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너(you)’와 ‘그들(them)’의 차이를 생각한다. ‘너’와 ‘그들’을 구분하는 건 ‘나’와의 거리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는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포함한다. 설 연휴와 이후 며칠 동안 읽은 책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다. 쉽지 않은 독서가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쉽지 않은 독서였다. 거리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일상 가운데서 틈틈이 읽다 보니 독서의 흐름이 깨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주인공들 보는 일도 힘겨웠다.
그들의 삶을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의 삶이 아닌 1940, 50, 6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삶으로 치부해버렸다면, 그래서 방관자의 입장에서 읽었다면 이토록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열여섯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 고 규정할 순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야 할 시간임은 분명하다. 로레타는 열여섯 살에 ‘청춘의 종말’을 맞았다. 열여섯 살에 청춘의 종말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랬다. 혼란의 상태에 다가온 남자를 구원자라 착각해 그와 결혼했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며느리가 되었다. 삶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버나드가 그렇게 금방, 그렇게 완전히 죽어버린 것은 지금도 의아한 일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자동차를 향해 기운차게 뛰어오던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것으로 끝이라니. 경찰이 줄스를 잡으러 오지 않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서두른답시고 허둥거리다가 지문을 뭉개고 증거를 잃어버리곤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은 놀라웠다. 그는 몇 주 동안 신문을 훑어보며 버나드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찾아보았지만, 그 일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그렇게 죽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가능해? 8월에 로레타의 친구 집 창문으로 라이플이 발사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창문을 깨뜨리며 들어와 박혔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경보가 울렸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플이 발사된 것은 사실이지만, 라이플이 발사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러니 후속조치가 없었다.(359쪽)
청춘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은 그녀에겐 큰 사건이지만 그 도시 사람들에겐 일어나지 않으면 좋지만 일어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도시는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다. 평화의 도시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이들인 줄스와 모린의 삶은 ‘황폐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로레타는 아버지에게서 ‘젊은 것 같은데 늙은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내게는 로레타도, 그녀의 오빠 브룩도, 그녀의 아이들인 줄스와 모린도 모두 ‘젊은 것 같은데 늙은 사람’이었다. 네이딘을 포함한 줄스가 만난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로레타가 계속 남자들을 만나고 줄스가 사랑에 목매는 것도, 모린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들을 가까이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아, 젠장! 제길!”그녀가 소리친다. “더 이상 못 해먹겠네. 이런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얘가 아프든 말든 나도 몰라. 나도 내 인생을 챙겨야지!”
모린은 침대에서 엄마가 내는 소리를 듣는다. 엄마는 다른 방에서 울고 있었다.
“내 인생을 챙겨야지.” 로레타가 말한다. “내 인생은 언제 시작되는 거야?”(431쪽)
내 인생을 살겠다고 말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 나이의 부모님에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많아 자신의 인생은 뒷전이었다.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부모님만큼도 살지 못한다.
“……(중략) 제가 평생 원한 건 하나의 인간이 되는 거였어요.” 모린이 느릿느릿 말했다. “꿈과 뒤섞이지 않는 것. 마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꼭 그런 사람이에요. 언제나 말짱히 깨서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항상 잘 웃어대지만 사실 엄마의 인생은 전부 잠들어 있어요. 코니 고모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엄마와 고모의 친구들도 모두,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잠들어 있는데 저는 그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와 의붓아버지도 모두 잠들어 있어요, 잠들어 있는 남자들이에요. 저는 모린 웬들이 되고 싶지만, 거기에 뭔가 의미가 생기면 좋겠어요. 깨어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정말 안 좋을 때는, 내가 보기에 나 자신인 것 같은 존재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이것저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제 기억, 제 눈에 보이는 것, 제 생각이 뒤섞인 존재예요. 저는 그걸 통제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어서 무서워요.”(603쪽)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 인간이면서 인간이 되는 걸 원한다는 말은 분명 모순인데 이 말에 공감하는 건 그들의 삶이 인간의 삶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분이는 이방원에게 살아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삶은 무엇이다, 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모린의 말처럼 잠들어 있는 상태로 사는 삶은 아닐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라고 했다. 작가는 제자였던 모린 웬들의 편지가 소설의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내 삶이 비루하다 해도 그들의 삶에 비하면 투정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만만한 곳은 없는 것 같다. 멀리서 보기에 추함을 보지 못할 뿐. 약한 우리는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치열하게.
눈의 나날이 끝나가고 있다고 쓰려고 보니 내가 사는 도시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즘은 어떤 말을 하는 것이 겁난다. 괜찮다고 말하고 나면 바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눈이 오든 그렇지 않든 겨울은 끝나가고 있다. 추워서 잠들어 있는 날을 보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독서도 삶도 게을렀다. 책과의 거리도,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도, 삶에 대한 거리도 가까워지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