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울때 너를 그린다
박항률 지음 / 효형출판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이웃북로거이신 binsante님의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여태껏 전시회를 손에 꼽을 만큼 밖에는 다니지 못한 나로서는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뭐 하나 준비해간 것 없이 덜렁덜렁 시집 한 권 들고 찾아뵌 게 아직도 부끄럽고 실례를 범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처음으로 접한 binsante님의 작품은 경이로웠다.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있진 않지만 색색의 볼펜들이 꼬불거리며 일궈낸 작품들은 기법적인 면에서는 단연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음 깊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래도록 간직해온 또 다른 자신을 나무로 표현해낸 binsante님의 감성은 꼬불꼬불한 선이 전하는 것만큼이나 복잡·미묘하다. 그녀의 그림을 맞대고서 나는 엉뚱하게도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내 생의 원형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광활한 대지 위에 ‘나’와 또 다른 나의 원형인 ‘나무’ 한 그루, 그것을 이어주는 좁지만 선명하게 뻗은 길 하나. binsante님의 작품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더듬거리게 하는 듯하다.  


그렇게 연이 닿은 binsante님의 부탁으로 박항률의『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를 구하게 되었다. 드리기 전에 먼저 읽어보았는데, 세상에나! 그 속에 새겨진 그림들을 보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그 구불하다 못해 꼬불꼬불한 선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흡사했다. 그 기법만 놓고 본다면 전문가가 아닌 나처럼 일반적인 감상자들은 서로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닮았다. 나중에 책을 드리면서 binsante님도 몹시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이럴 수가!  

 

*

이 책의 표지를 보면 어렴풋한 내 어릴 적 크로키에 대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미술시간에 사람을 그리라면 졸라맨(?)을 그릴 만큼 미술에 재능이 없었고, 흥미 또한 없었다. 한데, 크로키에는 좀 흥미를 보였던 것 같다. 크로키장을 사서 집에서 스윽스윽 이것저것 그려본 기억이 난다. 윤곽만을 대충 그려내는 크로키에는 세밀한 터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게 나에겐 더없는 위안이 되었을지라.   

 

 

박항률의 그림 속에는 ‘실밥’ 같이 비저 나온 생의 ‘연’이 있다. 무심한 표정과 절망 혹은 회한이 그 슬픈 눈동자 속에서도 생의 ‘연’은 빛나고 빛난다. 실밥이 흘러 풀어져내려 바람에 나부낀들, 그것이 어찌 내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나와 무관한 것이라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보이지 않는 생의 ‘연’을 눈에 보이는 실오라기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 크나큰 여백 속에 ‘자유’의 이름으로 풀어놓은 게 아닌가 싶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모든 것은 서로 잇닿아 있으며, 그렇게 잇닿은 모든 것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듯 한 기분이랄까.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시선은 늘 나 혹은 너에게로 쉴 새 없이 달음질 치고 교차하고 뒤엉킨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 중 중요한 생의 단서가 아닐까. 어쩌면 박항률은 이러한 시선까지도 예의 그 실밥처럼 삐져나온 꼬불꼬불한 선에 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어들을 죄다 길어 올려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오롯하게 전해진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의 근원적인 물음으로 시작해 그런 걸음걸음마다 채이고 새겨지는 흔적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 그로부터 얻어지는 의미의 조각들, 그렇게 시간 속에 갇혀버릴 것만 같은 어떤 두려움 등등 고뇌와 번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꿈도 자유도 잃어버렸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흘러가는
시간 뿐이다.
생활은 무력해지고
영웅 없는 시대에 소인으로 살고 있다.
내가 욕망을 갖는 시간이란
하루 24시간 중에 단 1분도 없다.  


∥「욕망의 시간」중에서; p75∥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즉 체념의 상태. 지독한 고독의 상태와 대면함으로써 전정한 예술적 혼을 불태울 수 있는 박항률. 그 속에서 그의 그림은 생명력이 넘치는 꼬부랑 선으로 탄생한다. 그 극단에서 길어 올린 가녀린 선들이 모이고 모여, 그런 무념의 선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일반 사람들의 욕망을 해소하는 듯하다. 욕망의 시간과 무념의 시간의 간극은 한없이 넓디넓지만 때론 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싶다.  

