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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53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평점 :
오규원의 시를 읽노라면 삼차원의 풍경이 이차원의 평면으로 포착되어 박제되는 느낌을 받는다. 시어는 건조하고, 사변적이다.
<길> 전문을 적어본다.
누란으로 가는 길은 둘이다
陽關을 통해 가는 길과
玉門關을 통해 가는 길
모두 모래들이 모여들어 밤까지 반짝이는 길이다
저기 푸른 하늘 안쪽 어딘가 많이 곪았
는지 흰 고름이 동그랗게 하늘 한구석에
몽오리가 진다 나무 위의 새 한 마리 집에
가지 못하고 밤새도록 부리로 콕 콕 쪼고
있다 밤새 쪼다가 미쳤는지 저기 푸른 하
늘 많이 곪은 안쪽으로 아예 들어간다
밤새 나뭇가지 끝에 앉았던 새 한 마리
새벽 하늘로 날아갔다
누란이 시인이 다다라야 할 곳이라면,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양관과 옥문관이 통한다. 양관과 옥문관이라. 이름이 절묘하다. 어쨌든 거기로 가는 길은 모래들이 모여들어 반짝이는 길이란다.
시집에서 '모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또 있다. <나와 모래>라는 시다. 거기서 바다는 하나이고 모래는 헤아릴 길 없어 사랑, 절망, 죽음, 공포, 허위, 모순, 자유, 반동, 혁명, 폭력, 사기, 공갈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무엇이 될 수 있다. 그 모래는 번번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밤새도록 부리로 콕 콕 쪼던 새가 해를 가린 구름 쪽으로 날아갔다. 콕 콕 쪼다가(본질을 구하다), 아예 들어가버린다. 쪼는 행위에서 몸을 던져 하나가 된다.
시집의 뒷면에 <조주록>의 인용문이 있다.
(1)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 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만물은 변화 발전하는 운동 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조주의 집 3>
뜰 앞의 잣나무는 멀리 있는 산보다
집에서는 훨씬 높다
그 높이의 층층 사이의 허공을
빈틈없이 하늘이 찾아들어 잎이며
가지의 푸른 배경이 되어 있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너무 깊고 넓어
거미가 줄을 치고 허공을
얽어맨 곳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머리 가까운 높이에서 가지
두 개가 부러져 누렇게
말라가면서 눈부시다
이 집에 사는 사내는 몇 년 전에
지나다니기가 불편하다고 잣나무
밑부분의 가지를 서너 개 잘라버렸다
그 자리에는 가지 대신 투명한
공기가 가득 뻗어 있다
............그리고
지상에 태양만 나타나면
뜰 앞의 잣나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가 책상 위의 趙州錄을
그늘로 가둔다
가지 대신 투명한 공기가 가득 뻗어 있다... 오규원의 시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없다. 없음은 있음을 대신하는 또 다른 무엇이다. 또한 오규원은 관념적이다. 그의 세계는 커튼 하나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나 그것은 극단적인 관념론이 아니다. 왜냐면 오규원에게 있다와 없다의 구분은 존재와 비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안의 光度
를 가져가버린다 액자 속에 담아놓은 세계의 그림도 명
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
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
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
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
을 내 앞으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
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마리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
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물과 길 2>를 읽노라면 순간을 포착해 있음과 없음을 지면에 포착해 놓았다.
돌밭에서도 나무들은 구불거리며 하늘로
가는 길을 가지 위에 얹어두었다
어떤 가지도 그러나 물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멈춘다
나무들이 멈춘 그곳에서 집을 짓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때마다
하늘은 새의 배경이 되었다 어떤 새는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날아올랐지만
거기서부터는 새가 없는
하늘이 시작되었다
오규원의 시들은 사변적이고 난해하다. 실험적인 시어들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들... 해설에서 황현산은 미셸 푸코가 마샬의 사진집에 붙였던 말을 인용한다.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따질 나위도 없이, 이 말은 사진을 거론할 재주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이야기가 그것을 변질시키거나, 사진이 말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별 필요가 없는 존재이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33620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