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LR도 부럽지 않은 똑딱이 카메라 - 전면개정판
문철진 지음 / 미디어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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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던 스마트폰이 문제가 생긴 지는 꽤 오래 전이다. 여름 내내 주머니 속에서 자가발전을 하며 홀로 뜨거웠고, 카메라를 작동시키면 스마트폰이 꺼졌다. 스마트폰을 바꾸면 될 일인데 어떤 고집에서일까,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자리보전하고 있떤 똑딱이 카메라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세종시 축제에 가서 아이 사진을 찍어줬는데 거의 한 장도 건지지 못했다. 아이는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카메라 셔터 속도는 아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면, 너무 어두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사진 찍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산 책이다.


배운 점은 구도가 중요하다. 삼분할, 심도, 측광 따위의 용어들과 뜻.

느낀 점은 희안하게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DSLR이 부러워 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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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경숙 - 2013년 제58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숨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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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은 김숨의 <그 밤의 경숙>이다. 한 밤중에 도로에서 남편과 퀵 오토바이 기사 간에 시비가 붙는다. 퀵 오토바이 기사와 맞붙었다간 남편이 크게 상할 것 같다. 경숙은 오토바이 기사에게 제발 가달라고 부탁하고, 남편은 분에 못 이겨 차를 출발시킨다. 어쩐지 남편의 차가 퀵 오토바기사를 친 것만 같다. 

혼란에 빠진 경숙은 자신이 근무하는 콜센터에 대해 생각한다. 번호로 불리며 소모품 취급받는 곳, 전화를 하라고 큰애에게 스마트폰을 사줬지만 정작 자신은 아이의 전화가 아닌 그악스런 고객들의 전화만 받아야 하는 상황 등.  

<그 밤의 경숙>은 김종일의 단편 <일방통행>을 떠올리게 한다. 김종일이 공포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소설을 써본다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수상작가의 선정작 <북쪽 방>은 한평생 열정 없이 지구과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 폐병을 얻어 아내에게 백안시 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매일같이 누군가가 집 담벼락에 쇠공을 던지는 통에 몹시도 불안함을 느끼던 그는 어느 날 바깥에서 쇠공이 날아가 누군가의 머리를 깨었다는 외침을 듣는다. 아내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아내는 우족을 사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쇠공을 던지는 사람이 객관적인 실체인지, 아니면 유폐된 남자인지 확실치 않다. 그는 아내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었을까? 김숨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인데, 공포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라는 엉뚱한 느낌을 받는다.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잘 쓰여진 소설이다. 특히 초고와 관련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컴퓨터는 작가에게서 초고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작가의 일이란 교정하지 않은 초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김연수가 작가를 일반인과 엄격히 구붓짓는 태도와 과잉된 자의식 때문이다.


백가흠의 <한 박자 더 쉬고 - The Song 2> 는 비정한 소설이다. 학창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엄석대 같은 존재를 커서 다시 만난다. 그는 예쁜 아내를 얻어서 교회에 다니며 잘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예술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다 '나'는 다니던 교회 여자애가 강간당하는 현장에 '내'가 데려다 줬었음을 떠올린다.

백가흠은 이 이야기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정하다. 어설픈 권선징악도 문제지만 얘기만 던져놓고 나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에밀 졸라 정도의 거장이라면 모를까.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쿨한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삶의 이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가서지 못한 작품이다. 다분히 무라카미 하루키 풍의 이미지.


정찬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잘 쓰인 소설이다. 침팬지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글을 쓰도록 의뢰받는다는 독특한 상황 설정과, 외젠이라는 가공의 침팬지 이야기를 엮어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정찬의 소설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조해진의 <홍의 부고>와 최진영의 <어디쯤>은 습작 느낌이다. 기교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작가의 내부로부터 '쓰고싶다', '써야한다' 하는 욕망이 차올라 쓰여진 소설이 아니라 '단편을 하나 써볼까' 하는 정도의 욕망에서 시작된 작위적인 글 같은 인상을 받는다는 말이다.

홍이라는 후배가 죽었는데 정작 홍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약도를 보고 찾아가려는데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는 것. 두 소설은 많이 닮아 있다.


