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평점 :
융구 쇼바 슝가 아리따 슈바 슈하가리 차리차리 파파(9쪽)
정애 아버지는 말할 줄 알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정애 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은 울분이 정확한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새마을’에 대한 기대가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바뀐, 광분하거나 울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몸 없는 혼처럼’ 살았던 이들의 상처를 그린 소설이다.
공선옥의 소설은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을 읽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건 공선옥의 소설에서 자운영 꽃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내 기억 속엔 소설의 제목은 모호하고 내용은 증발되었는데 자운영이란 꽃 이름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지 마소 우지 마소, 꽈리 때깔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참지름으로 밥 비벼줄게 우지 마소……(30쪽)
이 노래는 정애 아버지 정택이 ‘몸 없는 혼’으로 살아가는, 빈껍데기로 살아가는 아내에게 불러 주던 노래였다. 이 노래는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정택 자신을 위로했던 노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공선옥의 소설을 처음 읽은 이후 다른 작품은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책을 읽은 후 선명하게 남은 건 자운영 꽃뿐만은 아니다. 당시 내 기분도 선명하다. 가슴에 돌이 내려앉은 무거움,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갑갑함이 기억난다. 그녀의 소설을 더 읽지 못한 건 그 느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다섯의 나는 울고 싶었으나 서른살의 내가 울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쉰살의 나는 노래를 불렀다. 우지 마소 우지 마소. 꽈리때갈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그러자 백살의 내가 노래를 받았다. 아가 아가 얼뚱아가 미역국에 밥 말아줄게. 우지를 마소. 우지를 마소.(31쪽)
아버지의 노래는 정애의 노래가 되었다. 절망의 늪에 빠질 때마다 정애 역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때 정애는 ‘노래는 세상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물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간다’(31쪽)고 생각했다. 어린 정애는 세상은 울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울 수 없었다.
정택과 정애에게, 영암집 숙자에게 노래는 울음을 대신하는 수단이었다. 정애는 갈급했을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이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위로엔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 위로하는 사람, 위로받는 사람. 위로라는 단어가 사치인 시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그녀는 서른살의, 쉰살의, 백살의 나를 불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노래가 가능한 건 내가 미래에도 살고 있다고 믿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애는 ‘따뜻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독특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묘자의 이름을 검색하니 ‘아름다운 모양이나 태도’라는 뜻이 있었다. 새정지에서 상처를 안고 떠난 정애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그 도시’에서도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몸 없는 혼’이 되어 버렸다. 정애는 새정지로 돌아왔으나 새정지는 예나 지금이나 새 정지(淨地)가 아니었다. 정지(停止)된 정애의 삶은 돌아온 새정지에서도 반복되었다. 아무리 고되더라도 살고 싶었던, 나무처럼 건강하고 꽃처럼 아름답고 싶었던 정애가 맨몸으로 새정지를 떠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새로운 땅, 새 정지를 찾아 떠났을 거라고. 그녀의 미래의 삶에 긍정하지 못한다. 새정지, 라는 단어 때문인지 정지된 새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꾸 그녀가 날 수 없게 된 새의 절망을 만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건 이 이야기가 실재 이야기이고 내가 그녀의 미래를 아는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암집 숙자의 말처럼 ‘야속한 세상’, ‘시치미 뚝 떼는 세상’이지만 새정지에 함께 살았던 묘자가, 살기 위해 죽여야 했던 묘자가, 정애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묘자가 정애를 기억한다는 사실은 정애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랬다고 믿는다.
묘자를 찾아온 여자가 정애이든 정애가 아니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묘자를 찾아왔고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찾아왔다는 것,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건 살아갈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그녀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삶에 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우리 부모들처럼.
그녀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노래한다면 나는 노래를 듣겠습니다.” 공선옥에겐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이 이야기한다면, 나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시간의 지속성은 이야기를 진실과 멀게 각색하거나 잊게 한다. 진실과 멀게 각색한 이야기, 잊힌 이야기는 반복된 잘못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상처 속에 살게 한다. 잊힌 이야기, 잊혀가는 이야기를 복원하는 건 소설가의 책무 중 하나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