 

**

그림뿐만 아니라 박항률의 글에서 풍기는 생에 대한 생각들 역시 나와 닮은 것 같다, 고 binsante님이 말씀하셨다. 나이도 비슷하다고.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그림과 글, 생각, 나이까지 비슷하다 못해 흡사한 이 두 분을 보면서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한 몸을 하고 태어난 게 아닌가, 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그걸 지켜보는 나조차 이렇게 오묘하고 신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당사자인 binsante님의 기분은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언젠가 이 두 분의 대면이 성사되고, 한 전시회에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해본다.  


‡‡‡‡‡‡‡‡‡‡‡‡‡‡‡‡‡‡‡‡‡‡‡‡‡‡‡‡‡‡¨¨주워 담기¨¨‡‡‡‡‡‡‡‡‡‡‡‡‡‡‡‡‡‡‡‡‡‡‡‡‡‡‡‡‡‡

 

볼이 발그레하던 시절의 무모한 야망, / 꿈을 먹으리, 꿈을 먹으리. / 백년을 사는 하루살이처럼, / 해를 등지고 별을 잊은 채, / 하물며 뽀얀 갈빛 먼지가 / 머리 속을 송두리째 흐트러 놓은, / 꿈은 허망한 착각. //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중에서; p18∥  


너의 눈은 내 손에서 태어나 / 슬픈 표정으로 날 괴롭히나 / 난 그 분위기에 취해 널 완성하련다.
∥「3월의 시」중에서; p20∥

내가 그를 사랑했었는지 아닌지 / 확실하지가 않다. / 모두가 벽처럼 망각되어진 / 막연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기민하고도 다행한 약혼이다. / 벽과의 거리만큼이나.
∥「전화」중에서; p28∥  


해 거름에 산들거리는 바람은 // 처마 밑에 빗방울, // 흠뻑 머금은 거미줄을 떨구는데, // 달빛 소소한 //  슬레이트 지붕위, // 고염나무 그림자 사이로 // 푸릇푸릇 돋아난,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 웅크리고 도사린 내 모습은 알거지.
∥「내 모습은 알거지」중에서; p46∥  


저 들판 위로 부는 가시 바람에 / 눈이 멀어도, 좋아서 / 노래부르며 가야 할 그곳으로 / 흩어지는 꽃잎처럼, / 끝없이 움직여 간다.
∥「나는 가야할 그곳으로 간다」중에서; p51∥  


황무지를 방랑하여, /사랑과 희생에 굶주린 독사들이 / 도사리는 누런 들판을 / 발바닥이 닳아 없어지도록 맴도는 자여!
∥「무상한 시간 속으로」중에서; p59∥  


나는 신의 캔버스에 그려진 초라한 / 물감 덩어리 // 나의 가슴 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덩어리.
∥「캔버스에 비친 나」중에서; p60∥  


꿈을 사르련다 / 빛바랜 시래기 다발처럼 변해버린 / 가늘게 떨리는 둥지 않에서 / 못내 회생못할 꿈을 // 모질게도 긴 / 밤이 지나가도록 너는 / 별빛으로부터 가슴 깊숙이 전해 받은 / 숨죽인 속삭임을 들으려무나 // 그래 / 너는 활갯짓하며 / 하늘 끝 점이 될 때까지 / 망각 속으로 흐터져 // 갈기갈기 찢기운 마음속 /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 그 푸르디 푸른 회한의 모서리에 / 나를 몰아 세우려느냐?
∥「새벽녘」전문; p62∥  


가장 높은 관념을 매일매일 취하지 않으면 // 흔들리는 자아는 또 죄악을 저지른다. // 평범으로 금의 환향한 인간, // 자신을 뒤쫓던 운명을 뿌리친 후 // 안도하는 인간, 그래도 좋아서, // 아예 억지로 팔자소관을 피해 달아난다.
∥「흔들리는 자아」전문; p73∥  


나는 그녀의 허리에 감겨진 혁대 //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무명 베일 // 그러나 나는 그대로 벌거숭이 // 나는 추워서 파랗게 질린 // 얄팍한 종이 한 장 // 바람에 쉽게 날리는 먼지.
∥「먼지」전문;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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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로 음반이 당첨되기는 두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내겐 흔하지 않다. 잔인한 오월을 다독여보내고 유월에는 좀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소망했었는데, 그런 내 바람을 알아챘을까? 아무튼 조금 바쁘긴 해도 기분 좋은 유월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새삼 힘나는 선물이 도착해 더없이 반갑다.

