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 이주은의 벨 에포크 산책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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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시선이 향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느 날의 내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이주은의 그림 에세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에 관심이 간 건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11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한 예쁜 산책길을 만나며 했던 생각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는 그녀의 모습이 담긴 표지그림 때문이었다.

 

표지그림은 에리크 베렌스키올의 『기억』이다. 표지그림은 전체 그림의 반이었다. 책 속에서 전체 그림을 보고 그녀의 맞은편엔 또 다른 그녀가 앉아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뒤표지엔 그림의 나머지 반, 자는 듯 눈을 감은 또 다른 그녀가 있었다. 이주은에 의하면 두 사람은 자매 사이로 눈을 감은 그녀는 화가의 아내로, 화가 수업을 받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화가의 삶을 접었다고 한다.

 

정원을 내다보며 손으로 턱을 괸 오른쪽 여인은 그녀의 언니이다. 자매는 각각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은 눈을 감는 것으로 ‘지금’을 애써 유지하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먼 곳을 바라봄으로써 ‘여기’를 부정한다. 자신에게서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는 여인과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는 여인이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105쪽)

 

언니의 ‘지금-여기’의 삶은 기록되지 않았다. 아마도 동생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보통 여자들의 삶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한쪽은 익숙한 현실에, 한쪽은 불확실한 바깥 세계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기차는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른쪽에 앉은 언니가 보는 세계는 앞의 세계지만 왼쪽의 동생이 보는 세계는 뒤의 세계이다. 아직 모르는 세계와 이미 알고 있는 세계. 두 사람이 자리를 바꿔 탔다면 어땠을까. 삶의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삶은 자신이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삶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화가가 두 자매의 모습을 그린 것은 그녀들에게서 자신의 양면성, 현실 안주와 일탈 두 모습을 봤기 때문은 아닐까.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시대가 세기말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의 부제는 ‘이주은의 벨 에포크 산책’이다. 이주은은 그림과 문학을 통해 유럽의 세기말로 들어가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봤다. 내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구경꾼이 되었고, 가지 못한 길 또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진실과 기억 사이에 혼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은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보다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세기말엔 '그'보다 '그녀'들이 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는 유럽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세기말을 가리키는 말로 ‘아름다운 시절, 좋은 시절’이란 뜻이다. 문명의 발달로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나 존재했던 것들의 사라짐,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마음은 공허했던 시절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절대로’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절대’라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으며, 설사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이에 수많은 변수가 개입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정답을 염두에 두고 살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정답을 찾지 못한 채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단 하나의 정답이란 결국 죽음밖에 없기 때문이다.(181쪽)

 

지금은 세기말은 아니지만 세기말이라는 시간을 지우고 보면 세기말 그들의 삶은 지금-여기 우리의 삶과 많이 다르지 않다. 현실의 버거운 삶 앞에 미래의 꿈은 싹조차 피우지 못한 채 사라지지 십상이고 삶의 가치는 돈 앞에 쉽게 무너진다. 옳고 그름은 헷갈린다. 헷갈린다면 애써 찾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거짓이 되는 현실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기보단 매 순간, 훗날 후회를 덜 하게 될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이주은은 세기말이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이유에 대해 ‘불확실성이 모호하고 불안한 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잠재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양성과 잠재성은 새로운 시대 21세기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불안하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다.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불안해도 내일은 온다. 우리는 '그들'의 내일을 살고 있지 않던가. 지금의 불안은 나만의 불안은 아니라는 것과 내일의 나를 조금 더 완성해 줄 거라는 확신은 짙은 불안을 조금은 가시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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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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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려면 우선 상처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상처의 원인은 자본주의, 정확히 말하면 돈을 근저로 한 자본주의적 삶이다.

 

살기 어렵다, 는 말에는 돈이 없어 제대로 소비할 수 없다는 말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적 삶이 흥미롭다면 단순한 소비가 아닌 소비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소비의 즐거움을 완벽히 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삶에 만족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부제는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이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자본주의 삶의 편린을 이해하고 ‘소비사회의 유혹적 논리’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는 문제와도 상통한다.

 

화려한 불빛 아래 매혹적인 모습으로 유혹하는 상품들을 뿌리치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방법은 노동 혹은 어떤 수단을 통해 돈을 벌어 소비하는 것뿐이다. 노동하고 소비하는 반복적 삶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노동하는 삶은 자유를 빼앗고 몸의 피로를 가져오지만 상품을 향한 욕망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삶의 편린을 이해한다 해도 소비사회의 유혹적 논리에 상처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강신주는『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의 문학가 4인과 사상가 4인(이상과 게오르그 짐멜, 보들레오와 발터 벤야민, 미셸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유하와 보드리야르)를 연결한다. 문학자들의 작품과 삶을 통해 자본주의적 삶의 상처를 드러냈다면 사상가들은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자본주의적 삶의 문제를 찾았다.