편혜영의 <비밀의 호의>에서 주인공의 동생은  어렸을 적에 사흘간 집을 나갔다 돌아왔다. 주인공은 못내 그녀가 그 사흘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것만 알면 그녀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끝내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동생을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앞으로의 삶은 비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혜영은 <철수사용설명서>에 오늘의 작가상을 준 심사위원 중 한명이다. 그래서 나는 편혜영이 왜 <철수사용설명서>에 상을 주어야 했는지가 궁금하다. 그것만 알면 소설 업계의 비밀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윤성희의 작품 <못생겼다고 말해줘>는 역시 윤성희 다운 작품이다. 삶의 냄새가 나지 않고 이미지만 둥둥 떠다니는.

전성태의 <배웅>은 짤막한 소품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는 쏘냐를 배웅하는 화자의 애틋함을 그린 작품이다.

97년인가 조경란의 <식빵 굽는 시간>을 읽었을 때는 불만족 스러웠는데, <옥수수빵 구워줄까>는 나쁘지 않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오븐과, 엄마 밑에서 크지 못해 안쓰러운 조카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차츰 화해하는 '나'의 모습들이 매끄럽게 배치되어 있다.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제주도 워크숍을 다녀왔다. 오며 가며 전철과 비행기에서 읽었는데 작품 수준이 전체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그러나 제주도는 아름다웠다. 일해야 할 시간에, 일해야 하는 공간에 있지 않아도 좋은 그 상황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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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저녁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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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거리에 쓰러진 채 발견된 시체에서 청소부가 은십자가 목걸이를 습득한다. 목걸이에는 '빈첸시오'라는 이름이 세겨져 있었다. 청소부는 성당에 다니는 아내에게 목걸이를 선물하지만, 그녀는 남의 목걸이를 지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신부에게 사실대로 말한 후 목걸이의 처분을 맡긴다. 그리고 목걸이의 본래 임자인 또 다른 '빈첸시오' 가 나타난다.


사망한 빈첸시오의 본래 이름은 황인후였다. 그의 어머니는 신부와 상간하여 인후를 낳았는데, 전해 듣기로 신부는 인후의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건내받은 직후 아이를 내팽개쳤다고 했다. 그때의 사고 때문인지 인후는 간질을 알았다. 이 질병으로 인하여 인후는 신부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다.

인후가 사촌의 별장에서 강혜경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둘은 운명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다. 혜경의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지만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기자 혜경의 어머니는 조금 누그러진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혜경의 집에 내려오는 유전병이었다. 인후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며 하느님에게 간구했지만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자 심한 절망감에 빠져 수도원을 전전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 빈첸시오 신부가 책임자로 있는 수도원으로 간 인후는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인후를 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버지 빈첸시오 신부로부터 은십자가와 세례명 빈첸시오를 받은 인후는 예수님과 닮은 삶을 살다가 추운 겨울에 객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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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는 세 분이 있었다. 한분은 성 빈첸시오 페 레리오 사제 증거자로 중세기의 위대했던 설교자이고, 다른 한분은 성 빈첸시오 순교자이다. 마지막 한분은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신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증거자이다. 소설 속에서 인후는 세번째 빈첸시오이다.


소설보다 흥미로운 것은 문학평론가 김주연의 글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을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된다. '학살의 시기,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신의 묵인 혹은 방조 아래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신학자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이 '하느님의 눈물론'을 들고 나왔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죽어갈 때 하느님은 너무 슬퍼 울고 계셨다는 주장이다.


정찬의 소설은 이 불트만의 이론을 모티프로 하여 전개되는데, 사실 하느님의 눈물론에 관한 소설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너무나 훌륭히 다루어진 주제라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작가는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혔으나, 다소 진부한 주제와 도식적인 전개로 성공하진 못한 것 같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13329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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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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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일본군은 조선의 주요 성을 점령했다. 그들은 성을 점령하면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임금이 도망갔는데도 조선은 항복하지 않았다.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안의 좁은 땅만 차지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1597년 정유년, 일본은 십사만 일천오백명의 군사로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처음 얼마간은 전주로 향하는 길에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차츰 전세가 바뀌어 육군이 상주 목사 정기룡에게 패한 뒤 직산 싸움에서 크게 졌고, 9월 16일 이순신에게 명량에서 패하면서 일본 수군 역시 무너진다. 육군과 수군은 서해에서 만날 수 없었다. 퇴각을 거듭하던 일본 육군은 순천과 울산을 잇는 남해 연안에 성을 쌓고 1598년 11월 18일 철수 때까지 주둔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일만 삼천여 병졸과 역부들 역시 순천 인근 해안에 산성을 쌓았다.


