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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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은 소풍이라고 했다. 잠시 놀러 와선 많은 것을 누리며 산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 부족하다 생각해 계속 욕심을 부린다. 정민의 『책벌레와 메모광』에 의하면 어떤 장서인은 자기 이름을 넣고 그 끝에 ‘차람借覽’ 또는 차관借觀‘이란 도장을 찍어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중국 책은 줄줄이 찍은 장서인으로 그 책이 어떻게 유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책은 내 것이다, 가 아니라 그 책을 가졌었다, 는 것 자체로도 의미를 두었던 그들이 존경스럽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몇 번의 경험으로 웬만해서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받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준다. 약간의 못된 심리인데 장서인이라도 찍어 빌려줄 걸 했다는 생각이 든다. 빌려 간 사람이 내 책이라는 걸 기억하게. 다른 사람이 그 책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내 책을 빌려 간 사실을 알게. 최석정은 어느 책에도 장서인을 찍지 않았고 남에게 빌려줄 때도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서적이란 공공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마침 책을 모을 힘이 있었기에 책에 내게 모인 것이고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26쪽)라고 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직은 책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물욕은 많지 않은데 책은 예외다. 서점에 가면 사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다. 책들을 보면 내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다 읽는 것과 무관하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지 않는다. 집중해서 읽는 것이 어렵다. 아마도 내 책이 아니라는, 기간 내에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겨우 집중에 읽고 반납하고 나면, 그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내내 떠나질 않는다. 아, 이 끝없는 책 욕심이여!

    

이덕무는 열 손가락이 모두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올라 피가 터질 지경인데도 하루에 수천 자씩 베껴 썼다고 한다. 책을 구하기 힘든 시대, 거기에 가난했던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베껴 쓰면 눈으로 읽는 것보다 오래 기억되고 생각이 명료해지기 때문이었다. 그가 책을 베껴 쓴 것은 욕망이 아닌 열정이었다. 그는 진정한 책벌레였다.

 

지금은 책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지만(대신 독서 기록은 한다,)한때는 책을 산 날짜와 서점도 적고 밑줄도 치고 감상도 적어놓곤 했었다. 오래된 책들을 펼치다 그런 흔적들을 만나면 그날로 타임머신을 타게 된다. 참 행복한 기억이다. 몰론 박제가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나는 이렇게 훌쩍 커버렸구나.’(33쪽)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타인의 오류는 지적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한다. 타인에겐 엄격하고 나에겐 관대하다. 다산은 잘못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잘못 적은 메모에 대해 메모를 덧붙여 바로 잡았다. 메모는 하지만 별도로 정리하지 않은 터라 흩어지고 사라지기 일쑤다. 그나마 요즘은 휴대폰 메모 기능을 활용하는 까닭에 사라지는 일은 드물어졌다. 다산과 저자 정민 덕에 메모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계합은 ‘지금까지 무의미하던 사물이나 대상이 나와 새롭게 만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220쪽) 계합은 메모에서 비롯된다는 저자 정민의 말에 동감한다. 메모는 기억을 되살려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모두.

 

조금씩이라도 매일 책을 읽지만 전에 비해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흩어질 이야기에 빠져 책을 읽지 못했다. 책에 집중할 수 없는 날이 많았다고 생각했지만 핑계였다. 『책벌레와 메모광』는 나의 독서 습관을 돌아보게 했다. 올해 세웠던 독서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빨리 보단 느리고 깊게 읽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 적게 읽었다. 리뷰도 많이 쓰지 못했다. 내년에는 부지런한 독서와 성실한 메모를 꿈꿔본다. 그것은 좀더 나은 나를 만드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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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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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었던 이야기, 겪은 이야기,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자를 잘못 옮겨 적은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남자 이름을 갖게 된 겨울이면 늘 만두를 만드시는 어머니, 언니와 나와 동생의 생일을 전부 잘못 기억해 생일과 다른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한(나는 호적에는 맞게 올리는 바람에 훗날 주민등록번호를 정정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층을 달리해 같은 집에도 살았으나 특별한 기억은 없는 할아버지(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키워드로 표시한다면 중절모, 고서, 솔담배, 요구르트이다. 평생 담배를 피우셨고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었음에도 80세를 넘게 사신 이유가 요구르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떡볶이 같은 건 함께 먹어본 적 없는 단지 편지만 주고받았던 친구 H, 아버지가 다른 학교의 악명 높은 교사였던 부모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었으나 혼자 남겨질까 두려움을 갖고 있던 또 다른 H, 건물청소를 한 후 작은 평의 지하 공간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건물에서 집까지 걸어가고 오는 시간이 좋다는 M의 어머니, 술 때문에 가족들의 속을 끓이고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 M의 아버지 그리고 무너져버린 J의 어머니…….

