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시간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너무 속상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나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오는 내내 전의 일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지와 종결보고서를 작성하고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누웠지만 계속해서 오후의 일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일에 대해 미련스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곱씹으며 나를 괴롭히는 사람......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또 그리는 사람......나의 어떤 점이 신뢰를 주지 못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잘 응대한 걸까......조금 천천히 온 몸이 쑤셔오면서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잠을 잤지만 개운함이 없다. 

그래도 오늘 쉬는 날이라 한편 홀가분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아이가 오늘 잘 놀았나요?" 아이가 잘 놀았는가 하는 궁금증의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의 놀이를 설명했다.

"선생님 아이가 다른 수업에서는 안 그러는데 놀이치료는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물어본 거에요."

3번째 만나는 날이었고, 아이 엄마는 아이가 놀이치료실만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치료 수업은 매우 즐거워하는데 나의 수업만 즐거워하지 않는다며 예전에 1년동안 놀이치료를 했었는데 거기랑 너무 비교가 된다며 물론 선생님도 좋으신 분이고 잘 하시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여가며 정중하게 사람 속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아이와 놀이를 하는 치료실을 직접 봤다는 듯이, 내 아이가 즐거워하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을 보인다며 즐거워하지 않는 놀이치료를 내가 왜 해야 하는가, 하고 내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수용하고 버텨주어야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상처받았고, 속상한 마음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나를 계속해서 괴롭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깔끔하지 못하게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여기에 풀며 나를 지키려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안쓰럽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도 나를 괴롭히고 소진시킨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기 위해 전공서적들을 읽고 또 읽었는데 오늘은 가볍게 소설책을 읽고 싶었다. 최근에 읽었던 [딸에 대하여]가 여운이 있어 도서관에 가서 3권의 책을 빌려왔다.

소설을 읽으며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잠시 잊고 싶었다. 














이 중 가장 얇은 [항구의 사랑]을 먼저 읽었다. 잠시 소설 속에 빠져 과거를 회상한다.

어딘가 묻어두었던 그림자를 펼쳐드는 느낌이었다. 

여고 시절 '팬픽 이반'이라는 동성애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공감되진 않았으나, 그 시절의 아련한 환상과 모호한 현실의 경계의 아찔함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 시절의 어리석음도 함께 떠올랐다. 최선의 선택은 늘 최악의 선택이 되었고,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리숙했다. 아는 것이 없었음에도 다 안다고 착각하며 세상을 넓게 볼 줄 몰랐고, 그런 안목조차 없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금 생각하니 당연한데,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p.153)


사랑에 목 마른 아이들, 놀이치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늘 관심과 보살핌, 무한한 애정과 수용을 갈구한다. 나는 그 아이들을 수용해주고, 버텨주고, 기다려준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기다리지 못하고 담아주지 못한 것들을 담아주고 그래도 괜찮다고 다독여준다. 너를 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아. 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어. 하고 아이들을 격려하고 지지해준다. 가만히 그 아이들의 행동을 살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한 편안하고 안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나는 아이의 요구와 지시를 수용해주며 따라가주며 너는 이런 아이야, 너는 이런 걸 하고 싶어해. 너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아이야. 너 이렇게 하는 게 좋구나. 지금 너가 이럴 때 화가나는구나. 화가날 때 너는 이렇게 하는 구나.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어. 하고 다독거려주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며 아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스스로가 깨닫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스스로 선택하고, 선택한 것에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이가 놀이치료실만 즐거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해 결국, 나에게 귀결하는 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었다. 속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 말에서 그녀가 나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저, 그녀를 받아주었어야 했다. 그녀의 불안을 함께 견뎌줘야 했다. 놀이치료를 통해서 이 아이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족한 엄마의 불안을 안아주었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이의 부족하고, 문제되는 것들을 놀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개입으로 가르쳐야 하고, 가르쳐서 나아지는 것은 작은 변화라도 눈에 잘 보인다. 하지만, 놀이하면서 변화되는 것은 조급하게 기다린다고해서 그 변화가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에 불안해한다는 것을 이해했어야 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해도 그녀는 그녀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것조차도 이해했어야 했다. 그녀는 나를 공격하려고 한 말이 아니고, 자신의 불안을, 믿지 못함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공격으로 상처로 받아들였으니, 여전히 소양이 부족하다는 반성으로 나의 마음을 다독인다.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나의 마음을 자꾸 헤아린다. 속상한 나의 마음에 반창고를 붙이며, 내가 왜 속상해했는가를 생각한다. 나의 자존감이 높았다면, 그녀의 말이 그녀의 불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알아차렸을텐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말할까봐 두려운 나의 마음도 알아차렸다. 이제 시작하는 아이인데, 그냥 그만두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나의 불안도 함께 본다.

