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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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도쿄 네리마구 주택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히오키 다케시와 아내 유리는 칼에 찔려 살해 당했고, 중학생 아들 다이치는 독극물을 먹고 사망했다. 남편과 중학생 아들은 성인 남성에 의해 심하게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

아내 유리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발견 당시 나체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 위에는 312개의 종이학이 흩뿌려져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벽장에서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 깨어난 열두 살 난 사나에 뿐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들어온 흔적도 없고, 출입문은 안으로부터 잠겨 있었다. 화장실의 환풍구는 성인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완벽한 밀실이었다.

경찰은 사나에에게 수면제가 든 쥬스를 건낸 정체 불명의 사나이와, 당시 그 동네를 주무대로 활동하던 빈집털이범 등을 주목하여 수사를 진행했지만 딱히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 와타리베란 사나이 역시 기소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사건은 미결로 남게 된다.

주인공 '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일처리는 깔끔하게 해낸다. 사장이 부하직원이나 계약직 사원을 부당하게 대접하면 나름대로의 항의도 한다. 하지만 정렬이라든가, 신념같은 것은 없는, 어딘지 나사 빠진 일상이었다.

TV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뉴스가 온종일 흘러 나온다. 하지만 정치인은 피해회복이나 원인규명보다 복구를 둘러싼 이권에만 눈이 벌개져 있다. 그런 현실을 보며 '나'는 성실하고 차분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느낌으로 무료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여자와 우연히 만나 하룻밤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나'에게 탐정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접근한다.

탐정은 '내'가 하룻밤 보낸 그녀와 동거했던 남자가 실종되었다, 그 남자는 경리부정을 저지른 뒤 행방이 묘연하다, 어쩌면 여성이 살해해서 자택의 큰 화분에 묻어버렸는지도 모르는데 조사에 협조해 줄 수 있는가, 따위의 말들을 했다.

'나'는 심드렁한 태도로 듣다 그날 여자를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탐정이 찾아왔더라는 말, 화분 속에 시체가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솔직히 건넨다. 여자는 선선히 화분을 파해쳐 보여준다. 시체는 없었다.

다시 만난 탐정이 '나'의 답변을 들은 뒤 맥 빠진다는 듯 얼마간의 사례금을 건내준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탐정은 어디든 가서 탕진해버리라고 했다. 탐정은 묻지 않은 말들을 해댔다. 그리고 알게된 여자의 정체. 여자는 22년 전, 도쿄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사나에라고 했다.

'나'는 탐정의 얘기를 들은 뒤부터 사나에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22년 전 살인사건을 조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력 용의자를 변호했던 변호사, 사건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재구성해 책을 내려 했던 프리라이터 등을 찾아간다. 그리고 알게된 추가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남편 히오키 다케시는 지나치에 아름다운 아내 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내 유리에게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륜이나 일탈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아들 다이치는 여동생인 사나에에게 성적 환상을 품었고, 실제로 사나에의 잠옷에서 다이치의 정액이 검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사나에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행방불명 되었던 사내도 사나에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뜻밖에도 사나에의 입을 통해 알게 된다.

그녀가 쏟아놓는 말들은 과거 사건의 실마리이면서 어둠에 의해 잠식당한 사람의 음울한 자기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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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후미노리는 1977년생으로,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업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 후쿠시마대학 행정사회학부에 입학한다. 대학시절은 꽤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유쾌한 사람들 틈에서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 후 취업이 여의치 않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글을 썼다. 초기에는 대중들이 좋아할 법한 글들만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개성없고 맥빠진 글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자신만의 언어로 진지한 글들을 다시 썼고, 결국 2002년 <총>으로 신초신인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차광>으로 노마문예신인상, 2005년에는 <흑 속의 아이>로 아쿠타가와상, 2010년 <쓰리>로 오에겐자부로상, 2016년 <나의 소멸>로 분카무라되마고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사나에의 고백에 의하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끊임없이 어머니를 의심하는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연애에 실패한 뒤 자신을 내던지듯 결혼한 어머니, 사춘기에 들어서 여동생을 성적으로 원하는 오빠 등에 답답함을 느낀 사나에는 기묘한 가족 구성원 중 누구라도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다이치 역시 여동생을 차지하는데 유일한 방해물이 부모라는 생각에 그들을 해칠 생각을 하며 어두운 상상을 키워 나갔다.

