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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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난 한국 문학을 잘 안 읽었다. 기껏 읽어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검증된(?) 혹은 소문이 날 대로 난 작가의 책이나 읽어보았을까? 그마저도 요즘은 제대로 읽은 것이 없는데 가끔 읽게되는 한국 신인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재기넘치고 기발하며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런 새로운 작가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처음보다 더 멋진 소설들을 써 낸다면 우리 문학에도 언젠가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보다는 독자인 우리가 먼저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지만 말이다.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선 매번 이야기를 해서 지겹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또 이야기 하련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런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전혀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symptomer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어찌나 능청스레 모든 것을 풀어 놓는지 깜빡하고 속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읽다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문장, 스타일, 약간 식상한 스토리도 느껴지고 많은 에피소드들이 정신을 산란케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로 썼다하니 그런 것 쯤이야 통과!

 심리학인지 문학인지 모호한 생각마저 갖게 한 이 책은 사법고시라도 합격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들어간 연구소에서 기껏 아침에 들어온 물건을 내리고 서류와 물건의 개수가 일치하는지 확인한 후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면 그 날의 업무가 끝나버리는 한 무료한 직장인의 기상천외한 경험담이다. 작가는 그가 말하는 심토머들의 등장이 인류의 새로운 종의 탄생이니 어쩌니 하면서 설設을 풀어 놓지만 <믿거나 말거나> 혹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그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 주변에 각자의 집에서 심지어 우리 몸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기에 이렇게 서두가 긴지 알아보자.

 어느날 우연히 회사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엿보게 된 13호 캐비닛. 텅 빈 연구실 구석자리에 처박혀 꼼짝도 안 하는 그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맞추기 위해 아니, 무료한 회사 생활을 0000에서 9999까지 눈 딱 감고 만번만 반복하면 될 그 일로 활기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케비닛 열기를 한 후 그  안에 들어 있는 삼백일흔여섯 개의 파일들을 읽게 되면서 알게 된 일이다. 물론 주인공인 공대리는 그 바보같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지만 말이다.

 그 서류엔 심토머들이 나온다. '징후를 가진 사람들'. 공대리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행동과 징후가 보이는 그들의 증세는 이러하다. 자다가 깨면 몇 시간 아니 몇 일 아니 몇 년의 시간이 사라지는<토포러Torporer>의 징후를 가진 사람들, 심호흡 한 번하면 몇 시간이 사라지고 없는<타임 스키퍼Time skipper>를 가진 여자, 자기하고 똑같은 분신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짜증난다는 <도플갱어Dopperlganger>의 여자, 사랑하는 여자 곁에 있고 싶어 고양이로 변신하고픈 남자, 홍당무보다 지우개가 더 맛있고 광고지라든가 이쑤시개 같은 것을 먹더니 이젠 달빛까지 먹어댄다는 남자.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속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담을 맡게 된 공대리가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치 공중그네의 이라부 선생을 보는 것 같지만 그다지 쓸만한 해결책을 내세우지 않으니 꼭 그렇다고 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심리서도 보고서도 아니고 소설이다. 그저 심토머들의 상담 내용이 다라면 뭐가 그리 재미가 있을 것이겠냐마는 <캐비닛>엔 음모와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약간의 엽기적인 결말이지만.

 2부 마지막 이야기에 <저도 심토머인가요?>라는 글이 있다. 사실 작가가 심토머라는 신종어를 써가며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을 보면 처음에도 말했듯이 그 심토머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심토머의 첫 징후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겪고 있는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직장을 자주 바꾸는 사람, 쓸데없이 뭔가를 모으는데 심하게 집중하는 사람, 지하철만 타면 구토가 나는 보험판매원,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는 핸드폰의 밧데리를 매일 바꾸는 외로운 사람, 일에 빠진 사람, 빚에 쪼달리는 사람, 또 남들이 배부른 소리라고 하지만 자긴 미칠 것만 같다는 주부. 그들은 아직 심토머의 자격이 없지만 언젠가는 그 증상이 심해지면 심토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빌미로 심토머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각자 받고 있는 스트레스와 고민들이 <캐비닛>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현실. 그 현실을 블랙유머속에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문학도 그 다양함이 날로 발전되어 가는 듯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늘 독자보다 한 발 앞이다. 그러니 작가를 하는 것이지만 매번 감탄이다. 캐비닛. 은희경의 말처럼 능청스런 '구라'가 일품인 작품이었다.

