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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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노트북을 켜고 시작화면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빈 화면을 봤다. 낯익으면서 낯선 얼굴이 보였다.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주인은 바로 나다. 밤의 시간은 가면을 벗은 나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혹은 몇몇 친밀한 사람들에게 생각과 느낌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외를 느낀다. 제 생각과 느낌을 거리낌 없이 말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 혹은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침묵하면 비겁한 사람 혹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 된다. 재미가 없어서 웃지 않았을 뿐인데 유머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 재미있어서 웃었더니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직 나이고, 타인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말하기도 하고, 선배들에게 듣기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내가 이타심이 두드러진 사람 혹은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진 우리는 세상 속으로 숨어 은둔자로 살거나 세상 밖으로 나와 가면의 생을 살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가면의 생을 사는 건 ‘에밀 아지르’란 가면의 생을 살았던 로맹 가리 뿐은 아니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의 매스커레이드(masquerade)는 ‘가장’ 혹은 ‘가장무도회’를 뜻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을 통해 가면의 생을 사는,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생에 주목한다.

 

호텔을 찾는 사람 중엔 몰래 데이트를 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하는 유명인사도 있고 호텔 물건을 빼돌리기 위해 괜스레 클레임을 거는 이들도 있다. 닛타 고스케는 잠복근무를 위해 잠시나마 호텔리어의 생을 살고, 손님 가타기리 요코는 복수를 위해 시각장애인인 노부인을 연기한다.

 

세 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의문의 숫자 메시지가 남겨진다. 경찰은 숫자 메시지를 근거로 다음 범행 장소를 코르테시아도쿄 호텔로 예상한다. 닛타 경위를 비롯한 형사들은 호텔리어로 가장해 잠복근무한다. 닛타는 호텔리어 야마기시 나오미와 함께 프런트 데스크를 담당하게 된다. 직업의 특성상 의심부터 하고 보는 닛타와 손님의 말은 무조건 믿고부터 보는 나오미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그들은 서로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고 훌륭한 파트너가 된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은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복수를 행하진 않지만,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은 위험한 생각을 한다.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야 훌훌 털고 일어나 세상을 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악을 키운다. 구리하라 겐지는 과거 자신에게 상처를 준 닛타가 호텔리어가 된 모습을 보고 가면을 벗기겠다는 일념으로 시비를 걸어 괴롭힌다.

 

지금의 선(善)은 언제나 선(善)이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나오미로서는 최선이었으나 나가쿠라 마키에겐 최악이었다. 우리가 행한 선(善)은 오직 선(線)안의 선(善)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하다.

 

나가쿠라 마키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려는 목적으로 나오미에게 거짓말까지 했지만, 그녀는 들어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가쿠라 마키가 호텔을 예약해 잠복했다면 어땠을까? 닛타가 나오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녀를 믿고 사건의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에게 이벤트를 해주기 위해서라는 거짓말이 아닌 실제 자신의 사연을 나오미에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현명한 나오미는 뭔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매일 가면의 생을 살거나 내 속의 많은 나 중의 하나를 꺼내 그 모습이 오직 나인 것처럼 연기하며 산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말을 많이 한 날엔 기운이 소진된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하다. 한 잔의 맥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점점 작아져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닛타는 사과하는 구리하라에게 “세상에 너무 늦은 일 따위는 없다”고 말했다. 구리하라의 삶이 망가진 것은 아이들의 장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구리하라 스스로 자신을 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가면의 생을 살지언정 ‘나’를 잃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분명한 진실이다.

 

우둔한 몸짓을 지녔으나 수완가였던 형사 노세는 가면의 생을 사는 닛타의 가면에 가려진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활약하는 소설이 이미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남남커플이 활약하는 소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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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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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점은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가 말했다.

“이제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지.”