다음주에 그녀를 만나면 좀 더 다독여줘야겠다. 그만두고 오지 않는다면 못 보게 되겠지만......설마, 그냥 그만두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를 다시 무장해야겠다. 전공서적을 펼쳐든다. 열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그래도 가끔 소설책 읽으며 머리를 식힐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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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2-04-05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 속상한 일 있으면 친한 친구한테 전화해서 막 이야기해요 그래야 속상한 거 풀려요. 얼추 풀리고 맛있는 거 드시고 맛난 커피 마시고 소설 읽어요 그럼 싸악 풀릴 거에요, 좋아하는 일 하는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요! 과정이니까 넘기면 더 좋은 일 있을 거예요!!

2022-04-05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05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05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4-05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같아도 속 상할 것 같습니다.
계속 맴돌고, 기분이 풀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소설을 읽으며 마음을 푸시고, 전공서를 찾아 읽고 다시 심호흡 하시는 모습 본받고 싶습니다.
상황이 원만히 잘 해결되어 더 강한 섬님이 되어 있으시길요^^

꿈꾸는섬 2022-04-05 21:14   좋아요 2 | URL
책읽는나무님 감사해요.
이곳은 여전히 따뜻하네요.
응원에 힘이 나네요.^^

mini74 2022-04-0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드셨겠어요. 그럼에도 비난하는 듯한 그 엄마의 마음이 불안에서 비롯됨을 아시고 그 불안을 함깨 해줘야겠다니 섬님 참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아마 섬님의 마음, 다음엔 그분도 아실꺼라 믿습니다 ~ 편한 밤 보내세요 ~

꿈꾸는섬 2022-04-05 21:17   좋아요 1 | URL
부족한 저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네요. 저도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좀 더 여유있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다음에는 좀 더 편히 만나야겠어요.
따뜻한 댓글 감사해요.

2022-04-21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5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지 않지만 제대로 말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아이들에게 상처주는 말은 참 쉽게 나오는데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말은 잘 안 나온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예민하다. 우울감이 높고 자존감이 낮으며 주위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진하다. 교실에서는 문제행동을 일으키고 부적응행동을 보이며 학습 저하에 또래관계도 원만치 않고 교사의 지시에 불응한다. 부모는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이해가 안된다고 머리를 갸우뚱한다.

아이를 바꾸는 것보다 아이의 환경이 바뀌면 아이의 문제 들이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자신을 무섭게 만드는 엄마, 아빠의 폭언과 폭력이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데 부모들은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전에 어느 방송에선가 오은영박사님이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해주는 일은 아이들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요. 하지만 돈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건 정말 문제인거에요.˝ 하고 말하는 걸 보았다.
정서적 안정을 느끼게 해주는 말과 행동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로 강요하고 위협하는 부모들도 보았는데 말이라는 게 지낼 수록 더 많이 연습하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표현하는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자신들이 들어 온 그대로 말하는 것 같다. 아이는 어리고 약하니까 더 쉽고 위협적인 방법으로 지시하고 억누르는 것 같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도 안전하게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더 안전한 언어를 사용해야 할텐데, 쉽지가 않다.
이렇게 쉽지 않은 말을 어떻게 하면 될지 굉장히 쉽게 쓰여진 책이 새로 나왔다. 연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상황별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나와 있다.
이 책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만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읽고 적용하면 좋겠다. 아이들과 부모를 만나는 나에게도 굉장히 유용한 책으로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

아이들은 내게 ˝선생님은 참 친절하지만 단호하세요.˝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을 수용해주지만 문제행동엔 제한을 설정하고 허용하지 않을땐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저항하지 않고 안전한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주고 따뜻한 마음과 애정 그리고 위로를 전해주는 연습을 해보자. 우리가 그렇게 받으며 자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어도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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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1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12-0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다시 컴백?!

2020-12-01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다크아이즈 김살로메님의 포토에세이가 우편 도착하였다.
잊지않고 나에게도 책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소중하게 읽어야겠다.

˝지난 추억의 쓸쓸한 아름다움/ 그리고 지금부터 또 시작하는/ 우리 인생의 사랑과 이별˝

따뜻하며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 것 같아 지치고 힘든 일상의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늘 읽고 쓰는 일을 부지런히 행한 결과물을 받아들고 감사한 마음에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겠다.

잘 받아서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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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리를 해야 할 시점

아이들이 자라면서 다양한 욕구가 생겨나고
스마트한 세상에서 그동안 함께 했던 책들은 자리를 잃게 되었다.
가족들은 이제 책장 가득했던 책들을 비워내달라고 한다.
몇차례에 걸쳐 지인들에게 방출했는데도 여전히 남은 책들에 미련이 남아 정리가 쉽지 않다.
정리를 해야한다 생각하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책들, 소중한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책들이며,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어 구매한 책들인데, 이 책들을 정리하려니 아쉬운 마음이 한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정리를 해야하는 시점은 맞는데, 정리를 못하고 부여잡고 있는 이 집착을 내려놓아야한다.

*임시저장을 언제해둔건지...글쓰기를 하려니 이게 먼저 뜨는구나...아마도 지난 여름 책장정리하며 기록하다 남긴 글인듯 하다.