흔들어 보니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보니 음반이 다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포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뽁뽁이(?)로 정성스럽게 싼 정성과 함께 조은은 그렇게 도착했다.

와! 잘생겼다. 가수 맞나? 첫 느낌이 참 좋다. 특히나 이제 나에게도 레뷰 스티커가 생긴 것이 더없이 반갑고 좋다. 나는 언제쯤 레뷰 스티커 받나, 했었는데 말이다.
레뷰 스티커 빼고 음반만 한 컷! 다시 봐도 잘 생겼다. 가수가 이렇게 잘 생겨도 되는 건가, 했다. ‘그리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그리움’이다. 때론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수없이 많은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조은의 싱글앨범. 솔직히 말해서 싱글앨범을 구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못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내 주머니 사정이 다달이 사들이는 책과 영화 OST 때문에 헐빈(?)하고 궁색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느낌이 좋은 음반을 받게 돼서 좋다. 노래는 세 가지 버전이다. inst 버전을 빼고 특히나 Acoustic 버전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계속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든다.
싱글앨범을 처음 접해본다. 깔끔한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가사가 정갈하게 새겨져있고 조은의 눈빛이 그리움을 간절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한 이 사진이 참 느낌이 좋다.
처음에는 보이스가 너무 밍밍하다, 생각했었는데, 사진에서 우수에 찬 모습을 한 조은을 되새기고, 눈을 감고 노래를 되감아 들으면서 점점 호소력 짙다, 는 생각으로 바뀌어 갔다.
세잎클로버. 팬클럽 이름인가보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팬이 있나보다. 싱글앨범은 처음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일반 앨범 속의 감사의 말은 너무 길어서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 간단 명료(?)해서 좋았다. 이 사진은 탤런트 백성현을 닮은 듯하다. 커뮤니티 주소도 살짝 새겨져 있다.
어릴 적엔 CD를 살만큼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해서 늘 빌려 듣거나 테이프로 사서 듣곤 했다. 언젠가부터 조금씩이라도 CD를 사들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마음에 드는 음반을 죄다 사들이는 건 불가능한 실정이다. 언젠가는 마음껏 좋은 음반을 탐하는 시간이 내게 허락되기를······. 벌써부터 그날이 그리워진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조은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워진다’는 느낌이 강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수렁 같은 게 음악이 아닌가 싶다. 영화『복면달호』에 보면 모든 음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는 말이 나온다. 장르야 어찌됐던 간에 음악이란 영혼의 휴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끝으로 좋은 시간, 좋은 추억 그리고 좋은 선물을 선사해준 레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잔인한 오월에 한없이 힘이 들었었는데 이번 유월에는 조금 힘을 내!, 하고 다독여주는 일상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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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
조성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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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무얼 바라 겨우 숨만 쉬고 있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떨어져도 바닥은 보이지 않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28년을 함께 살아도 나는 나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듯하다.『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는 지금 나를 비롯한 20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20대들은 어떻게 이 절망(?)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었다가는 중간부터는 짜증(?)이 폭발하는 듯했다. 끄트머리에 가서는 ‘아, 이게 뭔가요!’라는 생각까지 든, 아무튼 좀 복잡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은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이다. 대학등록금 문제를 필두로 해서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여러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청년실업의 궁극적인 원인(?)과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세대와 계층 간의 시각차에서 발생하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치권내 인사(?)들이 바라보는 20대들의 정치적 성향의 편견과 오해, 통일에 있어서 20대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담론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내게 그리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볼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사회적 시스템, 제도, 정책 등등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선한 책’은 아니라는 것. 나름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어쩌자고?’ 저자에게 되물어야 할 정도로 해결책이 참 거시기(?)한 것 같다. 조금 시건방지고 오만하게 말하겠다. ‘당신이 제시한 해결책, 그 말, 나도 할 수 있다!’

