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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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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악어빌딩 어디에나 숨어 있었다. 아무 데나 코를 막고 기다리면 곧 냄새가 나타났다. 냄새는 악어빌딩의 공기였고, 콘크리트 벽과 파이프와 좁은 계단 사이를 흘러 다니는 혈액이었다. 보이지 않으므로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고, 말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정체는 더욱 모호했다. 땅속인지 벽 속인지, 1층인지 4층인지, 냄새의 시작이 어디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하의 레스토랑에서도, 1층의 철물점에도, 2층의 합기도장에도, 3층의 피시방에도, 4층의 오피스텔에도, 옥상에도, 냄새는 있었지만, 모두를 모른 척, 없는 척했다. 처음 맡으면 불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익숙해지는 냄새였다.(9쪽, 첫 문단)

 

5월이 흐르고 있다. 일상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곧 익숙해지는 냄새였다’의 끝에서 내가 떠올린 단어는 ‘두렵다’였다. 나는 두려웠다, 삶의 연장을 위해 관심에서, 그리고 진실에서 멀어질까 봐.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각하게 될까 봐.

 

악어빌딩 4층은 ‘악어빌딩의 냄새와 외부의 공기가 매일 전투를 벌이는 곳(9쪽)’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도 악어빌딩 4층 어디쯤 있지 않을 까싶다. 우리는 현실과 희망, 외면과 용기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구동치가 4층에 사는 이유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 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11쪽)

 

이탈리아 테너 가수의 아리아로 구동치가 즐겨 듣는 노래이다. 사람들은 구동치를 찾아와 ‘딜리팅’을 의뢰한다. 딜리팅은 사진이나 글 등 삶의 흔적들을 없애는 일이다.

 

구동치에게 딜리팅을 부탁했던 배동훈이 죽고 딜리팅 품목이었던 태블릿 피씨가 사라진다. 태블릿 피씨를 찾아 없애려는 구동치와 태블릿 피씨로 천일수와 거래를 계획하는 이영민과 이영민에게서 태블릿 피씨를 뺏으려는 천일수와 원수도장을 지키기 위해 천일수의 일을 돕는 나영욱을 비롯한 원수도장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쪽)  

 

사람들이 딜리팅을 원하는 것은 자신의 흔적들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이영민 같은 누군가는 그 흔적들을 보관하고 싶겠지만.

 

구동치는 딜리팅 고객이었던 정인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딜리팅 품목인 하드 디스크를 다른 것과 교체하고 나오다 그의 딸 소윤과 부딪힌다. 정인수와 배동훈에게 하드 디스크와 태블릿 피씨는 딜리팅 품목이었으나 소윤에겐 추억이자 소중한 일상이었다. 나에겐 지우고 싶은 것이지만 남겨진 자들에겐 사랑하는 이를 기억할 수 있는 장치일 수 있다.

 

기억과 기록을 없애는 행위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때때로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지운다. 시간이 지나고 읽으면 왜 그리도 유치한지. 나 역시 구동치 탐정을 찾아왔던 ‘그들’과 다르지 않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사랑과 욕망, 그 어디쯤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현실의 만족을 위해 나쁜 흔적을 만드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나쁜 흔적을 지우고 싶은 이중의 욕망이 담겨 있었다.

 

키보드에는 'delete'키가 있다. 잘못 쓴 글은 언제든 삭제할 수 있다. 잘못 살고 있다는 사실은 왜 삶의 끝에서만 알게 되는 걸까. 한 번 살아온 생은 잊힐망정 지워지진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을 바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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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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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구 쇼바 슝가 아리따 슈바 슈하가리 차리차리 파파(9쪽)

 

정애 아버지는 말할 줄 알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정애 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은 울분이 정확한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새마을’에 대한 기대가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바뀐, 광분하거나 울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몸 없는 혼처럼’ 살았던 이들의 상처를 그린 소설이다.

