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공포영화를 안 보는 건 전쟁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와 같다. 전에는 의학드라마도 보지 않았었다. 뱀파이어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이유도 피 때문이다. 그래도 뱀파이어 영화가 나왔다는 소릴 들으면 귀가 솔깃한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건 인간이나 뱀파이어나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올바로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서늘한 사랑이 이번엔 해피엔딩이길 바라는 마음도 갖고 있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에 등장하는 뱀파이어(혹은 흡혈귀)를 이야기를 통해 뱀파이어의 기원을 비롯한 뱀파이어의 문화사를 파헤친 책이다. 여성 뱀파이어가 존재함을 알면서도 브램 스토커의 소설『드라큘라』의 영향 때문에 뱀파이어하면 여성보단 남성이 떠오른다. 이 책에 의하면 고대 흡혈귀 선조는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릴리트처럼 대부분 여성이며 신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와 아랍 문화권의 악령이었던 굴이나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고대 로마의 인쿠부스도 흡혈귀의 선조였다고 한다. 시대 탓에 감추고 억누르고 살아야 했던 여성의 분노가 흡혈귀의 모습으로 부활했을지도 모르겠다.

 

뱀파이어 미신이 발칸반도 국가들과 남쪽의 도나우 강에 활개를 친 데는 고립된 지역이라는 지리적인 특성도 작용했다고 한다. 이유도 없이 백성이 죽었다면 능력자(혹은 통치자)들은 가짜 원인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백성이 죽은 이유를 모른다는 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통치자들은 원망의 화살을 돌릴 대상으로서 뱀파이어라는 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뱀파이어 사례가 보고되던 시기는 결핵이나 페스트·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뱀파이어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질병의 원인을 알 수 없던 시기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고대의 전설에서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는 소설『드라큘라』보다 20년 앞서 발표되었고 뱀파이어 문학 장르의 시초로 간주한다고 한다. 이 책은 드라큘라를 소재로 한 많은 소설의 줄거리와 작품들이 서로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화가들의 그림과 더불어 소개하고 있다. 작가들은 이전 뱀파이어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테오필 고티에의 「죽은 연인』은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등에서 얻은 영감에서 탄생했다. 뱀파이어의 이야기는 이처럼 작가들에 의해 생명력을 유지했다.

 

고대 흡혈귀의 선조는 대부분 여성이었다고 했지만 19세기 말에도 여성 뱀파이어가 유행이었다. 여성들과 부정적인 경험을 겪은 뭉크 같은 화가들은 여성 뱀파이어 그림을 수차례 그렸다고 한다. 그녀들이 정말 나쁜 여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가들은 사랑에 대한 상처와 원망을 여성 뱀파이어를 그림으로써 복수(?)했다.

 

작년 이맘때 뒤늦게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었었다. 이미 많은 드라큘라 이야기들을 접한 탓에 시시했던 기억이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는 이 소설에 빚지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뱀파이어 특징들이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 영화적 특성, 영상미를 살리는 쪽으로 소설『드라큘라』를 기발하게 재해석하기도 했다.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잠시 놀라긴 하지만 서늘함이나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떤 공포영화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이야기보다 무섭지 않다.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타자의 생명은 경시하는 왜곡된 생존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럼 인간들은......

 

실제로 피를 빨아먹는 건 아니지만 인간들도 뱀파이어와 다르지 않은 생을 살고 있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이 망가지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 짧지 않은 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도 한순간 추락하지 않던가. 뱀파이어들은 영원한 삶을 사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고통을 겪지 않던가.

 

저자는 머리말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집《미치광이들》의 모토 “우리는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를 인용했다. 뱀파이어 영화를 잘 보지 않으면서 뱀파이어 영화에 관심을 간 건 그들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 즉, 나의 욕망을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린 드라큘라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드라큘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을 통해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78~279쪽, 2003년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라는 제목을 만났을 때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온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고 결국엔 그것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난다. 세상엔 미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의 생에 한눈팔기는 없었을 것이다.