그러다 그 즈음 유행한 빈집털이범을 떠올린 사나에는 매일 밤 문을 몰래 열어 놓는다. 빈집털이범이 자신의 바람을 대신 실현시켜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정말로 빈집털이범이 침입했고, 빈집털이범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묶어놓은 뒤 귀중품을 훔쳐 달아난다. 상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오빠인 다이치가 칼을 들고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찔러 죽인다. 다이치는 어머니의 옷을 벗겼다. 마치 성인이 된 뒤의 사나에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그 위에 학을 뿌렸다.

빈집털이범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빈집털이범은 어머니 유리의 아름다운 모습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단지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아왔다가 처참한 광경을 발견한 빈집털이범, 그리고 그에게 칼을 들고 달려든 다이치. 둘은 격투를 벌였지만 곧 다이치가 빈집털이범에게 제압된다. 그는 칼을 빼앗아 들고 도망친다. 격투 과정에서 빼앗다가 자신의 지문이 찍혔을 것이므로.

오빠 다이치는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다. 사나에는 이 모든 사건에 자신이 등장하지 않도록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던 것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사나에는 이후 오빠와 닮은 사람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라진 동거남, 그리고 '나'는 '오빠와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나에의 진술이 어느 정도의 진실은 알려준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튀는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다이치는 이미 사나에에게 욕정하고 있는데 왜 성인이 된 사나에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어머니의 옷을 벗긴단 말인가? 다이치가 독극물을 먹고 깜짝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이치가 무엇인지 모르고 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나에는 사건을 미궁에 빠지게 만들 여러가지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했는데 어쩌면 사건의 일부, 혹은 전부를 계획한 것은 사나에 아니었을까 등등... 하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사나에의 기묘한, 어두운 어떤 면에 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나' 역시 R이라고 불리는, 하이드씨와 같은 어둠을 강제로 분리한 전력이 있는 망가진 인간이라고 느끼고 있으니까...

<미궁>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삶이라는 것의 불안정성을 깨달은 일본인의 의식 변화를 바탕으로 어둠에 잠식당한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 파편화된 개인의 소외감 등을 건드린다.

착실하게 살아갈 필요가 과연 있는 걸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항상 건전하게 살라고? 뭘 위해서?

도덕과 윤리에 대한 기준이 대격변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일본. 재생가능성 조차 의문시되는 불안한 정세를 반영하듯, 작가의 말들은 날이 서 있고, 등장인물들은 균형을 잃은 채 흔들거린다.

요새 들어 부쩍 '개인의 어둠'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아진 것 같다. 거대담론이 해체되고, 현실 극복을 위한 다양한 기획들이 실패로 돌아간 것 지금, '희망' 대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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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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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의 <영국 왕을 모셨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 한 문장 덕분에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디테는 처음에 프라하 호텔 점원으로 일했다. 정식 웨이터는 아니고 기차역에 나가 핫도그를 파는 일이었다.

기차 승객들은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디테는 잔돈 내주는 시간을 질질 끄는 수법으로 꽤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라이스키('천국의'라는 뜻의 체코어) 창녀촌에 갔다. 디테는 그녀들이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느꼈고, 그녀들의 아랫배 주위를 꽃이나 나뭇가지로 장식하곤 했다. 그녀들도 그런 디테를 어엿한 신사로 대접해준 것은 물론이다.