 

공선옥의 소설은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을 읽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건 공선옥의 소설에서 자운영 꽃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내 기억 속엔 소설의 제목은 모호하고 내용은 증발되었는데 자운영이란 꽃 이름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지 마소 우지 마소, 꽈리 때깔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참지름으로 밥 비벼줄게 우지 마소……(30쪽) 

 

이 노래는 정애 아버지 정택이 ‘몸 없는 혼’으로 살아가는, 빈껍데기로 살아가는 아내에게 불러 주던 노래였다. 이 노래는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정택 자신을 위로했던 노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공선옥의 소설을 처음 읽은 이후 다른 작품은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책을 읽은 후 선명하게 남은 건 자운영 꽃뿐만은 아니다. 당시 내 기분도 선명하다. 가슴에 돌이 내려앉은 무거움,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갑갑함이 기억난다. 그녀의 소설을 더 읽지 못한 건 그 느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다섯의 나는 울고 싶었으나 서른살의 내가 울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쉰살의 나는 노래를 불렀다. 우지 마소 우지 마소. 꽈리때갈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그러자 백살의 내가 노래를 받았다. 아가 아가 얼뚱아가 미역국에 밥 말아줄게. 우지를 마소. 우지를 마소.(31쪽)

 

아버지의 노래는 정애의 노래가 되었다. 절망의 늪에 빠질 때마다 정애 역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때 정애는 ‘노래는 세상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물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간다’(31쪽)고 생각했다. 어린 정애는 세상은 울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울 수 없었다.

 

정택과 정애에게, 영암집 숙자에게 노래는 울음을 대신하는 수단이었다. 정애는 갈급했을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이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위로엔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 위로하는 사람, 위로받는 사람. 위로라는 단어가 사치인 시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그녀는 서른살의, 쉰살의, 백살의 나를 불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노래가 가능한 건 내가 미래에도 살고 있다고 믿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애는 ‘따뜻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독특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묘자의 이름을 검색하니 ‘아름다운 모양이나 태도’라는 뜻이 있었다. 새정지에서 상처를 안고 떠난 정애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그 도시’에서도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몸 없는 혼’이 되어 버렸다. 정애는 새정지로 돌아왔으나 새정지는 예나 지금이나 새 정지(淨地)가 아니었다. 정지(停止)된 정애의 삶은 돌아온 새정지에서도 반복되었다. 아무리 고되더라도 살고 싶었던, 나무처럼 건강하고 꽃처럼 아름답고 싶었던 정애가 맨몸으로 새정지를 떠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새로운 땅, 새 정지를 찾아 떠났을 거라고. 그녀의 미래의 삶에 긍정하지 못한다. 새정지, 라는 단어 때문인지 정지된 새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꾸 그녀가 날 수 없게 된 새의 절망을 만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건 이 이야기가 실재 이야기이고 내가 그녀의 미래를 아는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암집 숙자의 말처럼 ‘야속한 세상’, ‘시치미 뚝 떼는 세상’이지만 새정지에 함께 살았던 묘자가, 살기 위해 죽여야 했던 묘자가, 정애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묘자가 정애를 기억한다는 사실은 정애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랬다고 믿는다.

 

묘자를 찾아온 여자가 정애이든 정애가 아니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묘자를 찾아왔고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찾아왔다는 것,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건 살아갈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그녀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삶에 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우리 부모들처럼.

 

그녀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노래한다면 나는 노래를 듣겠습니다.” 공선옥에겐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이 이야기한다면, 나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시간의 지속성은 이야기를 진실과 멀게 각색하거나 잊게 한다. 진실과 멀게 각색한 이야기, 잊힌 이야기는 반복된 잘못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상처 속에 살게 한다. 잊힌 이야기, 잊혀가는 이야기를 복원하는 건 소설가의 책무 중 하나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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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는 누구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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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야기는 문장과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창작자의 자의 혹은 타의의 강요 혹은 무의식 속에 쓰이지 않은 혹은 쓰이지 못한 ‘무엇’이 존재한다. 이야기는 독자들이 쓰이지 않은 혹은 쓰이지 못한 ‘무엇’을 찾아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이지 않은 혹은 쓰이지 못한 ‘무엇’은 독자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1.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의문형의 문장으로 이루어진『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이기호의 여덟 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우, 우, 우리 애가 지, 집에서 써, 써, 썩어가고 있다네”(13쪽)

 

