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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ㅣ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아이가 죽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죽어버린 인류 최악의 상황에 홀로 살아남은 한 남자.. 이 책의 시작은 아무런 설명없이 밤이면 공격을 해 오는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네빌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일들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 박살난 곳을 수리하고, 마늘을 따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마늘목걸이를 만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체의 몸에 말뚝을 박는 등 도저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러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평범한 일상은 아니지만 기괴한 작업을 매일 반복적으로 해나가는 네빌은 지루하고 우울하며, 고독하고 외롭다. '미국 공포 소설계의 전설'이라 칭해지는 매드슨의 어느 시기의 작품 주제가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며, 고독하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남성"(작품해설 참조)이라고 말하였다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전설이다>는 그 주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핵전쟁의 결과가 가져다 준 것은 오직 한 남자를 제외한 인류 전체의 멸망과 흡혈귀라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인간으로서는 단신으로 살아남은 네빌은 전설에나 나올 법한 미신적인 개념이 아닌 인간이 흡혈귀로 변하게 된 과학적 증거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들들 물리치거나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책을 읽으며 많은 노력을 한다. 탐구하는 분야인 혈액에 대한 설명이나 현미경의 사용법, 박테리아의 특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점도 이 책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가 많이 지난 고전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들라면 네빌이 음악을 듣기 위해 레코드 판을 거는 장면으로, 요즘처럼 음악 CD가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본 기억이 나지 않으나 흡혈귀들과 혈투를 벌이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그 영화에서는 적어도 몇 명의 동지가 있었으나 이 책의 주인공인 네빌은 홀홀단신으로 흡혈귀 무리와 맞써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무도 없는 거리를 홀로 질주하고 시체에 말뚝을 박으려 다니는 일상, 자칫 시간이라도 놓치게 되면 영락없이 흡혈귀의 밥이 될수도 있는, 나날이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팽팽한 낚싯줄처럼 날카로운 상황을 잊기 위해 폭음을 하면서도 자신이 미칠 것을 염려하고 연구하고 고뇌한다.
이 책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정상'의 개념이 무엇인지, 과연 특이한 존재, 비정상인 존재가 인간인지 흡혈귀인지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이 병에 감염되거나 죽어서 흡혈귀가 되었다면 과연 홀로 살아남은 자가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질까? 네빌의 마지막 독백을 읽으면서 '정상'의 개념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설이다> 뒤에 실린 10개의 단편도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극단의 상황이 금방이라도 닥칠 것 같은 글(죽음의 사냥꾼/어둠의 주술),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급작스레 소름이 돋게 만드는 작품(던지기 놀이/아내의 장례식), 서서히 불안이 고조되어가는 작품 등 다양한 느낌을 주는 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법 두꺼운 분량의 책이나 기념비적인 작품 그 자체로서도 전설이 남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