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사라지는 시간 - 오이겐 루게 장편소설
오이겐 루게 지음, 이재영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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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들은 바깥에 모여 앉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지. 그럴 때 네 생각이 가장 많이 나. 왜 하필 그런 때일까?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해서? 내가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느껴서? 하지만 나는 언제나, 평생 동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살아왔어. 평생 나는 어디엔가 속하고 싶었지만, 내가 속하고 싶은 집단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 (중략) 솔직히 말할게. 모기장 안에 드러누워 있으면 나는 밖으로, 그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웃는 소리를 들으면 격심한 동경을 느끼게 돼.(488쪽)

 

198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오이겐 루게의 장편소설 『빛이 사라지는 시간』은 동독이 사라지기 전과 사라진 후의 시간을 살았던 한 가족 4대 가족의 일상을 통해 어딘가에 속하고 싶었으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은 작가의 자전소설로 작가와 그의 가족이 러시아, 독일, 멕시코 등에서 겪었던 일상들이 세세하게 펼쳐진다. 1952년부터 2001년까지 연대기 순과 각자의 시점별 이야기가 교차하는 독특한 시간 구성을 하고 있다.

 

1952년부터 1995년까지는 연대기 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리 소원을 빌어도 베를린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샤로테는 입국을 요청받자 나라를 건설하는데 기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그곳으로 부른 드레츠키는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함부르크 시절 첩보생활이라고 부르기엔 많이 부족한 첩보생활을 했던 빌헬름은 동독에서 어떤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의 일은 샤로테의 부탁으로 겨우 얻은 명예직 일자리였다. 그럼에도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넘쳤다. 쿠르트는 전쟁시작 전 독일에서 도망쳐 우랄산맥에서 벌목하다 이리나를 만나 알렉산더를 낳았다. 쿠르트는 오이겐 루게의 아버지 볼프강 루게로 보인다. 쿠르트는 동생 베르너에게 쓴 편지로 조직을 만들었다는 오해를 사 수용소 감금 십 년 형을 살았고 그때 베르너는 죽었다. 쿠르트는 이십 년 만에 동독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하는 일은 모스크바 여행을 하는 상사의 통역이었다. 빌헬름은 수용소 생활을 하다 괴혈병을 앓아 이가 모두 빠졌고, 동독으로 돌아온 샤로테는 멕시코에선 앓지 앓던 천식을 알았고, 어린 시절 한쪽 눈을 잃었던 쿠르프는 벌목을 하다 발을 다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엔 물자 부족과 에너지 위기와 감시의 시간이었다면 장벽이 무너진 후엔 실업과 파산으로 위기의 시간이었다. 그 사회는 알렉산더가 원하는 사회도, 쿠르트가 꿈꿨던 사회도 아니었다. 그들의 병은 낫지 않았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은 1989년 10월 1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한 달 전의 시간이다. 이날은 빌헬름의 아흔 번째 생일이었다. 이리나, 나데시다 이바노브나, 빌헬름, 마르쿠스, 쿠르트, 샤로테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한 가족이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 기다리는 것, 바라는 것, 두려움은 제각각 달랐다. 빌헬름은 알렉산더와 샤로테를 패배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쿠르트는 빌헬름이 당의 찬가를 부르는 걸 범죄라고 생각했고, 샤로테는 빌헬름이 집을 망가뜨리는 것을 자신의 작은 멕시코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데시다 이바노브나에게 동독에서의 삶은 빛이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2001년엔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가 일어났다. 하나의 이야기는 2001년의 이야기다. 효과적인 치료법인 없는 비호지킨림프종을 앓고 있는 알렉산더는 기억의 부재, 치매에 걸린 아버지 쿠르트와 함께 베를린을 관통하는 하델강을 보기 위해 언덕에 오른 이후 멕시코로 떠났다. 멕시코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던 나라’였다. 알렉산더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멕시코를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고 누구도 희생할 필요도 없는 나라로 상상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멕시코는 자신의 것을 뺏는, 자신을 속이는 나라였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돌고 돌아 다시 동독, 그리고 멕시코로 떠돈 생이었지만 그가 속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젠가 죽을 생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믿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은 영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989년 10월 1일의 그날처럼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같은 장면을 겪고도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우리니까.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모든 기억은 희미해진다. 옳고 그름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변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반복해서 기억함으로써 ‘빛이 사라지는 시간’을 살았던 이들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재 삶은 ‘베르너가 살지 못한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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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맨 - 기계가 된 남자의 사랑
맥스 배리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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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어릴 적 꿈은 기차가 되는 것이었다.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기차 자체가 되는 것. 그러나 인간이 사물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남자는 『머신맨』의 주인공 찰스 뉴먼이다.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전은 불가능한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분명 휴대폰이,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 자체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예뻐지기 위해, 신체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 얼굴을 바꾸고 몸을 바꾼다. 그렇게 바꾸는 이유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꾸기만 하면 현재의 삶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보고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검색한다. 극히 드물지만 어쩌다 휴대폰을 두고 외출한 날에 마음이 불안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세상은 넓어 내가 모르는 존재하는 건 당연한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정보의 바다를 헤맨다. 온종일 헤매도 늘 불안하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분명 아주 예쁜데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성형을 감행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며.