저자가 ‘연대’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대 간의 연대와 정치권과 20대의 연대 등을 강조하면서 연대만이 절망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연대하자는 말이 시덥잖게 들린다기보다 그냥 연대하자고 말하는 게 다라서 멀뚱멀뚱했다고 할까.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연대를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이를 힘 있게 받쳐줄 만큼 그가 분석해놓은 문제점(대학등록금, 청년실업, 오해와 무관심)은 너무 식상하고 연대를 강조하기엔 좀 빈약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그 20대에 속한 백수다. 내가 뭘 알겠는가. 저자가 나보다는 많이 배웠고 머리도 좋을 테니 그러면 그런 줄 알고 따라야지. 하지만 만약, 저자가 나처럼 찌질한 백수생활에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고, 거의 ‘달관’의 경지까지 이른 처지와 위치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해결책을 ‘연대’로 들고 나가야지 하면서 문제제기를 과연 대학등록금이나 청년실업 등으로 잡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자신도 현재 20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시절을 지냈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하면서도 연대에 대한 접근 방식이 조금은 빗나간 게 아닌가 싶은 게 찌질한 백수인 내 생각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연대란, 저자처럼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정책적인 병폐의 관점에서 본 ‘한계적 트라이앵글’을 가지고 이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은 성급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결책을 골몰하는 것에서 그쳤다면, 나름 괜찮은 책이라 할 만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 뜬구름 잡기 식이 아닌가. 연대를 강조하는 여러 학자들이 많다. 예컨대, 강수돌 교수라든지 한홍구 교수, 윤구병 님(?) 등등의 주장을 보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연대에 대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 비해 이 책의 저자는 좀 성급하고 조금은 빈약하고, 설득력도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또 조금 아쉬웠던 점은 너무 쉽게 20대 젊은이들의 성향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분석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20대들의 특성을 도출하고 있는데 조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달리 보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위치한 20대들의 성향을 잘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깊이는 좀 얕다는 느낌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 또한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절망이란 저자가 말하는 생존 혹은 생활욕구의 불충분만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물론 인간으로써 기본욕구이자 가장 우선시 되는 욕구가 생존욕구라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존욕구의 불충분, 단순한 감정의 패닉상태가 아니다. 이는 현실을 이탈한 의식의 세계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가 앓고 있는 ‘병’의 근원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의식화한 이상향에 대한 ‘비전 없음’에 대한 좌절인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문제를 분석해서 해결책으로 연대를 들고 나왔다. 세대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좀 더 건방지게 달려보자. 진정으로 20대들이 앓는 절망의 근원을 끄집어냈나, 되묻고 싶다. 나는 저자가 다분히 감정에 대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감성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말 않고 그저 20대 젊은이들의 고충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문제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말하기’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듣기’로부터 시작된다는 단순한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통하자고 했던가? 그럼, 저자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게~~요?

고등학교 때 배구동아리를 했었다. 그때 대회 일정이 잡히고 연습을 하기 위해서 선배들에게 연락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주장이었던 내가 무턱대로 전화를 넣었는데, 죄다 그냥 끊더라는.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7대 선배(나는 13대) 왈, 절차를 밟아라! 그렇다. 절차를 밟고 수순에 따르라는 것. 내 한 대 위로 연락을 취하고 거기서 또 한 대위로 이어가는 그 과정과 절차를 말했던 것이다. 소통과 연대를 실현하자고 했던가. 그럼 절차를 밟아라! 일단 입 닫고 먼저 들어라, 고 말하고 싶다.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 내면의 상처를 먼저 찾아내고 보듬지 않고는 그네들을 움직일 수 없다. 젊은이들의 생각, 가치관, 정체성 그로 인한 혼란을 이해할 수도 잠재울 수도 없다. 하물며 소통과 연대는 오죽하겠는가.

