 빠진 사람은 자신에게 번아웃이 온지 모른다. 휴식하고 재충전해야 하는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니 치료의 시작도 없다. ‘내가 번아웃이라고?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자신을 속인다. 휴식할 시기임을 인정하고, 마음의 재활을 위한 긴 여정을 감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데 도리어 억지를 부리며 집착한다. (246쪽)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월요병이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증상일 것이다. 하루만 더 쉬면 좋겠다는 생각,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을 해버릴까, 어디서 돈다발이 떨어지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생각이 출근을 시작해서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일은 그런 것이다. 생계를 위한 직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고 코로나19시대에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에는 답할 수 없지만 오늘도 수많은 직장인들은 퇴사를 꿈꾼다. 어쩌다 보니 퇴사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박종석의 『우린, 조금 지쳤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그랬다. ‘번아웃 심리학’이란 부제에서 짐작하듯 이 책은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다. 정신의학과 의사가 알려주는 처방전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러나 개인마다 번아웃의 강도가 다르니 보편적인 처방전이 더 맞겠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번아웃은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이며 번아웃 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일이 좋아서 일에 몰두했지만 결국엔 다 타버리고 마는 상대.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아니야라고 했던 이들도 책 속 번아웃 증후군 체크리스트를 보면 달라질 것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 자신감 하락, 출근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면 당신도 번아웃 증후군이다. 나의 상태를 파악하면 그에 따른 대책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우선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워라밸을 이루기 위한 대원칙을 소개한다.


첫째, 균형은 항상 깨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지 말자. 필연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회복력’과 ‘유연성’에 집중하자.


둘째, 모든 면에서 100점을 목표로 삼지 말자.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그 무엇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밀어붙이는 순간 워라밸은 무너진다. 70점이든 80점이든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절충점을 찾자. 자신의 삶을 100만큼 채워나가는 것보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여백을 찾아내 또다시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오늘 틀려도 내일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하자.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말자. 당신 인생은 오로지 당신 것이다. (36쪽)


나 스스로가 의도적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좋은 처방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효과를 볼 수 없으니까. 물론 마음이라는 게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런 책을 읽고 나를 점검하는 시간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번아웃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준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의사가, 그것도 정신과 의사가 번아웃 증후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니 그의 경험에 더욱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병원 출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어떤 목표도 목적도 없이 지낸 시간,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말이다.


번아웃에 빠지면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게 된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와도 멀뚱히 쳐다보다가 놓치기도 한다. 가계약금 계좌이체를 하면 되는데 몇 번이나 미루고 부동산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성적인 생각에 기인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출근하기 싫고 전화받기 싫고 그 어떤 생각을 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조차 귀찮고 우울했다. 결국 나는 집을 사지 못했다. (59쪽) 


세상에나,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저자 역시 그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친구와 형이라고 했다. 그들은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 어떤 조언이나 질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 힘들었겠다는 말, 그게 전부였다. 우리 주변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래도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느껴지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일도 나쁘지 않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또 일상에서 필요한 마인드풀니스 호흡법과 요가를 추천한다. 마인드풀니스 호흡법은 1. 기본자세를 취한다. 2. 몸의 감각을 느낀다. 3. 호흡을 의식한다. 4. 잡념이 떠오를 때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한다. 다시 호흡에 집중한다. 참선이나 명상도 좋을 듯하다.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직장에서 동료와 선후배와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해야 한다. 인간관계는 어디서든 필수인데 나와 같은 생각과 공감력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괜찮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다. 저자는 이에 사례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어떻게 응대하면 좋을지 알려준다. 이 부분은 다른 심리학 도서와의 차별성이라 할 수 있다. 편집성 인격장애, 분열성 인격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연극성 인격장애, 강박성 인격장애, 의존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성향과 장애를 통해 어느 시절 내가 만났던 동료나 상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주위의 누군가와 대입할 수도 있겠다. 알고 나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으니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나를 다스리고 나를 챙기는 일이다. 기존의 책이나 방송에서도 언급되고 익숙하게 들어왔겠지만 가장 먼저 나를 응원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 필요하다. 치료를 시작하는 일도 그 하나다. 지친 삶, 잠시 쉬어도 좋다는 말을 당신에게 들려주었으면 한다.


우리 내면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용감한 내가 숨어 있다. 꼰대 상사와 고객의 갑질, 직장 내 억울한 뒷담화, 과도한 업무와 야근, 쥐꼬리만한 월급 등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은 내가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또한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경력을 쌓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대출금이나 빚을 갚기 위해 직장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계속 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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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1-02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저 위쪽 1,2,3에 다 해당하는데 왜 출근이 매일 매일 싫을까요? 저의 진정한 리즈시절은 은퇴후라고 매일 다지면서 출근 중입니다. ㅎㅎ

자목련 2020-11-03 15:41   좋아요 0 | URL
추운 겨울에는 더욱 힘들지요.
바람돌이 님의 진정한 리즈시절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