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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올림픽대로두엣가요제에서
정준하와 에프터스쿨이 부른 노래, <영계백숙>

윤종신이 프로듀스한 곡,
이 노래를 통해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작곡가로의 윤종신, 그에게는 분명 "스토리에 대한 강박"이 있다. 

 

일단 이 노래의 가장 큰 장점은, 기획단계에서 미리 공개한 것처럼 '중독성'이다. 

후렴구, "영계백숙, 워어어어~"의 반복은 흥겹고 재미있다.
듣는 사람이 따라부르도록 만든다. 

 



문제는 이 부분까지 이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 

누들랜드니, 메밀리아공주니, 쯔유쯔유강의 간장이니…
사실 뭐 그리 대단하게 재미있지도 기발하지도 않은 가사들이 이어진다. 

즉,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려고 애쓴 것이다. 
  

 
 

사실, 노래에 스토리를 넣는 것은 윤종신의 특기이다.  

윤종신표 신파의 대표작이자, 수많은 군바리들의 심금을 울렸던
<너의 결혼식>, <오래 전 그날>, <애니(annine)> 등등의 가사들을 비롯하여, 

 
* 몰랐었어, 네가 그렇게 예쁜지. 
  웨딩드레스 하얀 네 손엔 서글픈 부케, 수줍은 듯한 네 미소. 
  이해할께, 너의 부모님 말씀을. 
  지금 보니 네 옆에 그 사람은 널 아마 행복하게 해줄꺼야. - <너의 결혼식>
* 너의 새 남자친구 얘길 들었지.
  나 제대하기 얼마전. 이해했던 만큼 미움도 커졌었지만…
  오늘 난 감사드렸어. 몇 해 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
  누군가 널 그처럼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었음을. - <오래 전 그날>

 
발랄 무드송 <환생>과 위풍당당 자기주장 <내 사랑 못난이>의 가사 역시 그러하며, 

* 나에겐 누구나 말리는 못생긴 여자친구 하나 있지.
  친구들은 그녀에게 첫인사로 인상 좋다하지. 
  그후에도 친구들은 여자친구 있는 내게 소개를 받으러 나오라며 
  내 안에 그녀를 무시하면서 말을 하지. - <내 사랑 못난이>

 
서글픔을 담담하게 그린, 그리하여 내가 윤종신의 노래 중에서 가장 세련된 것이라 평가하는
<이층집 소녀>의 가사에 이르기까지. 

* 얼마나 휘파람을 연습했는지. 단지 그녀가 좋아한단 이유로. 
  그녀의 추억은 따뜻한 엄마의 품속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나 휘청거릴 때 - <이층집 소녀>


인용을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모두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노래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노래 중에서 특별하게 스토리가 없는 것은 <팥빙수> 정도가 아닐까?

뭐, 이런 것이야,
작곡가로서의 혹은 가수로서의 개성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과연 <영계백숙>에도 스토리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얘기하자, 이 노래는 후크송이다. 

후크송의 대표작 <텔미>, <노바디>, <지>……
어떤 곡의 가사에도 스토리가 빠지지는 않지만 비중이 큰 곡은 없다. 

이들 노래들의 가사는 리얼리즘적, 일상적인 것이다.  
아니 한국 대중가요의 장르적 법칙에 충실하다, 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당신이 좋아 죽겠다는 것이나, 떠나려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나.
뭐, 이미 몇백 번쯤은 반복되어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내용이다. 
 
그러니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애초부터 가사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 그처럼 꽃다운 소녀/걸들이 (다소) 헐벗은 복장으로 상큼하게 무대를 뛰어나니는데,
가사 따위를 왜 음미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영계백숙>의 가사는 그렇지 않다.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서 나름대로 스토리를 형성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판타지.

현실이 아니다. 낯설고 새로운 세계.
당연히 주목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 

한국 대중가용의 장르적 법칙에서도 (살짝) 비껴나 있다.
그러니 대충 듣고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다. 

  

사실, 후크송이란 귀차니즘의 소산이다.
가사를 음미할 필요도, 곡에 대해 이해할 필요도 없다.
애당초 그런 본격적인 감상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상대로 만든 곡이다. 

