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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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28쪽, 첫 문장)

 

빠르게 다가간다, 에는 주체의 목적지를 향한 기대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다가가는 곳이 검은 강이다. 목적지가 어떨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가간다는 건 그곳 외엔 딱히 갈 곳이 없거나 그곳을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벼운 나날』의 네드라는 스무 살에 비리와 살기로 운명 지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 전, 그리고 후에도 자기가 사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울타리가 주는 안전함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쪽이었다. 누군가 가지 못한 세상을 들려준다면 판타지와 열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진실을 얘기해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순간 절망할지라도.

 

사랑은 불확실한 감정이다. 결혼한다고 해서 확실시되는 건 아니다. 불확실한 감정이 무뎌지는 것일 뿐. ‘너’를 위해 사는 건 당연하다고, ‘너’는 나를 위해 살 거라고 믿었던 삶은 아이들을 위한 삶으로 변모한다. 아이들을 위한 삶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지만, 누군가에겐 간절히 살고 싶은 삶이지만 네드라처럼 평생 ‘평범한 삶’으로 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내 삶이 소멸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나 남편의 처지에서 자신을 엄마가, 아내가 타인이라고 규정한다면 서운하겠지만 ‘나’가 아닌 모두는 ‘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소설은 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시대적 상황이 지금과 다른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결혼한 여자들의 삶은 남자들의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의 아이들을 다 키워낸 내 어머니는 아이들의 아이들인 손주들의 삶에 갇혀 있다. 걸음을 배우고 말을 배워가는 아이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당신의 삶이 소멸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네드라는 깨어 있었다. 팔꿈치 한쪽을 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이 지독한 냄새는 뭐지?” 그녀가 말했다. “핫지? 너니?”

개가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거기서 나가.” 그녀가 소리쳤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명령했다. 결국 귀를 내리고 개가 걸어 나왔다.

“비리.”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창문 좀 열어줘.”

“그래. 뭐야?”

“당신의 망할 놈의 개.”(94-95쪽)

 

‘지독한 냄새’의 근원은 ‘당신의 망할 놈의 개’가 아닌 ‘당신이 매혹당한 그 여자’일 게 분명하다. 그녀가 시간이 흘러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엔 그날 맡은 냄새도 한몫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삶의 균열들은 냄새로 좀 더 커졌을 것이다. 책장을 들여놓을 공간이 부족해 책탑을 쌓았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한두 권씩 떨어졌으나 정리할 시간이 없어 올려두기를 반복했다. 균열을 알았으나 외면했다. 우르르 책탑이 무너졌다. 균열의 끝은 붕괴였다. 아이는 자라 자신의 삶에 눈을 뜨고 남편이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처럼 ‘그녀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네드라는 원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속하지 않는 오직 나만의 삶을.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무너지는 삶을 회복하고 싶은 의지가 아닐까.

 

아이는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갑자기 가벼워졌다. 훨씬 가벼워진 채로, 무서울 정도로 사소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떠났다. 순진무구한 삶, 울음, 아버지와 의무적인 놀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이 모든 것이 무게가 있었다. 그것들은 떠나가고 용해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119쪽)

 

다리가 하나뿐인 소녀 모니카와 그녀 아버지의 죽음은 네드라에게 삶의 사소함을 가르쳐주었다. 인생의 여름을 보낸 네드라와 비리는 가을,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여행을 떠났던 비리는 리아를 만났고 그녀와 새 삶을 시작했다. 혼란의 시절 네드라의 위안이었던 정원사 지반은 “우리 삶이란 게 항상 다른 사람의 손안에 있지.”(124쪽)라고 했다. 제임스 설터는 반복적으로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이브는 삶을 가볍게 여겼지만 혼자 있는 삶은 두려웠다. 다정해도 남편은 될 수 없는 아노드 대신 전남편과 재결합을 고려한 것은 타인 없이 살 수 없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검은 강을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은 판타지 혹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이다. 그럼에도 검은 강에서 살거나 떠나는 것. 그동안의 나는 떠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살아왔고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삶의 경험들이 알려준 것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었기에.

 

그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강 쪽으로 걷는다. 그의 양복은 너무 덥고 꼭 꼈다. 강가에 닿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부부가 있다.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가 끼었다. 그 넓고 어두운 강, 그 둑에 온 것이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긴 하루였고, 끝없는 오후였다. 친구들은 떠나고 우리는 강변에 서 있다.

그래, 그가 생각했다. 나는 준비됐고,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 마침내 준비가 되었다고.(436-437쪽, 마지막 문장) 

 

다만 죽음으로 가벼워질 운명이라면 현재의 생을 좀 가볍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산다는 건 삶을 낭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균열 아니 붕괴의 조짐을 보고도 그 안에서 버티는 생은 무모하다는 뜻이다. ‘떠남’의 삶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떠나야만 알게 되는 사실 또한 있는 법이다. 한 가지, 자유는 외로움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깊은 밤, 앞 머리칼이 자꾸 눈을 찔러 가뜩이나 부진한 독서를 방해했다. 책상에 가위가 보였다. 싹둑! 마음에 들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럭저럭 괜찮군. 아니야 내일 미용실에 갈 걸 그랬어.” 후회해도 소용없는데 마음은 자꾸 중심을 잡지 못한 저울처럼 왔다가갔다가 한다. 미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매혹적인 문장을 읽는 독자처럼 책에 눈을 떼고 숨 고르는 일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삶은 늘 고통이다. 삶에 중요한 것은 회복 의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그녀는 타인의 눈에 불쌍해 보이고 불행해 보였을지 몰라도 삶에는 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게 돼 있다. 삭막한 나뭇가지도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필 것이다. 봄을 만나기 위해 이 여름, 겨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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