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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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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비는 중간에 잠시 멎긴 했지만 오전까지 내렸다.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K를 만나 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가 시작했다. 본방은 못 보고 늦은 밤 재방송으로 봤다. 1988년 K를 만났다. 그러니깐 우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셈이다. 어떤 기억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랬었나, 할 뿐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문득 J가 그리웠다. 비와 곱창과 소주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했다. J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일은 J의 회사가 있던 시청역에서 약속이 있다. 은행나무 사이를 걸어 뛰어왔던 J가 떠오른다.

 

안개로 뒤덮인 영국의 어느 마을에는 ‘고립된 삶’을 사는 액슬과 비어트리스라는 노부부가 있었다. 노부부와 마을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의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왜 헤어져야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 아들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들은 안개가 걷히는 방법을 알아 기억을 되찾고 싶었고 아들을 만나길 원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로 만났다. 기억이 희미해 작성했던 리뷰를 읽어보니 두 소설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소설 모두 인생의 저녁을 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길을 떠났고 기억을 만났다.

 

“난 그 애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액슬이 말했다. “분명 모든 게 이 안개 때문일 거예요,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49쪽)

 

기억은 언젠가 소멸한다. 그렇다 해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들이 기억을 지운다면,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액슬에게 비어트리스가, 비어트리스에겐 액슬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바싹 붙어서 걸었고 액슬이 비어트리스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도 평원을 지나는 동안 비어트리스는 대여섯 걸음마다 한 번씩 위령 기도를 올리듯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이라고 물었고, 이에 액슬은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라고 대답하곤 했다.(52쪽) 

 

그들은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후에도 자주 등장한다. 안갯속 갇혔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공포였다. 공포를 견디게 하는 것은 다정한 목소리,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으면 어때?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데. 그들이 인정하듯 그들의 사랑은 강한데. 이렇게 생각하며 읽는데 이 질문을 만났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71쪽)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옆 사람이 목소리가 다정한 것은, 그의 손이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인, 당신은 이 안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나요?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에겐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 액슬과 저는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 순간들을 빼앗긴다는 건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것과 같아요.”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 잖아요?”

“그럼, 나쁜 기억은 두렵지 않은가요, 부인?”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234-235쪽)

 

나와 K 사이에, 나와 J 사이에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K를 만나는 건, 그럼에도 J를 그리워하는 건 27년 그리고 12년의 쌓인 시간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동일 아빠는 설움 많은 둘째 딸 덕선에게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런다.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지금의 나는 나쁜 기억에 대해 그들이, 그리고 내가 처음 겪는 일이라 서툴러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은 때로 아량을 선물한다.    

 

길을 떠난 사람들은 노부부뿐이 아니었다. 위스턴과 에드윈, 말 호레이스와 길을 떠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기억을 찾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암용을 없애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암용이 있는 거인의 돌무덤으로 가야 했다.

 

암용을 죽이느냐 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암용이 악이라면 지금 죽여도 필요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언제고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능력이 있어도 그는 그저 한낮 짐승일 뿐이다. 비극의 상징인 거인의 돌무덤에 갇힌 암용의 삶도 비극이었다. 암용은 악한 존재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가웨인의 말처럼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웠던 기억을 잃게 함으로써 평화를 주었다. 무서운 존재는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싸우지 않으면 삶을 지킬 수 없다고, 싸우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세뇌한다.

 

몸의 변화로 잊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잊거나 잘못 기억하게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비어트리스의 말처럼 삶은 어떤 모습이든 소중하기에. 비극의 기억은 떠올랐고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진 않지만, 남아 있는 나날이 해피엔드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길을 가는 노부부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내게 『파묻힌 거인』은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11월을 닮은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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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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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헌드레즈홀을 본 것은 열 살 때였다.(첫 문장, 11쪽)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 뇌리에 남아 생을 지배한다. 『리틀 스트레인저』의 ‘나’에겐 헌드레즈홀에 대한 기억이 그랬다.

