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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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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한 사내가 짙은 어둠 속을 뚫고 허허벌판을 난 도로 위를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1권, 9쪽)

 

사내의 이름은 에티엔 랑티에로, 철도 작업장에서 책임자의 뺨을 때렸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후 일자리를 찾아 나선 상태였다. 인용문은 에밀 졸라의『제르미날』의 첫 문장으로, 에티엔이 길을 걷는 상황 설명이자 그가 처한 고통의 현실을 묘사한 중의의 문장이다.

 

『제르미날』은 곤궁한 삶을 살았던 탄광 노동자들이 ‘가축’ 혹은 ‘벌레’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을 살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제르미날(Germinal)은 프랑스 혁명력(革命曆)의 제7월 씨앗의 달(芽月)로 3월 21일에서 4월 19일에 해당한다. 소설은 3월에서 4월, 파업이 벌어진 두 달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티엔은 에밀 졸라의 다른 작품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오귀스트 랑티에와 제르베즈 마카르와의 아들이다. 그는 탄차 운반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몽수탄광에서 일하게 되고 240번 탄광촌에 머물게 된다. 에티엔은 광부들과 가족의 삶을 보며 왜 누구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누구는 저토록 회의호식하며 살아가는가?(1권, 257쪽),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빈곤함에 묻혀 잠들어 있던 멋과 안락함을 향한 본능이 깨어난’(1권, 268쪽)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또 그 아버지들이 옛날부터 대대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겪어 왔고, 또 앞으로 여전히 우리 아들과 그 아들들이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걸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아.(2권, 167쪽)

 

『제르미날』은 에티엔이 몽수탄광에 오는 이야기로 시작해 몽수탄광을 떠나는 이야기로 끝난다. 정당한 삶에 무지했다가 자각하게 된 그의 이야기도 흥미롭고, 급진적 사고를 지닌 수바린를 비롯해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지만 내 관심을 끈 인물은 라 마외드다. 파업에 두려움을 표했던 그녀가 적극적으로 파업에 동참하게 된 것은 그녀가 일곱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두 달에 걸친 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녀가 다시 갱으로 돌아간 이유 역시 ‘어린 새끼들’ 때문이었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삶을, 그들이 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리지만 무조건 옹호하진 않는다. 세상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자는 라스뇌르의 의견에도, 세상 모든 것의 파괴 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는 수바린의 생각에도, 기계공이었다가 월급 사장이 된 엔보나 호의적인 탄광 사장 드뇔 랭의 목소리도 외면하지 않았다. 에밀 졸라가 엔보나 드뇔 랭을 나쁘게만 그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어설픈 부르주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에티엔처럼 애초 목적과 달리 정치적 야심이 생긴 예도 있지만 대부분 노동자의 바람은 굶지 않는 것, 인간 최소한의 삶이었다.

 

1866~7년이라는 시간과 프랑스 탄광이라는 장소만 바꾸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곳 어딘가에서 벌어졌던, 벌어지고 있는,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억눌린 감정이 불씨와 만나면 분노가 되어 폭발한다. 분노를 진압하기 위해 폭력이 투입되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남은 자들은 다시 강자들에게 복종하며 살아간다.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부당해도 침묵하고 살아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당한 삶을 요구하는 일은 잘못한 선택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2권, 370쪽)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스하게 비추(369쪽)’는 4월, 파리로 떠나는 에티엔은 탄광 동료의 리블렌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환청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벅찼다.   

  

정당한 삶이 불가능한 꿈이 되는 현실 앞에 삶의 방향을 잃게 된다. 에밀 졸라는 『제르미날』을 통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에티엔과 그들이 보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희망의 싹을 틔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제르미날』은 ‘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짙은 어둠 속을 뚫고 허허벌판을 난 도로 위를’ 함께 걸었던 이들의 이야기이자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 『제르미날』 1,2권 통합 리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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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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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많은 문장이 필요할까. 나는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일반적으로 책 커버 안쪽에는 작가 소개가 실린다. 밀란 쿤데라의 책에는 위 두 문장만 실려 있다. 그야말로 달랑. 모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타국 프랑스로 망명해 살아야 했던,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 했던 밀란 쿤데라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전작들에도 느꼈지만 간결한 소개는 꽤 마음에 든다.

