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창.통 - 당신은 이 셋을 가졌는가?
이지훈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혼창통은 처음 봤을 때 부터 관심이 있던 책이었다. 그러나 밀려있는 책이 많았고, 책을 읽을 시간 자체가 부족해서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업무 중 점심시간을 이용해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회사 직원 책상에 꽂혀 있는 혼창통을 들고 나갔다.

 

일단 제목에서 한국경영의 어떤 무엇인가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혼창통, 혼은 열정, 창은 창의성, 통은 소통, 커뮤니케이션이다. 무언가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전혀 새롭지 않은 개념에 실망감이 넘쳐났다. 열정 passion, 창의성 Creativity, 소통 Communication은 현대 경영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로 너무나 많이 들어왔던 개념이다. 경제, 경영서적을 자주 읽어왔던 나로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저자가 든 예들을 보면서 생각보다 자료 연구 등이 부족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저자가 예로 드는 짐콜린스의 '성공하는 기업의 8가지 습관'에서 이야기하는 비전기업의 성공요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짐 콜린스가 성공한 사례들로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다. 또한 국내 기업의 사례 역시 혼창통과 어떤 맥락이 닿아있는지도 모르겠고, 국내 공장들에서 오래전부터 활용하던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나니 단순 짜집기한 책인데, 사례 또한 그다지 깊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저자가 거론하는 책에 대해서는 읽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워드 Onward -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의 혁신과 도전
하워드 슐츠 & 조앤 고든 지음, 안진환.장세현 옮김 / 8.0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우리가 봉지커피라 부르는 스타벅스의 인스턴트 커피 '비아'가 한국에도 출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 마침 스타벅스 CEO의 이야기를 다룬 온워드를 터라 '비아' 출시 소식은 한눈에 들어왔다.
스타벅스의 봉지커피는 머리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조합이다.그렇지만 가끔씩 편의점에서 스타벅스캔을 들고 나오는 나의 소비행태를 떠올리면 스타벅스와 봉지커피의 조합을 이끌어내지 못할 이유는 없는 데 말이다. 사실 스타벅스는 몇 해 전부터 캔음료와 병음료 제품을 팔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와 봉지커피가 잘 다가오지 않는 것은 스타벅스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온워드는 스타벅스의 CEO인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다시 살린 이야기이다. 스타벅스의 창업자에 가까운 하워드 슐츠가 단순히 최대주주로 물러나 있던 시기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의 위기를 본다. 그리고 다시 경영인으로 복귀한다. 복귀 후 그는 스타벅스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샌드위치를 과감하게 없앤다. 그리고 스타벅스 커피가 갖는 고유의 향을 되찾기 위해 전 세계의 매장의 문을 닫고 각 스타벅스 지점의 바리스타(?)들에게 화상 교육을 실시한다. (한국에서도 오전시간 잠시 문을 닫았었다.) 이는 모두 스타벅스의 고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고 커피 향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침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커피 향이 아닌 샌드위치 냄새로 가득하다면 스타벅스는 과연 커피를 파는 곳인가 식당인가? (이후 샌드위치 냄새를 최소화 시키는 방법을 찾아내 다시 판매에 들어갔다.)

 

온워드는 출간후 국내에서 20위권 내에 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되었다. 하워드 슐츠가 되살린 스타벅스의 본질 그리고 혁신은 우리나라의 스타벅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커피를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CEO와 문어발식으로 커피점에 까지 들어온 대기업에서 기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쉽으로 운영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스타벅스는 대기업이 운영한다. 그래서 미국의 지역 스타벅스에서는 바리스타(?)들과의 지역주민이 밀착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구매,판매만 이루어질 뿐이다.

특히, 하워드 슐츠의 개혁에는 전국의 모든 커피 머신을 바꾼 것에도 있다. 커피 머신이 높아 바리스타와 고객들이 더 이상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것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커피의 향과 맛을 개선시키면서도 고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낮은 높이의 커피 머신으로 바꾼 점은 우리나라와는 분명히 다르다.