 

2.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어린 시절을 공유한 소라, 나나, 나기의 현재 이야기이다. 소라는 ‘나’라는 부족으로 살며, 나나는 ‘그 정도’의 사랑을 하고 있고, 나기는 그 시절의 ‘너’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나쁜 듯 보이지만, 딱히 좋다고 말할 순 없긴 해도 나쁘지 않은 시절이었다. 소라와 나나가 나기와 순자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알아본 것이다. 소라와 나기는, 나나와 나기는, 소라와 순자는, 나나와 순자는 피를 나누지 않았으나 가족이었다. 애자씨의 말대로 인생의 본질은 허망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3.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104쪽)

 

여전히 혼자의 삶을 살고 보니 사랑은 ‘그 정도’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만큼만 사랑해야지, 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진 않다. 어쩌겠는가. 난 그렇게 생겨버린 것을.

모세씨, 그리고 그 가족 재수 없어, 생각했다가 내가, 그리고 내 가족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는 뼈아픈 진실을 만났다. 젠장!

 

4.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221-222쪽)

 

느리게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하찮은 삶이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희생에 무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끝이 보인다고 미리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소중하다면 ‘너’의 삶도 소중한 것이다. 끝에 직면하지 않은 이상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황정은은 하찮은, 물론 절대 하찮지 않은, 멸을 향해 가는 그들을 통해 생의 의지에 대해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이 ‘아직 많이 남은’으로 변한 시각을 살고 있다. 올해는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새삼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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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칠드런 - 2014 제8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6
장은선 지음 / 비룡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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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 대부분은 학교생활을 거친다. 학교는 크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 가르침과 배움 사이 교집합으로 묶이는 단어는 공부다. 공부는 학문과 기술을 익히는 일이다. 학문하면 지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지식과 기술은 학원에서도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는? 학문(學問), 배우고 질문하는 것이다. 학교는 묻고 또 묻는, 반복적인 질문을 통해 인생의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보단 선생과 제자가 존재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사들은 아버지의 지위와 성적으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학생들은 교사들을 불신한다. 교사와 학생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교사와 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자연계 현상만이 아니다. 성과주의 사회와 잘난 아이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욕망은 불안한 학교를 만드는데 한몫했다. 

   

 『밀레니얼 칠드런』은 자식이 사치의 상징이 되는 암울한 미래를 사는 비(非)성년 청소년들이 학교와 교사들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 속 학교는 ‘정부에서 허가받지 않고 태어난 아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국가기관’이다. 그야말로 미생들이 머무는 곳이다. 학교라기보단 시설이란 단어가 적절해 보인다. ‘정부에서 허가받지 않고 태어난’만 생략하면 현실의 학교 역시 ‘아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국가기관’과 다를 바 없다. 비성년이란 표현은 책 띠지의 문구를 따랐다. 미성년자는 만 스무 살이 지나면 자연스레 성인이 되지만 비성년자는 만 스무 살이 지나도 성적과 등급이 낮으면 성인의 삶을 살 수 없다.

 

부모님이 부자였던 덕분에 등록아동이었던 새벽은 부모님의 사고사로 무일푼 천애고아가 되어 학교로 보내진다. 새벽이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헤이즈와 넘버즈였다. 헤이즈는 자식세를 내지 않고 몰래 기르다 적발당한 아이들이었고, 넘버즈는 자식세를 낼 수 없어 버려진 아이들로 등록번호의 마지막 두 자리로 불리는 이름조차 없는 아이들이었다. 하루아침에 신분이 추락한 사람들이 그렇듯 새벽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새벽이 본 학교는 이상한 나라였다. 학생들은 정보를 외우기에 급급했고 성적에 따라 차별을 받았으며 개성은 존중되지 않았다. 교사들은 학교라는 감옥의 간수였다. 소설 속 미래의 학교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현실의 학교였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세상 말이다.  