 

찰스는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그에게 휴대폰은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이자 정보제공자였다. 우리의 삶 역시 다르지 않다. 휴대폰은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이 있는 대상이다. 찰스는 휴대폰을 찾으러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 ‘더 나은 미래’ 연구실에 갔다가 한쪽 다리를 잃는다. 인공다리를 달아야 하자 그는 직접 인공다리를 만들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가 만든 인공다리, 컨투어는 한 쌍이었다. 한쪽 다리가 잘린 우연한 사건은 그로 하여금 완벽한 다리를 갖고 싶은 열망을 품게 했다.

 

그의 회사 ‘더 나은 미래’는 그의 인공다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길 원했다. 더 나아가 연구를 발전시켜 완벽한 인공신체를 만들어 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더 완벽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신체를 만들어 팔면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람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병약했던 그는 잠재적 의식 속에 강한 신체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완벽해지고 싶은 찰스의 욕망과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회사의 욕망은 점차 커졌다.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찰스도, 의지보조기 기사 롤라도, 중간관리자 카산드라도, 찰스를 ‘감시’했던 칼도 그러했다. 그들에겐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찰스는 어릴 적부터 신체가 약했고 롤라는 심장이 약했고 카산드라는 치아의 틈이 벌어진 치극이 있었고 칼은 힘이 약해서 교통사고 당한 약혼녀를 구하지 못했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을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기에. 다만 어떤 순간에도 ‘나’를 잃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공으로 된 몸을 갖게 된 찰스에게 내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뇌뿐이었다. 그 후엔 그 뇌마저도 사라졌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우리가 ‘머신맨’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로봇이나 사이보그는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찰스와 ‘그들’만의 이야기로 규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 속엔 기계에 종속되어 기계 없이는 살지 못하는 우리가 있었기에. 약간의 자신감과 좀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닌 문제에선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실험이 성공하여 부작용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변한 ‘나’는 진짜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해지려다 ‘나’는 사라진, ‘나’라고 규정하기 모호한 괴물의 ‘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머신맨』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끝나지 않았던 찰스와 롤라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겐 완벽해지려다 진짜 나를 잃어버린 이야기, 끝나지 않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짜 ‘나’와 진짜 ‘나’의 경계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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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 아름다운 멜로디 뒤에 가리어진 반전 스토리
이민희 지음 / 팜파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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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대부분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그랬고, 프리다 칼로가 그랬다.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던 작곡가들과 가수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에디뜨 피아프가, 메르세데스 소사가, 빌리 홀리데이가 그러했다.

 

에디뜨 피아프의 삶은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이 아니었다. 피아프는 참새를 뜻한 불어라고 한다. 작은 체구였던 그녀가 반복되는 삶의 불행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 루이 르플레와의 만남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녀는 루이 르플레가 암살되면서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며 깊은 슬픔을 겪기도 했다.

 

3주 연속 빌보드 1위에 빛나는 사카모토 규의 ‘위를 보며 걷자’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주는 노래였다. 우연은 사카모토 규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왔다. 불행 뒤에 행복, 행복 뒤엔 불행이 오는 건 마치 순리인 것처럼.

