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웅의 서 1 ㅣ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아이들은 길을 떠난다.
아이들만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들은 길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지 않기에 떠나는 용기를 낼 수 있다. 길을 떠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보물을 찾기 위해. [영웅의 서]의 여자아이 유리코는 친구를 찔러 상처를 입히고 사라진 오빠 모리사키 히로키를 찾아 길을 떠난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외롭고 두렵다. 다행인 것은 떠나는 자들에겐 동반자가 있다는 것이다. 유리코는 유리가 되어 소년 무명승(소라)과 사전(아쥬)과 현실의 세계를, 소라, 아쥬, 〈영웅의 서〉의 또 다른 사본인 늑대인 재의 남자(애시)와 함께 〈헤이틀랜드연대기〉의 세계로 떠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
아이들은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책을 읽고 TV를 보며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상상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진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해 힘들고 아픈 시간을 견뎌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유리코는 낡은 사전의 정령으로부터 오빠가 ‘그것’에 홀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을 만나고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책에선 존재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여행을 통해 유리코는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오빠의 세상과 만나게 된다. 좋아했지만 알지 못했던, 그래서 진심으로 오빠의 편이 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한평생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책속의 〈영웅의 서〉의 세계엔 ‘황의를 입은 왕’이 봉인을 깨고 ‘최후의 그릇’의 몸을 빌려 세계로 나온다. 히로키는 바로 최후의 그릇으로 소환된 자이다. 현실세계의 유리코는 인(印)을 받은 자이다. 남매는 각각 존재의 의미를 지닌 개인이지만 가족의 테두리에서 보면 하나이다. 유리코가, 유리코의 부모가 히로키가 없는 세상을 슬퍼하는 것은, 찾으려하는 것은 그가 여전히 가족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 혹은 이별은 지금 나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만 기억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산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대상을 만났을 때 빛을 낸다. 책은 사람이 읽어주었을 때 비로소 책이 된다. 읽지 않은 책, 낡은 창고에 버려져 먼지 쌓이고 곰팡이 쓴 책은 형태는 존재할지라도 책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영웅의 부활, 책의 복원
영화의 세계에선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면, 부당함과 불의를 겪으면 가면을 쓴 영웅들이 망토를 휘날리고 나타나 도와준다. 현실을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인간들은 약한 자신들을 대신해 누군가가 악의 무리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길 바란다. 영웅을 염원하는 인간들의 심리가 영웅을, 영웅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돈과 힘으로 세상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영웅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가짜영웅들’이다. 그들은 변질된 영웅, 인간의 혼을 잃어버린 영웅들이다. 이 책에선 그들을 ‘황의를 입은 왕’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세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이다. 아이들이 정의의 신이라고 믿었던 부모와 교사들은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이노이 미치루의 어머니처럼 자신을 지키기도 버겁다. 보호받지 못한(보호받을 수 없는) 아이들은 침묵하거나 스스로 해결하려한다. 아이들은 판단능력과 해결능력이 없지만 그들에겐 ‘보호자’가 있지만 ‘보호자’가 없다.
억울한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 경찰과 법인 존재한다는 말은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눈을 감고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지위 여하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공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뜻이지만 현실은 ‘돈’과 ‘권력’의 유무에 따라 불공정하게 적용된다. 무죄무벌 유죄유벌의 세상은 요원하다.
인간은 악에 쉽게 굴복하는 본성이 있다. 게다가 쉽게 전염되기까지 한다. 영웅은 존재해야 한다. ‘황의를 입은 왕’을 봉인시켜야하고 나쁜 이야기를 자아낸 자는 이름이 없는 무명승이 되어 죄업의 수레바퀴를 돌릴지라도. 오래된 이야기의 잘못된 복원, 아집에 사로잡힌 오독, 겪지 않은 세상을 예측하는 이야기는 ‘황의를 입은 왕’의 복원을 의미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 것, 책을 읽지 않는 것 또한 ‘영웅’을 봉인시키고 ‘황의를 입은 왕’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영웅은 세계를 움직이지만 여성은 세계를 존속시키는 원천이다. 죽은 자를 깨우는 마법을 찾은 엘름은 여성이었다. 그것이 ‘호국의 마법’이 아님을 깨닫고 목숨을 다해 방법을 찾은 것 또한 엘름이었다. 유리의 세계에서 유리코의 세계를 돌아온 유리코는 목적을 이룬 것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빠는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길을 떠났을 땐 유리는 오빠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여자아이였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땐 오빠의 부재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졌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거야.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도록.” (2권, 332쪽)
사람들이 ‘영웅’을 숭상하고
‘황의를 입은 왕’에게 매료되는 싸움 속에 있어도
결코 목소리를 잃지 마.
뭐가 옳고, 뭐가 있어야할 것인지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감아버리지 마.(2권, 339쪽)
모험을 떠난 아이들의 이야기는 현재,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어진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으며 영웅을 기다리고 새로운 꿈을 꾼다. 모험에서 돌아왔을 때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떠나기 전보다 훌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과 노니는 집]에서 장이의 아버지는 책(이야기)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책(이야기) 때문에 꿈을 꾸었다. 장이의 아버지는 비록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들 장이가 그 꿈을 이어갔다. 어떤 이야기와 책은 죄를 짓지만 과거를 경험삼아 현실을 견디며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데 필요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떠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역사는 수많은 이들의 모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모험을 떠나야하는 이유, 작가들이 이야기를 자아내야하는 이유, 책이 존재해야하는 이유이다. [영웅의 서]로 떠난 모험의 세계는 독특했고 즐거웠다.
“지리서도 읽으십니까?”
“책이 없어서 못 읽지, 가려 읽지는 않는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모두 공부가 되는 것이 책이지. 당장 필요치 않은 지식 같아도 뜻밖에 유용하게 쓰일 때도 많고.”
- [책과 노니는 집] 장이와 홍 교리의 대화 中에서,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