 뭐 어쨌거나, 심토머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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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트
가쿠다 미츠요 지음, 양수현 옮김, 마쓰오 다이코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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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다' 라는 말은 어떨 때 쓰는 말일까? 사전에 찾아보면 '욕심이 없고 깨끗함'을 뜻하기도 하고 음식을 두고 '느끼하지 않고 산뜻한 맛'을 담백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난 가쿠타 미쓰요의 <프레젠트>를 읽으면서 내내 '담백하다'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희한하게도 가쿠다 미쓰요의 책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읽은 책은 <프레젠트>가 처음이니 그 '단백함'이 내게 썩 괜찮은 작가를 한 명 더 알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가쿠다 미쓰요의 책이 내 수중에 아직 여러 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기까지 하다.   

 12월, 선물이 가장 많이 오고가는 달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라서, 연말이라서 인사하고 인사 받느라 선물 장만에 정신이 없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내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다! 할 만한 선물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난 부모님이 정해 준 이름도 맘에 안 들고, 기억에 남을만한 책가방도 없었으며 첫키스의 추억은 가물가물이다. 남자친구들의 선물도, 결혼식의 기억도 없으니 그 예쁜 아이의 선물도 없다. 어쩜 이런 인생이 다 있나 싶지만 낙심하진 않는다. 아직도 내게 기억에 남을 선물을 받을 기회란 수 없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가쿠다 미쓰요의 <프레젠트>에는 12가지의 선물이 나온다. 선물 하나하나 풀어 헤칠 때마다 가슴이 짠하고 마음이 벅찬다.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거리다가 자신의 아이를 낳으러 가는 순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 하루꼬. 재혼한 엄마가 보내 준 어릴 때 할머니가 사 준 책가방을 보면서 지난 추억을 생각하는 나, 생일날 받은 료코의 너무나 멋진 첫키스, 혼자 자취하게 된 나를 위해 엄마가 사 준 냄비 세트.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느껴지는 베일, 기억, 요리, 눈물, 곰인형. 선물 하나마다 담겨 있는 마음들에 난 마치 내가 받은 선물인양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곰인형>이 나온 선물은 마지막에 눈물이 주르륵~흘렀다. 그렇게 멋진 선물이 존재한다니... 그런 선물을 기획한 마모루와 하쓰코 아니, 작가인 가쿠다 미쓰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앞 둔 남녀에게 꼭 권하고 싶은 기획이었다.(물론 결혼한다면 나도 그러고 싶고...^^;)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가쿠다 미쓰요는 이 질문을 받고 한참을 망설였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지만 생각해보면 선물이란 그런 것 같다. 상대방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그 선물에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는 것이다. 그 선물이 크든 작든, 비싸든 싸든 간에 주겠다는 사람의 마음이 제일 소중한 것이고 고마운 것이리라. 그러니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겐 많은 선물들이 떠 오른다. 사랑이 내게 준 아름다운 기억의 선물, 동생들이 준 믿음의 선물, 변함없는 마음으로 날 대해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의 선물, 친구들의 우정의선물.

 그리고 한 해가 끝나는 이 무렵, 이 아름다운 책을 읽게 되어 난 참 행운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이냐고...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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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30년 만의 휴가
앨리스 스타인바흐 지음, 공경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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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일에 얽매어 사는 현대인 누구나 <여행>에 대한 환상은 가득할 것이다. 그게 휴가로든 말년의 퇴직으로 인한 것이든 삶에 또 다른 활력소가 될 테니까 말이다. 나도 늘 <여행>을 꿈꾼다. 시간이 난다면 세계 일주를 하리라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어야지. 프루스트가 보랏빛 장갑을 늘 끼고 찾았던 파리의 리츠호텔, 오드리 토투가 나왔던 그 물랑 드 카페,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오모, 요즘 들어 가장 가고 싶은 곳 프라하 등등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다 다녀 볼거야. 언젠가는 나도 꼭!!! 하면서...