디테는 어느 정도의 돈과 솔직한 태도만 있으면 행복이 손에 들어올거라 믿고 큰 성공을 거두리라 다짐한다.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소설의 한 단락은 이렇게 끝나고, 다시 마법 같은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가 시작된다.

디테는 프라하 호텔에서 사귄 사업가 발덴 씨의 추천으로 티호타 호텔로 일자리를 옮긴다. 티호타 호텔 사장은 거구에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며 직원을 부를 때 호각을 불어댔다. 호각을 부르면 사방에서 직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장 앞으로 달려갔다. 또 덩치가 우람한 호텔 포터가 있었는데,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댔다. 또 번 돈은 모두 써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좋은 지배인 즈데네크씨가 있었다.

어느 날, 볼리비아 사람들이 프라하 아기 예수상(밤비노 디 프라가)의 축성을 받기 위해 티호타 호텔에 머무는데, 가짜 예수상과 바꿔치기 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디테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오인받아 티호타 호텔을 떠나게 된다.

다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호텔 파리였다. 그곳은 지금까지 일한 호텔보다 규모 면에서나 설비와 품격 면에서나 훌륭한 곳이었다. 그곳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씨는 대단한 인물로 웨이터복이 썩 잘 어울렸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시킬 음식과 서비스를 여지없이 알아 맞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디테의 물음에 그는 "영국 왕을 모셨으니까!" 라고 답했다.

디테는 스크르지바네크씨로부터 지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술들을 차분히 습득하는 한편, 손님들이 두고간 고급 넥타이를 착용하고 자세를 바르게 해서 작은 키를 극복하려 애썼다.

어느 날, 호텔이 보유하고 있는 금식기를 사용하기 위해 아비시니아 황제 일행이 방문하게 된다. 디테는 황제를 잘 보필했지만 행사가 끝난 뒤 금티스푼 하나가 모자라자 제일 먼저 의심 받게 된다. 게다가 아비시니아 황제가 자신을 잘 보필해주었다며 디테에게 훈장을 내려줬기 때문에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시샘을 받게 된다. 결국 디테는 호텔 파리를 떠난다.

호텔 파리를 그만두기 전, 디테는 독일인 여성 리자를 체코 민족주의자들(극우성향의)로 부터 구해주려다 폭행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디테와 리자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독일이 체코를 침공한 것이다.

그래서 디테는 자신의 이름을 독일식인 디티에로 바꾸었다. 다음으로 재판장과 의사, 에스에스 대원들 앞에서 아리아-게르만 혈통을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검사를 위해 자위를 했다. 그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프라하 뿐 아니라 브로노, 그밖의 사형집행법이 있는 전국 모든 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어쨌든 디테는 리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독일인도, 체코인도 디테를 축원해주지 않았다.

리자는 독일군을 따라 전장으로 떠났다. 그녀는 전장에서 유태인들의 학살 현장을 뒤져 매우 값 비싼 우표들을 약탈해왔다. 중간중간 아내와 만나 관계를 갖었기에 지크프리트라는 아들을 낳을 수 있었지만 아이는 성장이 더뎠고 온종일 못과 망치만 갖고 놀았다.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올 무렵, 디테는 볼셰비키로 오인되어 체포된다. 그는 차라리 그편이 체코 해방 시국에 유리하리라 생각했다. 오해로 밝혀져 유치장에서는 풀려났지만 그의 아내는 폭격을 맞아 사망한 뒤였다. 디테는 아들을 버리고 우표만 챙겨 도망간다.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디테는 게슈타포 지휘관의 주소를 밀고한다. 디테는 애국자들이 처형당할 때 나치 관청에서 예의 그 수음을 한 죄로 반년 형을 언도 받는다. 형을 살고나온 디테는 아내가 준 우표로 프라하 근교에 방기된 거대한 채석장을 사서 호텔을 짓는다. 호텔은 장사가 잘 됐고,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여전히 체코인들은 그를 멸시했고, 무시했다.