특정한 한 부분의 친근감과
그 부분에서 보여주는 엔터테이너의 매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당장 <영계백숙>을 보라. 후렴구에서 에프터스쿨의 안무는 얼마나 빛나는가!)
 

 
 

요약하면 이렇다.
후크송의 기본인 "순간적인 흥미"는 매우 탁월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길다.

그것이 이 노래를 망치고 있다. 

대중적인 흐름에 맞추기엔 작곡가 윤종신이 가진 "스토리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다.
어찌보면 '강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를 과감히 털어 버리고, 보다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유행에 따르기 위해서는.  
 

그런데…… 나는,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애절하고 감상적인,
때로는 궁상스러운 신파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윤종신의 이야기가 좋다.

설령, 그것이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아날로그성이 좋다.
 
  

야, 이 바보야. 난 널 사랑하고 있어.
얼마나 내게 위안이 됐는지.
긴 아픔 멈추게, 다시 웃게 만든게 너야.
- <애니(an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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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강박동감.. 2015-02-13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의 결혼식은 정석원씨 작사로 알고있는데.
아닌가요..

그 노래가 나온 공일오비는

정석원씨가 전곡 작사작곡으로 알고있거든요.
 
 전출처 : 로쟈 > 오역의 희열

연말이면 으레 그렇지만 할일은 많고 마음은 바쁘다(그렇지만 손은 더디다!). 정리할 일들 가운데는 좋은 일들도 있지만 궂은 일들도 있다. 가급적이면 연초부터 인상을 구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지겨운 책읽기'도 몰아서 해보도록 한다(좀 하다 보면 지치겠지만).

 

 

 

 

제일 먼저 브라이언 마수미의 <천 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힙과펼침, 2005). 이미 품절된 책인지라(자체 품절?) 굳이 이런 자리에서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만,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라 일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리해둔다. 마수미(B. Massumi)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이며, 당연히 영어권의 대표적인 들뢰지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가이드'의 원제는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92)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가이드북인 셈이다. 가이드북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개성적이며 따라서 그닥 친절하지는 않다. 친절한 걸 원한다면 우리식 가이드북인 <노마디즘>(휴머니스트)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 가이드북의 대상은 <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의 고원>이지만).

마수미의 책은 상당히 오래전에 복사해두었었는데, 이처럼 번역돼 나왔길래 반가웠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반갑지 않았다. 역자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된 번역서일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덥지 않은 마음에 도서관에 주문이나 해두었었는데, 얼마전에 대출가능해졌고 내가 첫 대출자였다(궁금함보다는 주문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대출했다). 고급스런 장정의 하드카바이긴 하지만, 역시나 읽어보는 시간이 아까운 오역서. 한데, 이건 역자 자신이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오역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243쪽)라고 태연하게 밝혀놓고 있는 터여서 지적하기도 쑥스럽다(보통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역은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적는다). 아아, 역자의 말은 겸양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인 것이니!('오역의 희열'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역을 감행하는 이유가 설명/이해되지 않는다.)

몇 걸음 뗄 것도 없이 첫 페이지부터 오역의 퍼레이드이다. 마수미의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국역본은 네 개의 장으로 재구성하면서 'Pleasures of Philosophy'란 제목의 서문을 '희열'이란 장으로 옮겨놓았다. 해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고스란히 빠져있으면서 오역의 '희열'을 유감없이 제공해주는 번역문들을 약간만 맛보기로 한다(어차피 이해못할 철학이라면 즐기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좋게 생각한다면, 번역에 대해서 툴툴대는 나의 태도는 제법 옹졸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그 옹졸함을 굳이 더 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서의 첫 페이지 세번째 문단이 국역본의 두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옮겨져 있다(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열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철학'이 그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일반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출(bastard)로서의 철학입니다. 서출이 아닌 합법적 철학은 '전제군주의 그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의 '관료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제도(the state)의 역사적 복잡성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복잡성은 우리 정신의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절대 제도(the State)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건전한 논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정적인 주체로서의 담론이며, 바위와 같이 견고한 담론이자,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일반(universal)' 진리의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8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정적인 서술이므로 밑줄긋기를 해볼 만한 대목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제멋대로의, 보다 정확히는 정반대로의 번역이라는 것. 원문은 이렇다: "Schizophrenia, like those 'suffering' from it, goes by many names. 'Philosophy' is one. Not just any philosophy. A bastard kind. Legitimate philosophy is the handiwork of 'bureaucrats' of pure reason who speak in 'the shadow of the despot' and are in historical complicity with the state. They invent 'a properly spiritual... absolute State that... effectively functions in the mind." Theirs is the discourse of sovereign judgment, of stable subjectivity legislated by 'good' sense, of rocklike identity, 'universal' truth, and (white male) justice. 'Thus the exercise of their thought is in conformity with the aims of the real State, with the dominant significations, and with the requirements of the established order."(1쪽)

