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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2015년 대한민국의 6월을 상징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는다면 메르스일 것이다. 그것은 내 발밑까지 왔었다. 내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진찰과 검사를 받는 외래환자시다. 아버지는 확진환자가 나오기 직전 병원을 다녀오셨다. 우리 집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 병원에선 확진 환자가 나왔다. 그 환자는 내가 산책을 가는 공원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았다.
1944년 뉴어크의 6월은 폴리오가 지배했다. 『네메시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다. 1933년 생, 올해 나이는 만82세인 필립 로스는 몇 년 전, 더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적어도 작가라면, 글을 그만 써야 하는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쓴다고 다 글은 아니다.
‘네메시스’를 『후-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에서 찾아보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근거하여 ‘밤의 딸로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뒤러의 동판화 《네메시스》가 실려 있는데 설명은 이렇다.
네메시스는 세상의 정의를 심판한다는 신탁의 모습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왼손에든 쇠사슬로 연결된 가죽끈은 심판자의 엄격함과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메르스와 폴리오를 퍼뜨린 신의 뜻은 무엇일까. 제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일까?
“앨런한테 옮아서 이제 자기들도 폴리오에 걸릴 거라고 겁을 먹고 있는 거요. 부모들은 히스테리에 걸렸소. 아무도 어째야 할지를 몰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거요? 나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소. 우리보다 깨끗한 가족이 있을 수 있소? 아이들의 행복에 그녀보다 관심을 쏟는 어머니가 있을 수 있었겠소? 앨런보다 자기 방과 옷과 몸을 잘 돌보는 아이가 있을 수 있었겠소? 그애는 뭘 하든 처음부터 제대로 했소. 그리고 늘 행복했고. 늘 농담을 했고. 그런데 왜 그 애가 죽은 거요? 이게 어디가 공정한 거요?”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말했다.
“오직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만 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사려 깊은 사람, 합리적인 사람, 남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 인생 어디에서 양식良識을 찾아야 하는 거요?”
“찾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대답했다.
“정의의 저울은 어디 있는 거요?” 가련한 남자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마이클씨.”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대답했다.
“왜 내가 아니라 그 애인 거요?”
캔터 선생님은 그런 질문에는 전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52~53쪽)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주는 경고라면 마이클스의 말대로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걸까. 신의 심술 앞에 인간은 그저 인생은 복불복이라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 답은 아마도 메르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생각한다. 초기 대응을 잘 했더라면? 물론 지나간 삶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네메시스』는 폴리오의 시간을 견딘 두 남자 버키 캔터와 아널드 메스니코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같은 비극을 겪었지만 삶을 지속하는 방식은 달랐다. 버키는 폴리오가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며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고 아널드는 새로운 삶을 찾았다.
두려움이 덜할수록 좋아.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게 자네 일이고 내 일이야.(110쪽)
사실 이 말은 제삼자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두려움이 자신을 타락시킬 것을 알지만 당사자가 됐을 때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내 아이에게 메르스를 옮겼다고 생각해 보자.
폴리오에 걸린 버키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폴리오를 전염시켰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폴리오의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라고 생각해 평생을 지옥에서 살았다. 지나친 면이 있지만, 비극의 늪에서도 삶의 끈을 놓친 않고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인데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자신의 늪으로 사랑하는 이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다. 세상에는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책임이 분명한데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 않던가. 그가 삶의 가치로 여긴 것은 '양심'이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구요.”(273쪽)
네메시스는 행복과 불행을 분배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뒤가 아주 구린 인물’인 아버지와 그에게 물려받은 나쁜 시력, 그리고 폴리오에 걸려 불구가 되고 또 폴리오를 옮긴 것 등 언뜻 버키는 불행이 많이 분배된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불굴의 정신을 심어준 할아버지, 그의 불구까지 감내하려 했던 마샤, 그리고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아널드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폴리오에 걸렸던 당시 버키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나는 바란다. 남은 그의 생은 행복하길. 이젠 책임의 돌을 내려놓길.
지난 6월에는 짐작조차 못 했던 일이 훅 들어 와 비틀거렸다. 비극의 생을 살다 바다가 가까운 남쪽 도시 중 한 곳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내게는 가깝지만 먼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가깝지만 먼’ 이란 문장의 모순을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몸은 아팠지만 병원은 두려웠고 마음이 힘들었지만 책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날들로 기억되길 바랐던 6월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6월에 비하면 7월은 고요한데 폭염을 핑계 대며 게으름을 피운다. 6월의 혼란 속에 미뤄뒀던 일들이 산적한데 하고 싶지가 않다. 다행인 건 그래도 책은 읽고 싶다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