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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다섯 조각
조안 해리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보기 위해 펼쳐드는 순간 환한 오렌지빛이 내 팔을 물들였던 「오렌지 다섯 조각」은 형형한 색을 입힌 책표지와 향긋함이 묻어나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화사함과는 전혀 다른, 한 여인이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유년시절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첫 단락은 마치 장화신은 고양이에서 삼형제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는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첫째 카시스에게는 농장을, 둘째인 렌 클로드에게는 와인저장실의 재산을, 그리고 셋째이자 막내인 '나'에게는 자신의 앨범과 까만 송로가 든 병을 남겨주신 어머니... 카시스(까막까치밥 케이크), 레네트(서양 자두), 프랑부아즈(나무딸기 리큐르)같이, 아이들의 이름도 과일과 요리법을 따서 지은 어머니는 과실수와 과일들을 자식인양 정성껏 돌보는데, 그런 그녀가 금단의 과일로 치부하는 것이 있었으니, 유독 오렌지만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
그녀에게 오렌지 향기는 과육이 살풋이 터지는 산뜻함과 그 향긋함이 침샘을 자극하여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하는 내음이 아니라 머리 속을 온통 헤집어 댈 지독한 두통을 예고하는, 지독히도 혐오하는 냄새일 뿐이다. 나에게도 가끔 급체로 인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두통이 엄습해 올 때가 있어 그녀의 고통에 절절히 공감을 하고 만다. 금새라도 혈관이 폭발할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조금이라도 고통을 면하기 위해 벽에 기대 서 있어야-앉거나 누우면 고통이 더 심해지는지라- 했던 경험을 비추어 보건데 '어머니'가 말을 하다가 멈추어 버릴 정도로 격심한 통증이 수반되는 고통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엄마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진짜 오렌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영악함을 보인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나무처럼 생각하여 적당히 가지치기를 해주면 더 향기롭게 자랄 것이라도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자신을 빼닮은 막내딸은 더욱 냉정하게 대하는데 '나' 역시 그런 엄마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가끔 어색한 방법으로 화해의 손을 내미는 엄마의 애정을 거절해 버리고 만다. 앨범에 암호처럼 숨겨 놓은 글에는 어머니가 겪은 고통과 절망이 담겨 있는데, 독일군의 지배 하에 '독일인은 더 구할 수 있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에 매달리려는 여인의 초초함과 절망이 담긴 절규가 묻어난다. 한편 아이들은 독일군인 토마스에게 마을 사람들에 관한 사소한 일들을 고해바치고 그 댓가로 초콜릿이나 잡지 같은 것들을 건네 받는다. 동족을 파는 이러한 행위를 세 아이는 누군가는 특권이나 또는 위선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하고 공정한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본명 대신에 '프랑수와즈 시몽'이라는 이름으로 레 라뷔즈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어머니의 요리법과 요리 솜씨로 식당을 열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혈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안심한다. 그러나 조카인 야닉과 그의 아내 로르 때문에 과거가 밝혀질 처지에 직면하는데, 그녀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유년시절의 사건은 무엇이며, 왜 마을 사람 여럿이 죽어야 했던 것일까? 요리법이 적힌 앨범을 탐내는 조카 부부의 계략에 어려움을 겪는 '나의 현재와 아홉 살 유년시절의 과거가 뒤섞여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좀처럼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던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가 잡기 위해 애썼던 '올드 마더'처럼 서서히... '나'는 손녀에게 올드 마더를 잡기 위해 한철 내내 애를 쓴 추억을 들려주면서 소원 따위는 빌지 않았노라고 말을 하였지만 올드 마더를 잡은 순간에 속삭이던 소원에는 아홉 살에 이미 사랑을 알아버린 여인의 절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책을 덮으며 "이제 너도 나처럼 될거야"라는 어머니의 말을 저주의 주문처럼 여긴 여주인공과 자신의 닮은꼴이기에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사랑한 어머니의 관계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큰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야단치고, 다그치는 부분들이 실은 내가 가장 싫어하고 떨쳐버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한 부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