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맞닥뜨려 오늘,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역사교육연대회의, 김종훈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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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 역사교과서의 반발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있어왔다. 2008년에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가 그 시초이고, 그 뒤 교학사 교과서이다. 국정화된 역사교과서의 방향은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마도 2008년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일 것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현행교과서가 자학적 사관에 빠져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교묘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독재개발이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역사는 일부 시간에만 한정된다. 조선 중후반 서술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식민지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의 기초를 쌓았다고 본다. 광복절을 이야기하지 않고, 건국절을 이야기하며 친일파들을 옹호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단지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말하기 위함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조선이 잘못해서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중화제국론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에 대한 청의 규정력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을 해체시킨 것이 일본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대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개화파의 노력이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고종의 의도보다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서술(56~57쪽)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은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켜주었으나 결국 스스로 자강개혁에 실패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서술로 이어진다. (81쪽)

 

대놓고 일본의 시각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다.

방곡령에 대한 설명에서도 "조선왕조는 흉년을 명분으로 방곡령을 발동하여 일본상인에게 타격을 주었다."(45쪽)고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82쪽)

 

러일전쟁의 배경에 대한 설명을 보자. 러시아에 대해서는 '야심'이라고 하는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진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이같이 '침략'을 '진출'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후쇼샤 교과서를 통해 역사 인식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표적 사례로서 (83쪽)

 

그리고 조선후기 민중봉기나 일제시대 의병 등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는 시각일 것이다. 그 위대한 지도자란 이승만과 박정희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공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돌리지만, 과는 대충얼버무리며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학자적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건국의 지도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근대화 혁명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한다. 역사를 설명할 때 구조와 행위자(주체)를 어떻게 결합시켜 서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엘리트 집단, 그리고 그 정점이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관성이 흔들린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달성된 긍정적인 업적을 이야기 할 때는 지도자의 역할이 부작된다. 반면 유신체제의 수립 원인 등 비민주적 정치 행태가 언급될 때에는 중공업화, 안보 위기, 당시 정치 구조의 한계 등 환경적·구조적 문제가 강조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은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본문 서술과 별도의 박스 등을 통해 여러 번 자세히 소개되나. 그렇지만 1960년 3·15부정선거를 언급하는 대목은 "자유당 강경파는"으로 시작된다.(뉴라이트 교과서 173쪽)

 

뉴라이트 교과서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이다. 식민지시절 경제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말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해서 일제 식민지를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게 하고, 경제발전의 배경에는 일제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서 독립운동을 자연스럽게 배제한다. 결과적으로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을 세웠음을 보이지 않게 이야기한다.

 

뉴라이트 특유의 식민지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을 일제 식민통치(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성과를 계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이들의 건국절 제기는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 '친일의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애국자이자 건국 공로자로 만들어주고 있으니, 뉴라이트 교과서야말로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86쪽)

 

또한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황민화 교육이 한창이던 전시기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이 각급 학교에 다투어 진학하였다. 졸업생들은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늘어난 국내외 일자리에 취업하였다. 하급직의 관료와 회사원은 징집된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리를 이어받았다.

상공업자들은 1943년 전반까지 계속된 전시 경제의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일제의 광기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공공연히 협력자로 나서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식민지 말기 수년간은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170쪽, 뉴라이트 교과서 132쪽에서 재인용)

일제 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저항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어 은근슬쩍 항일운동에 대한 언급없이 넘어간다. 이 글만 읽으면 일제 말기에는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독립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불가론을 강조해 친일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지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여자정신근로령' 부분은 박스 안에 자세히 쓰고 위안부 문제는 사진 설명으로 작게 기술하였다. 정신대 문제를 자세하게 쓴 것은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와 다름을 강조하고 싶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업자들이 여성들에게 큰 돈벌이가 있다고 하자 여성들이 이러한 꾐에 빠져서 갔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뉴라이트 교과서 93쪽)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말하고 있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을 이 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134쪽)

 

국정교과서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국정화를 노골적으로 강행한 것을 보았을 때, 박근혜정부가 만들어 낼 국정교과서는 노골적으로 근대화를 강조할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면서 친일파는 건국의 영웅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대한민국 건국절 70주년에 영웅으로 드러나는 사람들, 그냥 친일파로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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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 현장 교사들이 쓴 역사교육론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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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종의 역사교육론에 관련된 책이어서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될 수 있다. 실제 교육사례 등은 관심도가 적으니까 말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되어 역사전쟁, 역사교육에 대한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책 전체보다는 현재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심분야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교과서 사용에 관한 국가의 결정권이 이 정도로 강력한 나라는 소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보기 드물다. 교과서 제도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 일제 군국주의와 유신체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교과서 제도는 근대 공교육체제의 산물이다. 국민국가 수립과정에서 공교육은 '국민만들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수신','국어','국사'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과서 제도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위해 국가가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해방이후 역사과에서 국정제 교과서 제도가 중대한 문제로 논란이 된 것은 유신체제 아래 제3차 교육과정 때의 일이다. 10월 유신 이후 유신정권은 주체성 있는 국민정신교육을 강조하면서 검정제로 발행되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 단일화하였다. (54쪽)

