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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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친절한 여행 안내서도 아니고 글쓴이의 얼굴이 오롯이 드러나는 수필도 아니며 소설이나 시라는 이름의 문학은 더더욱 아닐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그가 걷고 있는 길을 따라 걸었지만 읽다 보니 소제목처럼 "얼굴 없는 산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그 산책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의 깊은 사유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나의 추억들과 생각을 나눠보고 싶었다.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걸어본다]라는 주제로 작가들이 걸었던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첫 책으로 이광호 문학평론가의 "용산" 산책이다.

 

사실, 용산이라는 곳이 이렇게 큰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내가 아는 용산이란 지극히 좁은 동네, 서울역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기 전, 배호의 가사처럼 '남몰래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삼각지' 그 근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전혀 아는 곳이 없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내가 알고 있는 '용산'도 많았다. 그 첫번째 장소가 용산전자상가이다.

 

용산전자상가로 가는 고가 밑에는 택배 회사가 있다. 밤이면 택배 차량들이 이곳에 밀집해서 주차를 하고, 밤에 이곳을 지날 때면 도로 가에 택배 상자들을 길거리에 부려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두운 밤거리에 쌓인 택배 상자들은 어딘가로 보내주어야 할 약속 같은 것이다. 노천에 쌓여 있는 그 약속들이 너무 허약하고 적나라해 보이는 것은 이 장소의 허술함 때문일 것이다. 밤이 되면 세상의 모든 안부와 약속 들은 갑자기 허약해진다.

 

단 한 번도 약속의 힘을 실감한 적이 없다. 약속은 언제나 무력한 자의 몫이다.

 

오래전 컴퓨터를 좋아했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용산전자상가를 찾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취향에 따라가기 마련이라 전자기계는 물론이거니와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던 그때, 그 데이트는 그저 그 친구와 걸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이 위로가 되던 때였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 긴 통로를 지나 전자상가로 들어선다. 컴퓨터 상가부터 시작해서 온갖 전자상가를 다 기웃거리는 일이 우리의 목적이었고, 가끔은 컴퓨터를 구입하고, 부품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친구들의 조립식 컴을 맞춰주기 위해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데이트도 그 친구와 헤어지면서 일단락되었고, 더 이상 용산전자상가에는 내가 갈 일이 없었다. 그곳은 내게도 이제 작가의 말처럼 '짧지 않은 시간 어렵게 작업한 데이터나 소중한 기억들을 대신하는 파일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사람들'만 가는 곳인 것이다.

 

그 완벽한 무력감에 대하여.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또 알게 될지도 모른다. 기억의 하드디스크는 언젠가는 반드시 망가질 것이며, 누군가가 그것을 복원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그다음 떠오르는 곳은 용산역이다.

용산역이라고 해서 용산역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너무나 깊이 내 뇌리에 박힌 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90년대 용산 전철역의 이미지는 기억 속에 실루엣처럼 남아 있다. 그 실루엣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 붉은색의 이미지다. 붉은 얼굴의 군인들과 사창가의 붉은 불빛들은 지금 포장마차촌 알전구의 붉은 불빛으로 옮겨왔다. 기억 속에는 역사 앞을 오가는 군인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과 부대찌개나 감자탕집 같은 허름한 식당들의 이미지가 있다. 사창가에 대한 기억은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다닌 미아리의 모습이 압도적이다. 미래와 현재에 어떤 확신도 사치스러웠던 한 시절. 학교 앞 개천 변의 유곽들은 짜장면집에서 몰래 보던 잔혹한 성인용 만화의 한 페이지 같았다. 미아리가 그랬던 것처럼, 용산역의 붉은 사창가들도 사라졌다. 붉은 불빛들이 새로운 환한 빛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이 거리가 붉은빛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은 아니다. 거리는 붉은빛을 다 지우지도 못한 채 희고 불투명한 액체로 덧칠되었다.