 

이상은 자본주의의 핵심을 돈의 논리에서 찾은 작가였고, 게오르그 짐멜은 화폐경제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돈에 대한 항구적인 열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결여에 대한 상처는 타인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피해의식으로 변질한다. 보들레오와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파리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적 삶의 근원을 ‘욕망의 충족을 미룬 우리의 의지’에서 찾았다. 투르니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로소』를 패러디한 『방드리디, 태평양의 끝』을 통해 타자의 삶을 통해 변화하는 로빈슨의 모습을 그렸다. 투르니에에게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노동의 주체가 아니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진단하면서 자본주의의 환상을 깨며 주체적 ‘가능성의 장’으로의 미래를 제시한다. 유하와 보드리야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문화에 현혹된 인간들의 모습에 포착했다.

 

책 속의 문학가와 사상가들은 문학작품 속에서 자본주의적 삶을 사느라 상처받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곧 우리 자신이었다. 노동하고 소비하고 노동하고 소비하는 악순환 또한 끊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해부한 사상가들이 주장이 아니더라도 돈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상투적인 답일 수 있지만 악순환을 끊는 주체, 소비에 대한 욕망을 줄일 수 있는 주체는 행복한 미래를 갈망하는 자신 혹은 사회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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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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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28쪽, 첫 문장)

 

빠르게 다가간다, 에는 주체의 목적지를 향한 기대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다가가는 곳이 검은 강이다. 목적지가 어떨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가간다는 건 그곳 외엔 딱히 갈 곳이 없거나 그곳을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의 네드라는 스무 살에 비리와 살기로 운명 지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 전, 그리고 후에도 자기가 사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울타리가 주는 안전함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쪽이었다. 누군가 가지 못한 세상을 들려준다면 판타지와 열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진실을 얘기해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순간 절망할지라도.

 

사랑은 불확실한 감정이다. 결혼한다고 해서 확실시되는 건 아니다. 불확실한 감정이 무뎌지는 것일 뿐. ‘너’를 위해 사는 건 당연하다고, ‘너’는 나를 위해 살 거라고 믿었던 삶은 아이들을 위한 삶으로 변모한다. 아이들을 위한 삶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지만, 누군가에겐 간절히 살고 싶은 삶이지만 네드라처럼 평생 ‘평범한 삶’으로 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내 삶이 소멸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나 남편의 처지에서 자신을 엄마가, 아내가 타인이라고 규정한다면 서운하겠지만 ‘나’가 아닌 모두는 ‘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소설은 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시대적 상황이 지금과 다른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결혼한 여자들의 삶은 남자들의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의 아이들을 다 키워낸 내 어머니는 아이들의 아이들인 손주들의 삶에 갇혀 있다. 걸음을 배우고 말을 배워가는 아이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당신의 삶이 소멸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네드라는 깨어 있었다. 팔꿈치 한쪽을 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이 지독한 냄새는 뭐지?” 그녀가 말했다. “핫지? 너니?”

개가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거기서 나가.” 그녀가 소리쳤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명령했다. 결국 귀를 내리고 개가 걸어 나왔다.

“비리.”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창문 좀 열어줘.”

“그래. 뭐야?”

“당신의 망할 놈의 개.”(94-95쪽)

 

‘지독한 냄새’의 근원은 ‘당신의 망할 놈의 개’가 아닌 ‘당신이 매혹당한 그 여자’일 게 분명하다. 그녀가 시간이 흘러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엔 그날 맡은 냄새도 한몫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삶의 균열들은 냄새로 좀 더 커졌을 것이다. 책장을 들여놓을 공간이 부족해 책탑을 쌓았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한두 권씩 떨어졌으나 정리할 시간이 없어 올려두기를 반복했다. 균열을 알았으나 외면했다. 우르르 책탑이 무너졌다. 균열의 끝은 붕괴였다. 아이는 자라 자신의 삶에 눈을 뜨고 남편이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처럼 ‘그녀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네드라는 원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속하지 않는 오직 나만의 삶을.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무너지는 삶을 회복하고 싶은 의지가 아닐까.