체코가 공산화 되어 재산이 몰수되고 백만장자들은 감옥에 가게 된다. 디테는 명단에서 빠졌지만 자진신고 형식으로 노동교화형을 받게 되고, 사람들이 꺼리는 오지로 자원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랑말, 고양이, 염소 등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들이 잘 지나지 않는 산간도로를 보수하면서 단순하고 평온하게.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디테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남들보다 키가 작아 고민인 얀 디테(Jan Dítě)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은 돈을 벌어 아름다운 여성과 관계하는 단순한 것이다. 그 아름다운 여성이 정숙한 부인인지 창녀인지, 체코인인지 독일인인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욕망의 집합소인 호텔에서 디테는 천진난만하게 일을 배운다. 사장이 호루라기로 종업원을 통제하고, 보여주기 위한 장작을 패는 포터(무장권력)를 통해 호텔 경영방침을 전달하는 그곳에서.

하지만 그는 티스푼 도둑으로 몰리고, 체코 애국청년들에게 폭행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리고 문제의 수음 장면이 등장한다.

전국에서 체코 애국자들의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그 순간, 디테가 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나치 앞에서 정액을 받아내기 위해 골몰하는.

작가는 한 걸은 더 나아가 체코의 사회주의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싸잡아 비아냥 대는 장면도 삽입한다.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이런 장면이 (체코)독자들이 모욕을 느꼈을 법한 부분이다. 아울러 작품의 논쟁적 성격을 한층 부각시키는 지점이다.

망치와 못(공산주의의 상징)을 가지고 노는, 그야말로 독일적인 이름을 가진 저능아 지크프리트. 디테가 지크프리트를 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장면은 '역사보다 우선하는 개인의 욕망'을 탐구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듯 하다. 하지만 개인이 무슨무슨 주의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고자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래서 작품에서도 디테는 사람들이 없는 오지로 들어가 조랑말, 고양이, 염소와 함께 살며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흡족하셨느냐는 디테의 물음에 나는 '조금 아쉽다'고 답할 수밖에...

** 체코 정부는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을 출간 금지 시켰고, 작품은 사미즈다트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사미즈다트(자기출판, 지하출판)는 작가가 직접 타이핑한 작품 한 부를 지인들에게 돌려 읽히면 읽은 사람은 한 부 더 타이핑하는 식으로 보급하는 방식이다. 일부 청년들과 동료 문학인도 보후밀 흐라발의 책을 불태우거나 비난했다.

1975년 잡지 Tvoba 인터뷰를 통해 자아비판을 수행하고서야 그의 작품이 다시 인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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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 범우문고 262
로맹 롤랑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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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오해와 연상이 독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뻔뻔한 표절과 최악의 대응으로 문단에서 가뭇없이 사라진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기골이 장대한 크리스토프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처음에 그 크리스토프가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는 베토벤을 모델로 쓴 소설로, 19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어느 날 화성에 있는 고구마라는 헌책방에 가니 한질 온전한 형태로 있길래 사다가 고이 책장에 모셔 두었는데, 꽂아 놓고 읽지 않다보니 약간의 채무의식 비슷한 것이 생긴 모양이다. 우연히 <톨스토이의 생애> 저자가 로맹 롤랑이라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다는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로맹 롤랑의 <빛을 밝히는 사람들>이라는 표제하에 정리된 세 명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중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7~1910)에 할애된 부분이다. 다른 두 명의 인물은 미켈란젤로와 베토벤이다.

작품은 톨스토이의 생애와 그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비평, 그리고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맹 롤랑이 이야기하는 톨스토이는 농민의 순진성과 건강함을 믿은 이상적인 기독교인이었다. 톨스토이는 평생을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고 이를 생활과 작품에 녹여내는 데 골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이유로 가정과 불화했고 주변 예술가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베토벤 폄하이다.