인용문은 「행정동」에서 오재우의 아버지는 자신이 사는 지방도시의 유일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오재우가 오 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일자리 찾지 못하자 자신의 후배이자 아내의 동기인 지도교수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면서 한 말이다. 아무런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혹은 찾지 않고) 집에서 썩어가는 이는 오재우 뿐이 아니다. 어머니의 논일을 돕기는 했지만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의 삼촌 역시 공장에 들어가기 전, 프라이드를 장만하기 전까지는 오재우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서 김박사에게 질문을 하는 사범대학교를 졸업한, 올해 스물네 살이 된 임용고시 재수생 최소연 역시 마찬가지다. 최소연의 경우 외적인 조건은 오재우나 삼촌보다는 낫지만 김 박사와의 상담에서 드러나는 사정을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의 전기 합선에 따른 화재로 27년 전 시력 잃고 보육교사인 아내가 버는 월급에 의지해 사는 전도사의 사정도, 「화라지송침」에서 구조조정 당한 후 가사에 전념하고 살아가는 ‘나’의 사정도 ‘써, 써, 썩어가고 있는’ 삶과 분리된 건 아니다.

 

2.

썩어가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공권력에 기생하는 것이다. 「행정동」의 오재우는 지도교수가 소개해준 행정동에서 기존의 학적부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을 했다. 「밀수록 가까워지는」에서 프락치로 몰렸던 삼촌이 잡혀가지 않았던 것은 경찰 공무원이었던 고모부 덕분이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에서 아버지가 ‘나’가 경찰 공무원이 되길 바랐던 것도 공권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탄원의 문장」에서 탄원서를 쓰던 교수인 ‘나’의 깨달음처럼 탄원서는 문장으로 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법관의 영혼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의 ‘나’는 반바지라 확신하는 것을 이웃들은 팬티라고 확신할 때 판단을 의뢰한 곳은 경찰서였다. 「행정동」에서 오재우는 같은 일을 하지만 이름조차 나누지 않았던 그녀를 도와주려고 경찰서에 갔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익명의 존재들이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려면 ‘검은 봉지의 빵과 우유’마저 뺏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검은 봉지의 빵과 우유’를 뺏기는 것은 생존마저 포기해야 함을 뜻한다.

 

3.

서두에서 이야기는 형식의 측면에서 문장과 문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내용의 측면에서 이야기는 사람의 삶과 관련이 있다. 「행정동」의 오재우는 입력하지 않는 학적부 정보에서 학생들의 삶을 추측하곤 그것을 자신만이 아는 그 사람의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부분 이야기 혹은 그저 그의 상상 속 이야기일 뿐이다. 「밀수록 가까워지는」의 삼촌이 ‘나’의 집에 프라이드 자동차를 두고 간 사정은 할머니의 생각과 고모의 이야기, 고모부의 이야기로도 완성되지 않는 것은 삼촌이 목소리가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촌이 사라진 것은 그곳에서 자신의 여백을 채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이상 여백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차는 그래서 지금까지 굴러가게 된 거라우. 후진이 안 되니까.(81쪽)

 

자동차를 후진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썩어가는 삶’을 살았던 삼촌의 마지막 ‘프라이드’였는지도 모른다.

 

4.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에선 마가복음 8장을 인용하며 소경이 사람들이 나무처럼 걸어가는 것이 보이나이다, 라고 답할 수 있었던 건 나무를 본 적 있던 사람이었을 거라는 글이 나온다. 「밀수록 가까워지는」에서 삼촌이 프라이드를 후진하지 않았던 것은 리어카를 후진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경험하지 않는 한, 누군가의 사정이 되어보지 않는 한 누군가의 삶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저 ‘말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318쪽)’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5.

나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짐작과 진실 사이엔 그리 큰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작이란, 어쩌면 진실을 마주 보기 두려워서, 그게 무서워서 바라보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니 이야기의 운명 역시 어쩌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하는 마음을, 강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하는 짐작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중요한 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263쪽)

 

이기호의 소설들은 말하지 않아 ‘입증 불가능한 세계’(193쪽)에서 끊임없이 입증을 시도한다.「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2」에서 최이정의 아들 숙환처럼. ‘이정(而丁)’은 ‘조선의 레닌’이라 불렸던 박헌영의 호로 고무래가 되겠다는 그의 신념이 담겨 있다. 숙환을 만나기 전까지 이정의 아버지 최근식을 배신자로 믿었던 김명국은 이정의 이름이 보이는 그대로의 뜻 쇠스랑(而)과 망치(丁)의 뜻일 거라고 말했다. 쇠스랑과 망치는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도구들이다. 최근식이 딸의 이름을 '이정'이라 지은 이유는 입증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6.