소설은 바로 그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군막장 도모유키의 시선을 빌어 전개된다.


도모유키의 눈에 비친 조선군은 무시무시하다. 바다에는 이순신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일본군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 장군에게는 뇌물도 통하지 않아 일본군의 목을 잘라 바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군들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기약없이 성을 보수하고 인근 민가를 약탈해 식량을 보급했다. 때로 도자기를 빚을 줄 아는 기술자를 잡아오면 상이 내려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군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잘못하면 매질 당하고, 심하면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 붙잡혀온 조선인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성을 보수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지급받지 못했고, 활용가치가 없어지면 살해됐다. 그리고, 일부는 상인들에게 팔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도모유키는 그런 혼란한 와중에 조선여인 명외를 사랑했다. 명외를 보면 가난 때문에 술집에 팔려간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공기가 달라지더니 철군 얘기가 나온다. 도모유키는 철군 직전 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을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 명외를 탈출 시킨다.

마침내 철군 하는 날, 도모유키가 탄 배는 조선수군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되고 패잔병들이 다시 육지로 돌아와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하지만 살기위한 이동일 뿐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도모유키는 명외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일행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나온 도모유키가 명외가 살던 마을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눈보라를 헤치고 마침내 명외의 집에 당도한 도모유키의 눈에 미소 짓는 명외의 얼굴이 보인다. 도모유키가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고, 눈앞은 점점 어두워진다. 바람이 일어났고, 그늘에 쌓인 눈이 날았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패배해도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전쟁을 치룬다.

민중들은 전쟁의 승패와 관계 없이 죽거나 상하고 삶은 피폐해진다. 소설에서 조선군인들이 일본군에게 잡혀갔다온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맥락에서 도모유키와 명외는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핍박받는 민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간결한 문체, 특이한 시각 모두 좋았다. 서사가 조금 약하고, 사투리는 못봐줄 정도로 어색했지만, 그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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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아서스 : 리치왕의 탄생 - 리치왕의 탄생 제우미디어 게임 원작 시리즈
크리스티 골든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지음, NEOG 옮김 / 제우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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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윈드가 호드의 침략으로 쑥대밭이 되고 레인 국왕이 사망하자 안두인 로서경은 바리안 왕자를 데리고 로데론으로 피난을 온다. 로데론은 테레나스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아서스 메네실이다.


아서스는 어렸을적부터 백성들을 몹시 사랑했고, 그들을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지켜주겠다고 맹세하곤 했다. 그래서 검술과 기마술을 익히는데 남다른 노력을 쏟았다. 그의 검술 선생은 은빛 기사단의 우서경과 드워프 무라딘이었다. 무라딘은 본래 마그니 브론즈비어드 왕의 동생으로 드워프족 대사였는데, 아서스와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전투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 아서스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한 살 어린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쿨티라스의 통치자인 댈린 프라우드무어 제독이었다. 둘은 마법수행을 위해 달라란으로 가는 길을 동행하면서 더욱 친해지게 된다. 아직 어렸던 아서스와 제이나는 여정의 중간에 모험 삼아 호드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보게 된다. 그들은 호드 역시 어린아이가 있다는데 가벼운 충격을 느꼈고, 스랄이라는 무적의 검투사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 아서스에게 생애 최초로 상실감을 맛보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가 아끼던 명마 '천하무적'이 눈밭에서 발을 잘못 디뎌 죽고 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서스는 자신이 아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과 댓가라도 치르겠다고 거듭 맹세한다. 이런 맹세들이 나중에 로데론에 큰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한편 성장하면서 제이나와 아서스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서스가 제이나를 떠나고 만다. 아서스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를 댔지만, 제이나는 큰 상처를 받는다. 사실 아서스가 제이나를 떠나게 된 것은 훗날 밝혀지지만 운명의 큰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동안 스랄이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예언자가 나타나 인류의 위기를 경고한다.  


얼마 뒤, 아서스는 안돌할에서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건을 조사하러 간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죽은 사람들이 언데드가 되어 보이는 사람 모두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은 하스글랜도 마찬가지였다. 곡물이 매개체가 되어 역병이 도는 것 같았고, 역병에 걸린 자들은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다. 아서스는 미친듯이 언데드를 처치했다. 뒤늦게 우서경이 지원을 오지만 아서스는 우서경의 충고를 질타로 받아들여 대립각을 세우고 둘 사이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아서스는 자신의 백성들이 언데드가 되어 고통받는 것을 보느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 결과 스트라솔룸의 시민들 모두가 아서스의 손에 살해된다. 물론 그중에는 역병에 걸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병에 걸렸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은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아서스는 우서경과는 완전히 사이가 멀어지고, 제이나와도 서먹한 관계가 된다.