 

밀란 쿤데라 전집 출간과 완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 한 편엔 좀 이르지 않나 싶었는데 역시 신작이 나왔다. 『무의미의 축제』는 2000년에 발표한『향수』 이후 14년 만에 출간된 장편소설이다. ‘밀란 쿤데라 전집’으로 만나다 보니 오랜 시간 동안 신작이 없었는지 몰랐다.

 

『무의미의 축제』의 알랭이 여자들의 배꼽을 보고 여자들의 매력의 근원을 생각하던 순간 라몽은 다르델로를 만난다. 암을 의심했다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은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암이라고 거짓말한다. 라몽은 자신의 거짓말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웃지만 라몽은 암이라고 고백하는 다르델로의 모습에 친근함을 느낀다. 다르델로에겐 무의미한 거짓말이었지만 라몽에겐 다르델로를 평소와 다르게 보는 의미가 됐다. 첫 번째 직업이 배우였던 칼리방은 칵테일 파티에서 파키스타인 행세를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비화하길 혹은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해 주길 원했다.

 

라몽은 샤를의 집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의『회고록』을 보게 된다. 그는 샤를에게 스탈린의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가 웃기다는 말을 듣는다. 스탈린은 농담했으나 의미를 파악하느라 바빴던 협력자들은 웃지 못했다. 그들의 시대는 농담의 시대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농담을 못 하게 막은 주체가 스탈린이라는 것이다.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에 웃지 않는 건 협력자들만이 아니었다. 알랭의 여자 친구 마들렌도 자고새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탈린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농담이 존재한다.

 

“그런데 착각이야.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사과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58쪽)

 

알랭은 사과쟁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사과를 잘한다. 잘못임을 인정하는 일이라도 사과하는 세상을 바란다는 샤를의 말이 와 닿는다. 자신의 잘못은 남의 탓이라 우기는 세상 아니던가.

 

샤를은 병든 어머니에게로 떠나고 라몽은 음산한 삶에 쥘리를 만나 즐거움을 찾지만 이내 서글픈 현실과 만나고 칼리방 역시 쓸쓸함을 맛본다. 나쁜 징조나 삶의 추락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걸 증명하듯이.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138쪽)

 

알랭은 자신을 떠난 어머니의 환영과 만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을 낳길 원치 않았던 어머니와 화해한다. 아니 어머니에게 사과한다. 그가 배꼽 수수께끼를 통해 찾은 것은 존재의 본질이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기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47쪽)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생인 듯 보이지만 무의미한 생은 아니다.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삶은 세상을 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존재는 무의미에서 시작하고 농담은 삶을 바꾼다.

 

이승우의 소설집『신중한 사람』의 표지는 짝짝이 눈을 가진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표지의 분위기로 남자로 받아들였다. 한쪽 눈은 위쪽을, 다른 눈은 아래쪽을 보고 있다. 현실적으로 두 눈이 위, 아래라는 상반된 방향을 보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렇게 눈을 뜨는 건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상반된 방향으로 눈을 뜨는 건 나름의 방어기제이다. 『무의미의 축제』의 표지엔 한쪽 눈을 떼어 손에 올린 사람이 나온다. 한 눈으로 보는 세상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좁은 시야를 갖지만 고개만 약간 돌리면 보지 못한 시야를 볼 수 있기에 세상을 보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아직 내겐 하나의 눈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아직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두 소설은 지독한 삶들과의 화해로 읽힌다. 『신중한 사람』의 인물들은 지독한 삶이지만 여전히 살아갔고, 『무의미의 축제』의 인물들은 삶에서 만난 농담을 통해 삶의 여유를 찾았다. 존재하는 한, 살아갈 가치가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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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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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있지만 지금 여기 없는, 의 문구는 이승우의 단편집 『신중한 사람』 중 「이미, 어디」에 나온다. 제목으로 쓰면서 의미를 강조하려고 서술어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해도 불완전한 문장이다. ‘있다’와 ‘없다’라는 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가 동시에 쓰였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신중한 사람』의 인물들은 ‘지금 여기 있지만 지금 여기 없는', 모순의 상황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나’ 혹은 ‘그’, ‘유’나 ‘윤’, Y나 J 등으로 명확한 이름이 없다.「딥 오리진」의 ‘가공한’만 유일하게 전체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가공한’ 역시 단어의 뜻 때문에 불명확한 이름으로 읽힌다. 가공한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심리를 숨겼다. ‘나’, ‘그’, ‘유’, ‘Y’에서 이 시대를 사는 ‘나’와 ‘너’를 봤다. ‘여기’의 삶은 사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힘들고, 갈망하는 ‘저기’의 삶은 아득하지 않던가. 어떤 이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내 고객들은 모두 심약한 사람들이야. 누구보다 약하고 억눌린 게 많고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칼을 모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칼을 수집해야 할 정도로 약한 거지.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칼을 소지하는 거야…… (「칼」, 219-220쪽)

