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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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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는 (THE SENSET LIMITED)는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시속 130킬로미터로 달리는 급행열차다. 느린 삶을 갈망하지만 한편엔 조급함이 있다. 나만 낙오자가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다.

 

『선셋 리미티드』는 ‘안전하고 않은 곳’에서 목사 일을 하는 흑인과 플랫폼으로 뛰어들려다 흑인 때문에 실패한 백인 교수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작가인 코맥 맥카시는 이 소설에 대해 ‘극 형식의 소설’이라고 칭했다.  한 남자는 달리는 급행열차로 뛰어들려다가 또 다른 남자에 의해 구조된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장면으로 표현되었을 텐데 『선셋 리미티드』에선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전개된다. 그들의 지칭하는 단어는 이름이 아닌 ‘흑’과 ‘백’이다.

 

흑과 백은 피부 색깔,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이나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랐다. 흑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지만 백은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흑에게 신은 자신을 눈여겨보는 사람이지만 백에겐 신이란 관념 자체가 쓰레기였다. 이들의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보면 어떤 소설의 결론들, 누군가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말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픔이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대화 속에서 자주 길을 잃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은 흑과 백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나의 경우 흑과 백 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 가끔은 그 모호함이 질린다. 삶은 어느 쪽이든 고통이라 생각한다. 이건 백인 교수의 생각이니 나는 백의 의견에 가까운 걸까.

 

모르겠어. 그냥 기차가 어서 자기를 쳐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마음에 뭔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따귀나 한 대 갈겨주는 걸로 정리가 될 거야. 선생은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걸 안 믿어. 나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절대 믿지 않아. 선생이 붙들고 있는 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아니면 내가 그것을 표현할 말을 모르는 거거나. 어쩌면 선생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걸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잘난 도약을 했을 때 선생은 뭔가를 붙들고 있었고 그걸 가지고 뛰어내린 거라고 믿고 싶어. 교수 선생. 말이 선생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말을 찾는 거야.(122쪽)

 

소설의 등장인물은 백과 흑,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들려는 사람과 구한 사람이지만, 흑의 말처럼 세상에는 선셋 리미티드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백이 보기에 선셋 리미티드를 타려는 사람들은 불행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지만, 흑의 말처럼 그들의 선택은 특별한 일일 수 있다. 달의 시간이 아닌 해의 시간을 살고자 한다는 건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뜻이므로.

 

빛이 선생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다만 선생님 어둠밖에 보지 못할 뿐이다. 그 어둠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이 그 어둠을 만드는 것이다.(114쪽)

 

백은 왜 급행열차의 플랫폼으로 뛰어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절망적이게 했을까?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백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세상이 원한 것은 습득과 경쟁이었다. 그는 삶의 회의 속에 빠졌다. 그의 선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였다. 사람마다 삶의 가치는 다른 법이니 그의 선택을 인정하지만 옹호하진 않는다. 나에겐 빛은 있는데 어둠만 본다는 흑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가 졌고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어제의 시간은 지나갔고 오늘이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해도 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해는 뜨고 지기를 반복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한 번 지면 영원히 끝이다. 두 번은 없다.

 

사실 해가 진다는 생각은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해의 입장에서 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어둠과 빛 한쪽만 보는 건 위험하다. 균형적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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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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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한 꿈일지도 모른다. 영웅의 삶을 꿈꾼다는 건. 영웅이고 싶었던, 영웅의 삶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에드 리모노프라 불렀다. 본명은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이다. 리모노프는 그가 뾰족하고 전투적인 자신의 성격을 고려해 작명한 필명이었다.

 

에두아르드는 러시아 작가이자 정치가로 실존 인물이다. 『리모노프』는 특유의 저널리즘 글쓰기로 인정받은 현대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한 소설이다. 소설 속 ‘나’는 ‘리모노프는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던 야만과 불량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에게 열광했다’고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우리는 도덕 혹은 윤리라는 테두리에 스스로를 억압하고 살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에두아르드의 부모는 1942년 소련이 참패를 거듭하던 참혹한 5월 그를 잉태했다. 그는 독일 제6군의 항복으로 양쪽 군대의 운명이 뒤바뀌기기 20일 전인 1943년 2월 2일 우크라이나 NKVD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른들은 그에게 ‘너는 승리의 아이다. 스탈린의 이름을 딴 이 도시를 적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목숨을 바친 남녀 인민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너는 노예의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두아르드가 영웅을 꿈꾸었던 건 그의 부모가 그를 잉태했을 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비극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가 아니라 사소한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평화로운 도시에서 그가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도시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다른 곳으로 떠났을까? 설사 그렇더라도 그가 겪은 정도의 파란만장한 삶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 인간이 다 겪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심했다. 