 

용산역 근처를 가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근처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붉은 불빛'들이 모여 있던 그곳을 지나면서도 처음엔 뭐지? 했다. 그 안에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차창을 통해 스쳐지나가듯 바라보며, 그제서야 아, 이곳이 '그곳'이구나. 했었다. 지나는 데 몇 분은커녕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스침의 광경은 슬로우비디오처럼 천천히 선명하지도 않고 뿌연 화면처럼 보였다. 그녀들은 어떻게 저곳에 가게 된 것일까? 그날 밤 내내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이후 용산역은 내게 그 '붉은 불빛'들 속의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그 부근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이 맞는지도 헷갈릴만큼 변해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장소가 제의적인 공간이 되는 것은 우연에 기댄 것이다, 스쳐지나가던 골목길과 육교와 작은 공원과 카페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치지 못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의지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사소한 운명들이다. 그 우연들에 운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겠지만, 어떤 우연들은 삶을 일거에 다른 시간으로 돌려놓고 되돌아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 우연들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피할 수 없이 잔혹해보인다. 어느 봄날 작은 벚꽃 나무 아래에서 나눈 이야기가 기억날 수 없고, 그 평온한 눈빛도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 공간의 따뜻한 공기들과 상냥한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꽃잎의 리듬만이 기억난다면, 그리고 그 순간이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면, 그 장소는 한 사람에게는 제의적인 장소가 된다. 그 봄날이 몇 번이나 지난 뒤에도 눈 오는 날 그곳을 찾아가 한참 동안 혼잣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눈 속에 묻거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 혼자만의 비밀스런 의례를 치르는 사람은 그 장소의 주인이 아니라, 그 장소에 찔린 자이다. 장소는 긴 애도의 자리가 된다.

 

'우연이라는 이름의 사소한 운명'이 만들어준 또 하나의 장소, 이태원

이태원의 첫 기억은 친구와의 쇼핑이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보세옷을 살 수 있던 유일한 곳. 서울만 해도 낯선 곳이었던 내게 이태원은 더더 이상한 곳이었다. 한국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고, 분명 서울의 한 곳인데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던 곳. 가끔 클럽에 가기 위해 이태원을 찾기도 했었지만 막상 가본 곳이 기억에 남지 않은 걸 보니 그때의 나는 그 작은 용기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다시 찾은 이태원은 마치 처음와본 곳처럼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행객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와 장소의 스토리를 말해주기 전에는 그 장소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그 장소의 의미는 여행객의 시선 앞에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무화된다. 이태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여행객이 된다.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이 거리는 여행객의 거리다. 여행의 시작은 알 수 있지만, 아무도 그 여행의 끝을 알지 못한다. 어떤 시간도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채 어느 순간 닫힐 수도 있는 길, 끝없이 도착이 연기되는 길의 시간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오인과 참혹한 우연으로서의 생은 결국 전모를 다 알기도 전에 불현듯 마감될 것이다. 이번 생의 여행이 어떤 장면에서 멈추게 되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은 비밀로 남게 된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친구는 '큰옷'을 파는 곳에서 옷을 사야한다고 했다. 친구와 만나 그가 원하는 옷을 찾기 위해 '큰옷'을 파는 가게들을 드나들었다. 어릴 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느낌. 이제 이태원은 서울의 어느 곳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그저 이제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외국인들이 조금 더 많이 보일 뿐이었다. 친구가 원하던 옷을 사고 헤어지기가 서운하여 이태원을 걸었다. 해밀턴 호텔 쪽으로 걷다가 골목길로 들어갔고, 골목길에서 배가 고파 어묵을 사먹었다. 다시 걷다가 우리가 간 곳은 보광동 방면의 앤티크 가구거리였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물건이 있을 것이다. 버릴 수 있는 물건과 버릴 수 없는 물건, 그리고 버릴 수도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물건. 세번째 물건이 많은 사람은 돌보지 않아도 되는 창고가 필요하다. 내게 가장 절실했던 공간.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용산의 장소는 남산이다.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은 항상 남산 케이블카와 유람선 이야길 하셨다. 서울에 온지 몇 년이 지났어도 유람선은커녕 케이블카를 타볼 생각도 안 하던 터라, 그곳에 가보게 된 것도 부모님 덕분이겠다.

