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죄 : 교화장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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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C시 방송국 <꿈을 만나다>팀은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제자가 은사를 찾아가 깜짝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하지만 당초 기획 의도와 달리 이벤트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제자 샤오뤄(뤄자하이)가 은사 천선생을 만나자 마자 꽃다발 사이에 숨겼던 칼을 빼들어 천선생을 찔러버렸기 때문이다. 뤄자하이는 곧이어 선생의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은 뒤 경찰과 대치한다.

전작 <심리죄:프로파일링>에서 사건 해결에 기여했던 대학원생 팡무가 본작 <심리죄:교화장>에서 경찰이 되어 등장하는데, 그가 교섭인으로 투입된다. 팡무는 뤄자하이를 차분하게 설득하여 칼을 내려놓게 하는 데 성공한 뒤 범행 동기를 듣게 된다.

뤄자하이에게는 션샹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션샹은 강박적으로 자신의 신체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지 우려했다. 그녀는 과거 신원불상의 남성에게 강간을 당다. 범인은 "네 몸 속에는 이제 나의 뭔가가 남을 거야. 넌 평생 그 냄새를 갖게 될 거야"라는 암시적 발언을 했는데, 이로 인해 션샹은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게 된다. 하지만 뤄자하이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서 션샹은 차츰 심리적 외상을 극복하게 되었다.

문제는 같은 대학 쌍난난이 션샹의 담임이었던 천선생으로부터 '션샹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시작된다. 션샹은 광증이 도져 피가 날때까지 자신의 피부를 문질러 닦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션샹은 뤄자하이에게 복수를 종용하며 죽게 되고, 뤄자하이는 쌍난난과 천선생을 죽이고 만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뒤 뤄자하이는 재판에 회부된다. 팡무는 뤄자하이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으나 그가 사형 당할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런데 뤄자하이의 변호사 장더셴이 뤄자하이를 탈옥시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탈출한 뤄자하이에게 Z 선생이라는 자가 접근하여 일단의 무리들을 소개하는데, J선생(장더셴), Q양(취루이), T군(탄지), H선생(황룬화)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 어떤 실험에 의해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고, 이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외상을 겪게 된 터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원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바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던 과거의 인물을 찾아내 살해하는 것이 그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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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는 행동수정이론을 통해 인간은 오직 '강화'에 의해서만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문제가 있었지만 공포증과 불안장애를 치료하는 EMDR(고통스러운 기억을 회상하며 눈동자를 움직임으로써 심적 외상을 치료하는 방법)과 홍수요법(안전한 조건에서 공포 상황에 노출 시킴으로써 공포를 이겨내게 하는 방법) 등에서 진전을 보였다.

이러한 스키너의 주장에 강하게 공함한 이가 저우전방이었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반성하며 스키너의 학설에 따라 인간을 과학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행동공학'으로 인류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장더셴, 취루이, 탄지, 황룬화 등에게 범죄적 상황을 만들었다. 부녀가 성행위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대로변에서 옷을 찢어버려 수치심을 갖게 하였으며, 어린아이를 납치해 극장에 방치함으로서 방향 감각을 상실케 만들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이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들은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귀신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한 어린아이가 투신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공학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깨달은 저우전방은 자신의 이름을 저우궈칭으로 개명한 뒤 고아원을 설립해 속죄의 길을 걷지만, 자신의 제자 양진천의 신념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양진천은 더욱 발전된 형태의 실험을 지속했고, 그의 비서 천저 역시 양진천의 야망에 합류했다. 결국 천저가 완전히 왜곡된 교화장을 추진하면서 장더셴, 취루이, 탄지, 황룬화, 뤄자하이가 모여 과거 실험에 참여했던 범인들을 추적해 퍼포먼스 살인을 결행한다.

