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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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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의 말 한 마디는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러나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타인을 위로할 여유가 없다. 내 삶의 무게도 버겁다. 어렸을 땐 넘어져도 금방 일어났다. 분명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기에. 어른이 되니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몸은 늙었고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간다. 나약한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가면을 쓰지만 그 모습은 영 낯설다. 어둠 속으로 숨으면 사람들에게 잊힐까 두렵다. 다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웃고 떠들지만 마음은 공허로 가득하다.

 

성공신화는 불행이 강조될수록 높게 평가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한다. 내 삶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와 프리다 칼로 그리고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상처가 없었다면 그들의 작품은 지금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누가 더 불우한 시절을 보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정신분석학자인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게 하지만, 천재를 만드는 것은 고독이다. 온전한 작품은 한 사람의 예술가가 혼자 하는 작업으로 탄생한다”는 글을 제사하며 “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했다.

 

심상용의 『예술, 상처를 말하다』는 10인의 예술가들의 상처로 얼룩진 삶과 상처를 통해 발화된 예술을 다루고 있다. 카미유 클로델, 빈센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백남준, 앤디 워홀, 장미셀 바스키아는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예술가들이었고 케테 콜비츠, 권진규, 이성자, 마크 로스크는 처음 알게 된 작가들이다.

 

저자는 자크 엘륄의 “모든 인간은 실패한다”는 문장을 인용했지만 실제로도 실패를 겪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일반인들과 달리 예술가들은 실패를 기꺼이 감수한 사람들이다. 카미유 클로델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 사느라 괴로웠지만 언제나 조각을 생각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이 약자였기에 약자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케테 콜비츠는 역사와 사회의 질병을 대신 앓았다. 이방인으로 떠돌던 이성자는 기댈 곳이 없었으나 ‘문명의 치유’를 그렸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행동하고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 행위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무기로 세상과, 고독한 자신과 싸운 사람들이었다. 고통과 상처는 예술의 기원이다.

 

뭔가에 집중하면 시간이 잘 간다. 외로울 땐 뭔가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 예술가가 아닌 이상 창작 행위를 통해 치유 받지 못한다. 나를 위로해주는 대상은 반드시 사람이나 창작행위일 필요는 없다. 오늘 밤 두 눈이 있고 두 손이 있어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행복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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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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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그림보기를 즐기지만 때때로 거대한 벽에 부딪힌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서양화, 특히 역사화와 종교화가 그랬다. 관련 지식의 부재는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림에 대한 갈증을 가져왔다. 그러던 차에 이주헌의 『역사의 미술관(부제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의 출간 소식을 접했다.

 

역사는 인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림은 화가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그리기도 하지만 주문자의 의도에 따라 혹은 화가들 스스로 주문자의 의도를 헤아려 그리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절대 군주 이미지는 화가들의 생존과 출세 의지도 한몫했다.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던 표도르 슈르핀처럼 스탈린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화가들도 있었다.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생활인이자 욕망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 책에선 알렉산드로스, 아우구스투스, 루이 14세, 나폴레옹, 이반 뇌제, 스탈린 등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정복자이기 이전에 관대한 리더였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림 속에서도 관용과 배려가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나폴레옹은 화가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얻었다. 역사는 History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클레오파트라, 퐁파두르 부인 등 Herstory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로웠다.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그림에 담겨지길 원했다.

 

아를놀트 뵈클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모두 1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그중 8명의 자녀를 흑사병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잃은 아를놀트 뵈클린이 죽음과 공포에 천작한 것은 당연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은 그의 쓸쓸함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어쩌면 제대로 안녕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견뎠으리라. 전쟁을 소재로 한 많은 그림들이 실려 있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피도, 해골도 없는 마르셀 그로메르의 <전쟁>이란 그림이었다. 똑같은 철갑 헬멧과 군복을 입고 누가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그림인데 난 그 어떤 전쟁화보다 섬뜩했다.

 

키를로스 슈바베, <무덤 파는 이의 죽음> 

 