진중권의『레퀴엠』에 보면,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사무라이 존재 미학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시대적 착오’에 부딪혀, 즉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고 주도세력(젊은이)의 인성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 할복이라는 유종의 미(?)를 낳았다는 것. 여기서 인성은 작게는 세대의 특성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세대의 특성 혹은 정체성은 이 인성의 이해노력 여하에 따라 소통의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20대들에게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그들과의 소박하지만 대의를 위한 연대를 원한다면, 젊은이들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생각과 감정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나.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20대들에게 함께 고민하면서 젊은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네들의 인성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오늘을 사는 세대다. 미래를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기성세대들과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는 말이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존에 대한 위협 따위에 쉽게 절망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유에 익숙한 세대이면서 그에 대한 속박은 선전포고와 같다. 묵묵부답의 극단적인, 자폐적으로까지 보이는 성향을 띄는 세대다. 그걸 가지고 냉소주의니 무관심하니 하는 것은 좀 우습지 않나 싶다.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열정, 꿈, 그 힘을 믿고 응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쉽게 배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힘겨움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꿈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뭘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세대에 속한 한 사람이다. 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내가 하는 말은 20대들이 하고픈 많은 말의 편린정도는 된다고 본다. 소통과 연대를 이끌어내고 싶은가? 우리를 진정으로 돕고 싶은가? 그렇다면 감정의 호소 따위는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가 궁금하다. 즉,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과 불분명으로 앓고 있는 환자나 다름없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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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영 - A Day : 25현 가야금 연주집
조문영 연주 / 드림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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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조문영의『A Day / 25현 가야금 연주집』의 감상이 쓰고 싶어졌다. 여태 햇귀님께 선물 받은 후로 몇 달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들어왔으면서도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했던 느낌을 쓰고 싶어졌다. 엉뚱하게도 오늘 아무 생각 없이 영화『황진이』를 보고는 이렇게 됐다. 영화 속에 삽입된 곡을 찾아 웹을 뒤지고 뒤지다가 ‘25현 가야금’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 속에 남은 짧은 감상이 이 앨범의 첫 곡 제목과 잇닿아 있었기에 때문이기도 하다.  


「슬픈인연」은 영화가 남긴 여운을 이어간다. 기구한 삶, 가련한 사랑의 운명으로 엮인 영화 속 ‘놈이’와 ‘황진이’는 그 관계의 사실성 진위를 떠나 가혹하고 시리디 시린 현실에서 신음하는 연인이다. 서로를 바라면 바랄수록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연, 그네들이 이 곡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Green Sleeves」는 왠지 ‘그립다’는 느낌으로 충만하다. 중간 중간 통통 튀는 듯 한 선율은 조금은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리운 무엇인 것처럼. 시인 조병준은 슬픔과 슬픔이 잇닿은 체온으로 슬픔을 이긴다고 했다. 사진가 이홍석은 외로움과 외로움이 서로를 보듬으며 외로움을 이긴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곡은 그리움과 그리움이 서로 뒤엉켜 잠시나마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잊게 하는 듯하다. 

 

한참을 그리움을 쫓아 내달렸다. 그러다 어느 둔덕에 누워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그 속에 찬란히 수놓아진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본다.「따오기」는 그렇게 나를 잠시 쉬게 한다. 어느 봄날의 옅은 밤인 것 같기도 하고 초여름 혹은 가을의 밤인 듯도 하다. 그곳에 누워 산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 아름답고 옅은 밤하늘을 눈을 감은 채 맞고 있다. 평온함! 딱 그렇다.

 

「거친 길로의 여행」을 들으면서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가수 하림이 나와 연주하던 아이리시 휘슬이 떠오른 건 단순히 우연한 일이었을까. 케이스를 보니 하림이 참여한 곡이다. 아이리시 휘슬과 잰걸음을 닮은 가야금의 선율의 조화. 나는 둔덕을 박차고 일어나 달렸다. 놈이도 황진이도 낙원의 섬을 향해 내달리는 것만 같은 환영이 펼쳐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느낀다. 그래도 왠지 웃는 낯이 어울리는 곡이다. 아슬아슬한 긴장을 틈타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그런 아이러니한 스릴감이랄까.

 

놈이가 말한 그 낙원의 섬에 들어선 것일까. 몸은 조금 전까지의 팽팽한 긴장을 잃었다. 하늘하늘 꽃잎이 나리는 듯하다. 말장난 같지만「4월 이야기」는 영화『4월 이야기』처럼 줄지어 벚꽃이 만연한 낙원의 섬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한없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놈이의 말처럼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곳, 서로 도와가며 그저 행복한 시간만을 허락하는 곳, 그런 낙원의 섬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선 기분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되어도 좋을 만큼······  


만약, 그 낙원의 섬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아마「여우비 오던 날」이 전하는 템포감이 일상의 속도가 아닐까 싶다.「4월 이야기」가 무한한 게으름조차 허락하고도 남을 무엇이라면,「여우비 오던 날」은 ‘아, 심심하군!’ 하고서 섬 곳곳을 가뿐하고도 여유로운 걸음으로 둘러보는 듯 하달까. 이런저런 열매를 먹으면서 이 아름다운 섬을 둘러보다, 전제덕이 전하는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평온의 시간과 같은······ 