 

이태원의 번잡함이 지겨워져서 문득 어두운 하늘 저편을 보게 된다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남산이 있다. 남산은 용산구와 중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것이 의미라는 것 중의 하나는 남산이 한양 도성과 그 외곽의 경계선이었다는 것이다. 남산은 서울을 보호하는 성곽인 동시에 서울에 진입하는 통로였으며 서울 시내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상징이었다. 이런 이유로 남산의 역사는 용산의 다른 지역들처럼 처절한 내력을 갖는다.

 

그후로 남산은 용산에 속하는 장소들 중에서 가장 자주 간 곳이 되었다. 친구들과 산책을 가기도 했고, 도서관에도 갔다. 남산 팔각정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묶여있는 자물통들을 부러워했고, 서울시내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어두워지는 서울의 모습을 전망대에서 보고 있노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넓고, 이렇게 많은 건물들과 차, 사람들. 저곳에 누가 살고, 저 차들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느 하나 흐트러지는 것 없이 일제히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상. 그러고선 시골에서 서울로 와서 그래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기도,

 

이 거리에 영혼의 거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다. 이곳은 영혼 밖에 있는 풍경. 이제 너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은 풍경 밖의 일이다.

 

용산을 걷는 작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내가 떠올린 기억들은 어쩌면 용산이라고 한정하였지만 지방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올라온 사람들이 느끼는 그 어느 곳하고도 상통할 것 같다. 용산만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가 아니라,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곳, 혹은 내가 자주 갔던 곳들은 모두 '지나치게 산문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말처럼  '우연이라는 사소한 운명'이 그 어디에서라도 작동을 했을 테니.

 

어떤 장소는 기억 너머에 있고, 어떤 장소는 기억 이전에 있다. 영감을 주는 특별한 장소 같은 것이 있다고 믿기 힘들다. 가보지 못한 장소와 지나친 장소, 차마 지나치지 못한 장소가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장소는 무심하고 자명하며, 가까이서 보면 장소는 비밀스럽고 남루하다. 생의 매 순간 우울과 설렘 속에 자리잡은 특별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장소가 문득 지울 수 없는 뉘앙스로 마음에 새겨질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 낯선 시선 속에서 특별한 장소로 전환되는 그런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무감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고유한 장소가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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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07-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용산전자상가를 남친과 걸었던 적이...무단횡단 딱지를ㅠㅠ
 
내 인생의 그녀
부다데바 보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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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를 이어 20세기 인도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부다데바 보스의 『내 인생의 그녀』를 읽었다. 줌파 라히리나 살만 루슈디 같은 인도계 작가들은 알지만, 부다데바 보스라는 인도 작가는 처음. 인도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기억나는 책이라곤  비카스 스와루프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이며, 가장 최근에 읽은 작품은 『세 얼간이』라는 작품.

 

『내 인생의 그녀』에 호감이 간 이유는 인도문학이라는 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인도계 작가들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 줌파 라히리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봤다면 당연히 인도라는 나라에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발리우드라고 불리는 인도 영화가 기억에 남았다면 아마 인도문학도 당연히 궁금했을 테니까. 그렇게 간만에 읽은 소설 『내 인생의 그녀』는 내 젊었던 날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며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이루어진 사랑이든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이든, 잊고 살았거나 잊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의 지난 날들을 반추하며 미소 짓게 하는 선물 같은 책.

 

"기억은 남겠죠. 결국엔 기억만 남는 겁니다. 다른 건 없어요."

"그런 기억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걸까요?"

"전혀 없죠!" 델리 남자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에 방해가 되고, 시간을 잡아먹고, 사람을 슬프게 할 뿐입니다. 자, 커피 한잔합시다."

그래도 건축가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나가버린 행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은, 행복한 걸까요, 슬픈 걸까요?"

(…)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어쩌면 기억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떤 기억이냐에 따라……"

 

내 기준으로 '지나가버린 행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은' 행복하다.

특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기억조차도 아프거나 슬픈 일은 사라지고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들만 남는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그 상처를 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론 행복하다는 것.

아무튼 그리하여 그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 인생의 그녀"에 대해.