 

『신중한 사람』의 인물들은 청춘이든 마흔이 넘었든 노인이든 안정적 삶을 살지 못한다. 편안한 삶은 평생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들이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실력보다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칼」의 ‘나’는 ‘공부를 중단하고 갑자기 세상으로 나온, 특별한 기술도 없고 체력도 형편없는 스물 몇 살의 남자’로 칼을 배달하는 일을 하다 단골의 제안으로 단골의 아버지인 72세 노인의 말상대이자 밤의 시간을 지키는 일을 한다. 「리몬컨이 필요해」의 떠돌이 강사인 ‘나’는 결혼도 했고 ‘아직 기회가 오지 않은 거라고 희망을 붙들 수 있는’ 마흔이 넘었지만 밥벌이를 걱정하는 떠돌이 강사일 뿐이다.「칼」의 노인은 아들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에, 그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에 칼을 품고 산다.

 

불안한 현실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고 싶은 열망을 만들고, 집이 아닌 여관에서 살게 했다. 「리모컨이 필요해」의 ‘나’와 「이미, 어디」의 ‘그’, 「어디에도 없는」의 ‘그’는 각각의 사연으로 여관에 머문다. 여관방의 TV는 새벽 5시면 저절로 켜졌고 ‘나’는 잠을 설쳤다. 리모컨이 필요했으나 여관방에는 없었다. 선배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는 틈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기억이 끊긴 후 여관방에서 깼을 땐 옆자리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5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애들에게 밥 해주고 학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떠남은 버거운 현실의 연장이었다. 여자가 현실의 존재인지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현실과 환영이 구분 안 되는 건 「어디에도 없는」의 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시직을 전전하던 그는 다른 대륙의 대도시에서 초밥집을 하는 외삼촌으로부터 일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변수가 많고 예측불가능한 비자 업무’와 여관 종업원과 여관 주인의 우편물 미정리 사태로 인해 뒤늦게 비자를 받는다. 이젠 떠날 수 있다 확신하지만 집행관이 찾아온다. 5년 전, 술에 취해 옆자리 손님과 시비가 붙었고 합의를 하지 못해 형기를 살았는데 행정착오로 형기가 남은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여기’ 없는데, ‘여기’의 삶은 여전히 나를 붙잡는다.

 

「이미, 어디」의 ‘그’는 ‘회사와 사회로부터 그런대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어느 날, ‘끔찍한 것들’이란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끔찍한 것’들의 실체는 가족이었다. 그는 새로 살고 싶은 갈망이 깊어져 이미의 삶을 정리했다. ‘저기’로 데려갈 사람에게 연락이 끊겼지만, 그는 이미에서 없는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여기로 오게 되었다. 이미에서 없는 사람, 저기로 갈 수 없는 그의 삶은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는 지금 여기 있지만 여기 없는 상태에 놓인다.     

 

표제작인 「신중한 사람」의 Y는 ‘자기만의 완전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의도와는 다르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외국으로 떠나면서 ‘친절한 이웃’에게 집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집을 넘기고 사라졌다. 그는 집주인이지만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 집으로 들어갔다. ‘저기’의 삶을 원했고 ‘여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저기’의 삶은 ‘여기’가 되지 않았다.    