 

이런 국정교과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국정화다 보니 국사교과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집단이 있을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첨예한 부분에서는 모호하게 가져갈 수 밖에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근현대사와 고대사이다. 근현대사 서술에 관한 논란은 곧바로 현실 정치 세력의 정치 노선 충돌로 이어지면, 이념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폭동'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항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그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렵다. 고대사에 관한 논란은 문화사상, 민족정기 등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관념과 연계된다. 단군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상고사학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단체, 문헌 증거만으로 말해야 한다는 실증사학 진영 등 다양하고 양극적인 주장을 조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모호하게 초점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국정교과서가 밋밋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64쪽)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되어서 잘 몰랐는데, 최근에는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생긴 듯 하다. 책은 졸속하게 만들어진 문제들을 지적하다. 그에 반해 실제 역사를 고민하는 이들에 의해 <내일을 여는 역사>와 같이 정식 교과서는 아니지만 한중일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국사라는 과목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정도로 구분해서 배우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 물론 그안에 대한민국사에 대한 비중을 늘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 책은 지적한다.

한국사와 세계사의 관계도 역사 교육과정의 오랜 과제다.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국사와 세계사 교육을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사를 공부해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42쪽)

 

교사들의 실제 사례가 나오기도 하고, 역사교육의 방향에 대한 고민도 있다. 현직교사들의 비판도 있고,

이웃 나라를 타자화시키는 용어 사용도 문제가 된다. 고구려의 수당전쟁과 신라의 대당전쟁 관련 서술을 읽어보면, '야심', '야욕'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중국에 대해 부정적 정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서술이다. 또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든지, 신라가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한 것은 '자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서술은 고구려·백제·신라가 '같은 민족'이고, '수·당은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에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볼 때 이 서술은 타당하지 않다. (254쪽)

 

후삼국 시기, 홍경래 난, 동학농민전쟁 등 몇 차례 내정이 있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전쟁은 대부분 외세 침략과 그에 맞선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수업에서 다루는 전쟁도 대부분 이러한 경우다. 그런데 이 경우 각각의 사건은 대부분 "전 민족이 단결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막아냈다."는 서사 속에 용해되고 만다. 그러나 많은 전쟁이 지배층의 무능 때문에 일어났고, 지배층이 자신의 안위를 민중의 희생보다 중시하는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전쟁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

민족적 단결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취지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거나,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위기를 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06쪽)

 

이 책은 역사교육에 대한 고민과 비판, 실제 역사교육 현장에서의 사례와 2000년대 후반의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리고 점점 중요해지는 과학기술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에 대한 부분, 노동사, 생활사, 지역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안을 한다. 이런면에서 일반인이 전체를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와 관련해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부분 발췌독이 좋을 것 같다. 역사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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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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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정치관련 책들과 읽는게 맞는게 싶지만, 실은 정치 이야기이다. 정치란 우리 삶이니까.

 

기본적으로 정의는 정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언론은 그 역할을 저버렸다.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나온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그 폐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특히 심각하다. 매체 성향에 맞는 정치인 잘못은 눈감아주면서 성향이 다른 정치인에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종북 대 애국', '독재 대 민주', '친노 대 친박'으로 나누고 재단함으로써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 사안은 같은데 해석은 정반대다.(339쪽)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을 사람을, 사회를 단죄하는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스스로가 그 권력에 도취되어 있다. 정의를 말 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이다.  

몸통은 검찰권이다. 임용된 지 몇달 안 된 실무수습 검사가 어떻게 검사실에서 피의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가. 특수부 부장을 지낸 검사가 어떻게 차명계좌까지 만들어놓고 기업과 다단계 사기범 측근의 돈을 받은 것인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 건 검사들 손에 쥐어진 힘이었다.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수사 대상과 범위가 달라지고 기소 여부가 결정되면 적용할 법조문이 가려지는 현실, 권한을 앞세워 권력과 돈, 향응을 추구하고 싶은 일부 검사들의 욕망을 수준 이하의 동료들이 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행정부가 국회를, 사법부가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 너무 당연히 여겨진다. 국회의원들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들의 입이 될만한 국회를 깔보는 행동일 수 있다. 자기네들 리그에 붙여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불체포 특권을 두고 있다. 1당 독재였던 소련 헌법에도 "최고회의 대의원은 최고회의의 동의없이 체포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왕이 마음대로 의원들을 가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 특권이 왜 필요할까. 3권 분립에 따른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수사,재판을 통해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의원, 특히 야당 의원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173쪽)

 

그리고 그 행정부의 권력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사실 국민들은 권한을 준것이지, 그들에게 권력을 준것은 아니다.

