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나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4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효(孝)는 아름다운 한자다. 부모가 자식을 업고 가는 모습만큼이나 자식이 늙은 부모를 업고 가는 일은 아름답다.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를 행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등에 걸머진 삶의 무게는 너무 버겁다. 부모에게 독립할 나이가 되어서도 부모가 해주지 않은 것만 서운하게 생각한다. 불행의 기원이 부모 탓이라 원망한다. 오래전부터 사회가 착하다, 라는 말로 효를 행하는 이들을 칭찬한 것은 효를 행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파라나』는 청소년 소설가로 유명한 이옥수의 신작이다. ‘파라나’는 ‘마음이 푸르러서 언제나 싱싱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아이’라는 뜻이다. 정호는 부모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효행상을 받았다. 소년은 특별히 효를 행한 것도 없는데다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있는데 상을 받아 불편했다. 타인이 자신에 대해 착하다, 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양심에 찔리고 창피함을 느낀다는 건 정호가 맑은 아이라는 증거다. 드라마를 보면 악행을 반복적으로 저지르고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름에 ‘정’은 괜히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호는 자신은 결코 맑은 아이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겠지만.

 

효은이 정호에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려고 한 건 정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봤기 때문이었다. 긍정적인 효은을 만나는 동안 뭔가 툭 떨어지듯 K가 떠올랐다. 이름은 K가 맞는 것 같은데 성은 대체 생각나지가 않는다. 그 시절 친구들 몇과 지금도 만나고 있고 가끔 학창시절 친구들 얘기를 하는데도 K는 전혀 생각 못 했었다. 어느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 K가 자신의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K의 집으로 가는 길엔 유리문 안으로 정육점 불빛 같은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여자들이 보이는 집들을 늘어져 있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고 좁은 계단을 올라 도착한 집은 나 같으면 절대 친구를 불렀을 것 같지 않은 좁은 집이었다. K네 가족들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정호는 효은을 만나면서 ‘쓴’ 삶, 달콤한 날은 없는 쓰디쓴 ‘씨바’의 삶과 인터넷 댓글을 쓰며 위로받는 삶에서 벗어난다. 사실 효은의 상황은 정호보다 훨씬 나빴다. 정호는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는, 묵묵히 홀로 걸어가야 하는(148쪽)’, 삶이라고 했지만 정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엄마들이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우리 아기 착하지. 착한 아이는 엄마 말 잘 듣지.”라고 말한다. 그러다 아이가 자라 손해를 보면 “그렇게 착해 빠져 어떻게 세상을 살래.” 걱정한다. 전자는 엄마 말은 옳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나쁜 아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후자는 바보 같다, 어리석다의 뜻이 담겨 있다. 전자와 후자의 ‘엄마’는 ‘나’가 아니라는 점에서 ‘타인’이다. 타인은 행위의 주체인 ‘나’의 생각은 배제한 채 ‘나’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판단한다. 내가 늘 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듯 타인의 판단 역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타인이 타인들, 복수가 된다면 어떨까?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온전히 자신의 뜻이라기보단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불효자, 라는 공동체의 시선을 거부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공동체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 『파라나』는 『심청전』을 재해석한 소설이기도 하다.

 

야, 백정호. 아무도 널 공격하지 않아. 그건 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허상이라고. 이 세상 누구도 널 공격하지 않아. 혹, 누가 공격하든 무슨 상관이야. 굳세게 살아가면 되지. 넌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했던 거야. 네 좁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괜한 열등감과 편협한 생각으로 네 자신을 숨기려 했지. 모든 일에……. 이제 그 두려움에서 비켜서지 마. 절대 지면 안 돼. 전갈법이 있잖아. 전갈법? 그래 독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 독을 품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고 자존심을 지킨다는 뜻이야. 전갈답게. 이렇게, 정호는 전갈을 집어 손등에 올렸다.(279쪽)

 