 

「오래된 편지」는 J선생의 집필실을 정리하는 일을 맡은 윤의 이야기이다. 단정하고 꼼꼼한 성격의 J선생은 유고 시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J선생은 30년간 건강을 지켜주었던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고, Y는 20년도 넘게 갈망했던 집의 망가진 모습을 봐야 했다. 윤은 선생이 젊은 여자와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것은 윤이 J선생을 존경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좋아하게 만들었다. 윤은 ‘뜨거웠지만 그 뜨거움은 자기를 연료로 해서 타는 뜨거움’의 시절 J선생에게 익명으로 보낸 일종의 고발장인 ‘오래된 편지’를 보냈다. 집필실을 정리하다 선생이 ‘욕심내고 있다고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107쪽)’라고 습작품에 대한 첨삭처럼 답을 달아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삶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삶이 언제나 옮은 건 아니며, 부정한다고 해서 삶의 전부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가끔 세상이 기우뚱했지만 그럴 때면 몸을 반대 방향으로 약간 기울여 중심을 잡았다.(「신중한 사람」, 76쪽)

 

이승우의 문장은 삶의 모호성만큼이나 명확하지 않고 부연이 많다. 이승우는 칼 하나를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어설픈 희망도, 삶의 포기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려는 의지이다. 훗날의 삶을 바라며 현재의 삶을 견디는 일은 숭고한 일이며,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이상에서 멀어져 밥을 걱정하는 삶이라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지난날이 후회스럽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당황스럽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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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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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꾸민 이야기지만 그 속엔 ‘나’ 혹은 ‘너’의 ‘인생’이 있다. ‘나’는 ‘너’가 될 수 있고, ‘너’는 ‘나’가 될 수 있기에 소설은 ‘나’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성석제의 신작 장편 『투명인간』은 투명인간인 ‘나’가 한때 ‘자살 대교’라는 오명이 있었던 마포대교에서 자신처럼 투명인간인 김만수를 엿보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투명인간을 볼 수 없다. ‘나’는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복장을 빌려 보통의 사람 모습을 갖췄다. 투명인간인 ‘나’가 원하는 삶은 보통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다.

 

투명인간인 ‘나’가 투명인간인 만수를 엿보는 이야기로 시작한 소설은 세 아이를 낳은 후 머리가 유난히 큰 만수를 낳느라 고생한 또 다른 ‘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다음은 만수를 낳은 시어머니 ‘나’가 남편이 사상범으로 몰린 후 고생 끝에 가족이 개운리로 들어가 살게 된 이야기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난’이란 단어로 설명되는 만수를 포함한 6남매의 개운리 삶과 학교생활이다. 남매는 성장하면서 학교와 직장을 핑계를 집을 떠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의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런 60,70년대를 살아온 이들의 삶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아버지와 나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맏이였다. 그리고 맏이를 잃었다. 아버지와 나는 같았다. 황소울음 같은 소리가 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죽은 아들이 내 몸속에서 같이 우는 것 같았다. 옆에서 엎드리고 있던 만수가 따라 울기 시작했다. 만수의 울음은 온 식구가 소리 높여 울게 하는 신호가 되었다. 울음과 눈물로 집이 떠나갈 듯했다.(167쪽) 

 

집안의 기둥이었던 장남 백수는 대학에 다니다 월남에 참전한 후 고혼이 되었다. 이야기는 ‘나’의 시점에서 펼쳐지는데 여기서 ‘나’는 한 사람의 ‘나’가 아닌 가족과 이웃 각각의 ‘나’이다. 간당간당하게 이어져 오던 삶은 ‘맏이’를 잃으면서 휘청거렸다. ‘맏이’의 삶은 만수가 이었다. 6남매 인생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만수는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투명인간도 사람이고 투명인간이 되고 난 뒤에도 보통의 세상처럼 해도 되는 일, 안되는 일의 한계가 있더라. 우리는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364쪽)

 

아내는 신장 투석을 해야 했고, 키운 아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었다. 사회는 선한 삶, 성실한 삶보다는 이기적인 삶을 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살기엔 너무도 위험하다. 투명인간의 삶으로 사는 것은 인간 자체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투명인간에겐 곳곳이 위험이다. 세상에는 투명하지 않은 인간이 많고 그들의 눈엔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씁쓸하지만 인간의 외양을 갖추고 투명하지 않은 인간인 척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다행히 만수네 가족에겐 사랑이 있었다. 그것은 만수네 가족의 삶이 대대로 이어져온 힘이었다.