 

온워드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의아하다고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스타벅스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같다. 미국에서는 맛있지만 한국에서는 맛없는 스타벅스 커피에 매혹된 사람들이 우리나라 스타벅스와는 전혀 다른 미국 스타벅스의 혁신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질감이다.   
 

사실 별을 하나만 주고 싶었지만 책 뒤편에 붙어있는 스타벅스 쿠폰에 별 셋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게너가 들려주는 대륙 이동 이야기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34
좌용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시절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지형이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아주 오래전 지구의 대륙은 하나였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들었는데 그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별 관심도 없던 대륙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상기한 것은 지진읽기를 시도하면서 이다. 지진에 대한 가장 핵심이론 중의 하나가 판구조론인데, 이 판구조론은 대륙이동설에 기원한다. 즉, 지진 및 화산활동을 이해하려면 대륙이동설을 이해해야 한다.

대륙이동에 대한 설은 지도의 제작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로만 취급되었다. 그러다 기후학자이자 지구물리학자였던 베게너는 그 재미있는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갖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대륙이동설이 시작된다. 

최초의 지구는 판게아라 불리는 하나의 대륙에서 갈라져서 점차 이동했다는 것이 대륙이동설이다. 대륙이동설의 증거로는 첫째, 고생물의 증거가 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동일 생물화석이 발견된다. (아래 사진. 동일하게 나타나는 고생물 화석으로 고생물이 살았던 지역을 보여준다. 출처 : 위키피디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XX6056) 둘째, 지질의 증거로 북아메리카와 유럽 특히 접경지대에서 발견되는 같은 지층, 암석이다. 셋째는 기후의 증거로 인도남부와 호주 등에서 빙하의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1920년대 홈즈에 의해 맨틀대류설이 제기되면서 대륙이동설의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대륙이동설에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면서 대륙이동성을 과학계에서 무시되고 사라졌다.

그러다 제2차대전시기 갑작스레 해양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잠수함 등의 등장으로 잠수함을 찾기 위한 시스템 등이 갖추어지면서 비로소 바다 밑에 연구가 시작되고 지구의 자기장을 연구하던 중 지구의 극이 서로 역전되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륙이동설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해양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면서 바다 내 해령(산맥)과 해구(골짜기)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해저확장설이 등장하는데 이는 맨틀대류설을 뒷받침한다. 맨틀이 대류하면서 해저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의 극이 역전된 층이 중앙해령을 중심으로 평행대칭적으로 나타나면서 대륙이동설이 인정받게 된다.

 

대륙이동설이 인정을 받는 과정은 지동설의 등장을 연상시킨다. 지동설이 분명히 과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처럼 대륙이동설이 고생물 화석 및 동일한 지질구조를 갖는 서로 다른 대륙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대륙이동설에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였다. 과학이 갖는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ERRA 테라 :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 -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
리처드 험블린 지음, 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테라 :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이라는 이름의 책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책은 말 그대로 광포한 지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다음과 같다.


 - 1755년 리스본 대지진

 - 1783년 유럽기상이변

 -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 1946년 하와이 힐로 쓰나미

 

지은이가 이 네가지 주제를 선택한 것은 '지구와 대기사이의 상호연관과 과정에 대한 많은 실마리를 제공했고, 각 사건이 과학적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선별되었다.' 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지진을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사건이다. 본격적으로 지진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지진학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리스본은 가장 종교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으로 보던 신중심의 세계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또한 리스본 대지진 피해를 돕기 위해 유럽 각국의 원조가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당시 협력관계였던 영국의 원조가 컸고, 반대로 프랑스의 경우는 원조를 하지 않았지만 국제 원조의 시초가 된 사건이다. 이 뿐만 아니라 카르발류(폼발 후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지진피해 파악과 재건은 재난관리의 기틀을 닦았다.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가 대두되긴 하였지만 종교재판(개신교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한)등 종교의 힘이 여전히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때에 리스본 대지진은 본격적으로 신중심 사회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1783년 유럽은 이상했다. 몇달씩 운무(짙은 안개)가 유럽전역을 뒤덮었고, 잦은 폭풍우와 낙뢰에 의한 피해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은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가 지속되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대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철학자 및 과학자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신학적인 설명이 아닌 과학적인 설명을 시도하게 된다. 아직 언론이 제 모습을 갖추기 전이었지만 언론들은 대기 불안정 현상에 대해 특집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언론의 역할이 점차 커지게 된다.

