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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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올리면 부모에 이어 형제가 떠오른다. 지금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원래 집은 가족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낯선 세상에서 가족은 최초의 내 편이다. 가족이라도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즐거운 날도 많지만 전쟁의 날도 숱하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건 가족이라도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가족이 동상이몽 하며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라고.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책 제목과 같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가 그것이다. 두 소설은 작가인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알랭 레몽은 오십 년이 흐른 후 가족과 함께했던, 때로 가족과 분리되어 혼자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두 편의 소설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 그와 가족이 살고 머물렀던 집과 꿈을 찾아 방황했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이야기들은 기억의 왜곡과 상실 덕에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다. 지독하게 불행하거나 그리울 만큼 아름답거나. 그의 소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모두에겐 지나간 시절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고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이다.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렇게 따져보니 한 이십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도 넘었다. 그렇대도 그 집은 우리 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불청객들은 나가라, 감히 어디라고! 꺼지란 말야! 그 집은 당신네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란 말야. 그 집에 살면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지독하고 너무 찐해. 거기서 우린 너무나 행복했어. 그리고 때로는 여지없이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 열 명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 전부. 그리고 부모님들도. 지금 나는 트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집에서 먼 곳에. 그 모든 것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러나 가끔 브르타뉴로 다시 돌아가 트랑을 지나기도 하고 거기서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다. 떨리는 가슴으로 그 집을 지나는 때도 있다. 모르는 체하며 슬며시 창문 저쪽으로 눈길을 던져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창 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꼭 화상이라도 입을 것만 같다.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8-19쪽)

 

옛집에 간 적이 있다. 그 집은 새로 지어져 있었다. 태어난 집은 아니지만 여덟 살 여름부터 스무 살 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여러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란 단어에 떠오르는 집은 그 집뿐이다. 당시에는 그 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옛집에서의 내 부모님 역시 그랬다. 그것은 나에게 슬픔을 넘어 절망이었다. 잊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움 앞에 절망은 무뎌졌다. 안 좋았던 기억들은 다른 집에서도 계속됐지만 특별한 기억은 그 집에서만 유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집은 작았지만 있을 것이 다 있는 집이었다. 훗날 넓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전까지는 그 집이 작은지도 몰랐다. 그 집에는 마당과 옥상과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그 집은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보물찾기하기 좋았고 틀어박혀 책읽기 좋았다. 함께 했던 가족과 이웃들이 살지 않는 그 골목은 낯설었다. 다행이랄까. 그 골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 골목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내 기억의 조각도 사라질 것이다.

 

골목이 사라지는 건 차라리 낫다. 맘에 들진 않지만 다른 집들이 세워지니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에서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라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과 이별을 했다. 어떤 이별은 언젠가 만날 거라는 기대를 품거나 잘살고 있겠지 여기며 살았지만, 어떤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일부다. 산다는 건은 결국 이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나’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부모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실 것이다. 노년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지만 재작년 가을 무렵부터 작년 봄까지는 아주 나빴다. 게다가 어머니의 건강 역시 안 좋았다. 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자식으로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는 죄송함과 ‘내 속에서 나를 무섭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떤 존재’(93쪽)가 있어 마음이 복잡했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추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현실 앞에 기억은 때로 길은 잃는다. 추운 날들이 이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고요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48쪽)고 했다. 지금의 나는 이 평화가 지속하길 바란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길 바란다. 산다는 건 결국 이별하는 것인데 이별은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코.(「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40-41쪽)

 

파티는 끝났다. 내 몸이 겪는 고통의 여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부재. 목숨을 부지하고 견디는 일이 남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사고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이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몽유병자나 자동인형같이 된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이다. 삶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다. 사고가 나기 전의 삶과 후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트 크롸, 나의 소명, 이런 것은 이제 다 지워져버렸다. 죽은 것이다. 끝난 것이다. 그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발, 다시 한 발,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또 하루. 내 나이 스물두 살. 삶은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55쪽)

 

그 시절은, 우리가 트랑에 살던 그 시절은 끝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팔렸다. 나 역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 나는 이제 트랑에 살지 않고 생트 크롸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물렝 베르를 떠난다. 물렝 베르에 살던 사람들 각자는 저마다의 시절을, 저마다의 시간을 마감하고 결국은 떠나버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작업이 끝났다. 다른 더 바쁜 일들이 생겼고 다른 욕구가 생겼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안느, 나를 사랑하는 안느와 함께. 이렇게 행복을 꿈꾸었던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생생하고 살아 있고 싶어 했던 한 젊은이가 살아서. 그러니 이젠 어서, 어서.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95쪽)

 

우리가 밭에 도착하는 바로 그 순간, 숲에서 암사슴 두 마리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로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정확하게 집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그놈들이 바르르 떨면서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빗속으로 저만큼 달아나버린다. 달려라, 달려라,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4쪽)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나’가 살아왔던 시간은 다르다. 내가 살고 머물렀던 곳과 ‘나’가 살고 머물렀던 곳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별의 나날 혹은 잠재된 작별의 나날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레몽은 말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소생하지 않지만 삶은 여전히 기적이라고.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 있는 것이 작별일지라도. 파티는 끝났다. 그러나 다른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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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찜해둔 책이라 빨간바나나님의 좋은 리뷰 더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빨간바나나 2016-01-20 11:36   좋아요 1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에 도움에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