슬픈 청춘들은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 무너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한 걸음 나아갔다. 그들의 우정은 봄날의 햇살보다 빛났다. 정호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요즘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청춘의 시기를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좁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지. 살아가는 일은 맑음보단 흐림이 많지만 살아있다는 건 빛나는 일이다. 흐림이 없다면 맑음의 의미도 없지 않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 샷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제임스 바. 그는 범죄현장의 증거들이 완벽히 자신을 향하자 잭 리처를 데려다 달라는 한마디의 말을 하고는 침묵한다. 제임스 바가 잭 리처만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거라고 확신했던 건 과거 인연 때문이었다.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제임스 바는 잭 리처의 현명함을 믿었다.

 

『원 샷』은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잭 리처>의 원작소설로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 중 아홉 번째 소설이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고 잭 리처 시리즈를 읽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시리즈로 출간됐다는 건 어느 정도의 재미를 확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미스터리와 하드보일드가 조합된 소설은 거의 읽지 못해서 관심이 갔다.

 

금요일. 오후 5시. 아마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도시를 지나가기에는 가장 어려운 시간. 혹은 제일 쉬운 시간일 수도 있고. 금요일 5시에는 사람들이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 보이는 도로를 제외하고는.(9쪽, 첫 문장)

 

인디애나의 도심 공공장소에서 무차별 총격이 발생해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 샷 원 킬, 사람들은 한 번에 총을 맞았다. 범죄 발생하면 사람들의 관심사는 ‘WHO’와 ‘WHY’에 맞춰진다. 추리소설 독자의 관심 역시 다르지 않다. 범죄현장전문가들이 찾아낸 ‘WHO’는 제임스 바였다. 확고부동한 증거는 오히려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은 범인을 잡았다는 사실만 중요시했다.

    

여동생 로즈메리와 변호사 채프먼, 경찰 출신의 조사원 프랭클린이 잭 리처를 찾는 사이 교도소에서 제임스 바가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 잭 리처는 TV에서 제임스 바의 기사를 보게 된다. 채프먼이 오빠의 무죄를 인정하지 않자 로즈메리는 지검장의 딸인 헬렌 로댕 변호사를 찾는다. 헬렌 로댕은 제임스 바의 무죄를 입증하기보단 정신이상 선고로 형량을 줄일 생각이었다. 경찰과 검사, 변호사, 기자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사건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득이 될 결과였다.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 바는 14년 전, 걸프전 당시 재미로 사람을 죽였고 그 사실을 자백했지만 전쟁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묻혔다. 그는 14년 후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했지만 무죄를 주장했다. 제임스 바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범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범인일까? 범인은 왜 제임스 바를 범죄자로 지목했을까?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잭 리처는 어떻게 범인을 찾을 것인가?

 

잭 리처가 제임스 바의 무죄를 밝히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 쓰인 더 제크 무리와 대결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잭 리처는 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게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된다. 뉴욕 타임스는 ‘격렬한 하드보일드와 우아한 미스터리의 기막힌 조합’이라고 했다. 잭 리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제임스 바를 범죄자로 가리키는 증거들의 모순을 찾아내 그가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했다. 범죄자들은 너무도 완벽한 증거를 만드는 실수를 했다.

 

잭 리처의 사건 해결 열쇠는 열심히 생각하는 것과 행위의 단순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확고부동한 증거라는 것은 증거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가 필요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죄와 유죄는 오해나 이해관계가 아닌 명확한 증거 규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현직 경찰이 아닌 전직 경찰 잭 리처가 나서서 사건을 해결하는 현실이나 억울함 앞에 침묵 외에는 방법이 없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사회이다.

