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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평점 :
2006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 《음란서생》이란 영화가 있다. 『아트 파탈』, 아트+파탈은 음란+서생만큼이나 이질적인 단어의 결합이지만 흥미를 끌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음란함’이라는 키워드로 미술을 재조명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 예술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라는 해묵은 논쟁을 떠올렸다.
제목만큼이나 시선을 끌었던 건 표지 그림이었다.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아마도 액자 안엔 목욕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액자는 액자가 아니라 액자 모양의 문?)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표지는 기타가와 우타미로의 <입욕도>에서 여자의 모습만 남겨 액자와 재구성한 그림이다. 보이는 것이 많은 앞모습보단, 드러나는 것이 없는 뒷모습이 더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실제 내게 있다면, <입욕도>가 어떤 경로로 내게 왔다면 벽에도 걸지도 못하고, 몰래 보지도 못하고(그러니까 이 그림은 절대 내 취향이 아니다.), 남에게 선물하자니 아깝고(유명화가의 그림이니까),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 어딘가에 고이 처박아 두었을 것이다. ‘고이 처박아 둔다.’는 것은 모순적인 문장이다. 음란함에 대한 인간이 시선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앞에선 고고한 척하지만 뒤에선 음란함을 즐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과 음란함을 추구하는 인간은 같은 인간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일이라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재인용, 58쪽
이 책에 실린 그림들, 예를 들면 에드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 같은 작품들은 굳이 몰래 보지 않지만, 어떤 그림들은, 예를 들면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같은 그림은 책을 펼쳤을 때 많이 놀랐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펴야했다. 차이를 생각해 보니 전자는 익숙했고 후자는 낯설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들의 처음은 낯설기 마련이다. 반복은 익숙함으로 변하고 보지 못했던 대상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나를 매혹시킨 어떤 대상은 반복을 통해 아름다움이 소멸되기도 한다. 예술을 판단하는 기준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화의 비해 한국화는, 신윤복의 <소년전홍>을 보면 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상상할 뿐이다. 같은 화가의 <사시장춘>은 남녀 자체가 없다. 문 앞에 신발 두 켤레와 술상을 들고 여종이 서 있을 뿐이다. 상상은 때로 보는 것 이상으로 은밀하다.
여인의 나체 혹은 누드라고 해도 모두 아름답게 여겨지는 건 아니다. 비참한 상황에 놓인 인간을 그린 그림들은 나체 혹은 누드의 그림이어도 쓸쓸함 혹은 고통의 느껴진다. 재미있는 건 같은 소재라 해도 화가의 시선과 놓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모두 <수산나와 장로들>을 그렸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남성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았더라면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닛>은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의 각각의 그림이 있다. 유닛의 입장에선 ‘구국의 행위’이지만 홀로페르네스의 입장에선 유닛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치명, 목숨의 위협에 빠졌다.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당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한다는 거창한 이유를 내세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아름다움과 음란함은 인간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사회를 보는 독특한 해석도 없고,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도 없이 흥행만을 목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을 작품화한 경우는 분명 문제가 된다.
파탈fatal은 ‘치명적인’이란 뜻을 갖고 있다. 파탈擺脫은 어떤 구속이나 예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예술가가 아무런 감흥 없이, 혹은 일상을 그대로 그린, 모사한 그림들은 관객들을 매혹시키지 못한다. 모든 예술가가 관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끌림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가에게도 괴로움이다. 나의 경우 무슨 그림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림보단 일상을 살짝 벗어난 그림들, 그래서 일상을 깰 수 없는 이들에게 일탈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들, 혹은 따분한 일상의 활기를 넣어주는 그림들에 매혹된다. 그런 그림들을 넓은 의미의 ‘아트 파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