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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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월은 기억을 삭제하고 왜곡하고 변형한다. 1910년 8월 29일은 한일 합병 조약이 맺어진 날로 나라를 잃어버린 날이다. 이날은 이 땅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잊어서도 안 되는 날이다. 『검은 모래』는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4·3사건은 광복 이후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민중항쟁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폭도로 몰려 희생당한 아픈 역사이다. 『검은 모래』는 생의 버거움 앞에 울분조차 터트리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 떠돌았던 사람들을 다룬 소설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날로부터 나흘 후 우도 동쪽의 조일리라는 검은 모래(제주도 사투리로 검멀레) 해안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조선인이었으나 조선인으로 살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여자아이의 이름은 구월이었다. 구월에 태어나서 구월이라니 그야말로 얼렁뚱땅 정해진 이름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난 보통의 여자아이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운명은 잠녀로 예정되어 있었다.

 

『검은 모래』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의 긴 시간을 다루는 소설로, 구월에서 해금, 켄과 미유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가족사와 한때 그들과 관계를 맺었으나 헤어져야 했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픈 해금을 만나기 위해 미야케지마로 돌아온 미유의 현재와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구월에서 해금과 기영, 켄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삶과 재일한국인으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켄과 미유의 일상이 교차로 펼쳐진다.

 

그들의 가족사는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흘렀다.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이 땅의 운명과 별개일 수 없음을 증명하듯. 나라를 잃어버린 해 태어난 구월은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생애를 마치기 며칠 전 첫 출가 물질을 나갔다.

 

죽음의 땅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었다. 검게 녹은 불모의 대지를 헤집고 비 온 뒤 죽순이 솟듯 새싹들이 움튼다. 뱀 대가리처럼 생긴 연한 갈색 포자낭이 서로 키를 재며 쭉쭉 뻗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자연의 경이이며, 그 어떤 모진 환경도 견뎌내는 생명의 숭고함이다. 우악스럽도록 질긴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식물은 홀씨를 퍼뜨리며 제 깜냥대로 생존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시키에서 제일 먼저 돋아난 생명이 바로 이 쇠뜨기였다.

(126쪽)

 

구월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한반도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자 남편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나가사키에 갔다. 그러나 그곳은 폐허의 땅이었다. 폐허의 땅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쇠뜨기였다. 끝의 순간에도 다시 시작하는 힘, 그것은 생명의 숭고함이었다. 바닷물에 휩쓸려 흩어지는 모래의 운명과도 같았으니 사랑하는 이들과 오랜 시간 함께하는 삶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럼에도 해금이 바다에 구월을, 한국전쟁에 한태주를 잃고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새 생명, 건일 때문이었다.

 

해금이 태어난 1931년에는 복목환이 자주운항을 시작했다. 해금의 동생 기영이 태어난 1937년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1941년 12월 7일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해이다. 1941년 해금의 가족은 미야케지마 섬에 도착했다. 휴전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여전히 진행형임을 뜻한다. 구월은 휴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있던 해에 사망했다. 나라를 잃은 해에 태어나 나라를 다시 찾자마자 두 나라로 쪼개지는 불운을 겪고 이 땅이 아닌 곳에서 죽은 구월의 운명은 자식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광복이 되고 전쟁이 끝났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기영이 할 수 있는 이른 북한으로 가는 귀국선을 타는 것뿐이었다. 1963년 역도산의 사망과 더불어 해금의 아들 켄은 마음에서 건일을 죽였다. 그것은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의 운명 탓이었다. 미야케지마 섬은 드문드문 대분화가 있었다. 켄(건일)의 딸 미유는 대분화로 끊겼던 여객기 운항이 재개된 1982년에 태어났다. 2002년 6월은 한일월드컵이 있었던 해로 미유에겐 사랑하는 지로에게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고 상처받은 해였다.