(「킬리만자로의 눈」, 9쪽)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삶이 쉬운 건 아니다. 다 건넜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다리가 보인다. 어쩌면 삶은 고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지난겨울의 끝자락,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많이 지쳐 있었던 나는 책을 통해 위로받았다. 생(生)은 분투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시간 이후 두 번째 계절을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노인과 바다』를 읽기 전의 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을 살고 있다. 나의 시계는 아이와 노인의 중간지점에 머물러 있다. 어떤 날은 내일을 꿈꾸고, 힘든 하루를 산 어떤 날은 내일이 다가올까 두려워 밤을 지새우고, 또 어떤 날은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산다. 슬프게도 내일을 꿈꾸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독특하게 작품발표 연도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뒤쪽으로 갈수록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에 쓴 이야기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헤밍웨이의 청춘들도 다르지 않다. 일자리는 구하기 어렵고 연인과의 미래는 자신이 없다. 다행히 청춘에겐 희망이라는 샴쌍둥이가 존재한다.「온 땅의 눈」의 닉과 조지는 스키나 타며 살고 싶었지만 집과 학교가 있는 현실로 돌아갔다. 그들은 미래엔 함께 스키를 타게 탈 거라고 믿었다. 2부작인 「심장이 둘인 큰 강」의 닉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환경 오염된 도시의 강에서 송어 낚시를 했다. 그는 송어를 쉽게, 그리고 많이 잡는 방법을 알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인디언 마을」의 닉도, 「사흘간의 바람」의 닉도 마찬가지로 다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에게 아프리카는 좋았던 시절 가장 행복하게 지낸 곳이었다. 다시 시작해보려고 찾은 아프리카에서 그가 만난 것은 다리의 고통이었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눈 덮인 산이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의 젊은 여자는 죽 이어진 산을 보고 하얀 코끼리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사는 나에게 킬리만자로는 하얀 코끼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해리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봤고, 그곳으로 떠났다. 다리를 다친 그가 할 수 있는 건 절망하는 일밖에 없었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의 머콤버는 사자 사냥이 두려웠지만 물소 사냥을 하면서 댐이 터진 것 같은 흥분을 느낀 후부턴 사자 사냥에도 자신감이 가졌다. 새로운 삶은 늘 두려움이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을 통해 만나게 될 행복을 얻지 못한다. 머콤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머콤버 부인의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해리와 머콤버는 마지막 순간 행복했다.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그녀들에겐 통증의 시작이었을지라도.

 

 

“나는 카페에 밤 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하는 쪽이야.”

나이가 위인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131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의 카페를 찾았던 노인은 취하지 않으면 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야 내일이 온다. 잠들고 싶지 않다는 건 현재가 불안하다는 뜻이고 내일의 기대가 없다는 뜻이다. 「이제 내 몸을 뉘며」의 전쟁 속에 있던 나는 밤이라도 불을 켜놓은 곳에 있어야 했다. 「가지 못할 길」의 닉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깊은 밤, 잠을 자지 않고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을 찾아 헤매는 건 그럼에도 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의 가능성과 미리 안녕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밤을 같이 보낼 그들이 있는 한.

 

어린 시절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의 삶도 유쾌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삶은 그들과 다르리라 믿었다. 그러나 내 삶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불행했다. 행복을 꿈꾼다는 것, 때때로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는 말과 같다. 인생은 코를 찌르는 쿰쿰한 냄새와 꿉꿉한 기분을 견뎌야 하는 장마가 아닐까.「하얀 코끼리 같은 산」의 ‘그’와 젊은 여자는 기차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셨다. 무더운 여름밤 혹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맥주는 작은 행복이다. 지루한 장마를 견딜 수 있는 건 간혹 비추는 햇살 덕분이듯 현재를 견딜 수 있는 건 어쩌다 만나게 되는 소소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행복들과 재회했다.

 

“가을 폭풍이 오면 좋지, 안 그래?” 닉이 말했다.

“멋지지.”

“한 해 중 가장 좋은 때야.” 닉이 말했다.