 

소설은 에두아르드의 삶과 작가인 ‘나’가 본 에두아르드의 이야기 두 방향으로 전개된다. ‘나’가 에두아르드의 이야기를 글로 쓰려는 이유,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 에두아르드의 삶을 추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리모노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의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치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세면대에 얽힌 일화를 별생각 없이 재밌게 듣고 나서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메시지가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무엇일가? 그것을 찾고 싶어 나는 이 책을 시작한다.(38쪽)

 

‘나’가 평한 대로 에두아르드는 ‘질투심이 강하고 안하무인인 주인공’이고 ‘무명으로 죽는 것이 괴로울 뿐’인 사람이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소수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지 아무 곳에서나 돌출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영웅이 되는 인생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가 좋아하는 에두아르드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어디서도 길을 헤매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타인들을 향해 가고, 타인들이 나를 향해 온다. 자연스럽게 맺어진다.>475쪽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개떡 같은 인생’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사생활은 마음에 들지 않고 정치적인 행보에 대해선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관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궁금한 것은 그다음 이야기이지만 소설에선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어린 에두아르드는 흠모했던 아버지가 ‘정직하지만 다소 어리석은, 안쓰러운 존재로 비치’‘자유롭고 위험한 삶’을 살기고 결심했다. 그것이 진정 남자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에두아르드는 자신의 인터넷을 찾는 방문자의 수가 경쟁자인 카스파로프보다 많은 게 그저 좋을 뿐인 노인이 되었다. 원고료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가 애쓰며 사는 생이란 거 별거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의 생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삶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길을 나서는 것과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기다리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선 안 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한 소설이었다. 익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소련 해체 후 혼란의 러시아를 살았거나 러시아 정치 중심에 있던 실존 인물들이었다. 이름 사이에서 때때로 길을 잃었다. 러시아 현대사가 궁금하거나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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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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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일화를 떠올렸다는 말에는 지금의 나는 나이 먹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건 즐거운 일일까. 슬픈 일일까. 모르겠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지나온 그 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당신도.

 

청춘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청춘을 지난 지금도 그러하다. 언제쯤 명확해질까. 삶의 교차로에 헤매는 시기는 스무 살인지 알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교차로에서 헤맨다.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완료가 아닌 진행형이다.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는 증발했고 어떤 이야기는 가물거린다. 내 기억들은 오해와 착각이 만든 잘못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불명확한 기억은 답답함과 다행 사이를 오간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91쪽)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에서 60대의 소설가 보스망스는 40년 전의 과거, 스무 살의 시간으로 ‘퍼즐의 모자란 조각’들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는 ‘잘못된 만남’이었던 부아야말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녀와 고통에 빠트렸던 어머니와 환속 신부로 벗어나려던 자신이 있었다.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 없었던 두 사람이, ‘언제나 통과 중, 그리고 경계 중’이었던 그들이 그 시절에 만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건 때로 삶을 견디는 힘이 된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그들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다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고통 혹은 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청춘이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경험들은 안개 뒤에 희망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지웠다.

 

점점 타인의 고통(슬픔)을 만나는 일이 겁이 난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때때로 지평을 기대했던 그 시간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그 시절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보다 시시하거나 가볍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의 고통은 때로 현재를 견디게도 한다. 그 시절도 지나왔는데 이런 일쯤이야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통과 고통이 만나 희망이 되는 것은, 혹은 슬픔과 슬픔이 만나 지평이 되는 것은 청춘에게나 가능하다. 미래라는 시간이 있는. 그땐 잘 모른다. 자신들에게 미래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도 그랬다. 그들은 현재 속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벗어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루한 현재에 갇힌 나이 든 어른들과 달리.

 

드라마 <힐러>에서 20대 정후가 90년대 20대를 보낸 문호에게 ‘사장님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나 역시 생각이 많다. 도대체 언제 행동할 건지. 생각하는 것, 기억하는 것만으로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보스망스가 마르가레트의 삶이 만난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그 기억은 보스망스의 삶을 지배했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의 미래를 현재로 사는 보스망스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보스망스는 좀, 아니 많이 설레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내가 이토록 설레니 말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혹은 잊었다 해도 서운함보단 반가움이 들 것 같다.