 

에어즈 부인은 스물넷이나 스물다섯쯤이었고, 남편은 그녀보다 몇 살 더 많았으며, 딸 수전은 여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분명 무척 보기 좋은 가족이었겠지만, 그들에 관한 내 기억은 희미하다.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건 그 집 자체다. 내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완전무결한 대저택으로 보였다. 근사하게 낡은 그 집 구석구석이 생각난다. 빛바랜 붉은 벽돌, 물결 모양으로 굴곡진 창유리, 풍화된 사암 가두리. 덕분에 집은 약간 흐릿하고 불분명해 보였다. 이제 막 햇볕에 녹기 시작한 얼음 같다고 생각했다.(11-12쪽)

 

메이드가 살며시 복도 한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대담하게 그 반대쪽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엄청난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단순히 몰래 침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집 자체에 대한 전율이었다. 집의 외양 하나하나가 기가 막혔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바닥, 목제 의자와 장식장에 흐르는 고색창연한 빛, 비스듬히 뒤로 젖혀진 거울, 창들의 소용돌이 장식. 나는 먼지 하나 없는 새하얀 벽 쪽으로 뭔가에 끌리듯 나가갔다. 회반죽으로 도토리와 나뭇잎 모양을 본떠 가장자리를 장식한 벽이었다. 그런 건 교회의 외관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도토리 하나를 꽉 그러쥐고 틀에서 억지로 비틀어 떼어내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꽉 그러쥐고 틀에서 억지로 떼어내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주머니칼로 그 도토리를 파냈던 것이다.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짓궂거나 뭔가 때려 부수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단지 그 집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집의 일부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아니, 그토록 숭배하니까. 물론 좀더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내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갖고 싶어하는 남자의 심정이랄까.(13-14쪽)  

 

그 집엔 수전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지만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은 여자아이가 아닌 집 자체였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순전히 우연’으로 에어즈 가를 방문하게 된다. 소설의 화자인 ‘나’ 패러데이는 에어즈 가의 주치의인 데이비드 그레이엄에게 응급환자가 생겨 대신 갔다고 말했다.

 

“어머님께는 제발 말하지 말아주세요. 기억 못하실 겁니다. 그때 저는 쉰 명쯤 되는 무릎까지고 지저분한 꼬마 중 하나였는걸요.”

“하지만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99쪽)

 

‘나’가 우연히 헌드레즈홀를 방문했다는 말을 믿었다. 헌드레즈홀을 욕망했던 어린 시절, ‘리틀 스트레인저’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면서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왜? 그는 소설의 화자였으니까. 에어즈가에 불운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른 ‘리틀 스트레인저’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어린 나이에 죽은 에어즈가 무남독녀 수전이 혼령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고 다음엔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에어즈가 사람들의 나약한 마음이 환청이나 이상한 흔적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러다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에어즈 부인의 장례를 앞둔 ‘나’의 행동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캐롤라인을 위로하지 않고 지인들에게 캐롤라인과 결혼할 사이라고 밝히는 것에 급급했다. ‘나’의 목표는 사랑하는 캐롤라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캘롤라인과 결혼해 헌드레즈홀에 사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가졌던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결국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의 집요함이 두렵다. 그렇다면 그가 ‘리틀 스트레인저’일까? 대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이다.

 