아서스는 역병을 일으킨 강령술사 켈투자드는 처치했지만 말가니스는 당해내지 못한 것이 못내 분했다. 그즈음부터 아서스는 자신을 노스랜드로 부르는 강력한 힘의 존재를 느꼈다. 로데론 함대를 이끌고 노스랜드로 간 아서스는 그곳에서 무라딘이 찾고 있다는 룬검 서리한에 대해 듣자마자 자신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녘으로 온 이유를 깨닫게 된다. 서리한을 얻는 과정에서 무라딘이 사망하지만, 아서스는 피를 갈망하는 서리한의 힘에 압도되어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리한을 자신에게 보내준 존재가 리치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리한의 힘으로 말가니스를 처치한 아서스는 아버리를 살해하고, 로데론에 스컬지군단을 풀어 백성들을 도륙한다. 리치왕의 명을 받들어 켈투자드를 되살리기 위해 쿠엘탈라스를 침공하여 하이엘프를 몰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실바나스 윈드러너를 밴시로 만든다.


또한 아서스는 리치왕보다 고위 악마인 아키몬드의 명으로 달라란을 침략해 안토니다스를 살해한 뒤 메디브가 남긴 책을 탈취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키몬드보다 하급 악마이지만 리치왕보다는 지위가 높은 데서록, 바리 마트라스, 아키몬드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제 아서스의 오른팔이 되어 충성을 다바치게 된 켈투자드는 리치왕의 계획을 아서스에게 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리치왕은 본래 아키몬드나 티콘드리우스보다 하위 악마이지만 아서스에게 서리한 검을 주어 힘을 부여한 뒤 고위 악마들을 속여 독자적인 계획을 실현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에 아서스는 엘프 최초의 종족인 칼도레이의 나이트엘프 일리단을 충동질하여 티콘드리우스와 싸우도록 이간질을 한다. 티콘드리우스가 가진 굴단의 해골을 뺏으면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일리단에게 먹혀드는 것 같았다.


한편, 아서스는 자신의 힘이 점점 쇠잔해져가는 것을 느낀다. 힘이 쇠잔해지자 밴시였던 실바나스 윈드러너가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아서스는 리치왕의 얼음 왕좌에 금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노스랜드로 향한다.

노스랜드에는 캘타스가 아버지와 백성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신도레이의 블러드엘프를 규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캘타스를 물리치긴 하지만 비운의 왕자는 순간이동으로 죽음을 면한다.

아줄네룹의 옛 왕 아눕아락의 도움으로 리치왕의 왕좌로 간 아서스는 일리단이 자신의 계교에도 불구하고 리치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둘은 맞붙어 싸우는데 일리단 역시 1만년 전 악마에게서 빼앗은 아지노스의 쌍날검을 사용하여 격렬히 저항 하지만 아서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얼음왕좌를 지킨 리치왕은 아서스가 겪은 그 모든 고통이 사실은 자신이 예비한 운명이었음을 강조하며 아서스와 결합하려 하고 아서스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인다. 리치왕이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아서스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극악무도한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아서스는 리치왕을 죽이고, 그 자신이 리치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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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스컬지 군단의 군주이자 룬검 서리한의 주인인 아서스는 워크래프트의 역사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한 여행이 곧 그들 모두를 절멸케 하는 결말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왕자가 리치왕이 되는 과정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서스가 리치왕이 되는 과정에서 워크래프트 세계의 많은 부분들이 시작되고 주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굴단의 사부이자 리치왕의 영혼인 흑마술사 넬쥴, 듀로탄의 아들이자 오크의 영웅인 스랄, 한때는 아서스의 연인이고 안토니다스의 제자인 제이나 프라우드무어, 긍지높은 하이엘프였으나 아서스에 의해 밴시가 되어버리는 실바나스 윈드러너, 아버지와 백성을 아서스의 손에 모두 잃는 비운의 왕자 캘타스 선스트라이더 등등이 그들이다. 


각종 밑밥과 떡밥이 난무하는 <아서스>에 손을 댔으니, 당분간은 읽을거리가 끊길 걱정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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