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인류가 멸망할까? 모든 인류가 아니라 몇몇은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꿈 꾸었듯이 달이나 바다속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얼마후 그런일이 펼쳐진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이런 질문을 집어들었다. 책 뒤편에 설명되어 있듯이 어느날 아들과 함께 묵은 모텔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면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 소설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은 공포스럽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호의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한 빈 집에 상하지 않은 통조림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날은 행운이다. 그렇다고 그 집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언젠가는 그 식량이 바닥을 보이는 순간 절망으로 떨어질 것이다.
 
 로드를 읽는 동안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핵폭탄이 터진 것인지? 그렇다면 사람들이 모두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았을까? 여행중에 마주친 한무리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아니면 화산폭발 곳곳에 싸인 재는 이런 상상을 설명한다. 또한 녹아내린 아스팔트위에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충분히 이런 상상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또 이런 재앙이 전세계적인 것일까? 아니면 미국만의 것일까? 왜 구조대는 오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는 왜 남쪽으로 혹은 해안으로 가려하는가? 그곳의 상황은 어떻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러나 작가는 이런 궁금점에 대해 설명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외적인 질문은 그런 상황하에서 사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절박한 상황,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가져야만 하는 절박함속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일보다는 오늘 하루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노인처럼..

 로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필요한 설명과 미사여구를 배제한다.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상황만 보여 줄 뿐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앞에서 품었던 질문들에서 벗어나 절박한 상황을 상상하게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글쓰기 때문이다. 과연 내 앞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면 나의 행동은 어떨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지은이의 치열함 때문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희망은 있어야만 할 것인가? 사실 아버지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단지 아들의 가슴에 있는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들의 희망이 또한 하버지의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소년은 희망을 품고 있다. 그 희망은 단순히 생존이 아니다. 인간으로써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인간성을 갖춘 생존이었다. 생존하더라도 인간성을 버린다면 그것은 희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성을 품고 모진 세월을 버텨내는 생존 그것이야말로 값진 희망이고, 로드위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은 600여년이나 된 역사를 자랑하지만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역사를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시청, 광화문 주변에서야 경복궁, 덕수궁 등을 만날 뿐, 이 마저도 없다면 청계천, 강남 등으로 대변되는 서울은 고작 20년 정도의 젊은 도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주의 깊게 돌아다녀본다면야 종로, 시청, 숭례문 등지에서는 무슨무슨터라는 표석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표석이 있다고 해서 눈앞에 역사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 서울의 역사를 알기는 너무 어렵다. 

 이런 현실속에서 만난 서울은 깊다는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서울에 대해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하나하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서울의 전부가 아니라 서울은 역사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서울은 사실 우리의 생활과 많은 관계가 있다. 한 때 많이 사용하던 서울깍쟁이, 시골뜨기라는 말이 있다. 경제위기이후 노숙자들이 거리에 많아졌지만 90년대 전반까지는 노숙자들 보다는 거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거지들이 깍쟁이로 불리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지들은 누가 부자인지 누가 후한 사람인지를 금방 알아차려야 했다. 그말이 지금에 이르러 '지나치게 잇속을 챙기는사람들'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촌뜨기,시골뜨기는 또 어떤 의미일까? 지은이는 시골뜨기와 서울내기를 들어 조선후기의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 급제해 서울로 올라오고, 관직을 마치고 낙향하던 조선초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점차 자리잡기가 어려워지면서 서울사람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을 걸어잠근채 서울만의 유행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울과 시골사이에 시간이라는 벽이 생겼다. 시골출신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버렸고, 이는 촌스러움이 되었다. 내기는 출생지를, 뜨기는 출신지를 의미하는데 이제 서울에는 서울출생의 서울내기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뜨기로 나뉘어 불리며 시골출신은 서울에 들어오더라도 온전한 서울사람이 되지 못했다.  

 조선중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청계천의 잦은 범람으로 주민들이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시대에는 준천(하천정비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계천의 잦은 범람은 높아진 하천수위가 문제였다. 지은이는 청계천의 하천수위가 높아진 원인을 바로 급격한 인구증가에서 찾는다. 양란이후 서울은 무서운 인구증가를 경험한다. 이는 많은 공간이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급격한 오물증가를 뜻한다. 난방재나 오물등은 시골에서는 귀한 거름으로 만들어지지만 서울에서는 처리할 수 없었고 청계천으로 흘러보낸 오물들은 수십년 사이에 청계천 수위를 수미터나 올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등따습고 배부르게살고자 한 도시민들의 욕망과 그를 실현할 수 있게 해준 늘어난 부가 바로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똥돼지, 똥개 등 에서  다리밑에서 주어 왔다는 말 부터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이야기까지 지은이는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소재들 속에 숨어있는 서울의 역사성을 캐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조선에만 거치는 것이 아니라 전차가 놓여질 조선말,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하철1호선이 생기는 시기까지 다루어낸다. 

  이렇게 우리 삶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울은 여타 도시와는 다는 출발을 보였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도시들의 시작과 달리 서울은 종교와 분리된채 유교적 바탕위에 공적인 공간 기능이 강화된 채 세워진다. 서울의 또 다른 특징중의 하나는 우리나라 도시 중 유일하게 한글로 된 도시이다.