이 때 유럽에 거주했던 벤자민 플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하게 된다. 파리의 한 집에서 피뢰침을 설치하려고 하자 종교적인 이유로 이웃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후에 공포정치로 유명한 로베르피에르가 이 사건의 변호를 맞게 된다. 기상이변을 더 이상 신의 섭리로 보지 않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인도네시아 순다해협에 있는 크라카타우 화산폭발은 역사상 최고의 폭발 화산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동인도회사 등 주변에 많은 상선들이 정박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이 화산폭발을 경험했다. 자바와 수마트라 섬에는 수십미터의 쓰나미가 닥쳤다.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은 최초로 세계적으로 연구된 화산폭발이다. 당시 발명된 전신기술의 발달로 화산에 대한 소식이 즉각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화산폭발의 심각성과 화산폭발로 인한 기상효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46년 하와이 힐로 쓰나미는 태평양에 쓰나미 경보시스템이 만들어지게 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힐로 섬에 쓰나미가 닥쳐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 당시 미국의 비키니섬 원폭실험이 계획되어 있어 많은 과학자들이 하와이에 머물러 있었다. 해양학자들은 즉각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를 토대로 쓰나미 경보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왔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과학적인 대응책을 낸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재해의 힘은 과학을 무력화 시키곤 하고, 인간이 항상 재해관리에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지질학자들이 일본 동해에서 지진이 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일본 동북부지역 지진해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예측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앞으로 30년 이내에 지진이 날 확률~'이라는 식의 예측은 실제적인 경고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예측 후에 예측지점이 아닌 간사이 지역 고베에서 1990년대 초반 지진이 발생해 버려 과학자들의 예측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와이 경보시스템의 경우는 1946년 쓰나미 이후 효과적인 경보체계로 자리잡았지만 경보가 내려졌다고 항상 쓰나미가 닥친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경보에도 쓰나미가 오지 않자 사람들은 경보체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칠레 지진에 의해 힐로 지역은 다시 쓰나미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경험하게 된다.

 

재난관리가 오히려 퇴보되는 모습도 보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미국 남서부지역이 초토화되었지만 재해복구에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완전 복구가 되지 않았다. 재난관리를 시작하는데도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190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는 지진 발생 하루만에 연방정부에 의한 복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트리나 피해에 있어서는 100년 전 보다 못한 대비책을 보였다.

동남아시아 쓰나미의 경우 몇 몇 학자들에 의해 쓰나미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달할만한 네트워크가 동남아시아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쓰나미가 발생해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해당지역은 정보가 전혀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 경보체계에 대한 비용도 관련이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런 경보체계에 대한 예산을 아까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제상황도 역할을 했을 테지만,

 

때로는 과학보다 경험이 앞서기도 한다. 쓰나미에 대해 원주민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일본의 격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바다가 갑자기 사라지면(멀어지면) 최대한 바다에서 멀리 도망가라는 옛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할로 쓰나미 당시 공사중이던 인부(원주민)들은 바다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경고했지만 문명인들(? 백인들)은 재미있는 광경이라며 오히려 바다를 보려고 했다.