(「사흘간의 바람」, 281쪽)

 

몸의 노쇠를 제외한 아이와 노인의 차이는 삶의 바늘이 미래를 향해 있느냐, 과거를 향해 있느냐이다. 어느 쪽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지금의 내 삶의 행복한가, 불행한가이다. 소설 속 그들은 우울한 삶 속에도 자주 행복을 느꼈다.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 어쩌면 정답일지도.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고 또 노인이 된다. 돈이 많아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녀도 영원불멸의 삶을 살 순 없다. 미래의 어느 날엔 그 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재는 그러하다. 간혹 성장이 멈춰 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이 있지만, 노인이 아이가 되진 않는다. 삶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된 소설을 읽으며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거꾸로 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소설을 읽는 자의 특권! 여행의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도 다음을 기다렸던 젊은 날의 헤밍웨이를 만났다. 그는 내게 말했다. 고통의 침잠보단 지금을 즐기라고. 통증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분투하며 사는 생은 결국 현재를 즐기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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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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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들은 모두 교회를 다녔다. 그들은 나를 교회로 이끌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취했다. 약속 장소를 교회 주변에 잡아놓고 교회 일이 안 끝났다며 교회로 오라는 적도 있었고, 교회에 물건을 두고 왔다며 잠깐만 들리자는 적도 있었다. 교회에 들어가선 목사와 교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왜 하느님을 믿지 않느냐며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듣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들의 종교가 개신교(혹은 천주교)라면 종교를 갖지 않는 것도 나의 종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 좋았다. 종교의 유무가 친구의 조건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했으나 그들은 나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시선은 같았지만, 종교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이었다. 지금 내 주변에 신자들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이다.

 

『신 없는 사회』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 중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에서 태어난 필 주커먼이 비종교적인 국가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회를 관찰하고 연구한 후 사회의 발전은 종교적인 믿음과 무관함을 밝힌 책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서구 세계에서 진화론을 믿는 인구 비율이 가장 높았음에도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견진성사를 하고 교회세를 내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믿음이 아닌 전통과 관습, 그리고 낭만이었다. 현실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우리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가 많이 보인다. 세다가 포기할 정도다. 2005년 인구 센서스 집계에 의하면 불교 22.8%, 개신교 18.32%, 천주교 10.94%라고 한다. 무교의 비율은 46.48%라고 한다. 1994년엔 통계적으로 본다면 무교의 비율은 49.9%였다. 통계로 보면 대한민국은 신 있는 사회 쪽에 더 가깝다. 책엔 2007년에 발표된 세계평화지수가 실려 있는데 덴마크 3위, 스웨덴 7위, 미국 96위였다. 한국은 나와 있지 않아 따로 찾아봤더니 32위였다. 2011년 세계평화지수는 덴마크 1위, 스웨덴 3위, 한국 68위, 미국 73위다. 신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평화 지수 순위는 뒤로 밀린 이유는 뭘까? 신 있는 사회가 불행한 사회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신 있는 사회가 반드시 행복한 사회를 가져다주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필 주커먼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에 방해되지 않는 것 같다(58쪽)’고 말했다.

 

신이 없는 나라들이 모두 행복지수가 높은 건 아니라는 반대 의견에 대해 저자는 그 나라들에 종교가 없는 것은 무신앙의 강요, 독재의 결과였지 자유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신 있는 사회가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신이 없는 사회가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신의 뜻을 잘못 받아들인 인간들의 문제는 아닐까.

 

필 주커먼은 덴마크, 스웨덴의 종교를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N.J. 디머래스가 정의한 문화적 종교로 보았다. ‘문화적 종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현상에 참여하는 현상(261쪽)’을 말한다. 나 역시 점잖은 불가지론자이다.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여러 종교가 공통으로 설파하는 인류애의 실천에는 깊이 공감한다. 그릇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내게 가져다줄 이익 때문에 고민이 될 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기도 하며, 절망의 순간에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신 없는 사회』를 통해 행복한 사회는 신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부처님은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고 하셨다. 정확한 원인을 말할 순 없지만 내 주변에 그들이 있는 것은, 내가 그들과 인연이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호는 『시민K, 교회를 나가다』의 후기에서 ‘지금’과 ‘여기’에 대한 해석은 설교의 출발점이고 또 종착점이다(265쪽), 라고 했다. 신을 믿든, 진화론을 믿든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를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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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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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은 재미있으라고 던진 말에 상대가 큰 웃음으로 답할 때 성립하는 단어이다. 상대가 재미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 던진 말은, 상처받을 거라는 걸 확실히 알면서 던진 말은 농담의 가치를 상실한다.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으라고 던진 말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말을 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언어가 다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상대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이 전집의 형태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농담』이다. 루디비크는 어떤 일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떠나있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친구 코스티카가 알려준 이발소로 면도하러 갔다가 이발사가 된, 십오 년 전 사랑했던 루치에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십오 년이란 시간의 공백은 기억이 지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사람이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십오 년의 시간은 사랑했던 연인을 지우기엔 분명 짧은 시간이다. 그에겐 사랑이었으나 그녀에겐 찰나의 만남이었던 것일까?