 

에디뜨 피아프가 잿빛 인생을 살면서도 ‘장밋빛 인생’을 노래했다면 메르세데스 소사는 좌절의 순간 ‘생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를 만들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생에 감사해, 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등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을 위로했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준 인생에 감사하다’고 노래했지만, 그녀는 인생을 고마워하며 살 수 있기를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빌리 홀리데이는 에디뜨 피아프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삶의 이력도 비슷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는 교사이자 시인인 루이스 알렌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 흑인 린치 사건을 바탕으로 쓴 시에 스스로 곡을 붙인 노래다. 빌리 홀리데이가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은 시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에디뜨 피아프와 빌리 홀리데이는 ‘비이성의 시대’를 노래하며 견뎠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예술가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불의로 인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일”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유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유투의 처럼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노래였다.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사건 앞에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아니 침묵할 수 없었다.

 

Over The Rainbow를 불렀던 세 명의 가수 주디 갈랜트, 애바 캐시디, 이스라엘 카마카위올레는 죽음 앞에 무너졌다. 예전에 몰랐는데 오랜만에 다시 들으니 애잔하게 들렸다. 사연을 알고 들어서 느낌이 달리 다가온 모양이다.

 

가요(이상은의 <공무도하가>, 자우림의 )에서 클래식(헨델의 , 모차르트의 까지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에서 다루는 음악은 광범위하다. 삶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가 음악으로 탄생하기도 했지만,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나 데릭 앤드 더 도미노스의 , 알라 푸가체바의 <백만 송이 장미>처럼 슬픈 사랑 이야기가 음악으로 탄생하기도 했다. 엔리오 모리꼬네 & 조안 바에즈의 처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음악 이야기도 있었고 이번에 새롭게 만난 이야기도 있었다.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그들이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계속 전해져야 할 이야기, 기억해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랑을 기억해 자신의 사랑을 잃지 않도록, 폭력과 전쟁으로 상처 입고 불평등으로 가득한 사회를 기억해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도록, 절망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도록, 삶의 의미를 찾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려고 말이다. 음악에 얽힌 이야기와 무관하게 그냥 듣는 음악도 참 좋지만 사연을 알고 들으니 뭉클함이 몰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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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걸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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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다음 사람에게, 그다음 사람에게, 또 그다음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야기에는 화자(話者) 혹은 서술자와 청자(聽者) 혹은 독자 필요하다.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의 장편소설 『열세 걸음』은 화자인 ‘나’가 청자인 ‘너’에게, 또는 화자인 ‘너’가 청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너’이며 ‘너’는 ‘나’이기도 하며 소설 속 인물들은 ‘그’이지만 ‘나’와 ‘너’이기도 하다. ‘나’와 ‘너’를 규정지으면 독서는 길을 잃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첫 문장은 “마르크스도 신은 아니지!”라는 ‘너’의 말로 시작한다. 소설은 신이 있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불운한 삶을 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혹하다. 『열세 걸음』은 비슷한 외모에 같은 직업인 두 남자 물리교사를 통해 왜곡된 삶으로 벌어진 비극을 그리고 있다.

 

물리교사 팡푸구이는 교단 바닥에 고꾸라지자 ‘영예로운 죽음’으로 추앙되어 ‘동경과 존경’을 받았지만, 실제의 그는 죽지 않았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면 안 되는 법이다. 이것은 불변의 정리(定理)다.’로 여기지는 시대였고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있되 죽어야 했다. 그는 먼저 죽었지만 왕 부시장의 순직으로 시신 미용은 나중으로 미뤄졌다. 물리교사 장츠추의 아내이자 ‘아름다운 세상’의 장례미용사 리위찬에겐 정치적 인물의 시신 미용이 우선이었다. 시신 미용은 산 자의 불만을 없애고 죽은 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절차였다. 리위찬은 왕 부시장이 왕 부국장이었을 때부터 욕망으로 얽힌 관계였다.