 

이런! 황진이가 깊은 험난한 산을 오른다. 길도 나있지 않은 그런 바위산을 오르고 올라 깎아지는 벼랑 끝에 서 있다.「바람의 전설」은 놈이의 유골함을 들고 산을 오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벼랑 끝에 선 황진이는 놈이의 유골함을 안은 채 지난 날 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어릴 적, 기생이 되기 전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준 놈이를, 그날 난생처음 나가본 저잣거리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연등을 떠올린다. 한줌의 재로 품에 안긴 놈이를 안고 황진이는 그렇게 벼랑에 선 채로 하염없다.  


이젠 보내야 한다. 사랑했던, 죽어서도 곁을 지키겠다던 놈이를 바람에 맡기고 바람이 되어라, 그래서 내가 언제고 바람과 함께 일어나고 바람과 함께 잠들 수 있도록 바람이 되어라, 한다. 자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없어 상처받지 않는댔으니 앞으로는 그리 살아야 한다, 고 놈이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 마지막 의식은 슬프면서도 조금은 비장한,「겨울안개」에 녹아난다. 이네들의 이별의식에 내가 어울릴 법한 곡을 정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겨울안개」를 정갈하게 바칠 것이다.  


황진이는 그 후로 어찌 되었을까. 내가 말하는 황진이는 다분히 영화의 연장으로써 존재하는 황진이를 말하는 것이다. 놈이를 바람에 묻고 되돌아온 일상에서 그녀는 어찌 보낼까.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제 삶을, 이제는 놈이의 삶까지 짊어진 그녀가 비구니라도 되었을까.「축제」. 어쩌면 그녀는 바람이 되어 돌아온 놈이와 함께 죽는 날까지 축제를 즐기듯 여생을 만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람으로 되살아 온 놈이가 밀쳐냈을 것이다. 계절마다 놈이는 그녀에게 한 아름씩의 온갖 싱그러운 향기를 실어다 주었을 것이다. 위선의 탈바가지를 벗기려는 고약한 놀이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나날이 축제와 같으니까. 아마도, 그랬을 것만 같으니까.  

 

*

좋은 음악은 마음으로부터 울린다. 귀를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니라 기억조차 닿지 않은 곳에서 그 파장은 잔잔히 일게 마련이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나를 휘감아 도는 울림을 알아챘을 땐 이미 늦은 후이다. 언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는지도,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들었는지도, 아니 벌써 몇 날이 몇 달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공간을 가둬버리는 듯 하달까.  

 

**

책을 읽고 감상을 적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편이다. 하지만 음반과 영화를 듣고 본 후 그 감상을 적기란 아직도 익숙지 않다. 책은 한 번을 읽고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감상을 잘도 써내려 가는데 몇 달씩이나 줄곧 들은 음반은, 감흥에 젖어 수차례 다시보기를 한 영화는 어째서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곰곰 해보지만 답은 언제나 무음과 무성, 무형이기만 하다.  


사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정답인지도 모른다. 마치 소설가들이 첫 문장에 고심하고 고심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아니면 벅차오르는, 그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밀물처럼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헤집어 놓고는 썰물 때면 언제나 나만 홀로 남겨진 그런 기분이랄까. 세상천지가 낯설어 그대로 주저 앉아버리고만 싶은 심정이랄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내 혼을 홀딱 빼놓고 나를 헤집어 놓는 이런 음악이, 이런 영화가 군더더기 없이 그저 ‘좋다’고 느낄 뿐임을 안다는 것. 평론가들이 산산이 부셔놓았든 네티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놓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넋을 놓고 몇 십분 몇 시간을 멍하니 있어도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느낄 뿐, 그거면 족하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음악과 영화를 소화하는 방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쉽사리 감상을 써내려가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어쩌면 이런 내 소화방식은 늘 내 부끄러운 부분들과 닿아있기에 감상은 곧 내 치부를 들추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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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14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리 악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굉장히 아름답겠습니다.

ragpickEr 2009-06-15 08:09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잘 몰라요~ 헤헤.. 그냥 우리 악기로 연주하는 걸 들으면 뭔가 스멀스멀~ 희안한 감정이..^^* 이히히~

좋은 날 되셔요~!! 고맙습니다..