 

장면 묘사들이 세밀하고 대사와 인물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영화화됐겠지만 말이다. 간결한 문장들로 인해 잘 읽혔다. 오래간만에 한달음에 읽은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란 문구는 ‘프로이트’와 ‘여동생’은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는, 좀 과장하면 ‘여동생’은 ‘프로이트’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면 ‘오빠’와의 관계에서 ‘동생’, 특히 ‘여동생’은 약자에 해당한다. 강자는 약자를 힘으로 억압하지 않고 보호할 때 사회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힘을 가진 이들은 늘 착각하지만 ‘보호’라는 단어는 약자, ‘여동생’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드라마 속 오빠들의 다정함을 알지만 현실의 오빠들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오빠가 없다. 어떤 끌림이 작용한 것인지 친한 친구들 역시 거의 오빠가 없다. ‘오빠’라는 단어는 내게 아주 낯설다. 세상의 모든 오빠가 여동생에게 깊은 애정을 갖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려움에 직면한 동생을 외면할 만큼 무심하진 않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예외는 존재했다. 그는 바로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여동생에게 깊은 애정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애정을 누르는 다른 강력한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고체 스밀레스키의 『프로이트의 여동생』에서 프로이트는 전쟁을 피해, 죽음의 위험을 피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떠나 런던으로 가면서 아돌피나를 비롯하여 여동생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구제할 수 있는 명단을 직접 작성했고 그 안에는 가정부와 주치의 부부, 처제 그리고 강아지 요피까지 포함됐다. 프로이트는 아돌피나에게 ‘국가의 광기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굳이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핑계였다.

 

살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이 찾아온다. 어떤 고통은 수그러들지만 어떤 고통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겪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이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고통을 통한 아픔이다. 이후의 모든 고통에서는 첫 고통에 닿을 때만 무지근하게 아프고, 첫 고통과 유사한 면이 있을 때만 아프다.(63쪽)

 

세상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는 아돌피나에게로 향했고 아돌피나는 탄생의 순간, ‘삶의 시작’부터 고통을 받았다. 프로이트가 아돌피나에게 가졌던 애정은 어머니,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고통받는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우치에 누워 자신을 맡겼던 환자들처럼 아돌피나 역시 자신을 의지하길 바랐으나 아돌피나는 프로이트의 생각과 달리 너무 똑똑했다. 환자들과 달리 아돌피나는 고통의 원인을, 광기의 원인을 스스로 찾았다.

 

프로이트와 아돌피나의 엄마 아말리에 나탄존은 아돌피나에게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라는 말을 반복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속에는 아돌피나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다, 라는 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딸들에게 아내의 덕목에 대해 말했고 딸인 안나가 의학공부 하는 걸 반대했다. 프로이트에게 여자는 소통하는 자가 아니라 남자의 삶을 돕는 자였다. 프로이트는 자기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역사,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아돌피나로 인해 열패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아돌피나 역시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 믿었던, 그러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오빠로 인해 상처받았다. 프로이트에게 아돌피나는 더는 ‘보호’해야 할 동생이 아니었다. 출국비자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는 프로이트를 돌봐줄 사람들이자 그가 돌봐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녀(들)은 아니었다. 한때 아돌피나와 함께 둥지 정신병원에 있었던 클라라의 “멀쩡한 사람은 어슷비슷 정상이고, 미친 사람은 제가끔 미쳤어.”라는 말은 광기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는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처음엔 고통의 기원을 알지 못해 상처받고 나중에 고통의 기원을 알아서 상처받았던 라이너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맛봤던 그녀 아돌피나, 그리고 ‘착한 영혼’으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삶은 영원하지 않고, 사는 한 고통의 끝은 없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삶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죽음으로 소멸할지라도.

 

그녀는 죽음 앞에서 고통의 기억을 잊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녀의 삶은 사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이었다. 현재 내 삶을 본다. 나는 살고 있는 것일까. 견디고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의 여동생』을 만난 시간은 다시금 고통에 직면해 아팠지만 어떤 삶이든 무의미한 삶은 아닐 거야, 라며 현재를 사는 나를 위안했던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나무의 일기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냉장고를 바꿨다. 깊은 밤, 냉장고가 토해 낸 소리는 불안감을 느낄 만큼 컸다. 우린 이젠 이별해야 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헌 냉장고는 15년 정도 사용했다.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므로 더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버려질 냉장고를 닦고 또 닦았다. 세탁기나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다른 가전제품들과 이별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냉장고엔 발품을 팔아 저렴하고 좋은 재료를 사 음식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였던 당신의 일상과 음식을 먹으며 좋아했던 가족과의 추억 때문에 냉장고를 그대로 보낼 수 없으셨을 것이다.