 

냉동고에서 뛰쳐나온 팡푸구이가 허둥지둥 뛰어든 곳은 장츠추의 집이었다. 교육의 목적이 대학 진학이 된 시대, 급여도 낮은데다 교사로서의 만족도까지 낮았던 장츠추는 팡푸구이에게 엉뚱한 제안을 한다. 그것은 팡푸구이의 얼굴을 장츠추의 얼굴로 만들어 가짜 장츠추는 물리교사의 삶을 살고 진짜 장츠추는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팡푸구이는 장츠추의 삶에 혼란을 겪었고 장츠추의 장사꾼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리위찬은 남편의 얼굴을 한 팡푸구이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팡푸구이의 아내 투샤오밍은 죽은 남편이라고 말하는 장츠추(의 얼굴을 한 팡푸구이)가 불편했다.

 

그녀는 참새가 병아리처럼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걸 보면 하늘에서 행운이 뚝 떨어진다고 했지. 참새가 한 걸음 내디디면 자네한테 횡재수를 안겨주고, 두 걸음을 내디디면 관운을 안겨주고, 세 걸음을 내디디면 여복을 안겨주고, 네 걸음을 내디디면 건강운을 안겨주고, 다섯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의 기분이 늘 유쾌한 상태를 누리게 되고, 여섯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사업이 순조로워지지. (중략) 열한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아내가 아름다워지며, 열두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아내와 자네 애인이 화목하게 어울려 자매처럼 친한 사이가 된다는 거야. 하지만 절대로 열세번째 걸음을 보아선 안 된다네. 만일 참새가 열세번째 걸음을 내딛는 걸 보았다가는 앞서의 모든 행운이 죄다 곱절의 악운으로 바뀌어 자네 머리 위로 뚝 떨어져내린다지 뭔가!(422-423쪽)

 

제목인 ‘열세 걸음’은 물리교사 팡푸구이의 꿈에 나온 아름다운 여자가 말한 참새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로 꿈속의 ‘그’는 참새가 열세 걸음을 걷는 것을 보았다고 ‘너’에게 말했다. 팡푸구이와 장츠추, 그들의 아내들 투샤오잉과 리위찬, 리위찬과 비합법적인 거래로 얽힌 맹수 사육사, 담배를 팔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가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장츠추를 우체부로 오인하고 도와준 노인을 찾아온 테뉴는 보이는 욕망, 혹은 보이지 않는 욕망으로 얽혀 있었다. 이들의 생은 모두 참새의 열세 걸음을 본 생, 다시 말하면 악운으로 뒤덮인 생이었다.

 

팡푸구이가 장츠추의 얼굴로 바꾸지 않고 학생들과 가족들에게 살아있는 팡푸구이로 나타났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팡푸구이가 교단에서 고꾸라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팡푸구이의 죽음은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젠가 인간은 모두 죽는다 할지라도.

 

『열세 걸음』은 공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허울 앞에 개인의 가치는 무시되는 사회를 그린 이야기이자 양지 속에서 서지 못하고 음지 속에서 비틀대다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소멸한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당할 만큼 악운의 연속이라 믿고 싶지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이야기, 그래서 외면할 수 없는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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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홍신 세계문학 12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최규남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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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멀리 가신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스잔나는 요한 모리츠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7쪽)

 

게오르규의 『25시』의 첫 문장이다. 루마니아 판타나 마을에 살며 알렉산드로 코루가 집에서 일했던 요한 모리츠는 돈을 벌어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해 꿈의 땅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미국은 오래전 알렉산드로 코루가 사제가 그리스 정교회에 선교사로 부임했지만, 아내와의 결혼 때문에 포기한 나라였다.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의 아버지 요르그 요르단이 스잔나를 폭행할까 판타나를 떠나지 못한다. 작가였던 코루가 사제의 아들 트라이안은 판타나 마을에 집을 지을 생각이었지만 그 돈을 요한 모리츠와 스잔나에게 준다.

 

스잔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헌병대 소장 니콜라이 도브레스코 준위는 요한 모리츠를 ‘불온한 인물’이라며 말이나 가죽이 아닌데도 ‘징발’한다. 요한 모리츠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불온한 인물’이었던 요한 모리츠는 유대인 야곱 모리츠가 되어 루마니아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개인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요한 모리츠의 일이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흐르자 니콜라이 도브레스크 준위는 자신의 잘못을 들킬까 스잔나에게 집을 징발하지 않으려면 이혼 서명을 하라고 강요한다. 알렉산드로 코루가 사제가 요한 모리츠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지만 허사였다.