 

섬이란 제한된 공간의 생활은 도시 생활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너무 많다. 공간은 자유조차 구속한다. 섬에서의 시간은 제한된 공간보다 더 사람을 숨 막히게 할 때도 있다. 유배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섬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미유가 만난 섬사람들은 바다를 닮았다. 그들은 담아가면서 사는 삶보다는 덜어내면서 사는 삶에 익숙하다. 중요하고 귀한 것을 많이 가지지 않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언제 또 화산을 품을지 모른다. 가진 것 전부를 다 잃을지도 모른다. 화산섬이 그들을 내치려고 아무리 포악을 부려도 그들은 화산섬을 떠나지 않고 모여 산다. 어디를 간들 제한된 인간의 삶이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무너지면 다시 세우고 파이면 메우면 되는 것을. 그러니 속절없는 인생, 파도에 훨훨 씻어가며 산다.(324~325쪽)

 

구월의 가족들은 디아스포라이자 마이너리티였다. 어느 땅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구월이란 이름에서 세월(歲月)이 그녀를 구원(救援)해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해금은 제주를 닮은 그 섬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긴 여행을 끝내고 정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금의 한자는 바다의 금, 바다에서 빛나는 존재라는 뜻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대분화로 사람들은 섬을 떠났으나 해금은 섬을 떠나지 않고 민박 아리수를 운영했다. 떠나온 자였던 그녀는 떠나온 자들에게 머물 공간을 내주는 일을 했다. 미유는 해금의 뜻을 이어갈 생각을 했다.

 

삶은 영원하지 않지만 구월에서 해금, 켄과 미유,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이어온 이 땅의 미래가 미유(美流), 아름답게 흐르길 바란다. 미유의 한자 역시 멋대로 추측이다.『검은 모래』는 슬프고 아픈 역사를 다루고 있음과 동시에 내일의 희망을 다룬 소설이기도 했다. 불안한 날들이 계속될지라도 생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삶의 정답일지도 모른다. 함민복 시인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지만 폐허 속에도 꽃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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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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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의 작품을 읽은 일은 당분간 자제하자고 생각한 건 궁금한 작가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권의 소설로 만난 김연수는 내게 궁금한 작가는 아니었다. 당연히 신작『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독서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11월의 어느 날, 첫눈이 내릴 것처럼 흐른 날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예약판매 중인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고 구매버튼을 눌렀다. 책을 기다리는 동안 무척 설렜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삼십대의 막이 내려가고 있던 그 시절, 나는 단테가 「지옥편」을 시작하면서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어두운 숲에 처했었네”라고 노래할 때의 바로 그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159쪽,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엔 모두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다는 뜻일까.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혹은 주변의 사람들)은 암을 포함한 질병을 앓고 있거나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폐허의 삶을 살고 있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파멜라 이모의 남편 폴은 췌장암을 앓았다. 연인이었던 정감독은 시한부였던 걸로 보아 암이었을 것이다.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의 엄마 역시 암으로 죽었고,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의 2009년 봄 ‘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던 노작가 정대원 모두 암 투병 중이었다. 「우는 시늉을 하네」의 영범의 아버지와 ‘천재소년 바이올리니스트’ 인구의 아버지는 폐암이었다. 암이 많다는 건 더 이상 암은 개별적인 고통이 아니라는 뜻일까.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 고통(혹은 공포)의 터널 속에 있었지만 갇히지 않았다.「벚꽃 새해」의 성진은 서른 살이었던 2009년 봄이 폐허의 시간이었고 성진의 전 여친 정연에겐 서른 살이 된 지금이 폐허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성진은? 서른 살 정연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깊은 밤, 기린의 말」에선 발달장애아를 아들로 둔 부모가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가족은 알게 되었다. 어둠 속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일기예보의 기법」의 아빠는 첫 데이트에서 어둠이 싫다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빨간 랜턴을 샀었다. 엄마의 생일이기도 한 대보름에 소원을 빌기 위해 뒷산으로 갈 때도 아빠는 랜턴을 들었다. 아빠의 죽음 후 미경이 엄마의 남자가 된 닥터 강이 빨간 랜턴을 들자 난리를 친 건 당연했다. 실제 보름달을 보러 갈 때 빨간 랜턴은 별 소용도 없는 불빛이었음에도. 그런데 정말 소용없는 불빛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28쪽, 「벚꽃 새해」)

 