 

1.마칸랄의 슬픈 사연

 

_꿈에 그리던 여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여자. 우리 모두 그런 존재가 있죠. 마칸랄은 그 여자를 딱 한 번 현실에서 만나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것만이 진실이죠. 중요한 것은 그뿐,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제 우연히 <마녀사냥>을 봤다. 그 프로그램에서 남자들은 열번 찍으면 여자들이 넘어온다고 했고 여자들은 아무리 찍어도 처음부터 아닌 사람은 아닌 거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5년 동안 찍다가(!) 결국 커플이 된 사람을 보고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 게스트로 나왔던 임창정은 이렇게 말하더군. 안 넘어온 여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여자로서 나는 돈 많이 벌었다고, 혹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고 그때 받아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아닌 사람은 끝까지 (돈을 엄청 벌었다 하더라도) 아니니까. 물론 가끔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다. 그렇다면 아무도 누군가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 (적고 보니 도대체 어느 쪽이라는지 모호하기만 하지만서도;;) 하지만 '마칸랄의 슬픈 사연'은 말 그대로 슬픈 사연이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던간에 말라티에게 마칸랄은 남자가 아니었던 것. 아무리 잘생기고 돈을 많이 벌어도 아닌 사람은 아니었던……(다시 생각하면 마칸랄이 소극적이었다는 점이 걸린다.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움움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ㅋ 뭐래;;)

 

2. 가간 바란의 사연

 

_사랑이라고 하셨죠. 저도 한때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여 화학공식을 익혔대도 그것과는 별개로 익혀야 할 삶의 기본공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_저도 행복했습니다. 젊은 날의 저를, 어린 날의 저를 아는 분들. 그분들에게 살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머지 않아 저는 나이가 든 저를 아는 사람, 그러니까 저보다 젊은 사람이나 기껏해야 저와 동년배들의 기억에만 남게 되겠죠,.

 

_가볍게 받아넘기려느데 파키가 손으로 제 어깨를 살짝 만지며 말했죠. "그러네요. 우리 가간 바란 오빠도 이제 흰머리가 나네."

대수롭지 않은 말이고,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 말에서, 가볍게 제 어깨를 스치던 그 손길에서, 파키가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아마도 제 평생 사랑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나마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한 번뿐이었을 겁니다.

 

내가 추구하는 사랑은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 사랑인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을 안하고 평생 안고 가기도 하나보다. 그러면 후회만 남잖아. 가간 바란처럼, 다 늙어서야 깨닫게 되고 말이야. 파키의 입장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가간 바란이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러고 보니 마칸랄도 그렇고 가간 바란도 그렇고, 남자들이 참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드네.

 

3. 의사 아바니가 결혼한 사연

 

_눈앞에서 사람이 그렇게 울면 기분이 어떤지 상상이 되냐? 게다가 그 눈물이 나 때문아라면 말이야. 내가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 친구는 더 서럽게 울어,.

 

아바니의 사연은 마지막으로 사연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말처럼 사랑이라기보다는 중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받아주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건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다가온다면 아마 그쪽으로 넘어가겠지. 네 명의 이야기 중에 가장 코믹하고 평범한 (!) 이야기랄까. 다 자기 짝은 따로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가는 스토리.

 

4. 작가의 독백

 

_바람에 어떤 물건, 혹은 사람의 냄새가 실려왔죠. 지금도 저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요.

 

_모나리자, 당신은 몰랐을 겁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겠죠.

(…) 밤이면 밤마다 열병에 맞서, 우리를 짓누르는 어둠 속에서, 서늘한 그늘 밑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요.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당신은 누워 있었고, 한 달하고도 보름 동안 당신은 우리 차지였습니다.

 

한 여자 친구를 두고 여러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일은 우리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여자 친구와 사귀지 못하지만 평생 마음 속에 두고 살며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일. 사랑은 서로가 함께 걸어가기도 하지만 이렇게,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지킬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변해도 '남의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마녀사냥>이 인기가 좋은 것도 그래서일까?) 

위의 네 남자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듣다 보니 그 속에 비슷한 내가, 친구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 사랑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역시 지나온 사랑. 아름다웠던 청춘의 기억인지라 담담할 뿐이다.

