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하루가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조금은 불길하게 다가온 이 문장을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가벼운 느낌으로 본문 마지막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중력 삐에로>는 일본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네 편의 소설을 잇달아 나오키상 후보에 올려놓은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신작으로, 가족애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의 유전자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암에 걸린 아버지와 두 아들을 주축으로 한 이 이야기의 화자는 하루의 형 이즈미이다. 그는 '미래를 조사해드립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운 유전자 관련 일을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그 자신은 유전자의 힘을 인정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아니, 유전자의 힘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공포였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동생 하루 때문!

 파블로 피카소가 사망한 날에 태어난 동생 하루. 강간범의 유전자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유명한 화가의 환생이라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루는 그래피티 아트를 지우는 자칭 '일본 최고의 낙서 제거 전문가'이다. 강간범의 순간적인 욕망으로 태어난 하루의 일생은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경멸, 비웃음과 성을 혐오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 고통스러운 현실이 짓누르고 있다. 그렇지만 하루를 친자식과 동생으로 대우해주는 가족의 온당하면서도 따뜻한 사랑은 그런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하는 커다란 힘이다.

 어느 날 이즈미는 자신의 회사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동생의 음성 메시지를 받는데, 다음날 실제로 회사 출입구 근처에서 방화가 일어난다. 형의 의문에 하루는 낙서와 연쇄방화 사건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는데, 나중에 암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방화 사건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사건 현장을 탐문하거나 추리해 나간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작품 중반쯤에 접어들 쯤에 방화 사건의 주범이 누구인지 짚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사건의 정황과 범인이 밝혀지면서 끝나는 추리소설이 아니므로 누가 방화범인지 안다고 해서 김이 빠질 필요는 없다. 

 중력은 자연 상에 존재하는 법칙이다. 우리의 삶이 사회 통념의 울타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인습이나 고정관념, 편견 등은 우리를 하늘로 떠오르지 못하게 짓누르는 중력에 비유해도 좋을 듯 하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의 도움 없이 중력의 사슬을 벗어나기 어렵듯이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삶을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강간범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낳기로 결정하고, 내 자식으로 인정하며 키운 형제의 아버지도 중력을 벗어난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하루에게 건넨 그 말 한 마디 -"넌 나를 닮아 거짓말을 못 해."-는 얼마나 따듯하던가!

  우리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사랑해마지 않는 부모의 유전자라 할지라도 유전자가 지배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가 진정으로 조던 배트를 휘두르고 싶었던 대상은 유전자에 지배하는 삶, 중력처럼 우리를 짓누르는 사회의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아이들과 샤갈의 그림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는데 책 속에 언급된 것처럼 그림 속의 사람과 동물들이 중력이 벗어난 듯, 마치 꿈속인 냥 공간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었다. 아사카 코타로는 <러시 라이프>와 <사신 치바>를 통해 알게 된 작가로, <중력 삐에로>가 강간과 방화, 죽음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주제에 실린 무게감을 제거한 듯, 낙서를 지우는 하루의 손놀림처럼 리드미컬하면서도 빠르고, 가벼운 듯 하면서도 짧은 호흡으로 진행된다. 내용 속에 언급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인자(G.C.T.A)에 대한 지식, 영화감독, 뮤지션, 문학가, 화가, 수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 또는 작품 이야기가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또 한가지, 작가의 다른 작품에 등장했던 구로사와씨나 그림 액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 청년을 이 책에서 조우하게 된 것도 색다른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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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왕에서는 치바가 등장한다지요^^

하늘바람 2006-08-23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부터 시선을 끄네요

아영엄마 2006-08-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마왕은 여적 못 읽어봤어유.. ㅡㅜ
하늘바람님/요즘 이사카 고타로의 책이 많이 나오고 있네요.

울보 2006-09-0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되신것,,,

하늘바람 2006-09-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주의 마이리뷰 저와 같이 되어서 기뻐요

프레이야 2006-09-0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

oldhand 2006-09-0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아영엄마 2006-09-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하늘바람님, 배혜경님, 그리고 oldhand님~~ 모두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상복의랑데뷰 2006-09-0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축하드립니다~

아영엄마 2006-09-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나~ 상복의 랑데뷰님도 들려서 축하인사해주셨네욤~. ^^*