소설은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한 영국 귀족 집안의 이야기를 그린다. 오랜 시간 안락을 보장했던 성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성 밖의 세상을 만나는 일은 두려움이다. 그들에겐 용기가 없었다. 그들을 몰락으로 이끈 ‘리틀 스트레인저’는 과거의 영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둠과 슬픔 속에 살았던 그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불안의 씨앗은 점점 커져 결국 그들을 잠식한 것이다. 어떤 면에선 친절한 의사를 조심하라, 그도 낯선 사람이다, 로 읽히기도 한다. 읽고 난 후 서늘함이 온몸을 감쌌다.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제목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동명의 영화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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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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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아래아한글 프로그램에서 국민학교를 치니 초등학교로 자동 교정되는데 내가 다닌 곳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이므로 국민학교로 적었다.)때 둘째 작은아버지 식구들은 미국에 이민을 갔다. 작은아버지는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훨씬 잘 살 거라고 확신하셨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비디오테이프가 도착했다. 그 속엔 외국 영화 속에서 봤던 푸른 잔디가 있는 넓은 마당과 차고가 있는 이층집이 있었다. 비디오테이프 속 작은아버지네 세 식구는 행복해 보였다. 나만의 방이 없었던 나는 넒은 방을 혼자 쓰는 사촌이 부러웠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10쪽)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나’ 계나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다. 유학이나 여행이 아닌 살기 위해. 한국이 싫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진 않은 건 그래도 말이 통하는 내 나라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서가 아니다. 용기 부족도 한 이유이지만 작은아버지네 가족의 영향이 크다. 할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잠시 한국에 들어오신 작은아버지의 추레한 형색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음을 방증했다. 작은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의 대화 속에서 떠난 걸 후회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작은아버지를 보면서 어느 곳에 살든 불행은 비집고 들어온다고, 그러니 어디서 살든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아마...... (28쪽)

 

계나는 시드니 도착 다음 날 차에 치여 죽을 뻔했고 재기 불능 직전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계나, 너는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 거야.”하고 말하려고 보니 편혜영의 『선의 법칙』의 ‘그들’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낀 채 달렸던, 그리고 달리고 있는 그들, 톱니바퀴에서 벗어났어도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는 그들 말이다.

 

재기 불능 직전 상태에 이르렀다가도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한국이 아닌 호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슬며시 올라왔다. 소설 속 글을 인용하자면 빌딩(Building)이나 안테나(Antenna), 교각(span), 절벽(Earth)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걸 베이스(BASE) 점프라고 한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낮은 데서 떨어지는 것이 위험한 건 추락하는 시간이 짧아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높이 올라갈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은 지상에 나를 구해줄 사람이 있다고 자기 암시를 걸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상에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없다. 그대로 추락이다.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152쪽)

 

『한국이 싫어서』는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7번째 책이다. 읽기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이고 겉모양새가 책장에 꽂아 진열하기 딱 좋다. 행복한 삶을 원하면서 점점 더 불행하게 사는 청춘을 포함한 우리들의 모습이 담긴 소설이었다. 불편한 진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그 속에서 청춘들의 통쾌한 한 방이 있는 소설을 바랐는데 그건 아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이 두렵다. 실패의 경험은 도전을 가로막았다. 행복해지기 위해 길을 나선 계나의 용기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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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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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한민국의 6월을 상징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는다면 메르스일 것이다. 그것은 내 발밑까지 왔었다. 내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진찰과 검사를 받는 외래환자시다. 아버지는 확진환자가 나오기 직전 병원을 다녀오셨다. 우리 집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 병원에선 확진 환자가 나왔다. 그 환자는 내가 산책을 가는 공원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았다.

 

1944년 뉴어크의 6월은 폴리오가 지배했다. 『네메시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다. 1933년 생, 올해 나이는 만82세인 필립 로스는 몇 년 전, 더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적어도 작가라면, 글을 그만 써야 하는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쓴다고 다 글은 아니다.

 

‘네메시스’를 『후-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에서 찾아보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근거하여 ‘밤의 딸로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뒤러의 동판화 《네메시스》가 실려 있는데 설명은 이렇다.

 

네메시스는 세상의 정의를 심판한다는 신탁의 모습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왼손에든 쇠사슬로 연결된 가죽끈은 심판자의 엄격함과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메르스와 폴리오를 퍼뜨린 신의 뜻은 무엇일까. 제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일까?

