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환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동기와 연애를 했다.(이후 결혼도 했다.) 정환과 택이처럼 동기와는 절친도 아닌데 난 대체 왜 고백 한 번 못하고 물러난 건지.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동기가 나보다 그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사랑한다면서 나는 아무런 용기도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때 고백하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고백하지 못했던 남자(와 그 남자와 결혼한 동기)와는 인연이 끊겼고 고백했던 남자와는 여전히 친구로 지낸다. 고백했다고 해서 친구 관계가 끝나는 것도, 고백 못 했다고 해서 친구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친구로라도 만나고 싶은지의 여부였다. 때때로 감정의 널을 뛸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가 주는 긍정의 기운과 삶을 반성하게 하는 자극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가난하고 연하여도 장마르크 같은 남자라면, 페리고르 아주머니의 수다를, 할아버지의 권태를 아는 남자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고 아직은 그녀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 못 한다 해도.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애초 불가능한 일 아닌가. 불명확한 삶이 한 사람을 만나 좀 더 명확해진다면 그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를 읽다 포기하고 『정체성』을 읽었다. 긴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읽은 이후 시간이 지나 의욕이 사라졌다. 간단하게 남겨둔다.)

 

 

 

 

 

“차의 앞 유리창을 닦는 윈도 브러시처럼 당신 각막을 닦는 눈꺼풀을 보고 싶었지.”(71쪽)

 

샹탈, 나는 어떤 신비한 것을 정의 내린 것 같은 그런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이 참 좋더라. ‘그리고 나면 이렇게 시간이 그에게 흘러간다.’라는 말은 근본적인 문장이야. 그분들의 문제는 시간이고, 시간을 흘러가게 하고, 절로 그분들은 힘들이지 않고, 걷다가 지친 사람처럼 굳이 시간을 따라가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주머니는 말을 하는 거야.(89쪽)

 

며칠 동안 그분 입에서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소리, 고통 받지 않았으니 신음도 아니고 발음을 할 수도 없을 테니 단어도 아닌 소리가 새어 나왔어. 말하는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닌데 그냥 할 말이 없었던 거야. 전달해야 할 구체적 내용도 없었지. 심지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무관심했던 할아버지는 혼자 소리를 냈지. 아아아라는 소리만 내면서 숨을 들이쉴 때만 잠깐씩 소리를 멈추곤 했어. 나는 홀린 듯 할아버지를 보았고 결코 그 모습을 잊지 못하겠어. 아주 어린 아이였던 나는 깨달았다고 믿은 거야. 나는 저것이 있는 그대로의 시간과 대면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라고. 그리고 그 대면이 권태라 불린다는 것을 깨달았지. 할아버지의 권태는 그 소리, 끊임없는 아아아로 표출되었던 거야. 그 아아아가 없었다면 시간이 그분을 짓눌렀을 거야. 할아버지가 시간에 대항해서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 그것은 끊임없는 아아아란 불쌍한 소리뿐이었지.(90쪽)

 

“당신을 알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내 하찮은 일이 예전보다 흥미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 대화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잖아!”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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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6 1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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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6 17: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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