내이름은김삼순 2006-09-0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축하드려요!^^

비연 2006-09-0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나마...축하드려요^^

KNOCKOUT 2006-09-09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아영엄마님 리뷰를 읽곤 했는데 첨으로 인사드립니다.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stella.K 2006-09-0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이제야 알았네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아영엄마 2006-09-0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이름은김삼순님/넵, 고마워요~~
비연님/후후후, 안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당!
KNOCKOUT님/아~ 반갑습니다. 축하해주신 것도 감사하옵구요~ ^^*
stella09님/가문의 영광까지는 안되지만 저도 리뷰 당선되서 기쁩니다. ^---^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아비'가 '아버지'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왜 작가는 아버지가 아닌 낮추어 이르는 아비로 칭하였을까...' 했던 나의 궁금증은 그녀의 책을 읽고서야 답을 얻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작품들 속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내 가슴에는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쇳가루 날리는 현장에서 주말도 없이 날마다 야근을 하시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한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되어 있을 따름이다.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자랄 때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붇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내가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고서야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세상에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음을 살피게 되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생각해 보게 한다. <달려라, 아비>에서 태어나던 날 세상 밖으로 달려 나가버린 아버지나 <사랑의 인사>에서 놀이공원에서 실종된 아버지, 그리고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에서 어느 날 불쑥 나타나 TV리모콘이 삶의 희망인 냥 붙들고 하루 종일 TV에만 매달려 있는 아버지... 그러나 자식들은 그런 아비를 원망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을 할퀴고 간 상처나 큰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위안을 삼아 살아가는 힘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세상 밖으로 달려 나가버린 아비를 둔 작품 속의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살아갈 것이고, 나는 내 안에 굵은 기둥으로 자리한 아버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련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정형화된 도시인의 삭막한 삶과 인간관계의 일면을 젊은 작가의 감성적인 필체로 그리고 있다. 불빛이 깜박거리면서 검은 선에서 상품의 정보를 읽는 바코드검색기에 의해 읽히는 개인의 사생활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같은 상점에서 같은 물건들을 사는 사람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속에 존재하는 '나'는 이렇게 몰개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데, <노크 하지 않는 집>에서 이름도 없이 1호실~5호실 아가씨로 칭해지는 다섯 사람이 결국은 하나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에서 현대인의 몰개성과 획일화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해지고 만다.

 <영원한 화자>에서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자주 생각해보고 질문하는 '나'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누군가로 규정해 보려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조우한 '그녀'는 '나'에게 밀착하여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인물에 대해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 둘의 대화는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며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리듯 불협화음만 연출한다.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 이 둘의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언제 그들의 공유했다고 믿는 기억이 가짜임이 드러날까 하는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한다. 사실 '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글을 읽으며 지루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 속의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바람에 의한 포스트잇의 일렁임으로 잠들어 있는 물고기가 금방이라도 기지개를 켜며 헤엄칠 준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종이물고기>이다. 무수한 생각과 글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내 안에도 단편적인 언어와 문장과 기억을 담은 수많은 포스트잇이 일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 종이 비늘들을 지닌 물고기를 깨워 세상 밖으로 풀어줄 날이 나에게도 올까? 나에게 그런 일렁임을 가져다 준, 젊은 작가 김애란과의 또 다른 만남을 기다려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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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1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투는 눌렀는데, 언제 살지는 몰라요. 포스트잇 이야기 좋네요. 전 '아비'가 아비정전의 그 '아비' 인줄 알았어요.

아영엄마 2006-01-13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지만 책정보를 안 읽어보고 제목만 보면 '아비'를 사람 이름 정도로 알기가 쉬워요. 앞의 '달려라'라는 문장때문에 더 그런 듯 합니다.

깍두기 2006-01-1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 여기저기서 사라고 부추기는구만요.
내가 언제까지 버티나 함 볼까^^

돌바람 2006-01-13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종이 비늘들을 지닌 물고기를 깨워 세상 밖으로 풀어줄 날이 아영엄마님에게도 오기를...

Kitty 2006-01-1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어요 홍홍홍 사자마자 친구가 빌려갔지만 ^^;;;

바람돌이 2006-01-13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게 갈수록 압박이 심해지는군요. ^^

mong 2006-01-13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괜찮게 읽고 동생에게 선물했어요
^^

진주 2006-01-1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또..이소룡 흉내내는 외마디 소린줄 알았죠~ 아뵤~~~~ㅋㅋ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구판절판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힘들어했다. 박봉, 여자 기사에 대한 불신, 취객의 희롱,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곧잘 돈을 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어머니 역시 미안함에 내게 돈을 더 준다거나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달라는 만큼만 돈을 줬지만 "벌면 다, 새끼 밑구멍으로 들어가 내가 맨날 씨발, 씨발, 하면서 돈번다"는 생색도 잊지 않았다.-20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잠이었다. 자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잠 못 들던 수만 가지 이유는 다 잊어버렸다. 그녀는 오직 텔레비전만 없어진다면 아주 아주 달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날, 집에 돌아가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가위로 텔레비전 유선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것은 과거, 아버지가 그들 가족과의 관계를 끊었던 것처럼 잘 잘라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유선을 끊은 것에 대해 죽도록 후회했다. 리모컨을 만지는 아버지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고사하고, 갑자기 아버지와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색함. 그 침묵. 저 알 수 없는 표정. 그녀는 아버지의 표정이 새벽에 중계되는 게임 방송처럼 느껴졌다.
-102쪽

