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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대 문화아이콘 중에 하나는 바로 사진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기능들을 활용하다가 DSRL의 유행까지. 거기에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성화는 그런 사진의 대중화의 장을 마련했다. 나 또한 그런 흐름에 맞춰 8년 동안 5개의 디카를 구매했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구입한 하이엔드 디카까지. 그런 와중에 인터넷상에 유명한 블로그를 즐겨 찾아다니기도 하고, 디카 활용법에 대한 책도 구매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이미지 만들기의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사진들에서 조금 더 나아갈 순 없는가 하는 의문에 빠져들게 되었다. 찰나의 거장으로 유명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사진, 굿을 통해 전통과 그 안에 담겨있는 삶과 사상을 그려낸 김수남, 그리고 사진을 찍는 동안 인간의 예의를 갖췄던 살가도의 사진을 대하며 더 이상 찍기 놀이보다 진중한 자세로 보기에 마음을 두기로 했다.
사진 보기의 관심에서 사진읽기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사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필립 퍼키스의'사진강의 노트'는 제목과는 달리 본질적인 측면에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이라는 부제처럼 사색으로 가득차 있는 책이다. 제목을 보고 단순히 사진을 잘 찍는 법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했다가 재 표지 부제를 확인하고는 내 선입견을 탓했다. 물론 책 두께로 미루어 단순히 사진찍기 강의가 아닐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진책임에도 사진보다는 글과 여백이 많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을 책이라는 점은 미리 눈치챘다.
하지만 몇 쪽을 넘어가지도 못해 당혹감에 빠져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책에 밑줄을 치는 대신 살짝 접어두거나 얇은 포스트 잇으로 표시해 두고 있지만, 밑줄을 긋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책의 절반을 접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만치 않을 책이라는 점은 미리 눈치 챘지만 마치 현자의 삶의 대한 지혜가 담긴 책 처럼, 이 책은 사진의 현자가 남긴 사진에 대한 통찰로 가득차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사진강의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술이 아닌 본질을 이야기한다.
" 보여지는 것, 그자체. ...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
그것의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며 그 존재를 느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배제된 목소리, 음악의 선율, 도자기, 추상화, 그것의 현존, 그것의 무게, 그것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경이로움. 사실 그 자체의 신비.
아마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남은 길이의 반만큼을 끊임없이 가고 또 가야 되는 제논의 역설과 같다." (19~20쪽)
그리고 사진강의와 더불어 예술로써의 사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예술의 본질까지.
"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고, 다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까지 카메라를 치워 놓고, 다시 발견하고, 다시 찍고, 다시 치워 놓고... . 대개 사진 촬영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진 매체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루는 방식은 아니다.
접시 가장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포크를 찍은 앙드레 케르테츠 Andre Kertesz의 사진이 있다. 테이블에는 포크의 그림자가 늘어져 있다. 사진속에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그러나 이 사진은 변형의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누가 세잔의 그림 속에 있는 사과 한 알에 신경쓸 것이며,반 고흐의 우체부 그림에 찍힌 무수한 점들을 누가 문제삼을 것인가? 포크든 사과든, 작품의 대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예술가의 독창적인 감수성으로 어떻게 바뀌었느냐, 바로 이 점이 예술의 핵심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찍어내는 본성 때문에 이른 사진에서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저 소박한 도자기나 낡은 음반에서 지직거리며 들여오는 레스터 영의 재즈 멜로디가 어째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형태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71쪽~72쪽)
분명 이 책은 조금 더 아름다운 사진을 원하는, 실용적인 기술에 대한 소개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하지만 단순히 가족사진, 여행사진찍기를 넘어서 나름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보다 나름의 시각을 갖고 사진을 대하고 싶은 사람들은 분명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제자리에 머물다가 내민 첫걸음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