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승준이의 독서일기 (redsboy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edsboy</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26 Apr 2026 17:27:42 +0900</lastBuildDate><image><title>redsboy</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571014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redsboy</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redsboy</description></image><item><author>redsboy</author><category>인상깊은 책들</category><title>삭제되기 전에 저장해놓은 글</title><link>https://blog.aladin.co.kr/redsboy/17090257</link><pubDate>Fri, 13 Feb 2026 19: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edsboy/17090257</guid><description><![CDATA["세상에서 가장 글 못 쓰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도 선정되었다던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기에 궁금해서 미리보기를 클릭해 보았다. 나귀님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그나마 눈에 익은 고유명사가 등장한 몇 구절을 구글북스 원문과 대조해 보았더니 역시나 오역이었다. 공짜 알바를 할 의향은 없으니 하나만 지적하자.&nbsp;"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의 의미이며, 이때 '떠맡겨진다는 것'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라는 말에서와 같이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29쪽) 역주에는 "'처녀성을 떠맡은 자', 즉 '성모[동정녀] 마리아'는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을 번역한 것이며, 이는 뒤이은 말인 "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와 의미상 연결된다"고 한다.<br>그런데 이건 오역이다.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성모 승천"이라는 뜻이니까. 즉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가톨릭 전승을 말하며, 신성을 지닌 예수의 '자력 승천'(ascension)과 달리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인간이 하느님에게 "들려올라갔다"고 하는 '타력 승천'(assumption)이라 몽소승천(蒙召昇天), 피승천(被昇天)이라고도 한다.<br>버틀러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고, 책에서 젠더/성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virgin = 처녀(성)"라고 번역자의 생각 자체가 굳어버린 탓일까? 하지만 원래의 문맥에서 버틀러의 발언 맥락은 "처녀성을 떠맡은 자"가 아니라 "성모 승천"일 뿐이다. 즉 그 대목에서 연거푸 나오는 영어 단어 assumption의 여러 뜻 중에 "승천"도 있다고 덧붙인 것뿐이다.<br>즉 제대로 옮기면 이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assumption)의 의미인데, 이때 '떠맡겨진다'(assumed)에는 "성모 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의 사례에서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 결국 번역자/편집자/감수자 중 누구 하나도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이고, 역주 7도 그런 무지를 변명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을 뿐이다.<br>이건 "식자우환"의 사례일 수도 있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엘리아데 대담집을 번역하면서 "바흐"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더 유명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대신 덜 유명한 종교학자 "요아힘 바흐"라고 오역했고, 또 교수 둘이 공역한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에서 "라이너스의 담요"가 나오자 "노벨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의 담요"라고 오역했듯 말이다.<br>또는 앤 카슨의 책에서 토라를 "narrow sex"에 비유한 표현이 나오자 "좁은 음문" 대신 "한정된 교미"라는 번역어가 나온 것과도 유사하다고 해야 하겠다. 쉽게 말해 '에이 설마 그거겠어?' 하는 생각에 뭔가 그럴싸한 해석을 복잡하게 고안해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설마 그거'가 정답이었던 거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쉬운 답을 놓친 격이라 할까.<br>문제는 책 자체가 워낙 아리까리한 내용이다 보니, 독자는 오역조차 모르고 넘어가 버린다는 거다. 피천득의 저서에서 '에어리엘'이란 단어를 샘터 편집부가 '에머리엘'로 오입력하자, 저자의 제자인 한 교수가 이걸 또 의미심장한 뜻으로 굳이 해석하는 글을 썼던 것처럼, 저자의 권위가 높다 보면 독자 역시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여 오역과 오타조차 맞다고 여긴다.<br>버틀러의 이번 신간에서는 오역을 저질러놓고 무슨 뜻인지 다시 검토하긴커녕, 문맥과 동떨어진 역주를 길게 달아서 '꿈보다 해몽'을 도모한 번역자의 태도를 비판할 만하다. 이해가 안 되면 혹시 내가 잘못 옮겼는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말이 안 되게 번역해놓고 그걸 말 되게 한답시고 역시나 말이 안 되는 역주를 달아놓는 게 말이 되는가!<br>나귀님이 주디스 버틀러 같은 현대 철학자들을 불신하는 까닭은 그 논의 자체가 이렇게 번역조차 어려울 만큼 각자의 모국어에 '속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나 프랑스어와 호환되지 않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도 번역이라는 검증을 견뎌내지 못할 만큼 허약한 장난감에 불과하다.