 

사랑은 그/녀와의 많은 차이점은 무시하고 사소한 몇 가지를 공통점이 많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녀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애써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배반하는 게 맞지만, 배반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자기반성을 이끈다. 헬레나는 파벨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공산주의는 ‘사적 삶과 공적 삶의 일체(240쪽)’를 주장했지만 온전한 삶은 사적 삶과 공적 삶의 조화를 통한 균형적인 발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야로슬로프는 아들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들의 기마행렬’의 왕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 서운했다. 상대의 상황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상대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라며 원망하는 것은 미성숙한 사랑이다. 루비니크는 공적 삶이 준 부당함을 ‘순수’한 루비에의 사랑으로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 루비에는 루비니크를 받아들일 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아니 루비니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순수했다. 불행을 같이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문장은 한쪽의 불행이 다른 한쪽의 불행보다 적거나 없을 때 성립한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인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었다.)(56쪽)

 

루비니크는 자신이 마르게타에게 보낸 엽서의 농담을 읽고, 당과 대학에서 축출하는 것을 제안한 파벨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 헬레나를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가 파멸시킨 것은 파벨이 아닌 헬레나였다. 게다가 그녀는 삶의 농담 때문에 생을 구하지도 못했다. 오래전 나는 ‘혼란’은 청춘의 시기에만 통용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도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됐는데 그것은 시대가 나와 그/녀들 사이에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담이 통용되지 않았다고 하여, 타인에 의해 자신이 파멸됐다고 하여 타인을 파멸시킬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루비니크는 믿었던 자들에게 적으로 판단되어 유린당한 삶을 살았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또 다른 버림받은 자들을 짓밦는 모순을 자행했다.

 

삶의 아이러니랄까, 혹은 지독한 농담이랄까. 루치에는 루비니크의 친구 코스티카의 ‘경계 밖’ 애인이 되었다. 루치에는 고민 많은 인간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코스티카를 사랑했다. 코스티카가 루치에의 전부를 알고 있다는 믿음이 착각일지라도. 루비니크의 행위에 대해 동조하지 않지만, 동정은 한다.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은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391쪽)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삶의 정화(精華)는 내가 버림받았다고 해서 타인을 버리는 행위에선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는 상대를 파멸시키면서 이어져 왔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어져 오기도 했다. 『농담』은 읽고 나서 큰소리로 웃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절망의 시대를 살다 보면 삶에 대한 고민은 사치로 여겨지고 원망만 남는다. 자포자기의 생을 선택하거나 사랑으로 절망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올바른 삶도, 진정한 사랑도 아니다.

 

이 책은 절망의 시대라 할지라도 삶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추운 겨울이 계속되다 보면 봄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의심이 간다. 이미 경험한 봄은 기억되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왔다. 기다리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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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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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시작됐다. 봄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 것이고 따뜻한 봄기운 속에 추운 겨울은 잊힐 것이다. 봄에 취하고 싶어, 봄의 낭만과 환상 속에 빠지고 싶어 추운 겨울은 의도적으로 잊을지도 모른다. 동사 ‘잊다’와 ‘잊히다’는 주체가 누구냐에 달라진다. 2월초, 냉랭한 겨울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던 날, 그로인해 지독한 감기를 앓던 날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읽었다. 1987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 남긴 다섯 페이지 분량의 물음 중 몇 가지 물음에 대한 차동엽 신부의 답이 실려 있는 책이다. 종교를 갖지 않아 종교적인 색채가 짙지 않을까싶어 독서를 망설였다. 그런데 제목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기계발서들을 읽으면, 혹은 자기계발 강연을 보면 여러 책 중에서 고른 좋은 문장들이나 유명 인사들의 말, 기사들의 인용이 많다. 이 책도 그러했다. 질문은 종교적이라기 보단 보편적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으나 메모하고 싶은 좋은 말이 많았다는 것 외에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이 책은 잊혀졌다.