 

새해 첫 책을 고르는 일은 힘들었다. 어렵게 고른 책들은 첫 문장부터가 난감했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디디에 반 코벨라르트의『어느 나무의 일기』는 3백 살 정도 된 트랑스탕이란 이름을 가진 배나무의 의식 여행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디디에 반 코벨라르트는 현재 국내 상연 중인 뮤지컬<벽을 뚫는 남자>의 대본을 쓴 작가이다. 트랑스탕은 인간들과 함께했던 과거로 여행을 떠났고 나무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소설 속 야니스는 마농에게 트랑스랑에 관한 이야기, 한 배나무가 보는 삼백 년 동안의 역사, 그의 마음속 일기 같은 소설을 출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완성해 간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야니스가 출간하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로 보인다.

 

뿌리 내린 땅 밑 깊은 곳에서 나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인간 존재들이 점점 더 큰 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그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청난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거기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199쪽)

 

어머니의 냉장고에 관한 기억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닌 냉장고와 공유했던 기억일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냉장고에게 기억 따위는 없겠지만 말이다. 트랑스탕이 오랜 시간 살 수 있었던 것은 조르주 란 박사의 사랑 때문이었고(그 사랑이 아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슬픔에서 기원했다 할지라도) 의식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나무들을 사랑했던 나무 비평가 야니스와 <나무의 꿈>조각을 만든 마농 덕분이었다. 나무와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로는 살 수 없는, 공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잊고 있던 명징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옥상에 살구나무가 있다는 글을, 내게 봄을 알리는 꽃은 살구꽃이란 글을 어느 리뷰에서 썼었다. 살구나무는 지금 집으로 이사 와서 만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살구나무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집에 있었을까, 이 집에 세워지긴 전에 왔다면 그전엔 어디에 있었을까, 살구나무는 어떤 기억들을 품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달콤한 살구는 잘도 따 먹었으면서. 나는 참 무심한 인간이었다.

 

살구나무는 트랑스탕처럼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공유할 순 없더라도 소통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옥상에 올라 살구나무를 바라봤다. 뭔가 내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헌 냉장고는 수리되어 누군가의 집으로 가게 될 것이고 마지막엔 폐기처분 될 것이다. 그다음엔? 다른 모습으로 환생할까? 인간이 아니니 재생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구나무는? 배와 살구엔 씨가 있다. 그 씨들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기억을 쌓을 것이다. 모든 씨들이 뿌리를 내리는 건 아니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외면하고 싶다.

 

트랑스탕은 마농을 비롯한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살구나무는 세발자전거를 타던 꼬마가 반항(?)하는 초등학생이 된 모습을, 한여름 식탁을 즐겁게 해준 상추와 고추, 겨울의 식량이 되어준 배추나 열무들을 정성스레 가꿨던 내 부모님의 모습을,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 혼자 올라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책 뒤표지에는 어느 프랑스 독자의 ‘우리 세상과 나란히 이어져온 또 하나의 세상!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나무를 예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교훈!’이라는 평이 실려 있다. 나는 이 말에 아주 깊이 공감한다.