<br>그래도 다들 떠받드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나보다 싶어서 알아보려 해도 막상 나오는 책마다 오역본이니, 설령 '모든 것의 이론'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자기는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도 역시 모호할 따름이니, 결국 다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야바위판인가 싶기도 하다.<br>지금까지 간행된 버틀러의 번역서는 하나같이 오역 논란이 따라붙었으니, 이쯤 되면 이 저자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오역을 "떠맡는"(assumed) 운명이라도 된 듯하다. 그렇다면 오역을 지적하는 비판자들은 저 난해한 문장을 제대로 옮길 수 있는가? 아무래도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이번에 나온 책 역시 북펀드 단계부터 '새롭고 정확한 번역'을 장담했었으니까.<br>원문 자체도 이해하기 힘든데, 번역자도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을 독자더러 이해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과연 번역자는 "성모 승천"을 "처녀성을 떠맡은 자"로 옮기면서 말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참고로 구판에서는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진 동정녀 마리아"라고 옮겼다. 구판도 오역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쯤 되면 신판 역시 믿을 수 없는 수준 아닌지...<br>]]></description></item><item><author>redsboy</author><category>인상깊은 책들</category><title>나귀님과 그의 공감자들에게 - [중요한 몸 - 성의 담론적 한계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edsboy/17089049</link><pubDate>Fri, 13 Feb 2026 03: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edsboy/170890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034341&TPaperId=170890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26/26/coveroff/k64203434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42034341&TPaperId=170890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요한 몸 - 성의 담론적 한계에 관하여</a><br/>주디스 버틀러 지음, 이승준 옮김, 김은주 감수, 김은주 해제 / 알렙 / 2026년 02월<br/></td></tr></table><br/>번역자 이승준입니다. 나귀님의 말에 다음 3가지 답변을 드립니다.<br>나귀 : &lt;(1)&nbsp;이건 오역이다.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성모 승천"이라는 뜻이니까. ... (2)&nbsp;제대로 옮기면 이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assumption)의 의미인데, 이때 '떠맡겨진다'(assumed)에는 "성모 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의 사례에서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 (3)&nbsp;번역자/편집자/감수자 중 누구 하나도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이고, 역주 7도 그런 무지를 변명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을 뿐이다.&gt;&nbsp;<br>(1)&nbsp;"The Assumption of the Virgin"가 '성모승천'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사전에 있는 말을 옮긴 것이지, 즉 그러한&nbsp;한국어로 옮기는 해석의 습관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Assumption을 곧 '승천'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이 필연적이고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nbsp;“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성서에는 없는 말이자 권위있는 근거를 갖추지 못한 말, 즉 교황청이 공식적인 교의로 승인하기 전인 20세기(1950년) 이전에는 어떠한 신학자나 철학자의 텍스트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던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영어에서는 그 표현이 등장하고 우리의 영한사전들은 그것을 '성모승천'으로 번역하게 된 것일까?&nbsp;옮긴이 주석에서 밝혔듯이, '승천'은 루가복음 24장 51절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했다'(he was taken up into heaven)에 등장하는 말이며, 라틴어&nbsp;assūmptiō가 통상 영어 take up으로 번역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assumption이 '승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될 수는 있다고 옮긴이주에 밝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 즉 승천은 아무 대상에나 붙는 말일 수 없으며, 성서(신약성서) 상에는 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인 '그리스도'에게만 배타적으로 허용되는 말입니다.