하지만 로맹 롤랑은 이런 톨스토이의 한계도 매우 아름답게 포장해 준다. 이를테면 톨스토이는 음악이 가지는 힘에 압도되었기에 음악을 폄하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톨스토이가 1905년 혁명 전후 보여준 태도도 무척이나 이상적인데, 다른 말로 하면 순진하기 그지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혁명 한복판에서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모두를 비난하며 '비폭력 무저항'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설파했다. 하지만 로맹 롤랑은 바로 이런 톨스토이의 정신에 감동 받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로맹 롤랑은 톨스토이의 이러한 정신이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그를 변호하는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를 스케일과 전형성, 치밀한 묘사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최고 걸작으로 뽑는 듯 하다. <안나 카레니나>는 이보다는 못한 작품으로 평가하며, <부활>은 말년의 노작으로 <전쟁과 평화>의 예술적 완성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의 사상이 응결된 작품으로 꼽는다.

중단편으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좋은 작품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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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갇힌 여자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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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천후로 폐장된 호니먼 박물관의 얼어붙은 호수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녀의 이름은 앤드리아 더글러스-브라운, 정부의 군수 책임자이자 내각 각료 더글러스-브라운 경의 둘째 딸이었다. 마쉬 총경은 사건 해결을 위해 맨체스터 경찰국의 에리카 포스터 경감을 소환한다.

에리카 포스터는 얼마 전 마약 제조업자 습격 과정에서 동료이자 남편인 마크를 잃었다. 문제는 습격 책임자가 에리카였다는 점이었다. 에리카는 직무에서 배제된 뒤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조사와는 별개로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쨌든 현업으로 복귀한 에리카는 일반적인 절차에 따라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하지만 더글라스-브라운 경 부부는 그녀가 슬로바키아 출신에 여자라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가 들쑤시는 장소들, 이를테면 템즈강 이남의 더러운 펍과, 그곳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나 창부의 목격 증언들이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유력한 목격자인 창부 아이비가 앤드리아와 유사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거기에 더해 과거 동유럽 출신의 창부 세 명이 유사한 수법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수사는 반짝 활기를 띤다.

하지만 에리카를 시기하는 스팍스 경감, 그녀를 믿지만 최상부의 압박 때문에 그녀를 차츰 부담스러워하는 마쉬 총경, 자녀의 살인범을 잡는 것 보다 집안의 명예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더글라스-브라운 부부 등으로 인해 에리카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급기야 수사 지휘권을 스팍스에게 넘겨주기까지 한다.

아무리 봐도 앤드리아와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약혼자 자일스 오스본,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앤드리아를 시기질투해 폭력을 휘두른 이력이 있는 언니 린다, 매사에 심드렁한 그녀의 남동생 데이비드, 앤드리아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한 점남친 마르코 프로스트, 동유럽 여성들의 포주로 보이는 이고르 쿠체로프. 이들 모두가 앤드리아의 사망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였지만 이를 한 줄로 꿰내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러던 차, 실마리는 엉뚱한 데서 풀린다. 고양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린다가 수사관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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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 출신 여성 수사관 에리카를 흑인 형사와 레즈비언 형사가 보좌한다. 법의학자는 게이이고, 유력한 목격자는 창부이며, 그녀의 손자는 HIV 바이러스 보균자이다. 피해자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영국에 입국한 동유럽 출신 여성들이며, 최초로 시신을 발견하는 사람 역시 실업급여로 생활하는 청년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종교처럼 번지던 시기에 타깃 독자층을 명확히 하여 쓰여진 이 소설의 작가 로버트 브린자는 잉글랜드 동부 로스토프트 출신으로 명문 뮤지컬 학교 길퍼드 연기학교 출신이다. 작가의 의도가 맞아 떨어졌는지 에리카 경감 시리즈의 1편인 이 작품은 2016년 아마존 킨들 베스트셀러 1위, 영국 종합 베스트셀러 2위를 기록했다.