처음 네 문장은 국역본의 번역도 오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분열증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진다. '철학'은 그 중 하나이다. 그건 여타의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아주 개 같은 철학이다." 정도로 옮기겠다. '개 같은 철학'(A bastard kind of philsophy)은 철학에서의 분열증, 혹은 분열증적인 철학이 갖는 이름이고 양상이다. 이 '잡종 개' 같은 철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합법적 철학'이고 '국가 철학'이다(State를 역자는 '제도'라고 옮겼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제도권 철학' 정도라면 '국가 철학'과 의미가 통할 수는 있지만). 이 합법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역자는 'bureaucrats'을 '관료주의'라고 옮김으로써 이후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럴 경우 이후에 나오는 'they'가 무얼 받는 건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개 같은 번역이 돼 버렸다). 

다섯번째 문장부터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합법적인 철학이란 순수 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그늘' 속에서 말하며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와는 공모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걸맞게 우리의 마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절대 왕정(국가)을  발명해낸다.' 그들의 담론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양식'에 의해서 합법화되는 안정된 주체성의 담론이고, 바위같이 확고한 자기동일성, '보편적' 진리, 그리고 (백인 남성적) 정의의 담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실행한다는 것은 실제 국가의 목적들과 지배적인 대의들,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합법적인 철학과 그로부터 분열증적으로 도주/탈주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 같은 철학'은 정반대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오직 역자만이 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류의 오역이 국역본에는 모든 페이지에 걸쳐 출몰하며, 나로선 이 '희열들'을 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맛만 보는 정도에서 다시 역자의 말로 넘어가는 이유이다.

"역자는 번역하는 다이어그램 기계입니다.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더라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개념의 전이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다발입니다."(242쪽) 한 대목만 지적했지만, 이 '종이다발'과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암시되었을 것이다. 쑥쓰러운 것은 이 또한 역자의 계획(손바닥) 안에 다 포함돼 있다는 것. 그러니 '기계 번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빨만 아픈 일이다.

 

 

 

 

마지막 역주에서의 충고: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천 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이성의 논리> 그리고 <차이와 반복> 등의 번역본의 페이지번호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본의 출간여부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독자들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영역본으로 돌려보내거나 불어원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덱스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번역본이 아닌 토종 철학자들의 저서로 돌아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244쪽)

역자가 <이성의 논리>라고 한 건 <의미의 논리>를 가리킨다. 역자가 언급하고 있는 국역본들이 비록 미흡한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역자가 논할 수준은 넘어선다(그러니 적반하장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충고는 적어도 이 마수미의 책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독자들이 원본(영어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이 비문은 나의 것이 아니며 오타도 아니다. 역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역자가 풀서비스로 제공하는 희열에 어느 정도 몸을 푼 독자라면, 이제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자리에서 맛보아야겠다.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다간 희열의 '괴물'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길('괴물monstrosity'은 마수미의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05. 12. 19.

P.S. 귀가해야 하는 탓에 오늘은 여기까지만(마수미의 책은 내일 반납할 것이다). 조만간 몇 권의 '지겨운 책읽기'가 이어질 것이다(이 얼마나 지겨운 희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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