&nbsp;즉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말이며, 그것은&nbsp;assūmptiō(assumption)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때문인데, 떠맡는다, 받아들이다, 수용하다와 같은 의미를 신들의 세계, 신의 왕국인 천국(heaven)에게 부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절대&nbsp;assūmptiō을 하지 않는 세계, 아니 그런 동사를 감히 붙일 수 없는 세계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은 복종한다,' '천국이 습격당한다'라는 말이 신학의 논리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nbsp;성모 마리아께서도 승천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존재니 승천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성서를 인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시대, 즉 16세기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유비를 성령들, 천사들(혹은 성모 마리아)에게 허용하는 맥락에서 부과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책에서 Assumption을 '승천'과 같은 신학적 의미나, '하늘로 오른다'라는 주체적 작용으로 번역하기보다 '떠맡음'으로 일관되게 번역하는 것이 글의 맥락상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성모승천'으로 번역되는 맥락이 있음은 본문이 아니라 옮긴이주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혹시 좀 더 친절하고 쉬운 이해를 위해, 재판을 출판할 때는 말 그대로 &lt;동정녀를 떠맡음(혹은 동정녀의 떠맡음)&gt;으로 중립화시키고, 옮긴이주에는 통상 &lt;'성모승천'으로 번역되는 'Assumption of the Virgin'을 버틀러가 'assumption'에 부과하는 특별한 의미를 고려해 의도적으로 '동정녀를 떠맡음'으로 옮겼다."&gt;라는 말을 추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br>(2) 나귀님은 "제대로 옮기면 이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떠맡음'의 의미인데, 이때 '떠맡겨진다'에는 "성모 승천"의 사례에서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옮기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을 뜻하는 '승천'이 의미상 '떠맡음', '떠맡겨진다'는 말과 잘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귀님처럼 "더 고양된 영역으로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로 옮기는 것은&nbsp;'to be taken up into a more elevated sphere'(저는&nbsp;"더 고양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로 옮겼습니다)에는&nbsp;없는 영어를 자기의 머리 속으로 말을 만들어서 붙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그건 나귀님의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가톨릭 전승을 말하며, 신성을 지닌 예수의 '자력 승천'(ascension)과 달리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인간이 하느님에게 "들려올라갔다"고 하는 '타력 승천'(assumption)이라 몽소승천(蒙召昇天), 피승천(被昇天)이라고도 한다." 즉 나귀님은 버틀러가 쓴 글의 맥락에 맞게 번역을 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상식에 따라 assumption을 '타력승천'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형태로 해석(성서에는 근거가 없으며 오로지 인간주의적 이미지에 따라서 그려진 특정한 해석)해야 했기에 '타력승천'과 연결되는 '들려올라간다는 뜻도 있다'는 말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죠.&nbsp;<br>(3) "번역자/편집자/감수자 중 누구 하나도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이고, 역주 7도 그런 무지를 변명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을 뿐이다." '가톨릭을 몰라서 벌어진 실수'라고 단정짓는 말을 쓰는 나귀님은 인간(번역자/편집자/감수자)의 지성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초월자'의 수준으로 자신을 격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옮긴이주에는 assumption이 이미 '승천'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성서를 인용해 언급하고 있고, 또 그런 의미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신학에 대한 책이 아니라 버틀러가 쓴 '젠더와 퀴어이론'에 관한 책이기에, 그러한 맥락을 연상시킬 수 있는 더 좋은 번역어인 '떠맡음'을 택한 것입니다.&nbsp;나귀님은 그런 번역어(승천)를 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번역의 진위를 판단할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nbsp;<br>* 왜 번역자는 '승천'이라는 쉬운 번역어를 택하지 않고 '떠맡음'이라는 어려운 말을 택해야 했을까? 그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사용하는 맥락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Assumption을 다음의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즉 우리는 젠더(gender)를 떠맡는다는 것(assumption)[젠더를 '(타력)승천'한다고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젠더는 한편으로는 누군가 의식을 가진 존재가 옷장에서 옷을 꺼내입을 때처럼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규범체제 속에서 우리에게 떠맡아지도록 강제되는 것이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떠맡겨지는 것을 우리는 그 형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어떤 행위의 반복을 행해야 하는데, 그 행위의 반복은 늘 동일한 형태로 반복될 수 없다는 것, 우리에게 떠맡겨진 것을 우리는 최대한 그에 가까이 근사치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완벽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는 것을 함의합니다.&nbsp;이런 맥락을 고려했을 때, assumption을 '승천'으로 옮기는 관행을 옮긴이주에서만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본문에서는 '떠맡음'을 살리는 번역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26/26/cover150/k64203434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262655</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