 

『지평』은 두 번째 읽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다. 그에게 기억의 퍼즐을 찾는 일은 삶을 지배하는 과제인 모양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혹은 이것저것 재고 만나는 관계에 익숙해선지 그의 사랑이 신선했다. 아마도 그녀는 그를 알아보진 못해도 잊진 않았을 것이다.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를 함께 선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기에. 삶의 행로의 어느 순간 포개졌던 이들이 떠오른다. 당신들, 잘 지내고 있기를! 그땐 정말 고마웠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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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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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상식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이발사」의 이발사와 손님들처럼 말이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상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어찌 그들뿐일까. 「숲의 전망」의 메리 포천에게 상식은 땅을 팔아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지만, 그의 손녀에게 상식은 땅을 팔지 않고 숲의 전망을 보거나 잔디밭에 송아지들이 풀을 뜯어 먹게 하는 것이다. 경청과 설득을 통한 조율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빈틈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들의 믿음의 벽은 너무도 단단하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이름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만 39세(1925.3.25-1964.8.3)에 루프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유전병이었다.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장편 소설 2편과 단편 소설 서른두 편을 발표했는데 『플래너리 오코너』에는 서두에서 언급한「이발사」를 포함하여 서른 편이 실려 있다.

 

「이발사」의 이발사와 손님들, 그리고 일하는 흑인조차 검둥이는 부리는 대상이라는 사고를 지녔다. 「제라늄」의 더들리 영감이나 「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의 사고도 다르지 않다.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의 줄리언 어머니에게 흑인은 동정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변했고, 사는 곳도 달라졌지만, 검둥이는 하인이라는 사고가 뿌리박혀 있었다. 잘못된 생각일수록 더 단단히 박힌다. 줄리언 어머니의 친절은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사고에서 기인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인물들이 흑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부리는 대상으로 여겨 멸시하거나 불쌍히 여겨 친절을 베풀거나.

 

 「제라늄」의 ‘제라늄’은 떠나온 고향을 상징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한 가지뿐이다. 흑인들과 부딪히며 사는 것 그리고 세상이 변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사는 곳은 감옥이 된다. 『플래너리 오코너』에는 자유로워진 흑인들로 인해 혼란에 빠진 백인들이 등장한다. 고용인은 피고용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매킨타이어 부인의 불행은 폴란드에서 탈출해 온 귀작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판단은 때로 상대적이다. 흑인에게 자유는 마땅한 일이지만, 그들을 하인으로 생각했던 백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공포다. 「제라늄」의 더들리 영감이 흑인들과 부딪히는 삶을 두려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랜 시간 그것은 그의 삶이 아니었다. 「살쾡이」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게이브리얼 영감에게 살쾡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행운」의 루비에게 임신은 공포다. 그녀가 어머니의 임신을 보며 느낀 것은 임신은 ‘죽음을 쌓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 아기의 탄생은 삶의 행운이기도 하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은 보이는 것,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는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이녹과 고릴라」의 이녹 에머리는 스타 고릴라처럼 유명해지고 싶었다, 우연한 행운으로 고릴라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믿는, 오만 혹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이녹 에머리는 「감자 깎는 칼」, 「공원의 중심」, 「이녹과 고릴라」에 등장한다. 작가는 이녹 에머리라는 이름에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에서 할머니의 거짓말은 가족을 파국으로 몰았다. 옛집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잘못된 기억을 만들었고 가짜 이야기를 만들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인물들 중엔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루시넬 크레이터나 「강」의 해리처럼 삶의 구원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 처지에서 귀가 멀고 평생 말을 해본 적 없는 딸을 위해 선택한 거짓말이었지만 결과는 비극이었다.

 

「좋은 시골 사람들」은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장애를 가진 딸을 둔 엄마와 모녀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는 나쁜 남자가 접근한다. 모녀가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들의 거짓말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남자들이 그녀들의 거짓말을 몰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들의 거짓말은 눈에 보이는 거짓말, 딸들의 나이를 대폭 속이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호프웰 부인은 딸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르고 성경 외판원에게 순진하다고 말한다. 프리먼 부인은 “어떤 사람은 순진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요. 나는 일단 불가능해요.”라고 말했다. 「가정의 안락」의 토머스의 어머니는 스타를 좋은 아이라고 믿고 선을 베풀었다가 가정의 파멸을 겪는다. 「절름발이가 올 것이다」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나의 선(善)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일 수 있다. 선한 행동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드라마 <펀치>의 인물들은 누가 더 나쁜가,를 두고 경쟁한다.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악과 더 나쁜 악의 싸움이다. 선이 악을 이기는 일은 판타지다. 현실은 더 센 악이 이긴다. 악을 이기려면 내가 괴물이 되어야 하는 현실. 순진하지 않는 세상을 살려면 순진하지 않게 살아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고 싶지 않지만 진실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으면서 느낀 건 일종의 공포였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흑인, 종교, 질병에 관심을 가졌다.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은 ‘구원’은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혹은 행동했지만) 그(혹은 나)는 늘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내 선택과 행동으로 누군가(혹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리석음이었다. 아버지에게로 이어져온 루프스라는 병, 50-60년대 미국의 시대적 혼란이 작가로 하여금 불신과 공포를 갖게 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구원’을 고민했다는 건 치열하게 삶을 고민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작가의 단편 중 「죽은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라는 단편이 있다. 투병생활을 하며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어쨌든 행운이라고.