교자만두 2009-12-3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인 님의 감수성이 부러워요..제가 같은 음악 듣는다고 이런 감성을 풀어낼 수는 없을텐데..그래서 레인 님께 감사합니다. ^^때론 소설가와 시인이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그들의 존재가 감사할 때가 있어요. 나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걸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빚어내니까요.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처럼 레인 님께도 감사해요. 글 너무 잘 봤습니다.^^

ragpickEr 2009-12-30 23:43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아..^_^;; 그냥..마구마구 적어내려 간 것 뿐인걸요..^^*;;이렇게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다니요..ㅋㅋ

맞아요!! '나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걸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빚어내'는 그네들의 존재가 참으로 고맙지요..^^*

재미난 건요..그저 생각나는대로 끄적였을 뿐인데..다른 누군가에겐 그 낙서가 아주 와닿을 수도 있다는.. 뭐 그런 것 같아요..^^*;
엉뚱한 낙서 읽어주셔서 고맙기만 합니다! ^^*; 으흐흐~

교자만두 2009-12-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국악과 졸업한 선배가 있어서 좋은 곡으로 CD만들어 주셨어요.ㅋ 국악 음반 선물하고 싶어서 언니한테 부탁했는데, 선물하기 전에 들어 보니 나도 너무 좋아서...언니, 저도 한 장...ㅎㅎ 듣다가 또 선물하고 싶은 사람 생겨서 또 한 장 굽고..영리 목적은 아니었지만...어쩌다 보니 불법 CD 대량 유통시켜 버렸네요...=.=;;;핑계지만...그게....시중에 그런 CD가 없어서..ㅠ.ㅠ

ragpickEr 2009-12-30 23:45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와우~! 얼마나 멋진 곡이길래 불법유통을..ㅋㅋ
(사실은..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ㅋ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국악동요..를 우연찮게 발견(?)해서 몇 장 스윽~꾸워서 돌렸다는..^^*;;)

쉿! 이건 비밀유지가 필요한 듯하네요..^^* ㅋㅋ

교자만두 2009-12-3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게 용서될 것만 같은...좋은 날이네요..전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그랬어요..모든 미움이 사라지면...진짜 올해는 산타가 오셨나 봐요...근데 크리스마스 지나고 다시 복귀ㅠ.ㅠ

ragpickEr 2009-12-30 23:46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오늘 좋은 날 보내셨나봐요? ^^* 후훗..
산타..^^* 아직 안 돌아갔을 것 같은데요? ^^*

모쪼록 좋은 생각 많이 받아들이시는 내년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
파이팅입니다!! ^^* 이얍~!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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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지러운 내 책상 위에 빨간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 읽는 동네, 즐거운 사회’라는 스티커가 붙은『엄마를 부탁해』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최근 들어 실시하고 있는 ‘독서릴레이’ 프로그램의 책 중 하나라고 엄마가 말씀해주셨다. 읽은 후 이름, 날짜, 연락처, 간단한 느낌 정도를 뒷면에 붙은 ‘독서일지’에 적으면 된다고. 낯선님이 읽는 걸 보고선 읽어봐야지, 읽어봐야 하는데······ 하며 미루고 미루다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걸 보면, 안달한다고 해서 죄다 내 손에 착착 감기는 것만은 아닌 듯 한 오묘함을 느끼게 된다.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남편도, 딸들도, 아들들도, 며느리들도, 손자들도, 이 거대한 도시 속 많은 사람들도 엄마를 보지 못했고 모른다고 한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보지만 늘 한숨과 함께 회한이 밀려오는 잔인한 형벌의 시간, 그런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게 가족도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마저 ‘너’의 엄마는 물론 제 집의 ‘우리’ 엄마를 잊고, 잃어가며, 잃어버린 채 사는 듯했다. 나 역시도.  


『엄마를 부탁해』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그 일침은 ‘엄마’라는 절대적인 세계, 내 노력과 관심여하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내 편일 거라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실존체인 ‘엄마’를 앗아감으로써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엄마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건만, 기어이 그 극점으로 우리들을 내몰아간다. 그리고 납치범처럼, 살인마처럼 섬뜩하게 통보한다. ‘당신의 엄마는 어디 있을까? 알고 싶어? 당신은 절대 엄마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영원히!’

