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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평점 :
‘상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상식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이발사」의 이발사와 손님들처럼 말이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상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어찌 그들뿐일까. 「숲의 전망」의 메리 포천에게 상식은 땅을 팔아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지만, 그의 손녀에게 상식은 땅을 팔지 않고 숲의 전망을 보거나 잔디밭에 송아지들이 풀을 뜯어 먹게 하는 것이다. 경청과 설득을 통한 조율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빈틈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들의 믿음의 벽은 너무도 단단하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이름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만 39세(1925.3.25-1964.8.3)에 루프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유전병이었다.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장편 소설 2편과 단편 소설 서른두 편을 발표했는데 『플래너리 오코너』에는 서두에서 언급한「이발사」를 포함하여 서른 편이 실려 있다.
「이발사」의 이발사와 손님들, 그리고 일하는 흑인조차 검둥이는 부리는 대상이라는 사고를 지녔다. 「제라늄」의 더들리 영감이나 「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의 사고도 다르지 않다.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의 줄리언 어머니에게 흑인은 동정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변했고, 사는 곳도 달라졌지만, 검둥이는 하인이라는 사고가 뿌리박혀 있었다. 잘못된 생각일수록 더 단단히 박힌다. 줄리언 어머니의 친절은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사고에서 기인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인물들이 흑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부리는 대상으로 여겨 멸시하거나 불쌍히 여겨 친절을 베풀거나.
「제라늄」의 ‘제라늄’은 떠나온 고향을 상징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한 가지뿐이다. 흑인들과 부딪히며 사는 것 그리고 세상이 변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사는 곳은 감옥이 된다. 『플래너리 오코너』에는 자유로워진 흑인들로 인해 혼란에 빠진 백인들이 등장한다. 고용인은 피고용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매킨타이어 부인의 불행은 폴란드에서 탈출해 온 귀작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판단은 때로 상대적이다. 흑인에게 자유는 마땅한 일이지만, 그들을 하인으로 생각했던 백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공포다. 「제라늄」의 더들리 영감이 흑인들과 부딪히는 삶을 두려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랜 시간 그것은 그의 삶이 아니었다. 「살쾡이」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게이브리얼 영감에게 살쾡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행운」의 루비에게 임신은 공포다. 그녀가 어머니의 임신을 보며 느낀 것은 임신은 ‘죽음을 쌓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 아기의 탄생은 삶의 행운이기도 하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은 보이는 것,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는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이녹과 고릴라」의 이녹 에머리는 스타 고릴라처럼 유명해지고 싶었다, 우연한 행운으로 고릴라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믿는, 오만 혹은 편견일지도 모른다. 이녹 에머리는 「감자 깎는 칼」, 「공원의 중심」, 「이녹과 고릴라」에 등장한다. 작가는 이녹 에머리라는 이름에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에서 할머니의 거짓말은 가족을 파국으로 몰았다. 옛집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잘못된 기억을 만들었고 가짜 이야기를 만들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인물들 중엔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루시넬 크레이터나 「강」의 해리처럼 삶의 구원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 처지에서 귀가 멀고 평생 말을 해본 적 없는 딸을 위해 선택한 거짓말이었지만 결과는 비극이었다.
「좋은 시골 사람들」은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장애를 가진 딸을 둔 엄마와 모녀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는 나쁜 남자가 접근한다. 모녀가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들의 거짓말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남자들이 그녀들의 거짓말을 몰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들의 거짓말은 눈에 보이는 거짓말, 딸들의 나이를 대폭 속이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호프웰 부인은 딸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르고 성경 외판원에게 순진하다고 말한다. 프리먼 부인은 “어떤 사람은 순진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요. 나는 일단 불가능해요.”라고 말했다. 「가정의 안락」의 토머스의 어머니는 스타를 좋은 아이라고 믿고 선을 베풀었다가 가정의 파멸을 겪는다. 「절름발이가 올 것이다」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나의 선(善)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일 수 있다. 선한 행동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드라마 <펀치>의 인물들은 누가 더 나쁜가,를 두고 경쟁한다.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악과 더 나쁜 악의 싸움이다. 선이 악을 이기는 일은 판타지다. 현실은 더 센 악이 이긴다. 악을 이기려면 내가 괴물이 되어야 하는 현실. 순진하지 않는 세상을 살려면 순진하지 않게 살아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고 싶지 않지만 진실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으면서 느낀 건 일종의 공포였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흑인, 종교, 질병에 관심을 가졌다.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은 ‘구원’은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혹은 행동했지만) 그(혹은 나)는 늘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내 선택과 행동으로 누군가(혹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리석음이었다. 아버지에게로 이어져온 루프스라는 병, 50-60년대 미국의 시대적 혼란이 작가로 하여금 불신과 공포를 갖게 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구원’을 고민했다는 건 치열하게 삶을 고민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작가의 단편 중 「죽은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라는 단편이 있다. 투병생활을 하며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어쨌든 행운이라고.
내 경우 단편은 장편보다 읽기가 어렵다. 잠시 딴생각을 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31편의 단편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비슷한 소재들이 많아 때때로 기시감도 느꼈다.
눈이 펑펑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