 

내 경우 단편은 장편보다 읽기가 어렵다. 잠시 딴생각을 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31편의 단편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비슷한 소재들이 많아 때때로 기시감도 느꼈다.

 

눈이 펑펑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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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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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있다. 아이의 십자가가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보다 결코 가벼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년의 나이였을 때 적어도 그녀의 눈빛에선 그런 서늘한 절망과 외로움은 없었을 테니까.(97-98쪽, 「파충류의 밤」)

 

사람들은 저마다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있다는 것, 나만 힘든 건 아니라는 사실은 위로가 된다.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리면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천명관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초라한 인생’이며 ‘고립된 존재들’이다. 회사원, 유명 작가, 출판 기획자, 막노동꾼, 귀농 농부, 대리기사로 직업이 다름에도 그러하다. 「동백꽃」의 여인들처럼 그들도 섬에 갇혔다. 운명과 고단한 현실은 그들을 고립시켰다.

 

「봄, 사자(死者)의 서(書)」에선 죽은 존재임에도 완전히 세상을 떠나지 못한 사내가 등장한다. 사내의 죽기 전 삶은 ‘겨울’이었다. ‘영혼을 빼앗긴’ 좀비의 삶이었다. 삶에 희망이 없기는「동백꽃」의 여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섬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경숙과 유자가 우정을 버리고 경쟁적으로 선주의 아들 동엽을 유혹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만이 ‘남자 없이 평생 물질이나 하며 늙어가’는 어머니들의 삶을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거나 뒤늦게 알아버린 진실로 동엽의 아내가 되지 못했다. 인생이 꼬인 것은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핑크」의 목도리와 패딩 점퍼가 모두 핑크인 뚱뚱한 여자는 엉뚱한 데서 고양이가 튀어나오고 트렁크 문이 열리는 바람에 계획을 바꿔야 할 상황에 부닥친다.

 

「봄, 사자(死者)의 서(書)」의 사내는 「파충류의 밤」 속 부장의 삶과 겹친다. 죽기 직전, 그들은 가족과 헤어져 혼자 살았다. 사내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쉰일곱의 육체노동자 경구의 삶과도 겹친다. 두 사람 모두 이혼했고, 이혼 전 살았던 곳은 스물네 평짜리 아파트였고 가족과 같이 사는 동안 소통이 부재했다. 공자는 오십 세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고 했지만 그들의 오십 생은 안갯속이었다.

 

「핑크」의 대리기사는 ‘핑크’에게 아내와 헤어진 것은 자신이 푼수를 몰랐던 잘못이라고 말했다. 「전원교향곡」의 정환은 포도 농사를 하며 전원에서 살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아내는 아이들과 떠났다. 정환이 실패한 것은 삶의 푼수를 몰랐기 때문일까. 포도 농사를 짓지 않았다면 정환의 삶은 평탄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들의 무덤」의 정희는 오십이 안 된 나이였고 유명 작가였고 육십오 평 아파트에 살았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속 다른 인물들에 비해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내면의 삶은 암울했다. 그녀는 진짜 삶을 외면하며 거짓 이미지로 살았다. 그녀는 왕들의 무덤을 가는 길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스스로 봉인한 삶과 만난다. 아마도 앞으로의 그녀는 진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파충류의 밤」의 수경 역시 정희처럼 오십이 코 앞이었다. ‘잠으로 가는 길이 멀’었던 그녀는 몇 년째 불면의 이유를 찾고 있었지만 찾지 못한 상태다. 수경은 ‘서늘한 절망과 외로움’을 지닌 소년과 만나고 그의 자살 시도를 막음으로써 비로소 불면의 이유를 알게 된다. 과거 ‘고귀한 생명’을 버렸던 그녀의 기억이 그녀의 잠으로 가는 길을 막았던 것이다.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182-183쪽, 「우이동의 봄」)

 

고단한 일상으로 진이 빠졌고 아무리 먹어도 회복되지 않았다. 아, 몸무게는 늘었다. 소설집을 읽는 사이 회복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됐다. 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유난을 떨었다. 삶의 종착지는 하나인데 우린 왜 아등바등 살아가는 걸까. 기간을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의 삶을 산다. 예외는 없다.「우이동의 봄」에서 ‘나’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와 손자는 비관의 날들을 보내느라 함께 꽃비 내리는 봄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까짓것.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인생 뭐 있나? 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110쪽,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우라지게 추운 날’을 견디고 만난 봄은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만난 봄보다 찬란하다. 아니 찬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간당간당한 생이라도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날이 추워졌으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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