 

유대인이었던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트라이안을 사랑했지만 사랑때문이 아닌 운영하던 신문사를 구하고 자신의 생활을 구하기 위해 트라이안과 결혼을 계획했다. 게오르규는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이 세워지자 독일로 망명했지만, 루마니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했다. 게오르규의 아버지는 트라이안의 아버지 알렉산드로 코루가처럼 그리스 정교회 사제였다. 게오르규의 실제 모습과 많은 부분 겹치는 트라이안은 ‘관리,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 등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인간을 질식시킨’다며 ‘지상의 모든 인간이 탁한 공기에 질식되어 무서운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25시>를 쓰고 있었는데 『25시』은 트라이안이 쓰고 있던 것과 같은 주제의 소설이었다.

 

루시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25시다!”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바로 유럽 문명이 지금 처해 있는 시간이다.”(190쪽)

 

유대인 수용소에서 만난 의사 아브라 모비치와 함께 헝가리로 탈출한 요한 모리츠는 아브라 보비치의 여동생 로자 나기 집에 머물렀다. 하녀 율리스카와 함께 초콜릿 공장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다 불심검문에 걸린 그는 헝가리 적국인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은 속국이었던 헝가리에 노무자 5만 요구했고 ‘국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요한 모리츠는 독일의 헝가리인 수용소로 보내졌다. 요한 모리츠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징발당했고, 인간이었지만 팔렸다. 지금이 25시다, 라고 말한 이는 헝가리 정보국 국장인 바르토리 백작이다. 그는 기술 사회인 서구문명에서 인간은 인간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적 가치의 차원에서만 평가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트라이안처럼 게오르규의 또 다른 자아로 보인다.

 

스잔나에게 애칭 야니로, 어머니 아리스티차에겐 세례명 이온으로 불렸던 양켈 혹은 요한 모리츠는 유대인 야곱 모리츠에서 헝가리인 모리츠 야노스가 된다. 그는 뮐러 대령에게 ‘영웅족’이라고 불리며 연구 대상이 된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 혹은 가치 판단에 따라 수용되거나 폐기되는 대상이었다.

 

제 힘으로는 더 이상 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처해 있는 시간은 이제 삶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무거운 살과 피를 지니고 그런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인 것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380쪽)

 

루마니아가 소련에 정복당한 후 아니스티차와 스잔나는 목숨만 붙어 있는 사제를 구해 독일인에 넘겼다. 그 후 아니스티차는 총살당했고 스잔나는 도망쳤다. 요한 모리츠는 프랑스인 조제프와 함께 탈출해 미군 점령지역에 도착했지만, 미군은 요한 모리츠에게 루마니아는 연합국의 적국이라며 수용소로 보냈다.

 

트라이안 코루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 역시 요한 모리츠와 별반 다르지 않게 떠돌았다. 루마니아가 휴전을 청한 이후 크로아티아 사람에게 억류되고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송되었다. 소련군의 공포정치가 싫어 구원을 향해 탈출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군의 감옥이었다. ‘25시’의 세계는 개인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 세계이자 개인의 의지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였다. 트라이안 코루가는 탄원서를 쓰며 이름 대신 증인이라고 썼다. 이들에겐 삶의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켜보는 ‘증인’일 뿐이었다. 보고도 침묵해야 하는 증인 말이다.

 

요한 모리츠는 십삼 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고 여전히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공식적으로 자유로웠던 시간은 고작 열여덟 시간이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동유럽인의 외국인이란 이유로 다시 감금되었다. 요한 모리츠는 인간이었고, 인간이길 포기한 적이 없지만, 인간의 삶을 살지 못했다. 숨을 쉬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은 아니지 않던가. 아이러니하지만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기계로 여긴 존재는 체제와 문명에 속해 있는 인간, 역사 속 인간이었다. 따라서 인간을 존중하는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걸을 수 있는 건, 자유롭게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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