 앨리스 스타인바흐, <볼티모어 선>지에 근무하며 1985년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이 멋진 여자가 어느 날 휴가를 계획한다. 매번 계획만 세우고 실천을 못하던 그녀가 15년간 남의 이야기만 써다가  이제야 그녀 자신의 사연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여행을 방해했던 많은 장애들(집은? 고양이는? 병이 나면 어떡하지? 휴직이 받아 들여지기나 할까? 등등)을 어느 순간 극복하자 앨리스의 휴가는 꿈처럼 이루어졌다. 30년 만에 이루어진 멋진 휴가가 말이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들어 있지 않은 이 특별한 여행서는 젊은 여자가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아이도 다 키우고, 남편도 없는 싱글인 장년長年의 여자가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파리와 런던 이태리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 내려 갔다. 구경만 하고 바로 떠나는 여행이 아닌 머물러서 보내는 여행. 이런 여행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여행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차가 아닌 도보로 다니며 파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카페 뒤 마고, 카페 드 플로르, 또 가슴을 셀레게하고 소녀의 마음을 갖게 해 준 한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생트 샤펠의 색유리 사이에서 영혼이 만난 느낌을 받았고 생 루이 섬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느릿느릿 자콥 거리를 산책했다. 그들의 산책 모습에서 <비포선셋>의 장면이 떠올랐다. 여행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런던에서 그녀는 좋은 친구 셋을 만났다. 갑자기 아픈 그녀를 위해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아끼지 않고 돌봐주었고 그들과 같이 찾아 간 시싱허스트의 정원은 각자의 마음 속 열정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앨리스의 시싱허스트는 글쓰기였다. 뭔가를 언어로 우아하게 표현하려는 욕망. 킹스 로드에서 아침을 먹고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에서 전시한 러브레터를 읽으며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고, 브레즈노즈 칼리지에 숙박하면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마지막 여행의 종착지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대형 웨딩 케익처럼 생긴 밀라노의 두오모를 보았다. 보헤미안 라이프의 중심지이기도 한 브레라라는 곳에 반하면서 밀라노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딸아이 같은 캐롤린을 만났고 베니스에서 그녀는 삶이 자신을 재단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삶을 재단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앞으로도 또 그럴 수 있을 지 궁금해했다. 또 중세마을 라벨로에서는 사람이 아닌 도시에 대해 첫눈에 반하는 멋진 경험을 한다. 그리고 시에나의 서점, 아솔로의 묘지를 끝으로 앨리스의 여행은 막을 내린다.

 지금껏 읽어 본 여행서와 많이 다른 이 책을 읽으며 <여행>에 대한 매력을 또 한번 강렬하게 느꼈다. 패키지 여행에서도 맛 볼 수 없고 친구들과 같이 떠나는 여행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여행서였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여행을 맛 보리라 다짐하게 하는...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거야. 내가 영원히 지닐 거야.
이 순간의 기억을...베니스에 내리는 비의 기억을.
영원히 내 것이 될, 비 내리는 다른 곳을 상상하기시작했다.
스페인 계단에 쏟아지던 비, 파리에서 카페의 차양으로 들이치던 빗줄기,
시에나 광장에 내리던 비, 슬론 거리에 있는 숍들의 진열장에 튀기던 빗방울.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떠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안개에 싸인 베니스를 바라보고, 서둘러 비행기를 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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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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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 년 전 한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진짜같은 슬픈 이야기, 소설이란 걸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이야기...능소화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 불행의 이야기지만 그 불행을 사랑으로 승화한 행복한 이야기다.

능소화를 본 적이 없다. 아니 보았어도 그 꽃이 능소화인지도 몰랐으리라. '하늘의 꽃' 소화라 불리는 이 꽃은 만지는 게 아니다. 그냥 두고보아야 하는 꽃이다. 소화의 꽃송이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나 아름다운 꽃임에 꺾지말고 보라는 뜻에서 나온 소리일지도...하지만 그 꽃에 반해 꺾으면 안되는 그 꽃을 꺾은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팔목수라라는 옥황상제의 무시무시한 신하가 버티고 있는 하늘정원에서 말이다. 그녀의 죄값은 가혹하다. 팔목수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선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꼭꼭 숨어야 한다. 그게 그녀의 이승에서의 운명이다.

사주가 중요하다고 늘 말하던 스님이 있었다. 그 남자가 태어났을 때 그 스님은 이야기 했다. 선천운이 나쁘면 후천운으로 보하는 법이라고...남자의 아버지는 그러고 싶었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돋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의 불안은 점점 깊어만 갔다. 스님의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하늘정원에서 훔쳐 온 소화. 산 사람이 가까이하면 눈이 멀고 정신을 잃는다는 무서운 소화. 집 근처에 있는 소화는 모두 없애야 한다. 그리고 박복하고 박색인 여자를 며느리로 들여라. 부모 가슴에 묻힐 아들을 위한다면 그래야 한다. 벼슬에 대한 욕심도 접어야 하고 자신의 재능도 보이면 안 되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배필을 만나도 안 될 운명. 그 남자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운명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피할 수 가 없다. 다만 늦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저런 방도를 찾는 이유는 그 운명의 시간이라도 늦추어보자는 것이다.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하는 희망때문에. 부부가 너무 사랑하면 하늘이 샘을 낸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해도 그들의 사랑에 하늘은 샘을 냈을 것이다.

사람이 잊지 못할 슬픔이나 고통은 없다고 한다. 그 어떤 슬픔도 세월 앞에서는 약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고통에 못 이겨 자신의 목숨을 놓는 사람도 많고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놓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니까.