한때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거대 담론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 유물론을 기계적으로 해석한 이들은 '인간이란 얼마든지 환경 변화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는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환경과 교육의 중요성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러한 '세뇌'의 결과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실험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레이미는 저우전방이 문화대혁명의 반성으로 교화장을 계획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트라우마 치료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문화대혁명이야 말로 행동공학 오류를 현실에서 재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소설에서 저우선생은 천저를 양진천으로 오인해 살인한 뒤 자살하고, 양진천은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들 양잔에 의해 살해된다. 인간의 의지는 '상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의지적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의지를 과학이나 이론의 틀 안에 가두어 재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94959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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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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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6일, 회사원 이치로이 고즈에가 자택에서 거구의 남성에게 습격 당한다. 남자는 덤벨로 이치로이 고즈에의 머리를 강타한 뒤 포장용 비닐끈으로 목을 졸랐다. 하지만 이치로이 고즈에가 강하게 저항하자 남자가 덤벨을 떨어뜨렸고, 이를 주워든 고즈가 괴한의 머리를 가격했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현장에서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수첩을 떨어뜨린다.

수첩에는 하사타니 코지로(42세), 야토쿠라 미사토(12세), 가마츠카 요시부미(77세), 그리고 이치로이 고즈에(28세)가 순서대로 적혀 있었고 살해 방법과 범행 성명을 발표하는 방식 등이 적혀있었는데, 앞 선 세 명은 이미 시체로 발견되었기에 연쇄살인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 수첩이 에키나가 고등학교 학생 수첩이었기에 범인은 금방 특정되어 잡힐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용의자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사건은 끝내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4년이 지난 2001년 12월 31일 월요일 오후 4시 30분, 모처에서 연미회라는 모임이 열린다. 모임 회원은 전현직 경찰, 탐정, 미스터리 소설가 등으로 목적은 과거 미궁으로 빠져버린 이치로이 고즈에 사건의 진범을 밝히는 것이다.

이치로이 고즈에는 모임에서 처음으로 용의자의 이름을 들었다. 구츠와 기미히코, 에키나가 고등학교 2학년. 범행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비밀에 붙여졌던 정보다. 그는 범행을 벌이기 전인 1997년 2월 17일 가출, 6개월 뒤부터 상술한 인물 세 명을 죽인 후 이치로이 고즈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모임회원들은 각자의 추리를 시작해 나갔다.

미성년자에 불과한 구츠와 기미히코가 4년이나 행방이 묘연하다면 이미 자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시작으로 사소한 단서들에 이야기의 살이 붙어 나갔다.

먼저 그가 범행 당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점에 비춰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알리려는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살해당한 사람들 사이에 미싱링크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설, 실제 살해하려 했던 것은 한 명일 뿐 나머지 사람은 위장일 것이라는 가설도 주장되었다.

이야기가 달아오르자 급기야 첫번째 희생자 하사타니 코지로의 내연녀 토네리 히로미가 구츠와 기미히코가 증오한 동급생과 동명이라는 점을 들어 사실은 토네리 히로미가 구츠와 기미히코였고 둘은 동성애 관계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어떤 가설은 그럴싸 했고 어떤 주장은 근거가 미약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네 명 모두 신문 독자투고란에 글이 실린 이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연결고리였다.

밤이 깊도록 회원들은 이런저런 추리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치로이 고즈에의 남자친구 시가타가 도로에 서 있다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사망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발견되었지만 끝내 본래 사건과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은 채 모임은 종결된다.

모임이 파한 후 현직 경찰이 이치로이 고즈에를 집에 바래다 주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추리를 들려준다. 구츠와 기미히코는 사실 그가 실종된 날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이치로이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털어놓고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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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츠와 기미히코가 고즈에를 습격한 것은 1997년 2월 17일이었다. 하지만 고즈에의 강한 저항과 반격으로 오히려 치명상을 입어 사망하고 만다.

고즈에는 구츠와 기미히코가 누군지, 왜 자기를 습격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시체를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하다 남자친구 시가타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시가타는 고지식하게 경찰에 자수할 것만을 권유했고, 화가 난 고즈에에게 떠밀려 운행중인 차량에 치어 사망하고 만다.

고즈에는 고심 끝에 수첩에 쓰인 두번째 범행 대상 하사타니 코지로를 찾아가 사건 일체를 고백하고 그와 함께 사체를 처리한다. 하지만 약점이 잡힌 고즈에는 하사타니 코지로의 성노예로 전락하고, 고즈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첩에 적힌 인물들을 죄다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첫 장을 찢어버린 뒤 자신의 이름을 제일 마지막에 적어 자신이 마지막 피해자인 척 행세한 것이다.