범인은 데이비드이다. 데이비드의 넘치는 성욕을 아버지 더글라스-브라운이 돈으로 해결해 주었고, 여자를 대주는 포주가 이고르 쿠체로프였다. 문제는 데이비드의 욕망이 살인까지 포함하는 패키지였다는 점이었다.

앤드리아는 이 비밀을 알게 되었기에 살해한 것이고, 더글라스-브라운은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미 사망한 딸보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집안의 허울뿐인 명예를 지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범인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장녀 린다 소행으로 몰아간 뒤 정신병원에서 몇 년간 생활하는 것으로 퉁치려 했던 계획은 린다의 엉뚱한 고백으로 산통이 깨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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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한국어판) - 1934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미야자와 겐지 지음, 김동근 옮김 / 소와다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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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는 고기 잡이를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반 아이들은 그런 조반니를 놀려댔고, 외톨이가 된 조반니는 공상에 빠져들곤 했다.

켄타우로스 축제의 밤, 반 아이들은 쥐참외 등불을 강물에 띄우기 위해 몰려갔지만 조반니는 어머니를 돌봐야 해 그럴 수 없었다. 우유를 받으러 갔다 동산에 올라간 조반니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공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조반니는 은하철도에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자신을 놀리지 않고 동정해 준 캄파넬라도 있었다.

둘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돌아다니며 공룡을 발굴하는 사람, 새를 잡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배가 침몰해서 죽은 청년과 어린 남매, 그리고 인디언을 만난다.

어느덧 여행이 끝나갈 무렵, 캄파넬라가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라고 물으며 눈물 짓는다. 캄파넬라는 어쩐 일인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뒤 정신을 차린 조반니는 피곤에 지쳐 언덕에서 깜빡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덕을 내려가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조반니는 캄파넬라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이 죽어 슬픔에 잠겨있을 것이 분명한 캄파넬라의 아버지는 조반니를 보더니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것'이라고 도리어 위로한다. 조반니는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주기 위해 마을로 뛰어간다.

1896년 이와테 현 하나마키 시에서에 태어난 미야자와 겐지는 소설가, 시인, 아동문학 작가였고 농업과학 교사, 채식주의자, 첼리스트, 법화종신자,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부유한 전당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불교를 믿었기에 자연스럽게 어렸을 적 불교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법화경을 읽은 뒤 법화종(니치렌교) 으로 개종하는데, 이 때문에 아버지와 갈등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와의 불화, 가업에 대한 불만으로 1921년 도쿄로 간 미야자와 겐지는 법화종 단체인 국중회에 가입한 뒤 신앙생활과 어린이 이야기 쓰기에 골몰했다.

하지만 여동생 미야자와 토시의 병이 악화되자 고향인 하나마키로 돌아가 농업학교 교사가 된다. 동생은 다음 해 24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미야자와 겐지는 동생의 죽음으로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고향에서 농업기술, 음악, 문학을 보급하고 에스페란토어, 독일어,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글을 쓰던 미야자와 겐지는 1928년 여름 폐렴에 걸린 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이후로도 폐렴의 재발, 흉막염으로 고생하다 1933년 9월 21일 사망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법화경 1,000부를 인쇄하여 배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원고는 동생이 보관하다 사후에 출판된다.

소설은 이탈리아로 추정되는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조반니가 어느 날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을 한다. 기차에서 기이한 사람도 만나고, 죽어서 천국에 가기 직전의 여행객도 만난다. 함께 여행하던 캄파넬라도 사실은 죽어서 그 열차에 타고 있었다는 것을 깨어난 조반니는 깨닫는다.

다소 음울한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설정이 이후 <은하철도 999>에 차용되기도 하면서 일부 사특한 출판사에서 <은하철도 999>의 원작이라고 사기를 치기도 했다.

추석인데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고 체감온도는 그보다 높은 33도였다고 한다. 이제 남한도 아열대 기후로 변하나 보다. 아주 오래 전에 사놓고 읽지 않았는데 책장 정리하다 눈에 띄여 읽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8687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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