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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간송 전형필의 삶은 언제 한번 주목받아야 한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간송 전형필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친일과 친일행적이 모호해져 버린 시대에 여전히 친일파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일제시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은 상대적으로 관심 밖의 일이다.
책 <간송 전형필>은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과정을 그려낸 전기물이다. 작가가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일부 픽션이 있지만, 간송의 삶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네이버캐스트에서 간송전형필을 검색하면 책에 있는 많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굳이 줄거리를 적을 필요는 없다.
간송전형필은 문화재를 수집함에 있어, 중개상이나 소장자가 부르는 가격보다는 간송이 생각하는 가치를 쳐서 준다. 때로는 그 가치가 기와집 수십채에 해당할지라도 가치가 있다면 아끼지 않았다.
전형필은 서화 골동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취향보다는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도 좋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았고, 때문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다. (26)
간송이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 나선데는 주변 인물의 영향이 컸다. 먼저 사촌인 월탄 박종화의 영향으로 서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박종화는 간송에게 그런 뜻을 넌지시 전한다. 위창 오세창은 그에게 문화재 감식안과 더불어 우리 문화에 대한 시각을 가르친다.
“내가 자꾸 묻는 건, 뜨거운 가슴과 재력이 있으니 한번 본격적으로 모아보겠다는 자네의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네. 그런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잘 아네. 그러나 나는 자네가 우리 서화 전적과 골동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키겠다는 건지 알고 싶네."
전형필은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이제까지 서화 전적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세창은 잠시 전형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마침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 땅에 서화 전적과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은 많다네. 자네처럼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수집가도 제법 있지, 그러나 뜻을 갖고 모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네. 대부분 재산이 많거나 돈이 좀 생기자 고상한 취미로 내세우기 위해 모으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들은 수집벽이 식거나, 체면을 충분히 세웠다 싶으면 더 이상 모으지 않는다네, 그러나 자네는 조선의 자존심이기에 지키겠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하군.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네. 하하하” (82-83)
간송과 오세창의 대화처럼 간송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를 위해, 혹은 재산을 자랑하기 위해 문화재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년간 모시면서 간송이 다른 수집가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조선 초기 서화작품부터 체계적으로 수집하시는 걸 보면 위창 선생님처럼 책을 만드시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근역서화징)에 겨우 한두 줄 언급된 화가와 서예가들의 작품까지 애지중지하시는 보면,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심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서 외람되게 여쭙는 겁니다."
전형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선생, 지나간 세월이 어디 좋을 때만 있었겠소? 그림이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중국 그림이나 글씨를 모방하던 때도 있었고, 그런 모방에서 벗어나려던 과도기나 영 . 정조 때와 같은 번성기도 있었지요.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암울하던 때도 있었고 내가 위창 선생 님의 수집품을 보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유명한 서화가의 명품과 명필만 모아서는 500년 조선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라오. 그래서 유명하지 않은 서화가의 작은 그림과 글씨도 작품 수준에 관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모으는 겁니다. (154-155)
간송은 자신의 전재산을 모아 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
전형필은 박물관 만들 결심을 굳혔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이 하나 있었다. 좋은 그림, 좋은 글씨 좋은 도자기 좋은 책을 각각 100 점씩 박물관에 모으겠다는 꿈. 그래야 박물관을 통해 선조들이 남긴 문화의 궤적 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의 위치가 지금 이 자리가 아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04)
간송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문화재 수집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해방후에는 더 이상의 수집을 멈춘다. 물론 그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어렵게 모은 문화재가 한국전쟁으로 많은 작품이 흩어졌다. 그 작품을 다시 돈을 들여 모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나면서도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조형예술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한 검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수집한 간송의 소장품 중 서화가 지니는 의미를 간단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화뿐 아니라 전적을 함께 엄선해서 모은 점을 들 수 있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서화는 시작이 같은 뿌리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감상과 연구가 병존하는 전통문화의 바른 이해라는 입장에서 문헌사료와 유형문화재는 상호보완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림은 고려말과 조선왕조 전체, 20세기 근대 화단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화가들 모두를 체계적으로 망라해 수장한 점을 들게 된다. 간송미술관에서는 매해 봄가을 두 차례씩 특별전을 통해 소장품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특히 서화는 시대별, 장르별, 작가별-유파별 기획전을 열 수 있었다. 18세기 최고의 서화수장가인 김광국이 조선의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화첩으로 만든 <석농화원>과, 오세창이 모은 《근역화휘》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것은 의발전수의 상징 적 의미를 지닌다.
셋째, 회화사적 의의가 큰 거장의 걸작 100선을 목표로 모은 점이다. 이는 간송미술관에서 연 기획전을 통해 분명해진다. 진경산수를 이룩한 정선, 남종문인화의 국풍화를 이룩한 심사정, 19세기 예원의 총수로 학예 양면에 족적이 큰 김정희, 조선 말기 화단을 최후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승업 등 개인별 전시와, 정선·심사정·조영석 등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세 사람의 사인삼재 , 풍속화의 쌍벽으로 사농공상 사회를 담은 김홍도와 한량과 기녀의 애정에 초점을 둔 신윤복, 장승업의 제자로 근대 화단의 시발인 안중식과 조석 진 등 2~3인 공동전시가 가능했다.
물론 작품수로 보면 간송미술관의 작품수는 보잘 것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혜원 그림의 의미를 알아차린 점, 겸재 그림의 진수를 파악하고 연구결과를 낸 점 등을 들여 볼 때 간송미술관은 우리문화지킴이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간송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