책 속 여러 영웅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그 이유는 죽음을 맞으며 했다는 “인생이란 이 소극笑劇에 내가 맡은 역할을 충분히 잘한 걸까?”라는 말 때문이다. 잔인한 군주였던 이반 4세, 그는 사랑과 행복을 원했던 한 인간이자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다. <바실리아 멜렌티예바를 경모하는 이반 뇌제>의 늙은 이반 4세는 잔인한 군주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키를로스 슈바베가 그린 <무덤 파는 이의 죽음>에 나타난 것처럼 죽음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저자는 글머리에서 우리 옛 그림은 ‘자연의 소요逍遙’를 그린 그림이라면, 서양의 옛 그림은 ‘인간의 역주力走’를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나는 여백이 있는 우리 옛 그림을 좋아하며 서양화론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한다. 해골이 등장하고 피를 흘리는 그림들은 좋아하지 않는데 서양의 옛 그림은 ‘희로애락의 파도를 타고 투쟁을 벌이는 인간의 열정을 그린 그림’이라는 글을 읽고 나니 전쟁화와 초상화가 달리 보였다. 로트레크는 홍등가의 여인들을 관능의 화신이 아닌 생활인으로 그렸다. 그는 그녀들의 고백을 들어주고 슬픔을 같이 나누는 친구였다. 역사화는 화가의 판타지가 덧보태져 역사의 실제 장면과 다르게 표현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이다. 화가들은 그들과 호흡하며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열정을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림 한 점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책의 표지 디자인은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생생한 도판과 마케도니아의 역사, 로마의 역사, 프랑스의 역사 등 세계사가 실려 있어 그림을 통해 만난 역사 이야기를, 역사 이야기를 통해 만난 그림을 좀 더 확장해서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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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의 루브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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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어 자체가 나를 설레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루브르’이다. 루브르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이다. 책 속의 그림을 즐겨보지만 책으로 만나는 그림과 미술관에서 만나는 그림은 다르다. 책으로 만나는 그림은 크기가 축소되고 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그림은 빛을 고려한 공간의 배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책으론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 중에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라로 시작하는 시는 ‘오후 4시의 희망’이다. 이번에 읽은 책의 제목은 『오후 네 시의 루브르』이다. 평일 오후 4시는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며 일을 다시 시작하기엔 어정쩡한 시간이고 토요일 오후 4시라면 가장 느긋한 시간일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루브르를 드나들면서 만난 그림들 중 걸음을 멎게 하고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몇몇 그림에 관한 감상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肖(잊을 수 없는 얼굴을 그리다), 俗(거친 세상을 그리다), 風(바깥 세상을 그리다), 性(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그리다), 聖(영원한 어머니의 아들을 그리다)의 다섯 개의 Chapter로 나뉘어 있다.

 

처음 피사넬로의 <젊은 공주의 초상>을 봤을 때 공주의 넓은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꽃과 나비가 있는 암울한 배경은 기묘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주의 실체와 사연을 알고 그림을 보니 절망과 슬픔이 느껴졌다. 프란체스카의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의 초상>을 보고 서늘함을 느꼈는데 역시 사연이 있었다. 오늘 내 시선을 끈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작업대 앞의 자화상>이었다. 인생의 전부를 그림 그리는 일에 보낸 늙은 화가의 견고함이 느껴졌다. 저자는 고야의 <상복 입은 알바공작부인의 초상>에 대해 고객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연인에게 투영시킨 혼자의 고백으로 보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미치광이들의 배>는 내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숨겨놓은 의미를 찾는 것은 그림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리라. 금욕과 참회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지만 풍족한 생활을 하고 주변에는 인색했던 드라투르에게선 모순의 인간을 보았다.

 

그림을 많이 알진 못하지만 화가의 이름은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루브르에 전체 화가가 실린 책도 아닌데 모르는 화가들이 어찌나 많은지. 소수는 당시에도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은 죽은 후에야 부와 명예를 얻었다. 어떤 화가들은 죽어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몇몇의 그림과 이름만을 남길 뿐이다. 그럼에도 화가들은 시대를, 인간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사는 이유였기에.

 

르브르의 그림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졌던 느낌은 빛(삶)이 아닌 어둠(죽음)이었다. 풍경화하면 마음을 정화시키는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지만 루브르의 풍경화는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쓸쓸하거나 두려움의 전조가 느껴지거나 잔혹했다. 한 마디로 아름답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에 대한 비판이자 반성이었다. 하지만 빛은 밝음이 아닌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낸다.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느낌은 화가들에 대한 숙연함으로 이어졌다.

 

내게 좋은 그림은 ‘오늘 내 마음을 움직인 그림’이지만 그림에 대한 사연을 알고 그림을 보면 화가나 모델 등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생기고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이기적 존재인 나는 이타적 존재로 변한다. 그것은 꽤 행복한 경험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 라고 했지만 저자가 많이 부러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루브르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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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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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 《음란서생》이란 영화가 있다. 『아트 파탈』, 아트+파탈은 음란+서생만큼이나 이질적인 단어의 결합이지만 흥미를 끌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음란함’이라는 키워드로 미술을 재조명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 예술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라는 해묵은 논쟁을 떠올렸다.

 

제목만큼이나 시선을 끌었던 건 표지 그림이었다.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아마도 액자 안엔 목욕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액자는 액자가 아니라 액자 모양의 문?)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표지는 기타가와 우타미로의 <입욕도>에서 여자의 모습만 남겨 액자와 재구성한 그림이다. 보이는 것이 많은 앞모습보단, 드러나는 것이 없는 뒷모습이 더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실제 내게 있다면, <입욕도>가 어떤 경로로 내게 왔다면 벽에도 걸지도 못하고, 몰래 보지도 못하고(그러니까 이 그림은 절대 내 취향이 아니다.), 남에게 선물하자니 아깝고(유명화가의 그림이니까),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 어딘가에 고이 처박아 두었을 것이다. ‘고이 처박아 둔다.’는 것은 모순적인 문장이다. 음란함에 대한 인간이 시선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앞에선 고고한 척하지만 뒤에선 음란함을 즐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과 음란함을 추구하는 인간은 같은 인간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일이라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재인용, 58쪽

 

