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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 구원한 길 없는 절망감과 두려움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세상 일이 내 맘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복도, 운도 지지리도 없다며 애꿎은 삶을 탓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접하고 거대한 산 앞에 선 것 마냥 크게 좌절감을 겪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초능력이라도 있어서 단박에 어떤 일을 해결하거나, 상대방이 내 말을 듣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복권 번호를 알아 맞출 수 있는 능력이나 운이 있다면 금상첨화! <마왕>은 이사카 코다로가 "나 자신이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쓴 작품으로, '파시즘'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초능력을 소재로 차용하여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를 발휘하고 있다.
생각해. 생각해. 언제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동생의 표현의 빌자면 "이 세상을 복잡하고 까다롭게 생각하는 일만이 삶의 보람"인 형 안도는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상상하고, 고찰한다. 어느 날 상대에게 자신이 의도한 말을 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안도는 자신의 능력을 이리저리 시험해 보고, 30보 거리 내에서 통용되는 것임을 확인한다. 전철 안에서 대학 친구를 만나 주목 받고 있는 야당 대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무솔리니, 파시즘 등이 화두로 떠오른다. 일렬로 박혀 있는 수박의 씨를 보며 '파시즘'을 생각하고, 대중의 통일된 흐름이 가져 올 결과를 두려워하는 안도.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간다면 세상이 바뀔 거란 믿음을 가졌던 안도는 선거유세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한다.
현대로 접어들어 TV, 비디오, 게임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의 발달에 속도가 붙을수록 사람들의 사고 능력은 점점 저하되고 있는 것 같다. 멍하니 앉아 아무 생각 없이 TV나 비디오를 보고, 게임에 빠져들어 현실을 잊고 살기도 한다. 생각을 하지 않고 무리에 휩쓸려 다니다 보니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커지게 된다. 책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가 이누카이는. "5년 안에 내가 이 나라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내 목을 날려라!" 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젊은 사람들의 시선까지 사로잡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정치판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 줄 표를 얻기 위해 그럴싸한 문구나 웅변으로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자 애쓴다.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엔 다를 거야 하는 바람으로 투표용지에 표를 찍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임 깨닫게 된다. 정치인들의 공약(空約)과 이익추구, 몸 사림과 변절에 실망하고 돌아선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두 번째 이야기인 <호흡- 동생 준야의 이야기>는 형 이야기 편에서 동거 중인 동생의 여자 친구로 나오던 시오리가 화자로 등장한다. 오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는 결혼해서 준야의 아내가 된 시오리는 늘 남편과의 가위바위보 내기에서 지고 만다. 준야와 시오리는 경마장에서 준야의 운을 시험해 보고, 10/1의 확률에서는 늘 운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준야는 독재자와 함께 처형되어 거꾸로 매달린 여인의 뒤집힌 치마를 바로 잡아 준 사람처럼 되고자 한다. 커다란 홍수의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언제까지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같은 사람...
최근에 초능력이라는 소재를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를 읽은 터라 비슷한 소재를 등장시킨 이 작품에서 이사카 코다로는 어떤 이야기를 펼쳐 놓을 것인지 궁금했다. 저자는 파시즘과 민족주의를 죽음을 부르는 '마왕' 같은 존재로 보고 있다. 대중이 선동과 분위기에 휩쓸려 한 방향만 쳐다보게 될 때 마왕은 소리 없이 뒤에서 대중을 덮치고, 우롱하여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왕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 아이의 절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접하면서 <러시 라이프>, <사신 치바>, <중력 삐에로>, <마왕>까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연달아 읽었다. 작가는 깜찍하게도 이번 작품에 <사신 치바>에 등장하는 치바를 슬쩍~ 동원시키고 있다. 조사할 기간이 별로 나질 않는다는 그의 대사는 <사신 치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금방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큰 주재를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결말이 미완의 느낌으로 남는 것이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옮긴이의 말을 보면 저자가 이번 작품에서는 '대화문의 글자 수 맞추기'를 시도하였다고 하는데 언어간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로 그 묘미를 느낄 수 없는 것 또한 아쉽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