정연이 과거의 자신을 잊고 새롭게 살고 싶어 과거 성진에게 선물했던 명품시계를 찾으러 왔다가 찾지 못하게 되자 헛된 시간만 보내 한심하다며 진열된 토용이라도 사고 싶다고 하자 시계전문점 정시당 주인이 한 말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파멜라(팸) 이모는 과거 영화배우 차정신이었을 시절 정감독과 서귀포의 함석지붕 집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었다. 그 시간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기를 잃었지만 불행하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빗소리가 ’사월에는 미 정도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90쪽)던 걸 들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었다. 파멜라에게 그 시간은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살고 싶은 시간이었다.「우는 시늉을 하네」에서 소설을 읽지 않는 아버지가 ‘늦여름’을 최선을 다해 읽고 밑줄을 쳤던 것은 소설가인 어머니와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다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 영화감독이자 암 환자인 그가 푸른색 만년필로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의 정대원은 24번 어금니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파란 볼펜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 알고 있던 것이 진실이 아닌, 비현실이 현실인 그 상황을 정대원, 그리고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삶에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시간.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의 엄마는 딸 덕분에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었다. 「동욱」은 거대한 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우리를 보는 것 같아 아픈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관계’ 때문에 위로가 되는 소설이었다. 김연수는 말했다. 삶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게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과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파주로」는 당신은 비록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당신’을 잊지 않고, ‘당신’이 보여준 빛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라는 작가의 고백으로 읽혔다.「일기예보의 기법」에서 미경은 여자친구와 이별한 세진을 위로하기 위해 당연히 비가 내림에도 첫눈 예상이라는 일기예보는 내보낸다. 사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이 일기예보의 기법일 것이다.

 

바이올린의 소리는 겉에 칠하는 바니시가 결정하기 때문에 그는 그 맛을 알아야 했다. 소리와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표면을 맛봐야 한다는 것. 바로 그 사람을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이다. 본질은 표면에 있었다. 그렇다면 표면을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의 삶이라고 하더라도 깊이는 있지 않겠는가?(289쪽,「인구가 나다」)

 

한 해가 저문다. 새해가 되면 계획을 세우고 다시 희망을 품을 것이다. 늘 그러했듯이. 김연수는 고통의 끝에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간 속으로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삶은 달라지지 않고 그것은 곧 절망일지라도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다면 덜 외로울 것이다. 함께하는 삶은 부유(富裕)하지 않더라도 부유(浮遊)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함께 하고 기억한다면 삶에 헛된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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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프로젝트
그레임 심시언 지음, 송경아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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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뭐냐는 물음에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하지 못하는 것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동안의 나의 사랑이 그러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가 아닌 너는 나를 위해 왜 그것들을 하지 않았는지 원망하며 보냈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내게 ‘사랑하고 싶다’는 ‘사랑 받고 싶다’와 동의어였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건 다른 차원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사랑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사랑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은 한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만든다. 이성적 판단을 내릴 틈도 없이 찰나에. 사랑에 빠진 이들의 마음엔 내가 모르는 내가 살고 있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로지 프로젝트』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돈 틸먼은 39세로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지적이고 부교수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평균 이상의 수입이 있는 남자다. 거기에 요리까지 잘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이만하면 꽤 좋은 조건이다. 하긴 조건을 갖춘 남자에게 나이쯤은 흠도 아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연애 DNA가 부족했다.

 

돈 틸먼은 결혼을 결심하고 설문지를 통한 ‘아내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설문지 조사를 통해 자신과 맞지 않은 여자들은 소거해 나간다. 그는 친구이자 심리학 교수인 진이 어떤 내기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보낸 로지를 ‘아내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 지각에 운동 부족, 요리 실력 꽝에 바 메이드란 직업까지 ‘아내 프로젝트’에 결격 사유가 많다. 돈 틸먼은 로지를 다시 볼 확률은 제로라고 생각했지만 로지를 다시 만날 이유를 찾고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는 연애DNA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의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는 임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지도.

 