나는 공권력이란 말은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공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75쪽)

 

게다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행정부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주의의 폐해까지도 말이다.

"관료는 민원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례로 다룬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도 현장의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청와대 관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승객, 승무원 476명은 '집계해서 위에 보고해야 할 숫자'였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재는 사람이 일으킨 재앙에 머물지 않는다. 비인간화된 사회와 교육이 빚어낸 인간성 소외의 재앙인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의 공허한 눈빛은 수많은 사람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듯, 인간에 대한 열량을 소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40쪽)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미 사회는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상위계층이 모든 것을 점점 장악해 나가고 있고, 그 토대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관심은 10~20년 후 대원외고 출신이 법조계의 주축이 됐을 때 재판과 수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이냐다. 과거 경기고는 전국, 각계각층에서 충원됐다. 가난한 수재가 적지 않았다. 성향도 이질적이었다. 인권운동의 상징인 고 조영래 변호사, 정통보수를 대편하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진보사법의 대표 주자 박시환 전 대법관,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학교 출신 법조인이다.

반면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출신은 계층적 동질성이 강하다. 특목고 입학생 중 절반가량이 서울 강남 3구에 거주한다. 부모가 법조인, 의사,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경우가 많다. 기성 법조인들은 "재판, 수사하는 자와 받는 자의 출신 계층이 다르다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111쪽)

 

문제는 개개인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사회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하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에 가깝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거리낌없이 적어낼 줄 알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봉사도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활동이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24쪽)

 

저자가 이렇듯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에 대한 충격때문이다. 세월호는 사회의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렇게 가슴아픈 현실의 민낯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일단 권석천의 글에는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 듯 하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법망을 조임으로써 범법자는 끝까지 단죄하되 공포의 희생자는 막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아무리 소수의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려 있다.(322쪽)

 

정의로운 사회는 멀기만 한 것일까?

'정의가 이기는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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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야당을 갖고싶다
금태섭 지음 / 푸른숲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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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논란의 여지가 가능한 책이다. 안철수의 창당과정과 민주당과의 합당과정에 앞장 섰던 금태섭의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어, 안철수의 정치행보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만하고, 안철수의 아쉬움점 등도 읽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지적은 충분히 생각해 볼만하다.

정치판은 합리적인 토론이 통하지 않고 내부 비판이 금기시 되는 장이 되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 새누리당의 부패와 편협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지지할 정당을 찾기 어려워졌다. 그런 점들을 비판했다가는 싸늘한 눈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진보 쪽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무능과 폐쇄성을 지적하면 가뜩이나 불리한데 우리 편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수 많은 '정치 고수'들에게 조중동에 이용당하는 걸 모르고 자기 진영에 총을 쏜다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선거 때마다 있었던 야권 연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선거 관련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이라고 해도 연대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당연히 해야 할 사퇴를 놓고도 야권 지식인들은 일제히 위대한 결단이라며 칭송한다. 이런 모습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206쪽)

 

사실 그간 한국정치는 양당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본인의 정치적 의사와 맞는 정당을 찾기 힘든 구조였다. 옛날 민주당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아울렀지만, 지역적 색채가 강했고, 지금의 야당은 지역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 많은 이들을 포용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선택이 필요한데, 현실적인 가능성은 의문이다.

 

저자가 이기는 야당을 위해서 가장 주목하는 바는 의제설정 능력이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은 의제설정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다른 정치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바다. 반대만 할 줄 알지 대안을 못 내놓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정의만을 내세우는 야당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시대는 갔다.막연히 '민생문제'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야당은 그 이상의 '똑똑하고 유능한 의제 설정 능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303쪽)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바로 젊은 정치인의 등장이다. 사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미 40대에 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선의원들의 나이가 50대를 넘어서고 있다. 전문정치인의 부재는 그만큼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계속 정치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선진국에는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정부 수반에 오른 정치인들이 꽤 많다. 영국의 존 메이저는 47세에, 토니 블레어는 44세에 각각 수상이 됐고, 버락 오바마는 47세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대 초반부터 지역사회 혹은 정당의 기초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아왔다. 존 메이저가 시장통에 설치된 연단 위에 올라가서 연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21세 때였다. 토니 블레어는 22세에 노동당에 가입해서 정치를 시작했고, 오바마도 대학 재학 중이던 20세에 첫 정치 연설을 했다.(307쪽)

