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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묵시록(默示錄)을 꿈꿔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만의 묵시록을 만들고 싶은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본래, 작가라는 인간들은 세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고, 또한 자신의 손끝에서 세상을 만들어내는 쾌감을 경험해본 자들이니, 그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서 발현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묵시록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종말을 홀로 남아 기록하겠다는 욕망이 아닌가? 아무도 보지 못한 사실을 자신만은 알고있다는 자만심의 표현이 아닌가? 썩어문들어진 현실을 전복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그러나, 묵시록을 만든다는 것, 남들이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를 기록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의 몰락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창조도 어렵지만 종말도 어려운 법이다.
아무도 바라본 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오롯이 혼자만의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도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도 역시 종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만들어내는 묵시록들은 대부분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기계들에 의한 인간의 멸망을 이야기했던 '터미네이터'도, 결국에는 인간을 사랑하는 기계에게 희망을 내보이고 말았고, 자본주의 권력에 의한 노동자의 멸망을 이야기했던 '강철군화'도, 결국에는 노동자의 승리에 대한 예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묵시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의 묵시록'마저도, 성령을 통한 구원에 기대고 말았으니, 어쩌면 '묵시록'이라는 것은 그 태생부터가 한곌르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작가도 인간에 불과할진데,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지 않고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온전한 절망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내가 보고 듣고 읽은 것들 중에서, 그마나 온전하게 묵시록에 가까운 것은 '지옥의 묵시록' 한 작품 밖에 없었다.)
이 작품도 역시 그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작가는 결말을 감춰버리는 기법을 동원해서,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과연 주인공이 <폐허의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작가는 바로 그것에 대한 답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타 묵시록류가 가진 한계, 허약한 희망에 기대서지 않겠다는 작가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말이 희망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독자들이 주인공의 편지형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을 읽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부터가 그들의 생존을 암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중간중간에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도, 역시 주인공이 폐허의 도시를 탈출했다는, 아니 적어도 그녀의 기록만큼은 유출되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묵시록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꿈. 하긴, 꿈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절망을 이야기하려고 할 것인가? 절망이란 결국, 삶을 이어지게 하는 또 다른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