 

내게 『투명인간』은 ‘나’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읽혔다. 그 속엔 현대사를 살아온, 아니 버텨온 그리고 생을 이어온 가족과 이웃들, 수많은 ‘나’들이 존재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들로 이어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담겨 있었다. 굴곡의 현대사를 통과해온, 인간의 삶을 살고 싶었던 가족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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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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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시작됐고, 아니 중반이 지나가고 있다. 말복과 입추가 지났고 날은 좀 선선해졌다. 무더운 날씨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상황들에 인해 느리게, 조금씩 나눠 읽었다. 읽은 책 중의 한 권은 『기 드 모파상』이다. 모파상의 소설 중 확실히 기억하는 건 유명한 단편 「목걸이」뿐이다. ‘여자의 일생’으로 기억하는 『여인의 일생(『기 드 모파상』 표기)』은 제목만 기억날 뿐이다. 읽은 것인지 제목만 기억하는 것이지 모호하다.

 

모파상이 쓴 300여 편의 단편 중「비곗덩어리」외 62편이 실려 있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연애를 시작한 지해수와 장재열은 서로에 대해 딱 좋아, 라고 말했다. 이 책은 느리게, 조금씩 나눠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질릴 만하면 이야기는 끝났고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고 지루할 만하면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때문에 웃음이 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파상이 보불전쟁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쓴 「비곗덩어리」는 ‘매춘부’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들의 위선이 담겨 있었지만, 「시몽의 아빠」는 아빠 없이 엄마와 함께 산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 아이의 아빠가 되어 주는 대장장이 필리프 레미의 이야기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였다.

 

모파상의 소설들은 반전이 있는 작품이 많았다.「어느 농장의 아가씨」는 이야기의 전개상 비극적 결말로 끝날 걸로 예상했는데 짐작과 달리 해피엔딩이었다. 이들 이야기 속에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비애가 담겨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사랑과 결혼, 전쟁과 공포,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쓰라린 경험과 웃음 짓게 하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도둑」을 비롯하여 어떤 작품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들은 당신들은 믿지 못할 거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지. 하지만 내 이야기가 조금은 황당무계하게 들려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임을 먼저 밝혀 두겠소. 사회 풍속을 묘사하는 작가들만이 놀라지 않을 거요. 또한 무척 진지한 상황에서도 장난질할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익살스러운 정신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를 살았던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놀라지 않을 거요.”(「도둑」, 161쪽)    

모파상의 소설은 진지함과 유머가 공존했다. 독자의 입장에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순박한 인물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미망인」은 열세 살짜리 소년의 미망인으로 남은 노처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선 감상에 빠진 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겐 평생의 슬픔일 수 있는 일이다. 모파상은 「의자 고치는 여자」와 「여행」을 통해서도 사랑할 줄 아는 건 여자들뿐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사랑의 시작이 기대되는 「봄」에선 결혼을 부정하며 연애를 말리는 방해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니,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사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그리고 그날 밤 언니의 진정한 애인은 달빛이었던 것 같아.”(「달빛」, 213쪽)

 

「기발한 대책」 역시 결혼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만날 수 있다. 모파상이 사랑에 대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을지도.

 

모리소가 덧붙였다. “왕이 있으면 밖에서 전쟁을 하고, 공화국을 세우면 안에서 전쟁을 하지.”(「두 친구」, 290쪽)

 

「비곗덩어리」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보불전쟁 경험이 담긴 「두 친구」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소바주는 자유롭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지만, 전쟁만 지속하는 삶은 결코 인생이 아니다. 희망 없는 삶은 인생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와 아들을 대신하여 적군을 죽이고 죽어간 「밀롱영감」과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소바주 아주머니」의 사연은 슬픔을 넘어 비통이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쥘 삼촌」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피에로」라는 개를 길렀던 여자의 이야기는 개를 기르는 사람이 많은 이 시대에 관심 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고, 「목걸이」같은 이야기는 물질에 욕망을 두는 한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130여 년 전에 쓰인 모파상의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장편소설이거나 중편에 가까운 단편이었더라면 무더운 날씨가 아니더라도 800쪽에 가까운 책은 읽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많은 단편이 실려 있다 보니 뒤의 단편을 읽다 보면 앞의 단편을 잊기도 했지만 말이다.

 

43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기 드 모파상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인생의 온갖 것들을 탐했으나 그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10년이라는 짧은 창작기간에 비해 많은 작품을 창작한 모파상, 그의 부지런함은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은 인생의 온갖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자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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