 

“앨런한테 옮아서 이제 자기들도 폴리오에 걸릴 거라고 겁을 먹고 있는 거요. 부모들은 히스테리에 걸렸소. 아무도 어째야 할지를 몰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거요? 나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소. 우리보다 깨끗한 가족이 있을 수 있소? 아이들의 행복에 그녀보다 관심을 쏟는 어머니가 있을 수 있었겠소? 앨런보다 자기 방과 옷과 몸을 잘 돌보는 아이가 있을 수 있었겠소? 그애는 뭘 하든 처음부터 제대로 했소. 그리고 늘 행복했고. 늘 농담을 했고. 그런데 왜 그 애가 죽은 거요? 이게 어디가 공정한 거요?”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말했다.

“오직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 옳은 일만 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사려 깊은 사람, 합리적인 사람, 남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 인생 어디에서 양식良識을 찾아야 하는 거요?”

“찾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대답했다.

“정의의 저울은 어디 있는 거요?” 가련한 남자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마이클씨.”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대답했다.

“왜 내가 아니라 그 애인 거요?”

캔터 선생님은 그런 질문에는 전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52~53쪽)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주는 경고라면 마이클스의 말대로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걸까. 신의 심술 앞에 인간은 그저 인생은 복불복이라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 답은 아마도 메르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생각한다. 초기 대응을 잘 했더라면? 물론 지나간 삶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네메시스』는 폴리오의 시간을 견딘 두 남자 버키 캔터와 아널드 메스니코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같은 비극을 겪었지만 삶을 지속하는 방식은 달랐다. 버키는 폴리오가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며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고 아널드는 새로운 삶을 찾았다.

 

두려움이 덜할수록 좋아.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게 자네 일이고 내 일이야.(110쪽)

 

사실 이 말은 제삼자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두려움이 자신을 타락시킬 것을 알지만 당사자가 됐을 때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내 아이에게 메르스를 옮겼다고 생각해 보자.

 

폴리오에 걸린 버키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폴리오를 전염시켰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폴리오의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라고 생각해 평생을 지옥에서 살았다. 지나친 면이 있지만, 비극의 늪에서도 삶의 끈을 놓친 않고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인데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자신의 늪으로 사랑하는 이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다. 세상에는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책임이 분명한데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 않던가. 그가 삶의 가치로 여긴 것은 '양심'이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구요.”(273쪽)

 

네메시스는 행복과 불행을 분배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뒤가 아주 구린 인물’인 아버지와 그에게 물려받은 나쁜 시력, 그리고 폴리오에 걸려 불구가 되고 또 폴리오를 옮긴 것 등 언뜻 버키는 불행이 많이 분배된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불굴의 정신을 심어준 할아버지, 그의 불구까지 감내하려 했던 마샤, 그리고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아널드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폴리오에 걸렸던 당시 버키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나는 바란다. 남은 그의 생은 행복하길. 이젠 책임의 돌을 내려놓길.

 

지난 6월에는 짐작조차 못 했던 일이 훅 들어 와 비틀거렸다. 비극의 생을 살다 바다가 가까운 남쪽 도시 중 한 곳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내게는 가깝지만 먼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가깝지만 먼’ 이란 문장의 모순을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몸은 아팠지만 병원은 두려웠고 마음이 힘들었지만 책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날들로 기억되길 바랐던 6월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6월에 비하면 7월은 고요한데 폭염을 핑계 대며 게으름을 피운다. 6월의 혼란 속에 미뤄뒀던 일들이 산적한데 하고 싶지가 않다. 다행인 건 그래도 책은 읽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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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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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보고 싶어한다.(1권, 11쪽)

 

『용감한 친구들』의 첫 문장이자 ‘아서’의 첫 문장이다. 소설은 아서, 조지, 아서&조지 등의 인물별 이야기로 나뉘어 전개된다. 이런 방식은 인물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첫 문장의 ‘아이’는 ‘아서’다. 첫 문장에는 ‘무엇을’이 빠져 있다. 어린 아서는 ‘커튼이 드리운 방’에서 ‘희고 창백한 그 무엇’ 할머니 캐서린 팩의 죽은 몸을 보았다. 아서에게 그 경험은 기억의 시작, ‘최초의 기억’이었다.