인간이 애초에 바다에서 기어나온 존재라는 것을 떠나, 그냥 그것들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거기 있는 그들과 여기 있는 내가 그 시간 만나고 있다는 것. 바다에서 나온 인간이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다시 바다로 기어들어가, 마치 꿈을 꾸듯-자기 옆을 헤엄쳐 가는 수많은 아버지들을 본다는 것. 몇백억년 전에 비해 하나도 늙지 않은, 자기보다 젊은 아버지를 본다는 것,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다.-150쪽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은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 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들은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것은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다니는 상상을 했다. 반대로 자신이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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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문학전집 1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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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명 '기찻집'으로도 불리는 장석조네 집에는 과연 몇 가구나, 그리고 몇 사람이나 살고 있는 것일까? 책을 다 읽었으나 솔직히 이를 명확히 짚어내지를 못하겠다. 오영감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내 성금네, 끝방에 사는 양은 장수 최씨와 아내인 나주댁, 겐짱이라 불리는 박씨와 부인, 그리고 화가의 꿈을 지닌 박씨의 동생, 폐병쟁이 진씨와 그의 딸 등등 내가 꼽아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거대한 덩치를 밑천으로 삼아 살다 간 육손이 형 광수와 똥지게꾼인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어지간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터라 솔직히 누가 누구지 조금 헛갈려서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본 적도 있다. ^^;-뒤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 그 점이 어느 정도 정리되긴 한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장석조네에서는 화장실도 번호표를 받아 줄을 써야 사용할 수 있는, 아침 댓바람부터 생존(?)을 위해 치열한 눈싸움, 몸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냄비 하나, 밀가루 한 포, 돈 몇 푼을 얻기 위해 부대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들의 보잘 것 없는 삶을 눈앞에 그려 보니 지금의 나의 삶은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가 싶어진다. 앞서 언급한 여러 인물들이 표출하는 삶의 이야기들에 안쓰러워하고, 답답해하고, 속상해 하고, 우울해 했다. 어찌 그다지도 남루하고 박복한 삶들인지... 책의 제목이자 이 글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석조네'는 저자가 어린 시절 실제로 살았던 곳이라고 하던데 내가 살고 있는, 이 책 제목을 따라 하자면, 정원빌라네 사람들도 나름대로 책 한 권은 너끈히 엮을만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책에 나오는 대사는 거의 대부분이 사투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지방의 사투리든 간에 그 속에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절절히 녹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또는 지인의 글에 댓글을 달 때 사투리-얼마간은 지방색 불명(?)의..^^;-를 종종 사용하는 편인데 그 속에는 상대에게 지닌 애정과 친근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과 나의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그나저나 책표지에 붙어 있는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분홍 딱지에 눈이 가 쳐다보고 있으려니 과연 청소년들이 이 책에 나오는 사투리 중 몇 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 김소진, 책에 실린 사진 속의, 94년의 그의 모습에서 풍기는 도시인의 차분한 이미지는 <장석조네 사람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질펀한 사투리들과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소진 전집>을 펴내며.. 라는 첫머리 글의 말미에 적힌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이는 단 한사람이지만 그를 이곳으로 불러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글에는 요절한 작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김소진이라는 작가와 조우하였으며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건만 앞으로 내가 접할 수 있는 그의 흔적(작품)의 목록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 유재하의 노래가 내내 그리움처럼 남아 있는 것처럼 김소진, 그의 작품 또한 하나의 그리움으로 내 마음 속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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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10-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력도장 2004년 9월 선정도서이건만 이제서야 리뷰를 쓴다..^^;;

물만두 2005-10-20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력도장이 진짜 차력하는 줄 알았다는^^;;;