 

아이는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갑자기 가벼워졌다. 훨씬 가벼워진 채로, 무서울 정도로 사소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떠났다. 순진무구한 삶, 울음, 아버지와 의무적인 놀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이 모든 것이 무게가 있었다. 그것들은 떠나가고 용해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119쪽)

 

다리가 하나뿐인 소녀 모니카와 그녀 아버지의 죽음은 네드라에게 삶의 사소함을 가르쳐주었다. 인생의 여름을 보낸 네드라와 비리는 가을,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여행을 떠났던 비리는 리아를 만났고 그녀와 새 삶을 시작했다. 혼란의 시절 네드라의 위안이었던 정원사 지반은 “우리 삶이란 게 항상 다른 사람의 손안에 있지.”(124쪽)라고 했다. 제임스 설터는 반복적으로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이브는 삶을 가볍게 여겼지만 혼자 있는 삶은 두려웠다. 다정해도 남편은 될 수 없는 아노드 대신 전남편과 재결합을 고려한 것은 타인 없이 살 수 없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검은 강을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은 판타지 혹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이다. 그럼에도 검은 강에서 살거나 떠나는 것. 그동안의 나는 떠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살아왔고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삶의 경험들이 알려준 것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었기에.

 

그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강 쪽으로 걷는다. 그의 양복은 너무 덥고 꼭 꼈다. 강가에 닿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부부가 있다.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가 끼었다. 그 넓고 어두운 강, 그 둑에 온 것이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긴 하루였고, 끝없는 오후였다. 친구들은 떠나고 우리는 강변에 서 있다.

그래, 그가 생각했다. 나는 준비됐고,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 마침내 준비가 되었다고.(436-437쪽, 마지막 문장) 

 

다만 죽음으로 가벼워질 운명이라면 현재의 생을 좀 가볍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산다는 건 삶을 낭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균열 아니 붕괴의 조짐을 보고도 그 안에서 버티는 생은 무모하다는 뜻이다. ‘떠남’의 삶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떠나야만 알게 되는 사실 또한 있는 법이다. 한 가지, 자유는 외로움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깊은 밤, 앞 머리칼이 자꾸 눈을 찔러 가뜩이나 부진한 독서를 방해했다. 책상에 가위가 보였다. 싹둑! 마음에 들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럭저럭 괜찮군. 아니야 내일 미용실에 갈 걸 그랬어.” 후회해도 소용없는데 마음은 자꾸 중심을 잡지 못한 저울처럼 왔다가갔다가 한다. 미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매혹적인 문장을 읽는 독자처럼 책에 눈을 떼고 숨 고르는 일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삶은 늘 고통이다. 삶에 중요한 것은 회복 의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그녀는 타인의 눈에 불쌍해 보이고 불행해 보였을지 몰라도 삶에는 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게 돼 있다. 삭막한 나뭇가지도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필 것이다. 봄을 만나기 위해 이 여름, 겨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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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대왕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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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베를린은 한때 우리처럼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수도다.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베를린 대왕』 곳곳엔 한국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작가 호어스트 에버스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이 같은 분단국가였기 때문인지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베를린 대왕』에 관심이 간 것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코믹 스릴러!, 라는 광고문구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젠가 서울의 모습일지도 모를 베를린이란 도시에 관한 관심 때문이기도 했다.

 

『베를린 대왕』은 카르스텐 라너 경감이 두 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나흘간의 다양한 소동을 그린 소설이다. 스릴러 소설에선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명석한 두뇌 혹은 감각으로 조각난 단서들을 근거로 범죄동기와 범죄자를 찾으려는 형사 혹은 탐정이 등장한다.『베를린 대왕』 역시 다르지 않다. 북독일의 도시에서 베를린으로 전출된 라너 경감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라너 경감을 돕는 카롤라 마르코비츠와 림쇼프 전 경감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스릴러 소설에선 피가 난무하는 잔혹한 살인이 발생하는데 『베를린 대왕』에서 벌어진 사건은 잔혹하지 않다. 개인적으론 잔혹하지 않아서 맘에 들었다.

 

두 달 전 쥐약을 개발했던 에르빈 마칼리크의 죽음 이후 곳곳에서 쥐떼들이 출몰 했고 그것은 베를린의 골칫거리였다. 나흘 후엔 베를린 시장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10년 동안 시장, 어떤 의미에서 베를린 대왕이었던 토마스 코펠베르크에겐 다시 시장으로 당선되기 위해선 쥐 출몰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토마스 코펠베르크가 밝음의 베를린 대왕이었다면 에르빈 마칼리크는 어둠의 베를린 대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르빈 마칼리크의 문제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있었다.

 

소설은 대왕이 실존하지 않는 현재 베를린을 배경으로 영원한 베를린 대왕을 꿈꿨던 한 인간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감추고 살아가는 정·재계 인사들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진실보단 자신의 자리가 중요한 사람들이 어찌 이들뿐일까. 베를린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건을 은폐하거나 드러냈다. 범죄 동기는 있어도 범죄가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다면 아직 범인은 아니다. 보통은 사건을 은폐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은 잔인하기 마련인데 이들의 방식은 어설퍼서 웃음이 났다.