이후 이야기는 돈 틸먼이 길러진 아버지에게 실망한 로지의 생물학적 아버지 찾기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시간관념이 투철하고 효율적 삶을 정당화하는 그는 로지의 아버지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스케줄을 쓴다. 그것은 혼란이지만 그는 거부하지 못한다. 급기야 엉망이 된 스케줄을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로지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사실 로지는 돈 틸먼이 생각했던 것만큼 결격 사유가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로지가 남자들의 눈에 결격 사유가 많은 여자로 보였던 것은 대상화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본지 오래됐다. 로맨틱 코미디 소설은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겨울에 어울리는 연애 하면 제일 먼저 영화 <러브 레터>가 떠오른다.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보려고 DVD를 찾아 책상에 놓았다.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릴 거라고 했다. 폭설이 내리면 길부터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좋다. 왠지 기분 좋은 이들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겨울 돈 틸먼의 연애 이야기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슴 아프거나 머리 아픈 심각한 사랑과는 안녕!, 하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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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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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와 소멸의 차이를 생각한다. 전자가 존재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라면 후자는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곳엔 논이 있었고 빨래터가 있었다. 그 겨울, 꽁꽁 언 논에서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썰매를 타고 놀았었다. 지금 그곳엔 고층 아파트가 있다. 잊을만하면 스멀스멀 코끝을 파고드는 악취로 인해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악취가 진동했던 쓰레기 매립장엔 공원이 들어선지 오래다. 그곳에서 20분 거리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사라진 것들이 아쉽고 새로 생긴 것들이 반갑다. 멸(滅)과 생(生) 사이에서 길을 헤맨다. 슬픔과 기쁨이 수시로 교차한다. 조울증 환자처럼.

 

내가 사는 동네의 오랜 화두는 재개발이다. 누군가는 ‘지랄개발’이라 하고 누군가는 재개발만이 살 길이라 한다. 한동안 부동산이 난립했지만 무산됐다는 말이 떠돈 이후 몇 곳만 남고 자취를 감췄다. 빈집들이 많지는 않지만 하나 건너 고물상, 하나 건너 설비 가게다. 동네는 그렇게 점멸하고 있다. 재개발만이 회생일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살면서 이토록 많은 ‘씨발’을 만난 적은 처음이다. ‘씨’는 가끔 내뱉었지만 ‘발’까지는 참았다. ‘발’까지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더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시계 토끼를 따라간 세상은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그곳이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자 부랑자로 살아가는 앨리시어의 소년 시절 세상은 부랑자로 살아가는 삶과 다르지 않았다. 앨리시어에게 이상한 나라는 깨어나면 사라지는 꿈이 아닌 진행 중인 현실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꿈이고 앨리시어는 지금 깨어나지 않는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모른다.

 

사회에 대한 부모의 불만이 아이에게로 옮겨졌다 해도 아동학대는 답이 되지 않는다. 부모의 불행이 자신들을 만들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앨리시어의 늙은 아버지는 말했었다. 목숨은 모두 가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가치가 있단 말이다.(51쪽)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내 그릇된 행동은 언제나 정당하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야만적인 세상보다 더 야만적인 부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은 달라지지 않는 세상 속에서 어느새 그 부모를 닮은 우리들의 끔찍한 자화상이다.

 

그래서 궁금한 거다. 한 번에 그녀를 이길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 그런 방법이 있을 거고, 그걸 내가 꼭 알아야 한다.(100쪽)

 

명백한 적이라면 싸울 목적은 분명하다. 그 대상이 ‘나’를 이 땅에 있게 한 존재라는 건 너무 야만적이다. 그야말로 ‘씨발’이다. 떠날 수 있다는 건 돌아올 것이 있음을 뜻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앨리시어들은 언젠가 좀 나은 세상에 도착할 거라 믿으며 부랑자가 되어 이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을까. 앨리시어의 동생은 형과 같이 갔던 기억을 더듬어 혼자 길을 나섰고 갔던 길에 표시를 해두고 돌아왔고 다시 형과 함께 그곳을 찾아갔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은 답이 되지 않을까.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바닥에 닿지 않을까. 그 끝이 생이든 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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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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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등급이다.(9쪽)

 

삐뚤어진 세상을 향해 날리는 강력한 한 방이 기대되는 소설 『펀치』는 ‘나는 5등급이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별도로 기록할 만큼 특별한 첫 문장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나’라는 존재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등급으로 나뉘는 세상에 속해 있고 등급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자신이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판단되는 현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모래 먼지가 안개처럼 흩날려 앞을 가린다. 모래 먼지는 미래를 꿈꾸라고 하면서 미래를 닫아 버린, 멍청한 어른들 같다.(9쪽)

 

주인공이 어른들을 향해 펀치를 날리겠지, 하는 기대를 품게 하는 문장이다. 실제로 『펀치』는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와 학교, 종교의 ‘변태적 시스템’에 대해 강력한 아니 ‘사악한’ 한 방을 먹인다. 주인공의 펀치가 사악한 한 방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결정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꿈을 주입하고 개인은 자신의 비용을 들여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열매는 사회가 가져간다. 개인은 소비능력을 얻지만 그건 사회에 헌신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29쪽)