아영엄마 2005-10-2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에 올라온 선정도서 목록 중에 리뷰 쓴 게 너무 적어서 도장 가기 겁나요..^^;;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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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바람의 그림자」도 주인공이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을 쓴 한 작가의 발자취를 쫓으면서 겪는 일들을 담은 내용이었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미텐메츠도 자신의 대부의 임종시에 남긴 부탁으로 어떤 원고를 쓴 작가를 찾기 위해 부흐하임으로 떠난다. 전작이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독특한 공간과 젊은 날에 찾아 온 사랑과 열망, 끝을 모르는 증오와 복수의 칼날이 내재되어 있는, 감성이 넘치는 작품이라면 후자인 이 작품은 책들의 도시인 '부흐하임'이라는 배경과 위대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미텐메츠가 겪는 모험이 주는 넘치는 상상력에 더해서 책과 문학의 본질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가 창조한 차모니아 대륙이라는 배경 속에 존재하는 부흐하임이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고서점이 넘쳐나는 지상에서 지하미로까지, 온통 책들로 가득 찬 도시이다. 그리고 그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사람이 아니다. 위대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공룡이 나오고, 상어머리에 구더기 같은 몸뚱이를 지닌 괴물, 외눈박이 괴물(부흐링), 하늘을 나는 무시무시한 흡혈괴조, 다양한 형상을 지닌 책 사냥꾼들이 등장한다.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고려해 볼 때 이처럼 독특한 등장인물들의 등장은 하나나 새롭고 반가우며 그들이 펼쳐가는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이 흡혈괴조의 습격을 받아가며 '녹슨 난쟁이들의 궤도'를 지나가는 장면은 이 책의 소개 글의 일부처럼 '롤러코스터 위를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인디에나 존스가 궤도차를 타고 레일 위를 질주하는 아찔한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로 꼽을 수 있는 부흐링은 특정 작가의 이름을 지니고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외우고, 탐닉하고, 작가나 작품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한다. 작가는 책을 읽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부흐링이 들려주는 말을 통해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어 내는 일에 관련된 사람에 비하면 그저 책을 즐기면서 읽기만 하면 되는 독자들은 얼마나 팔자가 좋은 사람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위태로워 보이는 커다란 외눈을 지닌 괴상한-하긴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치고 괴상하지 않은 이가 있던가! - 외모와 달리(?)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종족이다.

그리고 책의 전반에 걸쳐 나오는 '오름'은 '많은 시인들에게 최고의 영감의 순간에 그들 몸속으로 뚫고 들어간다는 일종의 신비로운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 최상의 단계인 이 오름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끊임없이 열망하고 꿈꾸지 않을까 싶다. 아주 가끔 나도 글이란 것을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는데 불행히도 그런 오름의 순간에 주인공처럼 글을 쓸 도구가 없어 그것들이 '마치 미끄러운 물고기들처럼' 빠져나가는 때를 겪을 때가 많아 순간순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지닌 나로서는 책들이 촘촘히 꽂혀있는 표지를 비롯하여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의, 책으로 가득 차있는 서가를 묘사하는 부분들을 읽을 때마다 부러움이 넘치다 못해 범람할 지경이다. 살아 움직이는 책, 공포와 광기가 가득 찬 책마저도 탐을 낼만큼 위험한 욕망이다. 지상이나 지하나 무수히 많은 책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마음껏 뒹굴다 온 덕분에 잠시나마 책에 대한 포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에는 찾아오는 것은 결국 가지지 못한 책들에 대한 열망과 이토록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글재주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우주 너머까지 꿈꿀 수 있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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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9-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책입니다 ㅠ.ㅠ

icaru 2005-09-2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가지지 못한 책들에 대한 열망과 이토록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글 재주에 대한 부러움... 그러게요 흠... 언제까지고 이렇게 부러워하다가 판날라나요~ 이궁...

아영엄마 2005-09-2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님이 판타지쪽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니 이 책이 취향에 안 맞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람의 그림자>는 읽어보셨나요?
이카루님/물만두님에 이어 님도 추천을!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저는 맨날 부러워하다 날 샐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흑...ㅜㅜ

아영엄마 2005-09-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켈리님/책과 문학의 본질이 녹아있는 작품이긴 해도 이 책의 주인공이 공룡이고 이상한 생물들이 출연하니 판타지쪽을 선호하지 않는 분들께는 맞지 않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음, 제 리뷰가 매력적이라는 칭찬은... 너무 좋아요~~^^*

물만두 2005-09-2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그림자 읽고 화장품 탔다지요^^

바람돌이 2005-09-2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참 이 책의 평가는 분분하군요.
어쨌든 저도 사놓은 책이니까 읽기 읽겠지만.... ^^

아영엄마 2005-09-2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흑.. 화장품까정!! 나도 <바람의 그림자> 리뷰 쓸껄!!
바람돌이님/아무래도 개인의 독서취향의 문제겠지요~. 제가 원래 판타지 쪽을 좋아해요. 시간날 때 한 번 읽어보셔요.
음.. 그나저나 리뷰대회도서라 리뷰를 올리고 보니 이 책에 올리는 게 아닌가벼~ 다시 올려야겠다..@@;;

2005-09-22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