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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놀라운 점은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가 말했다.
“이제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지.”
(「킬리만자로의 눈」, 9쪽)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삶이 쉬운 건 아니다. 다 건넜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다리가 보인다. 어쩌면 삶은 고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지난겨울의 끝자락,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많이 지쳐 있었던 나는 책을 통해 위로받았다. 생(生)은 분투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시간 이후 두 번째 계절을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노인과 바다』를 읽기 전의 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을 살고 있다. 나의 시계는 아이와 노인의 중간지점에 머물러 있다. 어떤 날은 내일을 꿈꾸고, 힘든 하루를 산 어떤 날은 내일이 다가올까 두려워 밤을 지새우고, 또 어떤 날은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산다. 슬프게도 내일을 꿈꾸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독특하게 작품발표 연도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뒤쪽으로 갈수록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에 쓴 이야기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헤밍웨이의 청춘들도 다르지 않다. 일자리는 구하기 어렵고 연인과의 미래는 자신이 없다. 다행히 청춘에겐 희망이라는 샴쌍둥이가 존재한다.「온 땅의 눈」의 닉과 조지는 스키나 타며 살고 싶었지만 집과 학교가 있는 현실로 돌아갔다. 그들은 미래엔 함께 스키를 타게 탈 거라고 믿었다. 2부작인 「심장이 둘인 큰 강」의 닉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환경 오염된 도시의 강에서 송어 낚시를 했다. 그는 송어를 쉽게, 그리고 많이 잡는 방법을 알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인디언 마을」의 닉도, 「사흘간의 바람」의 닉도 마찬가지로 다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에게 아프리카는 좋았던 시절 가장 행복하게 지낸 곳이었다. 다시 시작해보려고 찾은 아프리카에서 그가 만난 것은 다리의 고통이었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눈 덮인 산이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의 젊은 여자는 죽 이어진 산을 보고 하얀 코끼리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사는 나에게 킬리만자로는 하얀 코끼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해리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봤고, 그곳으로 떠났다. 다리를 다친 그가 할 수 있는 건 절망하는 일밖에 없었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의 머콤버는 사자 사냥이 두려웠지만 물소 사냥을 하면서 댐이 터진 것 같은 흥분을 느낀 후부턴 사자 사냥에도 자신감이 가졌다. 새로운 삶은 늘 두려움이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을 통해 만나게 될 행복을 얻지 못한다. 머콤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머콤버 부인의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해리와 머콤버는 마지막 순간 행복했다.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그녀들에겐 통증의 시작이었을지라도.
“나는 카페에 밤 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하는 쪽이야.”
나이가 위인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131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의 카페를 찾았던 노인은 취하지 않으면 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야 내일이 온다. 잠들고 싶지 않다는 건 현재가 불안하다는 뜻이고 내일의 기대가 없다는 뜻이다. 「이제 내 몸을 뉘며」의 전쟁 속에 있던 나는 밤이라도 불을 켜놓은 곳에 있어야 했다. 「가지 못할 길」의 닉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깊은 밤, 잠을 자지 않고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을 찾아 헤매는 건 그럼에도 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의 가능성과 미리 안녕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밤을 같이 보낼 그들이 있는 한.
어린 시절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의 삶도 유쾌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삶은 그들과 다르리라 믿었다. 그러나 내 삶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불행했다. 행복을 꿈꾼다는 것, 때때로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는 말과 같다. 인생은 코를 찌르는 쿰쿰한 냄새와 꿉꿉한 기분을 견뎌야 하는 장마가 아닐까.「하얀 코끼리 같은 산」의 ‘그’와 젊은 여자는 기차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셨다. 무더운 여름밤 혹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맥주는 작은 행복이다. 지루한 장마를 견딜 수 있는 건 간혹 비추는 햇살 덕분이듯 현재를 견딜 수 있는 건 어쩌다 만나게 되는 소소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행복들과 재회했다.
“가을 폭풍이 오면 좋지, 안 그래?” 닉이 말했다.
“멋지지.”
“한 해 중 가장 좋은 때야.” 닉이 말했다.
(「사흘간의 바람」, 281쪽)
몸의 노쇠를 제외한 아이와 노인의 차이는 삶의 바늘이 미래를 향해 있느냐, 과거를 향해 있느냐이다. 어느 쪽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지금의 내 삶의 행복한가, 불행한가이다. 소설 속 그들은 우울한 삶 속에도 자주 행복을 느꼈다.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 어쩌면 정답일지도.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고 또 노인이 된다. 돈이 많아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녀도 영원불멸의 삶을 살 순 없다. 미래의 어느 날엔 그 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재는 그러하다. 간혹 성장이 멈춰 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이 있지만, 노인이 아이가 되진 않는다. 삶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된 소설을 읽으며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거꾸로 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소설을 읽는 자의 특권! 여행의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도 다음을 기다렸던 젊은 날의 헤밍웨이를 만났다. 그는 내게 말했다. 고통의 침잠보단 지금을 즐기라고. 통증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분투하며 사는 생은 결국 현재를 즐기는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