이 책에 실린 그림들, 예를 들면 에드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 같은 작품들은 굳이 몰래 보지 않지만, 어떤 그림들은, 예를 들면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같은 그림은 책을 펼쳤을 때 많이 놀랐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펴야했다. 차이를 생각해 보니 전자는 익숙했고 후자는 낯설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들의 처음은 낯설기 마련이다. 반복은 익숙함으로 변하고 보지 못했던 대상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나를 매혹시킨 어떤 대상은 반복을 통해 아름다움이 소멸되기도 한다. 예술을 판단하는 기준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화의 비해 한국화는, 신윤복의 <소년전홍>을 보면 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상상할 뿐이다. 같은 화가의 <사시장춘>은 남녀 자체가 없다. 문 앞에 신발 두 켤레와 술상을 들고 여종이 서 있을 뿐이다. 상상은 때로 보는 것 이상으로 은밀하다.

 

여인의 나체 혹은 누드라고 해도 모두 아름답게 여겨지는 건 아니다. 비참한 상황에 놓인 인간을 그린 그림들은 나체 혹은 누드의 그림이어도 쓸쓸함 혹은 고통의 느껴진다. 재미있는 건 같은 소재라 해도 화가의 시선과 놓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모두 <수산나와 장로들>을 그렸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남성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았더라면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닛>은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의 각각의 그림이 있다. 유닛의 입장에선 ‘구국의 행위’이지만 홀로페르네스의 입장에선 유닛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치명, 목숨의 위협에 빠졌다.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당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한다는 거창한 이유를 내세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아름다움과 음란함은 인간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사회를 보는 독특한 해석도 없고,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도 없이 흥행만을 목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을 작품화한 경우는 분명 문제가 된다.

 

파탈fatal은 ‘치명적인’이란 뜻을 갖고 있다. 파탈擺脫은 어떤 구속이나 예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예술가가 아무런 감흥 없이, 혹은 일상을 그대로 그린, 모사한 그림들은 관객들을 매혹시키지 못한다. 모든 예술가가 관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끌림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가에게도 괴로움이다. 나의 경우 무슨 그림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림보단 일상을 살짝 벗어난 그림들, 그래서 일상을 깰 수 없는 이들에게 일탈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들, 혹은 따분한 일상의 활기를 넣어주는 그림들에 매혹된다. 그런 그림들을 넓은 의미의 ‘아트 파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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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고 싶은 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림 그리고 싶은 날 - 스케치북 프로젝트
munge(박상희) 지음 / 예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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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에 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스케치북을 샀었다. 마지막 장까지 그린 적, 물론 없다. 내가 산 것은 스케치북 뿐만은 아니었다. 책장 서랍 어딘 가엔 물감도 있고 오일 파스텔도 있고 파스넷도 있고 사인펜도 있고 색연필도 있고 구입한 지 오래돼 새 것이라는 표현이 안 어울리는, 깎지 않은 콘테와 미술연필도 있다. 지금도 문구점에 가면 미술용품 코너를 서성인다. 다행이랄까. 조금 철이 든 나는 서랍에 쌓인 물품들을 떠올리며 구입하진 않는다.

중학교 시절 아주 잠깐 화가의 꿈을 꾸었던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었음에도 그리는 것만큼은 꽤 좋아했었다. 나는 주로 지루한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렸는데 나의 스케치북은 공책의 뒷장이었다. 지금 내가 그린 그림들은 어디에도 없다. 공책의 뒷장에 그린 그림을 보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것을 그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을 읽으며 그림들을 모아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는 이 책『그림 그리고 싶은 날』을 갖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그림 공부를 해보자 생각했으나 늘 생각뿐이었던 나는 이 책을 보며 나에게 맞춤형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신간 평가단의 책으로 선정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주목할 신간 리스트에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려야지, 하는 생각 다음엔 스케치북과 미술도구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나 역시 같은 생각으로 미술도구들을 사들였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건 종이와 펜과 연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연장만 탓하는 목수였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나의 그림들이 모두 허접하게 보였다. 화가가 될 생각도 아니었고 그저 취미로 그릴 생각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중으로 미뤄놓은 일이 너무 많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주변에 있는 종이들은 모두 스케치북이 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사물들, 내 옆의 사람들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됨을 알려주었다. 몰랐던 바는 아니지만 글로만 만났을 때 그다지 와 닿지 않았는데 실제 그림으로 만나니 이런 것도 정말 멋진 그림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에서 관찰한 사람들을 그려본다. 어슬렁거리던 아저씨들을 그린다. 유명 관광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관광객을 그린다. 바글바글 몰려 있는 무리들을 멀리서 구경하다보면 어느덧 한 명씩 한 명씩 개별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122쪽)
 
   

저자는 그림을 그리면서 만나게 된 사람은 결국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림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다면, 잘 그린 그림이든 못 그린 그림이든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알려주는 대로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또는 ‘디테일을 더하거나 빼면서 톤을 살리거나 죽이면서 묘사를 들이파거나 눌러주면서’ 나의 스타일을 만들고, 나의 그림들을 완성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그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고 자신감이 생기게 해주는 책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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