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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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이란 이름은 진작 알았지만 시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 얼굴은 몰랐었다. 어느 시인의 좋아하는 여러 시인의 시를 묶은 시집에서, 시인의 시를 인용한 모 철학자의 에세이에서 시인의 시를 몇 편을 읽었을 뿐이다. 언젠가 TV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생각했던 시인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인자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8년 만의 나온 시인의 정식 시집이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을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흔들린다」중에서

 

시인은 느리게 주변을 걷다 걸음을 멈춘 듯하다. 걸음을 멈춘 이유는 나무의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함민복이 본 자연들은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아무런 희망 없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줄 알았던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고 이파리를 튀우고 있었다. 희망을 꿈꾸는 삶은 결코 비참한 삶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이루지 못할 꿈일지라도. 예고 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개는 쇠줄에 묶여 있고

사내는 전화기 줄에 묶여 있다

사내가 전화기 줄에 당겨져 외출하면

개는 쇠줄을 풀고 사내 생각에 매인다

 

집은 기다림

개의 기다림이 집을 지킨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중에서

 

전화기 줄에 매달려 위태롭게 살아가지만 쓰러지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떠도는 ‘나’는 기다리는 ‘너’ 때문에 비로소 균형을 잡는다. 떠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개가 떠도는 사내 대신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듯, ‘나’는 새로운 ‘너’ 때문에 삶을 유지한다. 그렇게 생은 이어진다.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의 이유를 끝없이 찾는 것일지도.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중에서

 

탄생과 죽음은 대립하지만 탄생이 없다면 죽음도 없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단어로서는 존재한다. 사는 일은 점차 죽는 일이라는 아이러니. 드라마〈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영이의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또 죽어간다.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 「양팔저울」 중에서

 

함민복에게 삶은 ‘나’가 ‘너’를 읽어가는 시간이다. 읽어간다는 것, 그것은 제대로 안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너’는 자연이기도 사람이기도 사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너’라는 이름의 부여가 가능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희망은 줄고 절망이 크다. 경험은 준 건 선물이 아닌 독이었다. 현실은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너’와 ‘나’가 여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를 통해 빛난다. 이것이 우리가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하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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