 

새벽이 우릴 어떻게 하려고 ‘모든 사람을 한 줄로 세우는’ 제도를 만들었을까, 묻자 창우는 “우리가 세상에 나갔을 때,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반대나 저항을 하지 못하는 세상은 독재사회와 같다. 어른들은 어렵게 자유를 얻었음에도 아이들에겐 독재를 강요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새벽은 운명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불공평한 세상에 침묵하지 않았다. 잊고 있었다. 우리가 매일 맞는 아침은 분주한 새벽이 만들었음을. 학교와 교사들을 향한 새벽의 행동은 현실감이 없었지만 성공하길 응원했다. 새벽이 원한 것은 사육당하기보단 인정받는 것이었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였으므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숭고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비성년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껍질 속 생명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태어나지 못한 상태라 그런지 미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악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는 부당함을 보고 학생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낼 때 후련함을 느꼈다고 했다. 후련함은 세상을 비상하는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 암울한 소재임에도 속도감 있는 전개와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청소년들 덕분에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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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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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대형 여객선, 심리학자로 추정되는 ‘나’는 스물한 살의 세계 체스 챔피언 미르크 첸토비치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자긍심이 강한 첸토비치가 체스 외의 분야에선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류든 편집광적으로 단 한 가지 생각에 갇힌 인간들 모두에 대해 나는 평생 호기심을 느껴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제한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무한성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세상을 등진 것 같은 그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재료로 흰개미처럼 기이하고 유일무이한 하나의 압축된 세계를 만든다.(18쪽)

 

1942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이주한 브라질의 한 도시에서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비 오는 시월의 마지막 날, 무심코 집어 든 책에서 쓸쓸한 죽음을 만났다.

 

「체스 이야기」는 자살 직전 완성된 소설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체스밖에 모르면서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뛰어난 심리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첸토비치의 모습은 히틀러와 겹쳐진다.

 

「체스 이야기」는 각기 다른 삶의 배경을 지닌 두 남자의 체스 게임을 다룬 소설이다. 가난하고 무지했으나 우연히 체스 게임을 본 이후 천재적 재능을 보여 챔피언이 되고 세계를 돌며 순회경기를 하는 남자와 오스트리아 황실에 충성하며 좋은 환경에서 살았으나 나치 친위대에 체포되어 독방에 갇히고 독방에서 풀려나선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던 남자가 두 주인공이다.

 

첸토비치가 게임을 기억해서 두는 블라인드 체스를 두지 못했지만 B박사는 블라인드 체스에 강했다. B박사가 뛰어난 기억력을 갖게 된 데는 옛 오스트리아에 충성했다는 이유로 독방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무’의 세계에서 우연한 발견 이후 필사적으로 얻은 체스 교습서는 그를 무에 질식할 위협으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상대가 없어서 혼자 머릿속으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던 그는, 상대의 심리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무의 세계는 순수했던 그를 광기로 내몰았다. 다행히도 그에겐 자제심이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자멸은 그로 하여금 마지막 자제심마저 잃게 했다. 그의 세계는 그렇게 끝났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여자와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앞으로는 받을 일이 전혀 없는 여자의 긴 편지를 읽은 남자가 낯선 여인의 사랑을 뒤늦게 느끼는 내용이다.

 

「체스 이야기」의 B박사는 ‘나’에게 자신이 체스게임에 개입하게 된 배경을 고백했고 「낯선 여인의 편지」의 낯선 여인은 유명 소설가 R에게 소녀에서 여인이 되는 동안 그를 사랑했음을 고백했다. 첸토비치와 B박사는 체스를, 낯선 여인은 소설가 R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바꿀 대상을 만난다. 그 대상은 나를 늘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B박사는 무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세세한 것까지 기억했고, 임신한 이후 전 가족들 사이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 혹은 추방당한 사람처럼 살았던 낯선 여인은 사랑하는 R의 모든 것을 기억하며 시간을 견뎠다. 기억은 무에 갇힌 두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첸토비치와 소설가 R에게 기억은 무의미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이들을 보면 세상은 기억하는 자와 망각하는 자로 나뉜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낯선 여인 혼자 R을 짝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가 여자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순결을 중시하면서 매춘이 성형하는 도시의 이중성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관계는 불가능하다. R에게 사랑은 육체를 통한 순간의 열정이었다. 열정이 사라지면 그는 여행을 떠난다는 말로 관계를 정리했다. 여지를 남긴 그의 행동은 비겁했다.

 

R은 기억하진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그녀에게 빠졌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22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다. 전쟁의 불안이 남자를 망각의 존재, 떠도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녀의 세계는 사라졌으나 그의 세계는 그녀에 의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츠바이크가 남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작가를 여자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낯선 여인의 사랑 고백은 절절했다. 사랑했을 때의 나의 감정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금은 어딘가로 숨어버린 감정들 말이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쓸쓸하다.