 

『베를린 대왕』의 인물들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악인이라고 규정하기도, 범인을 쫓는다고 해서 선인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웠다. 베를린 대왕을 꿈꿨던 에르빈 마칼리크에겐 전쟁의 경험으로 말미암은 공포와 상처가 있었다.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면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이해가 되었다.

 

에르빈 마칼리크의 아들 중 한 사람인 헬무트는 묘비명에 ‘이제 모든 것은 다 상관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안녕!’이라고 새겨지길 원했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상관하지 않고 무심하게 살아가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호어스트 에버스는 도시를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라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든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그들’의 엉뚱함에 웃음이 났고 ‘그들’의 이기심에 씁쓸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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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문학으로서 삶
알렉산더 네하마스 지음, 김종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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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경험상 책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이 도착하기 하루 전 다른 책들이 담긴 택배 상자가 도착했는데 그 안에 <니체전집>의 소개가 담긴 팸플릿이 들어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니체의 책들, ‘니체’를 쓴 책들을 읽을 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팸플릿에서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니체의 책들은 다양한 스타일(혹은 모호한 태도)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역자에 의하면 니체 자신도 오독 되리라는 사실, 오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철학 교육과 강의로 잘 알려진 학자이자 『한 권으로 읽는 니체(What Nietzsche really said』의 저자이기도 한 한 로버트 솔로몬은 『니체 문학으로서 삶』에 대해 ‘놀라운 작품, 니체에 대해 씌어진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했다. 이 책은 약 이십 년 전, 1994년에 같은 역자에 의해 출간된 적이 있다. 역자에 의하면 이번에 출간한 책은 기존의 ‘원문 충실’한 번역과 달리 ‘의미 전달’에 초점을 맞추어 재번역했다고 한다.

 

막연히 읽고 싶던,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았던 스무 살 무렵『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펼친 적이 있다. 읽었다, 가 아닌 펼친 적이 있다고 쓴 이유는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끝까지 읽지 못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 이후로 ‘읽어야 하는데’와 ‘읽을 수 있을까’의 마음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세상에서 출간된 <니체 전집>은 모두 21권이다. 니체의 책들도, 니체의 책들에 관해 쓴 책들도 읽지 못한 상태 그러니까 이 책이 ‘니체에 대해 씌어진 가장 뛰어난 책’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니체 문학으로서 삶』을 읽었다. ‘니체’를 완전히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하니 네하머스의 해석 역시 불확실함을 내포하고 있지만 니체에 무지한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니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니체에게 자신의 글은 하나의 큰 세계를 이루는 작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니체는 경구를 즐겨 쓰며 과장법을 썼다. 네하머스는 ‘과장은 독자가 텍스트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한편 독자가 그와 논쟁을 벌이도록 만들어 준다.(69쪽)’고 했다. 네하머스에 의하면 니체의 원근법주의에는 ‘진리와 지식의 가치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야기(85쪽)’되었거나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해석일 따름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에 나타난 견해(85쪽)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부분은 모여 전체를 이룬다. 부분은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부분을 알려는 노력, 특정한 삶을 알려는 노력, 사건을 재해석하는 일은 진정한 삶을 이루는 조건이 되거나 새로운 진리를 만든다(혹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니체에게 부분은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상호연관된 엄청난 대상들의 총합이다(183쪽).

 

“창조자들이여 그대의 삶에는 가슴 아픈 죽음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순간성의 대변자이자 옹호자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창조자는 동시에 아이를 잉태하는 어머니로서 출산의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133쪽)

 

니체는 다양한 눈들과 많은 생각이 결합하어 하나의 진리, 좀 더 완벽한 세계, 풍성한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니체에겐 ‘절대’라는 단어는 없는 듯 보인다. 같은 세상, 그것도 비극의 세상이 반복된다 해도 그것이 같은 세상일 수 없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한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독단주의를 비판했던 니체는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듯 독자들도 자신의 판단, 자신의 견해를 갖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삶의 양식이 바뀌기를, 독자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란 말은 ‘너 자신에 대해서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209쪽)’는 말과 같은 뜻일 것이다. 이 말은 삶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라는 말로도 읽힌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문장은 현재의 삶은 나의 판단과 책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말은 아닐까. 부분인 ‘나’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며, 부분의 ‘나’들이 변한 세계는 기존의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일 것이다.

 

네하마스의 책으로 ‘니체’에 한 발 담근 내가, 권력의지, 영겁회귀, 자아의 본질 및 도덕의 비도덕적 기원과 같은 관점들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니체’를 ‘나만의 니체’로 받아들여 나만의 삶을 창조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확실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긍정해야 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읽기 어렵지 않지만 니체에 무지한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한편으론 니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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