많은 책들이 주변사람들에게 소소하게 전달되었는데 기록해두지 못할만큼 바쁘게 지냈다.
이렇게 한해도 한달이 남은 시점까지 왔구나. 시간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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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의 하루가, 어느새 12월 27일, 한 해의 거의 막바지에 왔다.
올 한 해를 어떻게 기억할까?
방송대 청교과 졸업, 청소년지도사 2급 자격연수, 청소년상담사 3급 시험, 대학원 면접...... 나열해 놓고보니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봉사활동이 나를 공부하게 하고 한층 더 성장시켰다는 걸 느낀다.
해볼까? 하고 시작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가 느끼는 공포나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내가 느끼는 가장 슬픈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어떤 일에 고통을 느낄까? 내가 견디지 못하는 일은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3일장을 치르며 조문객을 맞고, 화장을 하고 납골묘에 모시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잘 몰랐던 감정들이 불쑥 불쑥 올라와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의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러 집을 나서던 평범한 일상이 마지막 순간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죽음이었다.
평소 살갑지 않던 아버지의 죽음이 나를 자꾸 슬프게 했다. 관계 상실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 오고, 난 그걸 모른척 하기 위해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남편은 나의 상실에 대해 ‘너보다 어머니가 더 힘들지 않을까?‘ 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누구가 누구보다 더 슬프다고 슬픔의 무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한 공간에 머물던 사람은 나보다 더 실감하겠단 생각은 들었다. 난 가끔 친정집에 아직도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실 것만 같다. 엄마의 잔소리에 눈살을 찌푸리시거나 전철타고 춘천에 바람쐬러 가자고 하실 것만 같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친정 식구들과 연락도 덜 하게 되고, 얼굴 마주하는 일도 줄이고, 내 일에만 몰두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공부도...... 책 읽기도...... 뭔가에 열중하며 잊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마다 슬픔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냥 잊은 듯 다른 일에 몰두하며 지내는 동안 ‘나, 아파요. 슬퍼요. 힘들어요.‘하고 말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힘들면 힘들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들을 이겨내며 사는 일인 것 같다. 남들과 비슷하게 아니 더 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일 수도 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내가 원서조차 내지 않고 포기하면 사는내내 후회하고 원망할 것만 같아서 대학원에 원서를 접수하고 통보했다. 그때 가족들의 반응은 너무하네였다. 공부를 더 하겠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통의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남편에게 집중해야하는 거 아닌가 했다. 하지만, 아직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한다. 나는 아직도 나를 더 자라게 해야 한다. 대학원에 붙으면 다니고, 떨어지면 다시 도전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곳에 원서를 넣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결국 남편과 아이들의 예상대로 추가합격되어 등록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가족들은 처음과 달리 축하해주고 격려해주며 2년동안 잘 해보라고 응원해주었다.
빙글빙글 돌아 지금의 길 위에 선 듯 하다.
사는동안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후회하고 원망하는 삶, 변명하고 회피하는 삶도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삶이라기보다는 내 삶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동안 긴 글을 쓰는 일이 버거웠다. 아버지의 죽음을 얘기하지 않고는 어떤 글도 쓸 수 없었다. 이제 어쩌면 괜찮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제는 마주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슬픔을 충분히 슬퍼한 건 아니겠지만 문득 아버지가 떠오를 때 미소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름 열심히 당신의 삶을 사신 걸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건 그런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어느날 문득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더이상 마주할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힘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기억하는 한 아름답게 추억하고 싶다.
힘들때마다 권대웅시인의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를 읽었다. 위로가 되었다. <지금 지나가는 중>이란 시를 계속 읽었다. ‘지금은 모두 지나가는 중‘이라는 싯구가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박성우시인의 <웃는 연습>도 내게 힘이 되었다. 시인의 따뜻한 시어가 시선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그걸 일깨운다. 산다는 건 정말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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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8-12-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 섬님, 오랜만이듯 하여 달려왔더니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저 역시도 올해 힘들었지만, 알라디너들이 올해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덩달아 마음이 그래요. 그래도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올해 며칠 남지 않는 날들 편안하고, 다가오는 날들도 좋은 날로 기대할 수 있길요. 공부도 응원할게요!

2018-12-27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8-12-27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섬님께서도 올해 많이 힘든 시간을 지내셨군요. 상실. 감히 누가 다른 이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꿈꾸는섬님께 마음을 담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고 싶어요.

박성우 시인은 제게도 문득 문득 위로가 되어주었는데, 꿈꾸는섬님께도 그랬군요.

아주 오랜만에 이 서재에 들어와보는 것 같아요. 제가 거의 알라딘에 들어오질 못했거든요.
근데 위아래 펼쳐진 책들 중에 제가 참 좋아하는 책들이 있어서 반갑습니다.

2018-12-29 0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12-3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섬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이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가정과 하시는 일에 항상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대학원 입학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그리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20-03-0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호기시 고고기글스 인형 아직 가지고 계신다면 010-9036-3613으로 문자 부탁드릴께요ㅜ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인형이여서 찾고있는 중이거든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2020-11-24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