다소 억지스런 전개와 황당한 우연의 연속, 고즈에가 흑화해 경찰도 살해한 뒤 구츠와 기미히코와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 전체를 범행 대상으로 확장하는 결말 등은 습작 티가 팍팍 나는 대목이지만, 단순해 보이는 사건 이면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들을 끌어모아 또 다른 진실로 접근하는 전개는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날밤의 거짓말>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진실로 나아가지만, 진실 그 자체에 이르지는 못한다. 절대진리를 찾아가는 여행은 언제나 실패했고, 절대정신의 깃발을 들어올리는 순간 가장 반동적인 거짓이 되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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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내인 -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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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방옥서의 공공주택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누군가 아스팔트 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어우야이)를 누군가 소리쳐 부른다. 아이는 군중을 헤치고 들어간다. 하나뿐인 동생 샤오원(어우야원)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다.

아이의 아버지는 2004년 지게차 운전 중 사망했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도 병으로 사망했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한 뒤 도서관에 취직해 동생을 돌봤다. 경찰은 샤오원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지었지만, 아이는 납득할 수 없었다.

2014년 11월 7일 도심은 시위로 혼잡했고, 대중교통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그날 아이는 샤오더핑이라는 중년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다행히 한 아주머니가 경찰 신고 후 적극적으로 증언해주어 샤오더핑은 체포된다.

그는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사진촬영이 취미였는데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기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처음에 범행을 부인했으나 목격자 증언 등이 확실했기 때문에 2월 26일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고 2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사건은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인터넷 '땅콩 게시판'에 뜬금 없는 글이 올라오면서 사건은 재조명된다.

'열네 살 인간쓰레기가 우리 외삼촌을 징역살이 시켰다' 라는 kidkit727의 글은 이랬다. 그는 자신이 샤오더핑의 조카라고 밝힌 뒤, 삼촌은 경찰의 겁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인정한 것 뿐이다, 샤오원은 친구의 남자친구를 빼앗은 뒤 차버리는가 하면 불량배와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는 질이 나쁜 아이다, 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마약이나 원조교제 의혹도 있다고 넌지시 암시했다. 이 글은 여기저기 퍼졌고, 급기야 샤오원의 신상이 털리기에 이른다. '사이버불링'은 집요하게 샤오원을 괴롭혔다.

아이는 샤오원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찾기 위해 탐정을 고용한다. 모다마오라는 이름의 탐정은 아이의 사이버불링을 조사한 결과, 샤오더핑은 조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사이버 전문 탐정을 소개하며 물러난다.

새로 소개받은 탐정의 이름은 아녜(阿浬). 하지만 아녜는 아이와 만나기를 꺼렸을 뿐 아니라 사건 맡기도 거부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게다가 조폭들이 그를 노리는 통에 일상적인 대화도 수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아녜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되고, 동생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풀기 위해 전재산을 의뢰비로 지불한 뒤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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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샤오원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범인이 누군지 찾는 전반부와 범인을 밝혀낸 뒤 복수하는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초기작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범행 동기는 사소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악의는 어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건의 시작은 두쯔위라는 모범생이 고자질쟁이로 소문이 나면서다. 두쯔위는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샤오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 소문을 낸 것은 당시 샤오원과 사귀던 자오궈타이였다. 그가 샤오원의 스마트폰을 빌려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이다. 이 일로 자살까지 시도한 두쯔위는 음울한 성격으로 변하고 만다.