 도시는 기본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한다. 끊임없이 농촌으로 부터 물자를 빨아들이고, 소비하는 곳이다. 조선의서울 역시 이런 역할을 해냈다. 특히나 조선에서의 서울은 서울과 서울이 아닌 곳으로 구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지금의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 경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서울은 모든 재화와 자원을 끌어들일 뿐이다.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를 읽어나가면 시간적으로 서울을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유교적 이상이 깃든 서울의 탄생에서 부터 시작해서 전차가 다니고,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구한말까지 서울이 담고있는 내용을 알게된다. 공간적으로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갖는 기능과 그 사회성을 보게 된다. 서울의 역사라는 뼈대위에 도시기능의 서울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엮고 또 서울이라는 특수한 도시와 도시의 특성을 씨줄로 날줄로 엮어내어 복합적인 시각과 지식을 선사한다. 

전우용의 서울은깊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현대의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더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시대 영어담론 - 그 위선의 고리들
한학성 지음 / 태학사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2MB와 인수위의 영어에 대한 정책방향으로 인해 요즘 영어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영어는 항상 논란이 되었던 주제였다. 또한 90년대 후반 부터 영어공용어화 논쟁으로 한바탕 논란을 일으켰던 적도 있다. 

 경희대교수 한학성의 '우리시대 영어담론'을 작고 영어의 사회적 부분에서는 논의가 깊지는 않지만, 영어의 사회적 인식, 영어교육의 문제 전반을 담아내고 있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은이는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실제 영어보다는 영어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 즉, 경쟁의 도구로 영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며, 영어논란에서 정작 영어전문가들은 배제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또한 영어교육과 관련하여 서울사대 영어교육과 독점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권력의 문제와 영어교사 양성 등 교육과 관련된 문제를 말한다.

 지은이가 지적 중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우리사회에서의 영어경쟁력에 대한 부분이다. 세계화 시대를 이야기하며 영어 경쟁력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위한 자신만의 경쟁력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세계화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좋은 대학에 가려고, 또 서로 먼저 승진하려고, 즉 저마다 우리끼리의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영어에 골몰하는 것이다."(46쪽) 사회에서 말하는 영어경쟁력은 우리나라 전체의 국가경쟁력이 아닌 단순히 내부 경쟁을 위한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이런 내부 경쟁으로 영어가 사용되는 한 영어 사교육의 문제는 해결하기 힘들 것이고, 빈부에 따른 영어실력 차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일반적인 인사나 햄버거 하나 주문하는 것을 들어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목표로 하지만 결국 지향하는 바는 일상적 수준의 대화일 뿐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영어 목표에 대한 사회적 지향이 없음을 의미한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과 일상적 대화가 가능한 수준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권 국가에서 자라고 교육받지 않는 한, 조기 영어 교육이나 해외 영어 연수를 한다고 해도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을 갖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육만 제대로 받는다면, 조기 영어 교육이나 해외 영어 연수를 통하지 않고서도 일상적 대화 수준의 영어 능력은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다."(35쪽) 지은이는 영어의 지향점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영어교육의 목표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율배반적인 목표 원어민 수준과 일상적 대화의 수준의 차이는 결국 일상적 대화마저 못 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영어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복합적인 구조를 갖는 것 처럼 영어교육 역시 문제로 가득차있다. 서울사대 영어교육과 출신이 독점하고 있는 영어교육의 방향 및 방법은 실제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영어교사의 자질 및 영어 수업 역량은 열악하기만 하다. 일반계와 실업계에 대한 영어교육의 차이도 없고, 단순히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외고의 영어교육도 그 차별성이 없다. 

 지은이는 이런 영어의 문제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우리나라 전체가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영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유창한 영어 구사자로 양성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전 인구의 10%를 보고 준비한 다면 30여년 후면 우리나라 인구의 10%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일상적 대화 수준의 영어교육을 시행한다. 아울러 영어 교사들의 자질을 높이고 영어교육의 개혁을 통해 바람직안 방향 설정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영어수업시간에는 영어위주의 수업을 해야 하는데 그를 위한 토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은이의 이런 제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에서의 영어는 내부경쟁력의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영어를 통해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도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부추키고 있는 셈이다. 과연 영어를 영어답게 대하는 날이 올 지 의심스러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승길에서 영혼들의 죄를 씻어주는 설화 속 바리공주는 그 옛날 불라국 오구대왕의 일곱번째 딸로 태어난 후 버려진다. 오구대왕이 병에 들고 그 병을 고치기위해서는 저승땅 동대산 동수자의 약수가 필요하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바리, 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멀고 험한 저승 땅에서 약수를 구해온다.
 