표제작「김 박사는 누구인가?」의 마지막엔 김 박사가 누구인지 빈칸을 채워 달라는 작가의 요청이 실려 있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으로 들린다.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건 감춰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겐 오래된 친구들이 있다. 그녀들과 친구가 된 이유는 비밀을 공유하면서였다. 이기호는 『김 박사는 누구인가?』를 통해 우리에겐 ‘여백을 채워야 하는 순간(86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 사람’을 진짜로 알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나’와 ‘너’의 이야기가 여백 없이 채워질 때 이야기는 새롭게 탄생하는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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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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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살라버리라고 유언했지만 브로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브로트는 카프카 역시 자신이 카프카의 작품을 불살라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카프카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이란 책 제목처럼 그의 유언은 배신당했다.

 

2.

나는 뒤늦게 쿤데라, 그러니까 쿤데라의 책들을 읽어가고 있다. 더불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표지로 한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을 모으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알라딘 소설 신간 평가단 선정 도서다. 선정 도서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직접 구매했을 것이다. 주목 신간 페이퍼에 이 책을 적진 않았다. 내가 적지 않아도 다른 분들이 추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배신당한 유언들』을 받고 책을 펼치며 느낀 감정은 일단 당혹감이었다. 소설인 줄 알았는데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다. 알라딘의 주제 분류를 보니 소설과 에세이에 올려있다. 처음에도 소설과 에세이에 동시에 올려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 소설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소설은 아니라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쿤데라의 에세이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의미 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했다.

 

4.

요즘은 책 읽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이 책은 읽다 멈추다 다시 읽다, 를 반복하며 읽었다. 평가단 도서가 아니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이 책은 내게 너무 어려웠다. 프랑수아 라블레도 모르고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읽지도 못한 탓에 유럽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사유는 와 닿지 않았다.

 

5.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에세이는 소설보다 개인적인 것 같다. 나는 소설은 많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 혹은 내 주변의 이야기로 여기지는 반면 에세이는 작가만의 특별한 이야기로 읽혀서 내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읽힌다. 간혹 내 이야기 같아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6.

내가 보기에 위대한 작품들은 오직 그들의 예술의 역사 안에서만, 그리고 그 역사에 참여함으로써만 탄생할 수 있다. 무엇이 새로운 것이고 무엇이 되풀이된 것인지, 무엇이 발견이고 무엇이 모방인지는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작품이 우리가 알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가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 안에서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예술에게는 역사 바깥으로의 추락보다 더 끔찍한 일도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곧 미적 가치들이 더는 지각되지 않는 혼돈 속으로의 추락인 까닭이다.(30쪽)

 

7.

쿤데라의 소설『농담』 속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삶은 다른 곳에』와 『불멸』이 어떤 과정으로 탄생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은 흥미로울 수 있다. 쿤데라의 유럽 소설론과 비평, 번역에 대한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토마스만의 『마의 산』의 인물들의 특성과 완성 과정 일부, 카프카학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는 내게 너무 먼 작가다. 몇 번 읽기를 시도했으나 완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쿤데라의 글들에 공감이든 반대든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쿤데라는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은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라고 했다. 구매만 하고 읽지 못한 카프카의 책들을 이젠 읽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8.

쿤데라는 음악, 그리고 음악가에도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그는 이 책에서 유럽 소설의 역사와 더불어 유럽 음악의 역사에 대해 논하고 있다.

 

바흐의 음악은 한 번 망각의 사막을 거친 후로는 본래 얼굴이 언제나 반쯤 베일에 가린 것 같다.(89쪽)

 

카프카만큼이나 클래식과도 거리가 먼 사람인데 위 문장 때문에 바흐의 음악이 궁금해졌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궁금하긴 하다. 쿤데라의 라블레와 카프카, 스트라빈스키와 야나체크에 관한 깊은 애정을 만날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9.