후에 도서실 임원이 된 두쯔위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아이들이 충전을 하는 동안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빼냈다. 그러다 우연히 샤오원이 데이트강간 약물에 당해 술집에서 찍힌 사진을 입수하게 되자 이를 게시판에 뿌린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샤오원을 성추행한 진범은 스중난이라는 벤처기업 직원이었다. 야심찬 스중난을 아녜가 혼내주는 스토리와 스중난이 두쯔위의 오빠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서술트릭이 더해져 소설은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띤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은 샤오원의 자살 원인이 두쯔위의 사이버불링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죽음과 언니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동성을 더 사랑하는 말못할 사정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14년 9월, 홍콩은 정부의 선거법 개혁 방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우산혁명 중 도심점령운동이 펼쳐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고용의 질은 낮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도시를 무겁게 짓누르는 그 시기, 스마트폰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사람들은 익명의 참호 속에서 이론상 무제한의 대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SNS 따위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유통기한이 너무 짧아 그 메시지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밝히려는 사람들이 적거나, 밝혀진 후에는 이미 용도폐기된 후였다. 작품은 홍콩의 불투명한 미래와 암물한 전망에 대한 반발인지 모든 것을 명확히 파헤치고 진실을 찾아내는 아녜를 주인공으로 삼아 모더니즘적인 결론으로 독자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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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타카하타 이사오 지음, 유성운 옮김 / 마르코폴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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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타 이사오는 1935년생으로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도에이동화에 입사한 뒤, 1968년 첫 작품 영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을 필두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빨강머리 앤>, <반딧불이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가구야 공주 이야기>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을 감독, 연출하거나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 중 <반딧불이의 묘>는 한국과 홍콩 등지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킨 작품인데, 전쟁으로 인해 불쌍한 처지에 빠진 어린 남매의 모습이 피해자로 부각되었으나 정작 가해자인 일본은 어디에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에서 다카하타 이사오는 이 점에 대해 첫 장에서 언급하는데, 자신의 본래 의도는 전쟁의 비참함을 묘사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결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처지에 빠졌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품은 반전기류 형성에 별 도움은 안 됐다. 이유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따위의 논리로 자기 주장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히로시마 위령비에 "과거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라 쓰여 있는 점에 주목한다. 주어가 애매한 이 문구가 일본이 자신이 가해자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인의 '분위기를 읽는 성향', '우물쭈물 하는 체질', '책임지지 않는 풍토' 때문에 일본은 평화헌법 제9조를 지켜내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Si tu veux la paix, prépare la guerre" 고대 로마시대에 생겨나 전해온 말로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 라는 인식을, 영화 <천국의 아이들>의 각본과 <고엽(Les feuilles mortes)>이라는 샹송을 쓴 20세기 프랑스 국민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Si tu ne veux pas la guerre, répare la paix" 즉,

"If you don't want war, repair peace"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2014년 7월 아베 신조 내각은 헌법 9조에 대해 '일본에 대해 무력 공격뿐 아니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에 대한 공격이나 심각한 위협에도 자위대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새로운 해석을 담은 결의안이 통과된 후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군군주의화, 우경화 경향에 강하게 반발했다.

80의 나이가 된 다카하타 이사오는 거창한 말로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공습의 피해자로서 느꼈던 비참함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서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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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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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름이 한창일 때 양 사나이가 크리스마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넉 달 반이나 남았으므로 양 사나이는 느긋하게 작곡해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다 가도록 양 사나이는 좀처럼 작곡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무룩해져 공원에서 도넛을 먹고 있을 때 양 박사가 나타났다. 양 박사는 양 사나이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멍이 뚫린 음식, 즉 도넛을 먹었기 때문에 저주에 걸렸다고 단언했다.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동시에 성(聖) 양 축제일인데, 성 양 어르신이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떨어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날만은 구멍 뚫린 음식을 먹어선 안 되는데 양 사나이가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어쨌든 박사의 안내에 따라 저주를 풀기 위해 양 사나이는 구덩이를 파고 정해진 시간에 구덩이에 뛰어든다. 그리고 구덩이 안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꼬인 꽈배기 형제, 208과 209 옷을 입은 쌍둥이, 바다까마귀, 부끄럼쟁이 사내를 만나 갖가지 '저주 푸는 방법'을 실행하다 마침내 성 양 어르신을 만나게 된다. 성 양 어르신은 양 사나이를 그냥 초대하면 싱거우니 '저주를 거는 방식'으로 초대했다고 말한다. 양 사나이는 모두와 함께 신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다.

깨어난 양 사나이는 머리에 난 혹을 만지며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숙집에 돌아오자 우편함에 양 그림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가 한 장 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양 사나이의 세계가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연상시키는 양 사나이의 짧은 모험담은 무라카미 하루키 식 쿨한 유머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어우러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담긴 크리스마스 카드' 느낌으로 읽을 만 하다. 그림은 이우일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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