 

목표를 세우지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사는 생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리다가도 자꾸 걸음을 멈추는 생은 그들과 다른 생이지 잘못 산 생은 아니다. 달리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볼 수 있지 않던가. 내가 이 책에 관심이 간 것은 사회학에 관한 관심도, ‘피터 L. 버거’라는 사회학자에 관한 관심도 아닌 ‘어쩌다’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가장 신기했던 것은 과목마다 교사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담임은 사회 담당이었다. 다른 학년에선 국어와 한문 선생님으로 불리었다. 사회는 특별히 전공하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라는 생각은 사회학은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되는 학문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의 원제는 Adventures of an Accidental Sociologist이며 부제는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이다. 피터 버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사회학자로 현존하는 20세기 사회 사상가 중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루터파 목사가 되고 싶었던 피터 버거는 미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사회 실상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것은 사회학 공부로 이어졌다. 초기엔 미국 사회보단 19세기 프랑스 사회에 대해 배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흥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도 다르지 않았다. 군대 가는 것은 싫었지만, 군대에서 경험은 사회학자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에게 군대는 미국의 다양한 현실을 적합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그의 가족이 뉴욕에 정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군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회학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피터 버거는 연대순으로 사회학과 관련한 삶의 지적 이력을 펼친다. 책을 내게 된 과정과 자신이 어떤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봤으며 어떤 주장이 실려 있는지 들려준다.《사회학에의 초대》에선 ‘우리가 갖는 사회적 역할 바깥에 설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자유임을 깨닫게 해 우리를 해방한다.’라는 사회학의 의미를, 《이단의 시대》에선 ‘근대성이 반드시 세속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다원화한다.’라는 현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견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피터 버거가 출간했던 책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회학자는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이론을 정립한다. 사회 현상을 분석할 때 필요한 것은 균형적인 시각이지만 사회마다 전통적인 가치를 배제할 순 없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프로젝트들을 이끌며 그 사회의 정치경제 상황과 종교, 문화를 접하며 사회적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회학이란, 사실상 사회질서에 대한 ‘불완전한 비전’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사회학은 모든 제도가 깨지기 쉽다는 것을, 그리고 제도가 급격히 해체되면 독재나 무질서라는 이중의 위험에 봉착한다는 것을 알려준다.(342쪽)

 

 

이 책은 사회학과 인문 에세이 카테고리에 담겨 있다. 에세이는 남의 실제 이야기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회학을 다루고 있지만 쉬운 독서가 될 거라 예상했다. 곳곳에 등장하는 피터 버거식 유머들은 재미있었지만 내가 직면한, 혹은 겪었던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포괄적인 이야기라서 그런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다만 그가 책에서도 인용한 괴테의 말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황금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처럼 사회학은 세상이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리란 사실은 믿는다. 리뷰의 제목은 저자의 책 제목 중 하나를 삼았다. 이 책을 발판으로 관련 독서를 확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고 리뷰를 쓰기 시작한 지 3년 6개월쯤 됐다. 장르를 불문하고 무작정 읽고 썼다. 두 번 이상 읽지 않았다. 그러기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다. 그전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거나 일과 관련해 정보를 얻어야 할 때만 읽었다. 리뷰는 쓰지 않았다. 책에서 만난 세상은 무척 흥미로웠다. 리뷰 쓰기는 읽은 책에 관한 기록이라 생각했기에 서재에 올리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다소 과격한 제목의「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가 한여름 다섯 밤 동안 들려주는 책과 혁명에 관한 오랜 이야기,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 미래로 이어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니체와 루터의 말을 빌려 모두 알고 있다고 믿지 말고 반복해서 읽으라고 충고한다. 한 권의 책을 한두 시간 안에 읽고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부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가짜다. 그저 아는 척 위장할 뿐이다.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보가 모두 귀중한 정보는 아니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라도 얼마나 깊이 마음으로 받아들였느냐이다. 그럼에도 우린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눈을 반짝이고 밤을 지새운다.