<담 안팎에 어제 심은 소화의 이름을 능소화凌霄花라 하였습니다. 하늘을 능히 이기는 꽃이라 제가 이름지었습니다. 저는 팔목수라가 가둔 우리의 운명을 거역할 것입니다. 오래전에 팔목수라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잊지 못할 추억은 없다고, 사람이 이기지 못할 슬픔은 없다고, 아물지 않은 상처 따위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슬픔을 잊을 수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거닐던 날들을 잊지 못합니다. 이제 능소화를 심어 하늘이 정한 사람의 운명을 거역하고,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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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동화 - 삶의 지혜가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허브 이야기
폴케 테게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예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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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가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허브 이야기. 17가지의 허브들의 유쾌한 이야기다. 언젠가 꽃들의 유래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꽃들에겐 그 유래에 맞게 꽃말이란 게 있어 그 사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가슴 짠한 이야기들이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여기 나온 허브들의 이야기엔 익살과 위트가 있다. 읽는 내내 기분 좋은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럼 어떤 허브들이 날 그렇게 유쾌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보자.

 내가 재미있어 한 이야기는 <서양자초>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나는 여자다. 고로 남편 길들이는 법에 관심이 제일 많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 '신이 여자를 만들고 나서~'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깔깔거리게 만든다. 특히 신이 손가락 한 번 톡 튀기자 약초가 나타나고, 또 한 번 튀기자 어디에서난 찾을 수 있는 약초가 되고 쓰는 용도를 알더니 신부가 결혼식 전날 밤 약초 아줌마를 찾아가는 풍습까지 생겼다고 한다.(오! 이럴수가) 근데 더 웃기는 것은 그 아줌마를 찾아 간 신부의 태도다.

"아주머니, 저는 그 사람과 곧 결혼을 할 생각인데요...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이...."
"알아, 알아."
"이리 와 앉아서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럼 내 알아서 약초를 처방해줄 테니. 그러니까 신랑될 사람이 술집에 간단 말이지?"
"녜"
"가면 아주 늦게 오는데 입에서 악취가 풍기지?"
"네, 그 사람을 아세요?"
"조용, 난 남자라면 다 알아. 그러고는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해대지?"
"만날 그러는 건 아니지만......네."
"집에 있을 땐 오로지 처녀한테 비비댈 생각밖에 없지?"
"네, 그런데 그게......"
"성을 잘 내고 입에 닿는 것만 먹지?"
"아뇨,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녜"
"정말 그 남자를 사랑하나?"
"그게, 지금 제가 대답을 하다 보니 그런지 안 그런지 헷갈리지만......네, 사랑해요."

이 얼마나 익살스러운 이야기인지...아무튼 그리하여 그 처녀는 약초를 얻어 남편에게 사용을 했 다나? 그러면서 마지막에 약초아줌마는 덧 붙인다. 요즘도 여자들 속 썩이는 남자들에게 사용해 보라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 <타라곤>이라는 약초에 대한 이야기인데...짧은 다리를 가진 용의 딸꾹질을 멈추게 해 준 약초라고 한다. 내가 용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용들은 다 다리가 짧지 않은가? 그렇다치고 원래 용들이 채식주의자였다는 상상은 너무나 재미있다. 그 용들이 덩치 값도 못한다는 사람들의 놀림에 처녀들을 제물로 받았다는 이야기에선 꺄르륵 웃음이 나왔다. 또 사랑의 꽃이라 불리는 <한련화>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감동적이기도 하다. 공주에게 반한 청년이 공주가 내세운 결혼 조건인 '사랑의 꽃'을 찾기 위해 세상을 헤매다가 페루에서 드디어 그 꽃을 찾아 가지고 오는 동안에 '사랑의 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 보니 결국엔 빈 손으로 오게 되었는데 공주의 시종이 묻는다 "꽃은 어디 있느냐?" 과연 청년은 무엇이라 대답했을까?(궁금하면 읽어보시라~^^)

 그외에도 여러가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라벤더>는 걸핏하면 픽!하고 기절하는 왕에게 그 효능을 보여주고 <민들레>와 요정 알라운이 만나는 장면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란 노래까지 등장한다.(놀라워라~) <서양쐐기풀>로 부자 농부의 딸 차지한 가난뱅이 왕자. 또 <라일락>이 일으킨 기적으로 공주를 차지하게 된 목동. 이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나 신비롭고 놀라워서 세상의 허브란 허브는 몽땅 가져다가 키우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다.

 더구나 이야기의 방식이 여느 동화들과 다르게 유쾌하고 즐거워 다 읽어버린 것이 아쉬울 정도이니 잘 기억해 두었다가 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는 조카들에게 두고두고 써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초>로 쌈 싸 먹을땐 '안젤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바질>이 뿌려진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왕들의 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페파민트>차를 마시면서는 '차 한 잔에 담긴 행운'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정말 인기있는 고모가 되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나의 기억력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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