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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이 만든 필연일까.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은 ‘이야기’ 혹은 ‘이야기를 만들거나 들려주는 사람, 즉 이야기꾼’에 관한 이야기였다. 위화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이야기(문학)가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말했고, ‘8년을 기다려 온 이야기꾼의 귀환’이라는 띠지 문구를 내세운 장편소설 『지옥설계도』의 소설가 이인화는 최면 세계로 들어간 강화인간이 죽어도 소멸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깨어나려면 이야기로 된 설계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통해 이야기의 가치에 대해 말했다.

 

나는 추석이 지나자마자 길을 떠날 작정을 했다. 건어물과 소금 지게를 지고 열두 고개를 넘어 산간 마을을 다녀온 장돌뱅이 안 서방이 그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식이랬자 별로 시원한 내용은 아니었다. 안 서방이 들었다는 소문은 그 원수가 덕유산 자락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앉아 도를 닦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위인이 한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다는 소리도 어딘가 걸맞지 않건마는 더구나 도를 닦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도라면 재작년 그저께 온 세상을 들었다 놓고 도처에서 피박살이 나버린 ‘천지도’란 요물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겐가. 애고, 복도 없고 가련한 이내 팔자.(9쪽)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에 나오는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소설은 ‘나’ 연옥이 ‘그’ 이신통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연옥은 월선이라 불리던 관기가 선전관과 눈 맞아 구례댁이 된 이후에 태어난 아이다. 이별전을 받고 돌아온 엄마 구례댁과 같이 살다 오동지의 재취로 갔지만, 그는 투전판을 집으로 아는 남자였다. 시할머니의 소망이었던 아들을 낳아 대를 이었다면 달라졌을까? 연옥은 남편이 없을 때 집에 화적이 들자 이후 친정으로 돌아왔다. 딸은 어미 팔자를 닮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결혼 전 자신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신통을 다시 만난 연옥은 살림을 차렸지만, 그는 천지도 일을 다시 해보겠다며 길을 떠났다. 서자였던 아버지의 얼자인 신은 글 읽는 선비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어 한양에 갔다가 서일수를 만나 이신통이란 이름의 전기수가 되고 천지도에 들어가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천지도는 동학을 발전시킨 종교, 천도교를 소설화한 이름이다. 『여울물 소리』는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표기되는 동학혁명과 갑오개혁 등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허구와 사실이 혼재하는 소설이다. 천지도인들은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석영은 21세기에 천도교를 내세운 이유는 당시보다 100년 넘게 흘렀음에도 이 세상이 여전히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특별한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 때문일 것이다.

 

계급으로 친다면 가장 밑바탕인 천한 신분의 여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은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인데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신통이 여자들에겐 새로운 세상을 주지 않았던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자는 자고로 바깥에서 큰일을 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말해지던 세상이니 이해는 하지만.

 

연옥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이신통의 삶과 그가 천지도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퍼즐 조각처럼 작은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커다란 퍼즐 판, 이야기를 완성했다. 신통의 이야기를 들은 연옥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남기는 이야기이자 ‘비행운’의 날 속에서 좋은 날을 기다리는 이들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가 얼마나 잤는지 문득 깨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 감고 있을 때에는 바로 귓가에 들려오다가 눈을 뜨면 멀찍이 물러가서 아주 작아졌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488쪽)

 

『여울물 소리』는 얇고 폭이 좁지만 세차게 흘러가는 여울처럼 사람들 역시 그렇게 살아갈 거라는 기대를 하게 한 소설이었다. 목수이자 전시 기획자인 김진송은 최근 저서『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서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 세상은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다’고 했다. 이야기가 아닌 말이 범람하는 세상, 이야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진짜 이야기에 관한 갈급함이 황석영으로 하여금 판소리와 민요 등 옛이야기를 복원하게 했고 이 소설을 쓰게 했을 것이다. 황석영은 『여울물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들에 의해 삶은 소멸하지 않고 이어진다고 말했다. 우리가 꿈꿔야 할 세상은 바로 이야기가 흐르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는 세상,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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