 

그의 생각에 동의하듯 안하듯 인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기는 야당을 갚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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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 '정치 사랑'외에 탈출구는 없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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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의 현실이다. 중간계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 중장년에게는 불안이 청년들에게는 좌절이 일상화되고 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1년만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서른살 꿈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
이렇듯 미치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지만, 아무리 미쳐도 안되더라는 걸 깨닫는 데인 오랜시간이 걸리치 않았다. 그 어떤 미침으로도 이른바 '잉여사회'라는 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은 잉여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은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잔해와 폐허 위에서 자립의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라고 윽박지르는 이상한 마케팅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려차'는 말은 좀 사라졌을망정,... 자부심은 '열정'이란 말로 대체되어 "당신의 열정을 보여달라"거나 "좀더 열정을 가지고 일해라"라는 주문이 난무한다. 한 텔레비전 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 열정을 갖지는 않는 당신은 죄인"이 된다. 이런 현실을 고랍하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의 저자들은 "열정은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되었다"라고 단언한다.
"열정은 제도화 되었다. 오늘날 면접관들은 열정을 '측정'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답변은 간단한다. '악조건들을 얼마나 버텨내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접관들에게는 우리를 모욕할 권리가 주어진다."(24~25쪽)

 

하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진보(?)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정부만 비판하면 국민들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거마다 패배하고 있는데, 패배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바로 한국형 진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현실분석을 희망사항으로 대체하면서, 현실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증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버릇,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희망사항이 전혀 실현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성찰과 반성없이 자기들이 옳았다고 버티는 '유체이탈' 성향은 지금도 건재하다. (66쪽)

 

진보는 보수와의 관계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걸 드러내는 자기 존재증명에 정치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즐겨 쓰는 '정체성'이니 '선명성'이니 하는 말이 바로 그런 자기 존재증명의 슬로건이다. 변호사 출신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재선의원은 "이 정당에서 내가 아무리 주도적인 활동을 해도, 결국 듣는 말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였다. 아무리 뛰어도 나의 위치는 주변부였다"라고 토로했다.(83쪽)

 

586정치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생활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추진해야 할 사람들마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라는 추궁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보수에 대해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며 거친 언어를 구사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고 비판하지만, '싸가지 없음'은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의 표현이기에 그런 비판이야말로 싸가지 없는 게 되고 만다.(86쪽) 

 

현실을 모르는게 당연하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큰 정당은 여전히 80년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86 친노라는 이들이 80년대 민주화의 대가를 정당안에서 챙기고 있다. 국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현실문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현재 청년들은 구조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걸려있다. 당장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런 그들을 이해를 못하는 제1야당.

 

승리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선 투표로 힘을 키우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 권지웅은 20대의 낮은 투표율에 대해 이렇게 항변한다. "정치적 무력감이 큰 탓이죠. 내가 해서 될까? 이런 거죠. 젊은 세대들은 집단적 행위를 통해 뭔가를 얻은 경험이 크지 않아요. 정치적 행위를 통한 성공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정체 상태의 시민에게 왜 투표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이 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투표에 관심이 없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의 조건을 바꿔주는 방식으로 투표하게 해주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지요. '투표하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왜 투표하지 못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작은 승리'의 경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구조 타령보다는 미시적인 각론에 충실해야 한다. 가려운 곳을 제대로 짚어서 긁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신뢰로 세력화를 이루고, 그렇게 결집된 힘으로 구조 개혁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기반 없이 외쳐대는 구조개혁은 양심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마스터베이션에 전락하기 쉽상이다.(118~119쪽)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보다는 청년들이 만든 작은 유니온들이 더 실질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국회의원 하나 없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 더 앞장서고 있다.

 

나 역시 '2세대 진보정치'와 '2세대 사회운동'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청년유니온(노동)'과 달팽이유니온(주거)'처럼 거대 구조 보다는 의제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필요하다. 진보는 구조에 더 신경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야 한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청년들이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현 상황에서 구조 타령은 허황된 선문답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작 청년들이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실질적으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없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정년이나 임금피크제, 노동법은 모두 기성세대와 관련있는 일이다. 여야 모두 청년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안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욱더 청년의 청치참여가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쉽지 않다. 강준만은 공간의 활용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년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에 대한 투자는 소모적 복지가 아니다. 세대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출발은 청년 정치인 양성에 있다. 세대갈등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청년들이 이내 좌절하고 꿈을 접는 나라는 미래가 어둡다.(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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