 그리고 1980년대 북한의 청진에 딸만 일곱번째로 태어나 버려진 그리고 버려졌다는 이름으로 바리데기라 불려진 소녀가 태어났다. 그 소녀는 집에서 키우는 개(흰둥이)가 물고와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 사람들의 아픔을 볼 줄 아는 그녀는 흰둥이가 낳은 일곱째 강아지 칠성이 그리고 할머니와 교감을 하며 성장하지만 버려진 그녀의 출생만큼이나 힘든 세상살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관료인데다 중국과 무역을 하는 터라 90년대 북한의 대기근속에서도 배곪지 않는 생활을 하였지만 외삼촌이 탈북후 남한으로 가면서 그들의 삶은 풍비박산난다. 가족들은 뿔뿔이 흝어지고 만주뻘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언니(현이)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차례로 잃는다.
 
 다행히 중국에서 일자리를 잡고 친절한 중국인을 만나 발마사지를 배우지만 그 안정된 생활도 잠시, 빚에 떠밀린 중국인 내외로 인해 중국인 언니 샹과 함께 팔려 영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중국에서 배웠던 발마사지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과거와 아픔을 보는 능력으로 그녀는 영국에서 다시금 발마사지를 통해 사람들의 고통을 안아준다. 불법체류자라는 위험한 신분속에서도 함께 도움을 주는 여러나라의 사람들과의 삶속에서 그녀는 파키스탄계 무슬림 알리와 만나 어여쁜 아이 홀리야순이를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삶은 그녀에게 평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생한 9·11로 인해 알리의 동생 우스만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고 그를 찾기 위해 영국을 떠난 남편 알리는 행방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삶의 희망인 아이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만 한다.
 
 도대체 삶이란 왜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바리는 나에게 한국이라는 땅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근으로 죽어간 많은 북한의 사람들, 탈북의 틀에서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 아직도 팔려나가 해외를 떠도는 많은 불법체류자들, 그리고 남아공의 흑백갈등, 테러로 생명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리는 그들 모두를 보듬는다. 그것이 이 잔인한 세상을 헤쳐나갈 희망이라고 말해주는 듯.
 
 바리는 발마사지를 하다가 에밀리라는 부유한 영국의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의 삶의 흔적과 아픔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빼앗긴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삶은 온통 커튼으로 닫혀있다. 어느날 바리는 에밀리 부인의 집에서 활기와 희망을 본다. 에밀리가 죽은 남편과 그와 다른 여자사이의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그리고 아이라는 희망을 통해 에밀리 부인은 삶의 고통이라는 커튼을 걷어제쳤다.
 
 인종을 떠나 사람은 모두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보듬을 때 우리에게 희망이 찾아온다. 바리는 우리모두가 감추어둔 우리안의 선한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바리공주가 찾는 그 생명의 약수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는 마음이 아닐까 하고 혼자 자문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하권 308쪽)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들었다. 솔직히 이런 소설은 읽기에 거북함이 앞선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90년대 후반학번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느덧 절차상의 민주화가 진행된 이땅에 무임승차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역사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읽을 때야 머리 대 머리로 이해하기에 부채감의 무게를 애써 무시할 수 있지만,소설이나 시를 대할때면 정서 대 정서로 읽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내려가기엔 정서적 부채감이 크다.  

오래된 정원을 오랜시간 동안 책꽂이에 방치한 변명아닌 변명이다.

책을 읽다가 특정 사실들을 접하면 작가의 행적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도 오현우의 수감생활은 황석영씨의 방북사건으로 인한 5-6년간의 옥에서의 삶이 투영되었으리라는, 그리고 한윤희의 독일생활은 방북후 베를린에 거쳐했을 때의 경험이 귀한 체험으로 소설에 녹아있구나 하고 작가의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1980년 광주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동구의 몰락, 문민정부, IMF 경제체제까지 2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6-70년대의 변화가 독재와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한 닫힌 사회에서의 경제상의 변화였다면 8-90년대는 절차상의 민주화를 확보해내면서 열린 사회로의 문화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확보될 때 쯤 동구의 몰락이라는 사건은 운동을 통해 사회를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자조와 함께 IMF 경제위기에 에둘렸고, 경제위기 이후 부자아빠야 말로 아빠로서 인정받고, 20대 부터 재테크에 미쳐야하는 21세기에 황석영씨는 그 20년(오현우의 옥생활은 18년이죠)을 수감생활을 했던 한 인물을 불쑥 내밀었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인공 오현우는 70년대 지하운동조직의 수괴로 검거되어 18년만에 석방된다. 그는 18년전 사랑했던 연인 한윤희와 함께 했던 갈뫼를 찾고 그곳에서 그녀의 노트를 발견한다. 오현우는 70년대 후반 자신의 활동을 추억하고, 자신의 수감생활이후 한윤희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 자신이 부재했던 세상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둘의 희망인 딸 은결이를 만나는 장면까지..

책을 덮고선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해내는 모습은 지금 이 곳에서 역사를 기억해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리고 오현우의 삶은 그의 부재속에서도 한윤희를 통해 사회속에서 지속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윤희의 삶을 통해선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 될 것이다(작가 후기)라는 말처럼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읽는 이에게 그 초상을 기억하게 해 주기도, 때로는 처음 초상을 보여주기도, 그리고 실재하는 초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서의 짊을 한 번 탁탁 털어 구겨진곳 다시 펴내곤 깔끔하게 환기시켰다. 그 부채감을 잊지 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