 

 

뉴스에서 삼성가 재산 소송 소식을 보는데 책장에 꽂인 이 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돈 때문에 가족도 죽이는 세상 아니던가. 2월이 끝나는 날에서 3월이 시작하는 날 동안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개인적으로 2월은 많이 힘들었던, 그래서 우울했던 시간이었다.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이 책에 별 감흥을 못 느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문제에 침잠하느라 다른 문제엔 관심을 가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잊혀진 질문을 나의 문제가 아닌 그의 질문, 혹은 당장의 생활과는 무관한, 삶을 여유를 찾은 후에 고민해도 되는 질문들로 여겼던 것이다. 다시 책을 읽으며 잊혀진 질문들은 그(들)만의 질문이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통에 직면하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내가 무슨 그리 큰 잘못을 저질러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신이 원망스럽다. 나 역시 그러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 신을 부정했다. 차동엽 신부는 신은 벌을 주는 분이 아니라고 했다. 누구도 내게 신이 벌을 주는(혹은 기도를 들어주는) 자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내 멋대로 그렇게 믿어놓곤 신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내 멋대로 판단했던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커다란 선물,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은 발전해가면 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집 근처에 의료기를 파는 매장이 있다. 노인들은 의료기를 무료로 사용하기 위해 출근하듯 매일 그곳에 간다. 많은 노인들이 자신의 돈으로, 혹은 자식들에게 졸라 의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오래 살고 싶은 자의 욕망을 보았다. 그들에겐 어떻게 사느냐의 고민보단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나는 그들이 왜 살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다. 의료기 매장에 들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사는 일이 너무 행복해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 혹은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서,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해서 남은 생은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 어쩌면 그들의 심연엔 죽음이 두려워 가능한 삶의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세상은 두렵다.

 

 

잊혀진 질문 중에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내가 처음 들은 지구의 종말의 해는 1999년이었다. 꿈은 자주 바뀌었지만 꿈을 꾸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꿈은 모두 1999년 안에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의 생을 생각한 적이 없던 나는 2000년이 되었을 때 당황했다. 1999년 안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있었고 그것을 하며 지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해왔다. 만약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당황보단 덤으로 얻어진 날들, 보상받은 날들에 대해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종말이 아닌 환희의 날로 기다렸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약간의 정보를 통해 얻은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삼성그룹의 창업주라는 것, 그래서 많은 것을 가졌던 자라는 것이다. 그는 25년 전 78세의 나이는 생을 마감했다. 요즘 평균 수명과 비교해도 그 나이의 죽음은 결코 짧은 생은 아니다. 미래의 일은 장담할 수 없으나 지금의 세상에선 영원한 삶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져도 마찬가지다. 삶의 욕심이든 회한이든, 오래 살았든 짧게 살았든 죽음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추측컨대 이병철 회장은 삶의 확고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려고 치열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의 질문은 대부분 신과 종교에 대한 물음들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들을 보며 지나온 삶을 회고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었던 한 인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남긴 질문의 답을 직접 듣지 못했다. 그의 삶의 이력으로 보아 타인에게 질문을 던져두고 궁금해만하다가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답을 찾았을 것이다. 그의 지난 삶은 차동엽 신부의 표현을 빌리면 ‘계획농법’의 삶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차동엽 신부의 표현으로 ‘유기농법’ 내지 ‘태평농법’의 삶을 살리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남겨진 가족에게 바란 꿈도 ‘계획농법’ 혹은 아우성의 삶이 아닌 ‘꿈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품고 있되, 확실하게 ‘큰 방향’을 잡은 다음,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358쪽)'는 삶은 아니었을까. 잘 모르지만 적어도 가족끼리의 소송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앞에 없는 사람』의 시인 심보선은 ‘시인의 말’에 ‘詩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라고 적었다. 잊혀진 질문에 대해 차동엽 신부는 일일이 답을 해주었다.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몇 가지는 아직 공감이 안 된다. 그의 답은 최선이지 정답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공감했으나 다른 날엔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해 평생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미혹되지 않는, 견고한 생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미혹되어야 할 것은 봄바람과 꽃향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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