문득 이 글을 쓸 때 친구가 들어보라고 전해준 "옛사랑"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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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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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며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가 눕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베개와 시트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감에 단잠과 꿈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괴로워하는 친구를 마주 보고앉아 "얘기 좀 해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젊고 경험도 별로 없지만 때로는 그런 몸짓만으로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삶이란 게 인간에게 우호적인 얼굴을 보여주도록 설계된 거라면, 이 친구는 이런 것들을 알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대로 되나.. 다 지나고 나면 그때,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는 게 삶이지. 『줄리언 웰즈의 죄』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라기보다는 내가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억누른 죄책감. 그 죄책감은 세월이 씻어주기도 하지만 평생을 안고 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 선과 악은 그 차이에서 오는 것이겠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치곤 깊이 공감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많았다. 그래서 좋았다. 대중적인 마무리를 하자면, 그래 그 할머니가 마리솔이었거나(그렇다면 그 나무 목걸이는 어떻게 된 거지?) 마리솔이 진짜로 악명높은 악인이었어야 했다., 한데 이야기의 주제는 '장난'이었으니까.... 그렇게 끝날 수는 없었겠지. 아무튼, 간만에 흥미롭게 몰입하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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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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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러니까, 표지에서 보듯이 일본의 으스스한 이야기 냄새가 물씬 난다. 표지로만도 호기심 자극 만땅인데 제목에서 풍기는, 왠지 궁금한 단어, '엠브리오'는 뭐지?(엠브리오가 뭔지는 각자 알아보시길-.-)  그래서 읽었다. 원래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니까..

 

전날에 한 편을 읽고 다음날에 다음 편을 초저녁에 읽었다. 두 편 정도 읽고 저녁을 먹고 자려고 누웠다가 책이 보이기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는데,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페이지를 안 넘길 수가 없었다는!

 

표제작도 좋았지만(신기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어서;;), 그와 이어져 있는「라피스 라줄리 환상」속의 삶을 읽으면서 나도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한 서너 번, 다시 살면 그 기분이 어떨까, 경험해보고 싶다-.-;). 이 책은 읽으면서 비슷하지만 다른 타임머신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라피스 라줄리'가 타임머신보다 훨씬 더 리얼하고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작품인 「수증기 사변」은 '나'가, 이제는 얼굴도 잊혀진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다가가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 가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백번 이해가 갔다(사진을 남길 수 없으니..가난한 옛사람들은 초상화도 못 그렸을테니). 어쩌면 나도 그런 온천이 있다면, 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보기 위해 다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사실, '기담' 의 의미는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뜻인데 그럼에도 나는 내심 무서울 거라고 겁을 먹었다.(-.-) 기담을 공포로 착각하는 이 무지라니. 그런데 앞부분의 이야기들은 사실 무섭다기보다는 뜻 그대로 '이상야릇한' 이야기들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공감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작품 속 사람들의 행동도 다 이해가 되더라는 말. 하지만 마치 그런 나를 놀래줄기라도 하듯이 점점 더 야릇한 이야기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있을 수 없는 다리」라는 단편에서부터였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이런 이야기는 자기 전에 읽어야 한다며!) 딱 한 편만 읽고 자야지,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읽다가 그만, 마지막 책장까지 읽고 그 책을 덮고서야 잠이 들었다.(꿈을 꿀까봐, 억수로 겁을 내면서) 아무튼, 무서워지기 시작한 첫 이야기,있을 수 없는 다리」는 초반부에는 노파가 된 엄마의 안타까운 사연이 드러나면서 앞서 읽은 것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변해버린(!! 무엇으로? 무시무시한 것으로?!) 아들 녀석 때문에 깜놀라서 잠이 확, 달아났다. 읽으면서 내내 '성불하시오, 성불하시오' 라고 되뇌었다는.. 이후, 그 절정은 「지옥」이었다. 아, 끔찍하고도 무섭고, 잔인한 인간!!!!!

 

읽어보시라,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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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달 - 권대웅 달詩산문집
권대웅 지음 / 김영사on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예쁜 책이 한 권 나왔다. 