이 책에는 소설 문장의 반복이 주는 아름다움에 관한 글이 나온다. 이 책 역시 변형되긴 하지만 반복된 글이 많다. 그래서 읽은 부분을 다시 읽는 것 같은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 책은 9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8부의 제목은 ‘안개 속의 길들’이고 8부의 소제목 중 하나도 ‘안개 속의 길들’이다. 나의 무지 덕에 이번 에세이는 안개 속의 길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쿤데라의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이다. 클래식과 고전문학, 유럽소설에 대한 무지 때문이겠지만 쿤데라는 에세이보단 소설이 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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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파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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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을 찍는 일을 한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7쪽)

 

의무로서의 사진 찍기를 제외한 순수하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내가 당신(대상)을 기억하겠다는 마음의 첫 번째 행동이다. 사진은 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일종의 기록이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지금은 부재하지만 존재했음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선셋파크』의 마일스 헬러가 버려진 물건들에 관심을 두는 것은 폐가가 되기 전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처로 점철된 삶을 외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의붓형 보비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상처받은 그는 부모에게서 도망쳐 희망 없는 삶을 선택했다. ‘sunrise’의 시간을 살 수 있었으나 ‘sunset’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가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부모에게서 도망쳤지만 그래도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나는 당신들 곁에 존재하고 싶다는 잠재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재즈 그룹에서 드럼 연주자였던 빙 네이선은 망가진 물건들의 병원을 운영했다. 빙 네이선이 선셋파크의 폐가에 살기로 한 것은 공동의 힘으로 ‘실패한 세계의 폐허에서 새로운 현실을 주조해 낼 꿈(79쪽)’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열망에 영화「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이자 국제적인 문학가 단체 PEN 클럽에서 일하는 앨리스 버그스트롬, 원했던 화가로서의 삶보단 부동산 중개사로 살아가는 앨런 브라이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플로리다를 떠나게 된 마일스 헬러가 동참한다. 사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 청년은 혼자서는 갈고리를 떼어 낼 수가 없어. 자기 파자마 단추를 잠글 수도 없고 담배를 끌 수도 없어. 그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해. 기억해 보면 그 장면에서는 음악이 전혀 없었어. 거의 대화 한 마디 없었어. 하지만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이었어. 정말로 정직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야.

그 후로 모두들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데이나 앤드루스가 그 여자한테 말하잖아…….

테레사 라이트 말이지…….

그가 테레사 라이트한테 꽤나 고생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하잖아.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 그리고 프레드릭 마치는 쉬지 않고 미친 듯이 퍼마시는 주당이라서 몇 년 안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128쪽)

 

그들은 선셋파크에서 현재의 삶이 거듭나길 원했으나 선셋파크에서조차 내몰렸다. 그들의 미래가 행복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이 실패가 아닌 것은 그들의 삶은 ~ing,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일스 헬러의 부모들, 친부모와 양부모는 아들의 가출에 찾아 나서는 등 수선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사는 소식을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마일스 헬러가 ‘피할 수 없는 소멸과 계속된 삶의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 다리를 걸치고 있(186쪽)’음을, 인간은 상처를 통해 성장함을 알고 있었다.

 

마일스 헬러가 여자아이 필라 산체스에게 빠진 것은 그녀가 ‘타인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는 섬세함(19쪽)’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쟁 같은 삶을 살지만, 그래서 상처로 가득한 ‘전쟁의 아이(171쪽)’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삶이 축복인 것은 ‘나’의 삶이 ‘너’ 때문에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는 부모나 친구 등, 타인뿐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일수도 있다. 앨런이 몸을 스케치하며 몸의 가치와 상처 때문에 은폐했던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진 건물들, 무너지고 불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 사라져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328쪽)

 

폴 오스터는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말한다. 우리말엔 어제와 오늘은 있지만 내일(來日)을 뜻하는 말은 없다. 각박한 현실 앞에 내일을 사치일 뿐이다. 오늘은 스무 살의 내가 꿈꾸었던 내일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 순리라면, 지나온 과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천착하기보단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오늘을 살다 보면 언젠가 내가 그리는 내일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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