 

‘나’ 방인영은 엄마는 엄마로 칭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방변호사’라 칭한다. 조선 시대 서녀로 태어난 관계로 호부(呼父)가 금지되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란 사람이 자신에게 열성 유전자만을 제공한 장본인이면서 ‘죽 쑨 농사’라는 신세 한탄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인영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한탄은 그럴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자리를 내놓고 싶다는 의사로 읽힌다. 인영이 아버지를 ‘방변호사’라 칭하는 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먼저 딸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반발로 읽힌다.

 

부모에게 대학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곳이지만 인영은 또 다른 변태적 시스템에 속하는 일이다. 어른들 역시 자신들이 속한 사회가 변태적 시스템임을 모르지 않는다. 어른들은 그곳에 속하지 못하고 벗어나는 것을 자유가 아닌 패배로 여긴다. 변태적 시스템 속에서 억압당한 채 살아가는 부모가 딸을 변태적 시스템에 가두려는 현실이 인영은 이해 불가하다.

 

나리는 ‘퀄리티스타트’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 나는 한때 방변호사와 야구장을 들락거려서 알고 있다. 지난 19년을 정리하자면 퀄리티스타트는 아니다. 그렇다고 역전이 불가능할 만큼 대량 실점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예수한테 구속당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구속을 벗어난다면, 기회는 있다.(97쪽)

 

인영은 베드로 목장에서 고양이를 죽이는 낯선, 그러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모래의 남자’를 목격한다. 불혹을 앞둔 남자는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이 한심했다. 인영은 시험의 결과인 합격이 아닌 돈을 주고 ‘국가 시스템’에 속한 ‘모래의 남자’에게 부모의 살인을 청부한다. 고3 인영이 살인을 청부하는 이유는 억압의 뿌리가 부모라 믿기 때문이다.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든 걸까?”(149쪽)

 

꿈속에서 ‘절망’이란 이름을 가진 낙타가 인영에게 던진 질문이자 이 소설에서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방인영의 부모 살인은 억압의 뿌리를 잘라내고 스무 살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필요한 일이다. 비록 인영이 스물일곱 살까지의 삶을 계획하고 있다 하더라도. 불안한 관계를 해결하는 정답으로 쉽게 말해지는 소통을 시도하지 않은 건 그동안의 부모 탐색으로 미루어 시간의 낭비, 말의 낭비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남들 하는 대로 쫓아가는 사람이라서 널 낳은 게 아니야. 넌 엄마를 몰라. 엄마가 널 낳은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게 뭔지 경험하기 위한 도전이었어.”

“경험한 소감이 어때?”

“예수님이 아닌 일개 종은 애당초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게, 소감이야.”(216쪽)

 

인영은 불운의 아티스트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좋아한다. 그녀가 부른 노래의 제목은 'You know I'm no good'이였다.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문제 있는 사회가 나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악은 애초 존재하는 것일까. 사회가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나’가 어른이라면 둘 다에 해당한다고 말하겠지만 인영은 아직 고교생이기에, 비록 스무 살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인영의 문제라는 사실은 배제하는 게 옳을 듯싶다.

 

‘모래의 남자’는 아니지만 모래의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 경찰에 체포된다. ‘모래의 남자’가 인영의 의뢰를 받고 정말 인영의 부모를 살해했을까?, 하는 문제는 사실 중요치 않다. 중요한 문제는 억압이 잠재되어 있던 살해 본능을 깨운다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금기되는 일조차 감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살인을 의뢰하는 인물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여고생이라는 건 이 사회가 평범한 사람도 살인자로 만들 수 있다는 위험 사회라는 뜻일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들 속 살인자의 등장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해석된다.

 

당돌한 여고생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살인자가 등장하는 소설치고 음습하지 않은 소설이었다. ‘펀치’에는 과일즙에 설탕, 양주 등을 섞은 음료라는 뜻도 있다. 무더운 여름에 마시는 과일 펀치는 시원하고 달콤하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리고 인간관계가, 사회적 시스템이 시원하고 달콤하길 바라는 마음은 헛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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