권대웅 시인의 산문집.  『당신이 사는 달』

 

폐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지도 모를 "달詩", 직접 그리고, 직접 지은 시를 올려 페친(!)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산문집을 엮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이었다. 하늘빛(민트인가?)표지가 어찌나 예쁜지, 보는 순간! 이 책은 친구들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 책이로구나, 했다. 제목 아래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당신과 살던 집에 가고 싶었지요. 둥근 달 속에 있는, 저녁이면 둥근 종소리가 별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주던 집" 시인의 감성이 느껴지는 글이라고..! 

 

하늘색 표지를 벗기니 하얀 바탕의 표지가 보인다. 이 자체로도 참 예쁘더라는. 그다음장을 넘기면 서문을 대신하여 쓴 시가 보이는데 이런 글이다.

 

당신이 보고 싶어지는 이유

_서문을 대신하여

 

강물이 밤중에도 흘러가는 것은

바닷물이 쉬임 없이 밀려오는 것은

달빛이 그들을 밀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가슴도요새가

수만 킬로의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꿈틀거리던 애벌레가

나비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달빛이 그들을 들어 올려주기 때문이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데

빈 그네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꽃이 지는데

와락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은

달빛이 우리를 밀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봄

권대웅

 

시인들은 어쩌면 서문도 시처럼 척척 잘 쓰는지^^;
 

산문집이라서 달詩와 달詩 사이에 산문이 들어 있다. 글이 참, 참하다! 밑줄 긋고 싶은 예쁜 글들도 많고 일상적인 것,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 등등 다양한 산문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산문 사이사이에는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시인이 여러 나라를 돌며 찍은 사진들. 간혹, 시인이 만드는 책의 표지로도 쓰이는 그런 사진들이라고나 할까.

 

 

 

봄날에 올리면 딱 좋을 예쁜 시. 같은 엽서가 있기에 찍어봤다.

 

꽃 속의 달

 

꽃 속에서 달이 피어나고 있다

고요한 하늘연못

누가 놓은 손일까

아득히 먼 밤의 바다와 구름 너머

파랗게 아프고 빛났던 저 생

까무룩 잊고

배가 들어오듯이

꽃 속에서 둥근 달이 태어나고 있다

저곳과 이곳이 끊어지는 순간

저곳 속 이곳이 연결되는 순간

꽃의 둥근 만다라(曼陀羅) 속으로

나비들이 날아오르고 있다

   

또, 달詩와 산문과 사진과 그 사이에 이런 게 들어 있다. "책 속의 달詩 展" 말 그대로 달詩들만 모았다. 이런 편집, 참 맘에 든다. 여러 작품이 책속에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참, 혹시 궁금한 분들에게 진품(!)을 볼 기회가 있다. 『당신이 사는 달』을 펴내고 "달詩 시화전"을 한다는 소식을 페북에서 봤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직접 가서 보고, 책도 구입하고, 예쁜 사인도 받으시길!

 

4월 4일~6일 인사동 시작갤러리에서 '달동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부 시화전'이라고 한다. 판매 수익금 전액은 달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쓴다고 하니, 좋은 일도 하고, 예쁜 그림도 사고..

 

그리고 뒷표지!! 뒷표지도 어쩜 이렇게 이쁜지. 꽃이 들어가면 다 이쁜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겠지? 표4의 글엔 <작가의 말>이 적혀 있다.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시간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시간도 어느새 지나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 어느 것도 아주 사라지는 법은 없어서, 먼 허공의기억 같은 곳에 머물던 그 순간들이 메아리가 되어 문득문득 말을 걸어오곤 한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벗들, 아끼는 사람들과 사랑하고 편들고 때로 토닥거리고 미워하고 다시 껴안고 깔깔거리며 웃던 그 날들이….

그렇게 이어지는 수많은 지금 이 순간들이 지나가면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삶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한여름의 눈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그래서일 게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당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신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_작가의 말에서 

 

이상, 꽃피는 봄날에 읽은 『당신이 사는 달』의 예쁜 시와 그림에 관한 짧은 감상문. 

이 봄날에 친구에게 선물하면 정말 좋아할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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