개발관련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동남아시아 쓰나미에 있어서도 방글라데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다. 개발이 덜 되었기 때문에 맹그로브 숲과 산호숲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쓰나미의 완충작용을 했다. 개발의 한가운데 있던 휴양지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통해 발전 해 왔지만 그것이 항상 발전만은 아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개발은 인간을 더 위험한 환경에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점 더 지질학적으로 위험한 곳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광포한 지구와 인간의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스페인과 더불어 15,16세기 활발한 해외 탐험을 통해 교역로를 확보하고 신대륙의 많은 나라를 정복했다. 신대륙(브라질)에서 발견된 금광은 리스본을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리스본은 또한 가장 강력한 카톨릭 국가의 하나였다. 막대한 부로 로마 교황청의 최대 후원자였으며 유럽내 가장 독실한 카톨릭국가였다.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당시 이슬람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데 리스본의 종교재판소는 많은 이들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1755년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 불리던 만성절이었다. 리스본의 모든 이들이 미사를 보려던 시점 땅은 크게 요동쳤다. 저 멀리 스코틀랜드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큰 지진은 90분 후 세차례의 큰 해일로 리스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처음 지진이 나고 사람들은 지진에서 안전해 보인 해안가로 몰려들었는데 이후 닥친 해일을 피할 수 없었다. 리스본의 모든 것들은 무너졌고 왕조차 지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들은 리스본의 타락을 이야기했고 신의 징벌이라 외치며 회개를 강요했다. 무너져 버린 왕궁탓에 천막으로 된 임시처소에 머문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도를 옮겨야 된다는 이 부터 회개를 이야기하는 성직자들 틈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한 카르발류라는 대신이 왕을 알현했다 그는 왕에게 " 죽은자를 묻고 산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었다. 카르발류는 곧 왕의 전권을 뒤에 엎고 지진 현장에 나타난다.

 

그는 곧 병력을 동원하고 피난한 건장한 남자들을 소집해 시신을 수습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는 전염병의 창궐을 막게 된 것이다. 이 후 무너진 리스본 재건에 나선다. 평민출신에서 리스본 도시 건설 최고 책임자가 된 마이아의 제안으로 수직으로 반듯한 도로, 대칭적인 건물, 거대한 광장으로 리스본을 재설계했다. 4층 높이의 건물과 넓은 도로를 확보하는데 주안점을 둔 리스본 재건계획은 곧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산다. 집으로 평민들과 차별을 두어야만 했던 귀족들은 건축의 통일성속에 전복적인 평등사상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여러 이유로 리스본 재건계획은 더디어 갔지만 계몽주의를 실현하고자 한 카르발류의 독재덕에 리스본은 새로운 세계를 맞게 된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리스본의 아름다운 도시미학은 바로 이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르발류는 곧 지진의 피해를 조사하게 되는데 지금의 시각으로야 아주 단순한 질문이지만 지진이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지진의 피해는 어떤지, 그리고 지진에 의해 어떤 구축물들이 피해를 입었는지와 인명피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에는 종교적인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리스본의 재건 과정까지 살펴봤을 때 카르발류는 근대 재난관리의 장을 열었다.

 

사실 이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히 지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럽의 지성들에게도 큰 사건이었고, 유럽인들에게도 큰 일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지진이 발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대도시가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은 유럽에서는 처음 있는 일었다.  상식적이었던 유럽의 철학자들 눈에 신의 징벌이라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았다. 당시 리스본은 종교적인 도시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와의 갈등이 있었긴 하였지만 철학자들이 보기에 신의 징벌이 될만한 도시들은 따로 있었다. 즉시 볼테르는 그이 낙관주의 철학을 버렸고 루소 또한 지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영국의 지질학자들은 지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 당시 낙관적 계몽주의는 인간이 얼마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냐며 이성과 신학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리스본 대지진으로 이런 낙관적 계몽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성인의 축제일에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져왔다. 바로 볼테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개신교는 리스본 대지진을 카톨릭이 가지고 있던 무자비한 종교재판소와 종교적 차이에 의한 신의 징벌이라고 봤다는 점에서 카톨릭과 다름 없었다. 칼뱅파를 위시한 개신교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이런 비판에 앞장섰는데 근본적으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런 종교적인 문제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남아시아를 휩쓸었던 쓰나미에 이슬람은 그들이 코란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비기독교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해서 미국의 목사들은 신의 징벌임을 강조했다. 이번 일본 동북부지역의 지진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들 또한 신의 징벌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 1755년과 지금의 종교가 과연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하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신의 징벌이라는 무지한 논리를 편 반면 영국성공회는 자연재해 보다 매일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오히려 더 놀랍다며 이런 광신도적인 접근에 우려를 표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접근을 보였다.

 

인간은 아직도 지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직 지진에 대한 완벽한 이론도 없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 이후 더디지만 지진 연구의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 단순히 지진에 대해서만 알아간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라는 인간에 대한 이성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 뒤에 리스본 대지진을 통해 신중심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