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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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오래 하면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간보다는 정성과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전문가란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스스로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면 성공적이다. 각각의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지만 각자의 삶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건 만족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빨리 답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살면 살수록 삶을 비루하고 치사한 것들을 쌓아올린 허무한 성 같으니까.


김훈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들도 다르지 않았다. 단단해지기는커녕 허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걸 확인할 뿐이다. 삶이란 소중한 누군가와 동행하는 게 아니라 결국엔 혼자라는 걸 말이다. 부조리함으로 둘러싼 사회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명태와 고래」 속 이춘개가 그러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물질로 살던 그가 조업 중에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태를 잡으러 간 게 전부였다. 북에서 6개월 만에 돌아온 그는 여러 정보기관에서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 그게 끝이이어야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명태를 잡으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춘개의 삶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6년 후 간첩죄로 수감되었다. 엉뚱하게 흐르는 삶을 이춘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휴전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한 땅에서 산다는 걸 때때로 잊는다. 나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겹겹이 쌓인 공포와 고통을 알지 못한다. 「명태와 고래」 와 결은 다르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찾는 「48GOP」 를 통해 국가의 폭력과 전쟁의 비극을 느낀다. 그저 개인의 삶이라 치부할 수 없는 아픔이 전해진다. 김훈은 슬픔을 구체화하거나 절망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김훈의 인물은 조심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절제한다. 그것으로 인해 삶의 참담함을 전할 뿐이다. 어떤 감정은 가만히 바라볼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달복달한다고 원하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과감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건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단했던 지난 생에 대한 연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굳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아도 서로를 알 것 같은 노년의 두 남자의 일상을 그린 「저녁 내기 장기」 와 퇴직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며 대장 내시경 검사를 미루는 남자의 이야기 「대장 내시경 검사」는 헛헛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의 숱한 감정들이 모두 타버려서 재만 남은 게 괜히 서럽게 다가온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이 곧 도래할 것만 같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킨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삶이란 추억보다는 상실이나 아픔으로 채워진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함께 공무원 공부를 하며 짧은 기간 동거했던 영자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는 「영자」 가 애틋한 이유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조금 서로의 영역에 침범했어도 괜찮았을 젊음인데 마음 한 자락 들어갈 여유가 없다.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게 젊음이라서 그럴까. 고만고만한 삶을 위로하며 격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돌이켜지지 않는 것들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저절로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었다. (「영자」 중에서)


결국엔 죽음으로 연결되는 삶이라는 걸 아는 게 인생일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죽는다는 건 어찌 알 수 있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삶의 이치일까. 평생 신을 따르고 봉사하며 살았던 수녀들이 죽음을 앞두고 생활하는 ‘도라지수녀원’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젊은 신부의 이야기 「저만치 혼자서」 와 끔찍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재수생 연옥을 구조한 대원이 여자가 살려고 무얼 자꾸 잡으려 했다는 과정을 들려주는 「손」 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뭔가를 꽉 부여잡고 산다. 단 한 번 주어진 죽음은 혼자 감당할 몫이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갈무리는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처럼 저만치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라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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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랏다 2022-07-1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우연히 들어와 읽는데 책리뷰들이 술술 읽히고 공감가고 재밌어요~~ 자주 올께요!!^^

자목련 2022-07-18 15:02   좋아요 0 | URL
살어리랏다 님,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