 

우리가 그 책에 다가가는 도중에 아무리 꼬불꼬불 구부러지고 빈둥빈둥하고 우물쭈물하고 어슬렁어슬렁 하더라도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끝엔 어떤 거래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 전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일이 있다.(‘버지니아 울프의 글’ 재인용, 48쪽)

 

새해가 시작되면서 다독보단 정독을 계획했다. 느리게 읽되 깊게. 감명 깊은 책은 반복해서 읽기도 했다. 텍스트(text, 종이) 위에 쓰인 텍스트(text, 글/문서)를 읽는 행위, 그리고 텍스트(text, 글)를 쓰는 행위는 현재의 나의 마음과 몸 상태를 들여다보게 했다. 치유된 줄 알았으나 흉터가 남아있던 오래된 상처들과 시시한 현재를 만났다. 지난 6개월, 독서도 리뷰를 쓰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고독한 싸움’의 시간이었다.

 

매년 지구에서 10개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정한 국제 공개어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10개이며, 국제 사회에 통하는 UN공용어는 6개라고 한다. 나머지 6000여종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지구 전체 인구의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혁명은 세상을 바꾸고 그것은 문학에서 시작됐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 또한 알고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자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글)은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라질 수 없는, 사라지지 않을 무엇인 것이다.

 

(……)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 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40쪽)

 

나의 고독한 싸움은 끝났으나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생이 끝나는 날까지 반복될 것이다. 늘 책이 위안이 됐던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새로운 시작을 할 힘을 얻곤 했다. 새로운 시작을 혁명이라 칭하든 그러하지 않든 텍스트(문서) 읽기는 나만의 문장, 혹은 내 인생의 텍스트(본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를 한여름 밤,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쓴다. 덜 고독하기 위해 고독과의 싸움 속으로 걸어간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재인용, 2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돌아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언뜻 사랑, 우정 등의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확신은 서질 않는다. 진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돈이 많고 적음이 사랑과 우정의 조건이 되는 세상이다. 돈 때문에 가족끼리 싸우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드라마「추적자」의 창민은 돈 때문에 친구의 딸을 죽였고 우정을 버렸다.

 

흘러간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젊음도 그러하다. 『스타터스』의 나이 든 엔더들은 돈을 내고 젊은이들의 몸을 샀다. 부자로 알려진 사람이 투병생활을 하다 평균수명에도 못 미치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건강, 그리고 영원불멸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들’을 말한다. 샌덜 교수는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들’의 예로 새치기, 인센티브, 선물, 보험, 명명권 등을 예로 들었다. 명명권에서 예를 든 학교의 범람하는 상업화나 아이를 사고파는 것은 확실히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들이란 생각이 강하지만 이스라엘 어린이집 사례에서 본 인센티브의 문제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서로 간의 이해와 협조로 해결하면 좋지만 잘못하면 누군가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타인의 시간을 아무런 대가 없이 계속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거래란 ‘나(너)’가 ‘너(나)’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 ‘돈 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엇’을 건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과 ‘돈, 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엇’은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현실은 가진 자에게만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세상은 돈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시장의 가치가 사회생활에 차지하는 역할이 큰 시장경제주의에선 더욱 그러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없는 사회,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사회이다. 사람들은 돈이 많든 적든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온갖 부정과 부패가 발생할 것이다.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는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의미와 목적, 재화를 지배하는 가치를 놓고 깊이 사고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274쪽)

 

헌법은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특정 재화가 사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삶에 불평등을 가져왔다면, 그래서 특정인에게만 행복을 준다면 보호해야 할 태도와 규범을 변질시킨 것이다. 샌델 교수는 도덕적 논리 없이는 시장논리도 불완전하다(119쪽)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는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도덕적 논리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돈을 믿는 세상에 미래는 없다. ‘정의’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새로운 논제는 아니지만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토론이 필요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더불어 실천이 필요한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1.