 

언젠가부터 살구는 많이 열리지 않는다. 당연히 꽃도 만발하지 않다. 살구나무 역시 늙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폭염과 폭풍과 폭설과 해충들과 싸울 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다가오는 봄엔 눈처럼 날리는 살구꽃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첫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안갯속에 서 있는 것처럼 뭔가 있긴 한데 보이지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을 정돈된 감정으로 보내고 싶은데 자꾸 감정을 질질 흘린다. 어딘가 첫날의 기록이 있겠지만 애써 찾지 않는다. 찾는다고 흘린 감정을 다시 주워담을 수 없음을 알기에. 더는 감정을 흘리지 말자,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반복한다.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오랜 시간 작품 활동을 한 작가지만 나로서는 노벨문학상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다. 2012년,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발표한 앨리스 먼로는 더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 알게 된 작가의 첫 번째 읽게 된 책이 하필이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에 설명 불가한 묘한 기분이 든다. 다행히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녀에게 변심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안식처」에서 ‘나’가 읽은 잡지에는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남편을 위해 안식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오늘날은 1970년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지만 현재에도 통용되는 말이다. 돈 이모는 재스퍼 이모부(그의 성은 캐슬이다.)의 성에 갇혀 살았다. 그녀에겐 자신의 삶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한다.(「돌리」, 330쪽)

 

「일본에 가 닿기를」의 그레타는 토론토에 갈 기회가 생기자 지난가을 작가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 해리스 베넷에게 누가 읽어도 의심을 품지 않을, 당사자라도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함축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가 마중을 나온 건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았음을 확신했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사랑에 빠진 남녀에겐 두 사람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 아니던가.

 

요양원 교사가 되기 위해 토론토로 간 「아문센」의 ‘나’ 비비는 닥터 포스(앨리스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 헌츠빌로 가던 중 앨리스터는 실수였다며 결혼을 그만두자고 말한다. 세월이 흘러 토론토에 산 그녀는 우연히 그를 만났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88쪽)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실수였다며 결혼을 그만두자고 했던 그 남자를. 그럼에도 ‘너’를 잊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행복인지, 불행인지.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리아는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사랑에 배신당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상실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상실의 비에 침식당하지 않았다. 상실의 순간을 맞은 건 리아만이 아니었다. 병을 앓던 아내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레이는 리아를 통해 상실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 내가 그 비극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비극을 밖으로 꺼내놓았으니까. 그건 그저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실수에 불과해 . 내가 안타까워할 줄 몰라서 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나는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는 말은 해야겠어. 어쨌거나 지금 더 행복하다는 말도. 이 이야기 때문에 당황한 건 아니지?”(「기차」, 258쪽)

 

『디어 라이프』가 관통하는 이야기는 ‘비극 밖으로 꺼내기’가 아닐까 싶다. 「자갈」에서 동생 카로를 잃은 ‘나’는 비극을 품고 살았다. 「기차」의 ‘나’ 벨은 아버지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 「자갈」의 닐은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고,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진다고 했다. 「기차」의 벨이 잭슨에게 자신의 비극을 꺼내놓지 않았다면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디어 라이프』에는 14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작가는 별도의 장 ‘피날레’로 묶인 4편에 관해 ‘내가 이야기하는 최초이자 마지막-그리고 가장 내밀한-작품’이라고 했다. 앨리스 먼로는 4편을 통해 가족의 상처와 더불어 불행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꺼냈다. 비밀의 삶이 고통이라면 드러내고 도려낸 후 치료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완벽한 치유에 대한 욕심은 버리자. 그것은 꿈이다.

 

「자존심」의 ‘나’와 아이다(오나이다)는 전쟁이 진행 중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유럽전승기념일 직전에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함께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 새들이 폭풍처럼 몰려오는 황홀한 광경을 봤다는 것이다. 떠남이 예정되어 있지만 그들이 함께한 광경은 기억될 것이다. 앨리스 먼로의 ‘그 시절’은 불행과 행복이 공존했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실과 동시에 삶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

 

『디어 라이프』는 ‘그 시절’, 오래전 혼란으로 가득했던 날들의 사랑, 불행, 행복 그리고 기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 ‘디어 라이프(Dear Life)’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문장 그대로 ‘소중한 생에게’로 해석하여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도달한 노작가의 인생 예찬을 떠올렸다. 『디어 라이프』는 무궁한 비밀과 혼란으로 가득했던, 그럼에도 for dear life, 필사적으로 견뎠던 그 시절이 담겨 있는 일기장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