 

조지에게 최초의 기억이 없다.(1권, 12쪽)

 

‘조지’의 첫 문장이다. 목사였던 조지의 아버지는 “나는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기억이 없다는 건 뇌를 강타하는 강렬한 무엇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지의 평생의 삶을 지배한 것은 ‘진실’이었다.

 

아서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먼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상상력을 키웠고 옮고 그름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조지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은 바깥 세계는 나쁜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머물지 않는다. 어른이 되고 집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그들이 바깥 세계를 경험하며 느낀 것은 ‘부당함’이었다. ‘보고 싶어 했던’ 아서는 안과의가 되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심을 받던 조지는 사무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와 조지(Arthur & George')’이다. 다른 듯 보이는 두 인물은 ‘조지의 가축 훼손 사건 혐의’라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조지가 내민 손을 아서가 잡은 결과다. 아서는 안과의이자 ‘셜록 홈스’라는 뛰어난 탐정을 창조한 작가였다. 아서는 바로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다. 이 사건은 실제 아서 코난 도일이 겪은 사건이다. 아서(와 아서 코난 도일)는 사건의 보이지 않았던 빈틈을 밝힘으로써 조지가 편견에 희생됐음을 밝혔다.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니고 전 당신이 무죄라는 걸 압니다.(2권, 31쪽)

 

조지는 가축 훼손 혐의를 받는데 그의 법정 변호사 베이첼은 범인이라는 증거도, 범죄를 저지를 동기도, 범죄를 저지를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유죄 선고 받고 복역한다. 그러다 결백하지만 의심을 받은 것도 유죄라며 그는 특별사면을 받는다. 이 결과는 조지에게도 아서에게도 정당하지 못한 판결이었다. 범죄자는 죄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으로 만들어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론은 사실 확인 없이 확정 짓는다. 조지의 경우처럼. 불확실한 증거가 명백한 증거로 조작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이기 전, 들리기 전 상황은 배제한 채 보고 들었다고 진실이라고 믿는 건 위험하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 다르다. 앎이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면 믿음은 희망의 반영이다. 희망은 때로 그릇된 판단을 일으킨다.

 

처음엔 원제『아서와 조지(Arthur & George')』가 아닌 왜 『용감한 친구들』이란 제목을 썼을까 궁금했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진실이 밝혀져 조지가 다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진실을 끝까지 밝히려 했던 조지 자신과 조지가 내민 손을 잡아준 아서,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 사람들 때문이었기에.

 

이 일은 실제 사건으로 셜록 홈스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실제 겪은 사건이라고 한다. 줄리언 반스는 실존 인물 아서 코난 도일과 조지 에들지의 실제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했다. 소설이긴 하지만 아서 코난 도일의 이야기는 셜록 홈스가 사건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시한부였던 첫 번째 아내 투이와 두 번째 아내 진 레키와의 사랑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 모른다.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것.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2권, 301쪽)

 

할머니의 죽은 몸을 본 이후 아서는 눈으로 보는 것 이외의 것이 있음을 알았다. 최초의 기억은 환자, 아버지의 죽음과 맞물리면서 심령학에 관심을 갖게 했다. 아서는 안과의이자 추리 소설가였고 조지는 사무 변호사였다. 본 것은 진실이 아닐 수 있으며 잘못된 말(글)은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메르스 때문에 기사들을 자주 클릭하게 된다. 들리는 얘기는 메르스가 주를 이룬다. 보고 듣는 것이 많은 시대, 주목받기 위해 말을 쏟아내는 시대를 보며 신중함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모두 믿는 건 어리석다. 무조건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쏟아내야 할 말은 진실과 사과뿐이다. 죽음, 믿음, 편견, 사랑 등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는 책이다.

 

       

(*) 『용감한 친구들』 1·2권 통합 리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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