기억의 재생 버튼을 눌러본다. 학창시절 국어나 현대문학 시간에 김수영의 시를 배운 적이 있던가 하고. 떠오르지 않는다. 망각일까 부재일까. 나랑 동갑인, 선배들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H선배는 김수영을 좋아했다. 선배에게 최고의 시인이자 작가는 김수영이었다. 돌이켜보니 언뜻 김수영을 닮았던 것도 같다. 선배에게 문학은 곧 현실이었다. 책을 읽고 비평하는 것에서 나아가 현실 참여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은 동갑내기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분이 좋지만 그땐 나만 뒤쳐진 것 같아, 혹은 나만 꿈과 멀어진 삶을 사는 것 같아 심한 열패감을 느꼈었다. 선배를 좋아할 수 없었던 나는 김수영을 애써 외면했다. 김수영의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시인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선배가 동갑만 아니었더라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는 진작 김수영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2.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만난 김수영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뒤늦은 김수영과의 만남이 후회될 만큼. 엄밀히 처음 김수영을 만난 것은 아니다. 어떤 이의 글에서, 영상에서 ‘풀이 눕는다’로 시작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로 끝나는「풀」과 ‘팽이가 돈다’로 시작해 ‘팽이가 돈다’로 끝나는「달나라의 장난」을 만난 적이 있다. 마음이 지쳤던 시절,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 그 시들을 읽으며 지금의 삶은 우울하지만 좀 더 기운을 내보자고 생각하곤 했다.

 

 

3.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지는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시들을 먼저 읽었다. 『김수영을 위하여』에는 본문에 인용과는 별도로 본문에 인용된 김수영 시들과 산문이 별책으로 묶여 있다. ‘설움’ 그리고 ‘자유’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김수영의 그것과 분명 다르고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지만 나의 5월도 설움과 자유 사이에서 방황했던 시간이었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 나를 버리라는 뜻은 아닐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강신주는, 그리고 김수영은 ‘공동체 성원으로의 탄압’친숙한 사람들과 결별’ 사이에서 삶의 ‘자유와 환희를 지키려면 정밀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 자유를 지키자니 이기적인 것 같고, 그들의 자유를 지켜주자니 내가 사라진 느낌이 든다. 김수영에게 설움은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만드는 동력’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김수영의 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김수영은 모두가 시인이 되길 원했다. 부단한 자기극복을 통해 단독적 삶을 살기 바랐다. 김수영은 모두가 시인이 되질 않길 원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삶을 사는 사회라면 애써 시인이 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시인은 누군가의 눈길을 따라가는 삶, 함께 눈길을 헤쳐 나가는 삶보단 각자 눈길을 독자적으로 헤쳐 나가는 삶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함께 살게 되는 삶에 더 의미를 두었다. 시인은 ‘단독성이 실현되는 동시에 보편성도 확보되는 사회’,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만 때로는 서로 아름답게 때로는 아프게 공명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그런데 이런 사회 정말 가능할까? 나의 자유는 언제나 옳고 타인의 자유는 언제나 부당하게 보지 않던가.

 

 

4.

야만의 시대를 끝내는 메시아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들리는 불협화음’이다.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미완에 그친 4·19 혁명에 대해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김수영은 늘 ‘온몸으로 밀고 나갔다.’,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이자 행복한 사회를 위한 노력이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시작(詩作)이든, 시작(始作)이든 해보고 싶다. 변명이나 합리화, ‘옹졸한 반항’은 그만하고. 그러다보면 과거의 슬픔에서 자유로워지고 현실에 설움에서 자유로워져 나만의 궤적을 쌓아가게 되지 않을까. H선배의 이름을 클릭했다. 그는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 아니 더 나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기쁘고 또 반가웠다. 팽이가 돈다. 뱅글뱅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