 

시월의 마지막 날엔 비가 왔다.

그리고 쓸쓸한 11월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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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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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만나려면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은 언제나 어둠이다. 처음 눈을 들 땐 눈이 부셔 눈뜨기 힘들지만 곧 빛에 익숙해진다. 우린 그런 날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는 눈을 떴다.(9쪽)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빛의 제국>에서 제목을 따온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위 문장으로 시작한다. 의식하지 않는다면 특별할 것도 없는 행위이자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다. 어둠에 빛이 스며들어 점차 아침이 된다. 기영이 눈을 뜬 건은 아침이 됐기 때문이다.『빛의 제국』은 기영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AM 7:00부터 다음날 AM 7:00까지의 24시간,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왼손에 깁스한 기영의 아내 마리는 초보운전 시절처럼 운전이 서툴렀다. 처음이 서툰 건 당연하지만, 절반을 지난 생도, 끝에 다다른 생도 서툴기는 마찬가지다. 인생은 원래 사건·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며,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은 위로보단 서글픔이 든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속 하늘은 파랗고 집 주변은 어둡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의 공존은 부자연스러운데 그림을 보면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일까. 불빛이 있는 걸 보아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확신할 순 없다. 그것은 사람이 있는 걸로 위장하기 위에 켜놓은 불빛일 수 있다. 기영은 아내와 딸이 있고 집도 있고 직업도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가능성을 품고 살았다. 그는 10년 전 명령이 끊긴, 남파된 간첩이었다. 어린 연인이 있는 마흔의 마리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한 열다섯 살 현미는 간첩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세계는 낮보단 밤에 가까웠다. 그들은 어둠에 싸인 집에 불빛에 의지해 살았다.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을 살았던 건 기영만이 아니었다.

 

『빛의 제국』 속 개인의 삶은 국가와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과 맞물리며 돌아갔다. 개인은 국가와 사회와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듯이. 가족의 길고 길었던 긴 하루의 이야기는 기영이 남파되어 살았던 20여 년 전, 평양의 김성훈이 1984년에 서울로 내려와 1985년 봄 ‘김기영’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그때부터 우리 사회에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 속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삶·죽음과 함께 전개된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생은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다.

 

기영의 실체를 알게 된 마리는 기영과 함께 사는 삶을 거부하지만, 기영 역시 자신의 유일한 직원인 위성곤의 실체를 몰랐다. 기영은 안다고 믿었던 사람에 대해 몰랐고, 기영을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기영을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알까. 진짜는 가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국이 같이 산다는 철이는 가짜가 아닌 진짜일 수 있다. 부모님은 바쁘셨고, 친구가 없었던 진국에게 유일한 소통의 대상은 철이였으므로. 인생의 절반을 기영으로 산 성훈은 성훈일까, 기영일까? 마리가 기영의 실체를 알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마리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까?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모호하고,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순 없다.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건 나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문득 깨달았어. 지금까진 난 인간들이 상당히 추상적인 고민들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인생, 운명, 정치 뭐 이런 것. 너도 알다시피 나 수학 좋아하잖아.”

“형이 늘 말했죠. 순수한 추상의 세계라고.”

“맞아. 문제 풀고 있노라면 시간 참 잘 가지. 난 다른 사람들도 얼마간은 다 그런 면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 그런데 오늘 보니 다들……”

“다들?”

“살아남기 위해, 오직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들 사는 것 같아. 왜 나만 그걸 몰랐을까?”(398-399쪽)

 

내 방은 빛이 들지 않는다. 낮에도 불을 켜고 있어야 한다. 창문을 열거나 밖에 나가지 않으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의 낮은 밖에만 존재한다. 세상과의 부딪힘이 없다면 삶은 언제나 어둠일 수밖에 없다. 파란 하늘 뒤로 짙은 어둠이 숨어 있을지 모르지만, 곧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밖으로 나가 세상과 부딪히고 살아가야 한다. 소설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첫 문장의 주인공은 ‘그’였으나 마지막 문장의 주인공은 그의 딸 현미이다. 세상이 이어지는 이유는 새로운 주인공들, 현명하고 아름다운 아이들 태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기대는 가능하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도 우리가 삶을 견뎌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약한 인간의 위태로운 삶에도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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