 

이 잔인하고도 잔인한 절망의 극점에서 단말마에 그치는 일상적인 뉘우침은 전혀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렬하고도 처절한 속죄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후회로 하여금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상의 흐름을 시시각각 조각내 버린다. 단순한 강요와 훈계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p275)  


‘소’처럼 살아가는 엄마. 우리네 엄마는 여지없이 소처럼 묵묵한 일생을 보낸다. 엄마라고 부엌이 좋았을까, 엄마라고 집안일 모든 것이 하고 싶었을까. 당연히 엄마니까 하는 일이지, 라는 우리네 생각이 엄마를 더욱 혹독한 시간 속으로 밀어 넣은 건 아닌가 싶다. 당연하다는 말과 인식, 그것은 엄마에게 멍에를 덧씌운 잔인한 멍에가 아니었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갖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닐까.  

 

이 책에서 우리는 ‘엄마’가 아닌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자식들은 당연한 듯 제 삶을, 인생을 중심에 혹은 맨 앞에 놓고 가족을 그 다음으로 놓으며 ‘제일’이라고 능청스럽게 거짓부렁한다. 엄마, 아빠의 삶에 대해 단 한 번도 되돌아볼, 관심도 여유도 혹은 그런 ‘孝’를 찾기란 힘든 게 사실이다. 어미도 아비도 인간이고 사람이다. 숭고한 사랑과 헌신은 제 삶과 인생의 표피에 불과한 것이다. 그 내면에는 우리 누구나가 갖고 겪으며 살아가는 고민·고독·번민 등 감정의 소용돌이가 똑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다만, 숨죽인 채 울며 참고 있을 뿐임을 안다.  


그렇다고 엄마를 잊고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죄인취급하고 있지는 않다. 속죄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할까. 죽은 게 아니라 잊었을 뿐이고, 잠시 잃었던 엄마일 뿐이라고. 단지 잃은 게 ‘구 개월’ 정도가 지났을 뿐이라고. 아직 희망은 있다고. 그런 희망 속에서 엄마를 찾을 때까지만 엄마를 부탁한다고.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찬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시간, 어쩌면 그런 ‘착각’의 시간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때, 그런 시간 속을 거닐고 있을 때부터 우리는 소중하고도 중요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무엇을 잃었고 잃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기엔 우리네 ‘착각’은 너무 달콤하고 일상은 너무나도 견고해 전혀 빈틈이 없다는 사실을. 충격! 가령, 이 소설에서처럼 엄마를 잃어버리는 것만큼의 충격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착각은 균열조차 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직 늦지 않았다. 벌써부터 후회하고 비탄에 빠져 혹은 그래도 무신경하게 살아가기에는 너무 이르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안다. 시간보다는 마음이, 마음보다는 표현이 더 살갑다. 시간은, 마음은 추억을 되살릴 순 있어도 되돌릴 순 없다. 그래도 우리네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을 순 있다. 그렇게 다잡은 마음으로 우리는 시간을 되새김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추억은 마음으로부터 되살아나고 흐르는 시간 속에 영롱할 것이며 뒤늦은 후회일지라도 여전히 무관심한 것보다 값지다는 것을 안다.  


아주 유명한 책이라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서 조금은 ‘선뜻’ 만나기를 꺼렸던 것도 사실이다. 꼭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기보다 그저 ‘웅성웅성’한 틈에 끼여 읽다보면 그네들에게 나 또한 묻혀 버릴 것만 같은, 꼭 그런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진정되고 차분하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어쩌면 이것 또한 책을 대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주워 담기¨¨‡‡‡‡‡‡‡‡‡‡‡‡‡‡‡‡‡‡‡‡‡‡‡‡‡‡‡‡‡‡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뜻밖의 일과 자주 마주치는 것은 그 일의 앞뒤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p40)

이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구로 앞의 일은 옛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지금 일어나는 일은 지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당신은 생각하오? 글쎄, 그럴까? 나는 가끔 내 손자들을 보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어딘가에서 그냥 뚝 떨어져나온 아이들 같은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이 말이오.(p235)  


집이란 참 이상하지. 모든 것은 사람 손을 타면 닳게 되어 있는데 때로 사람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사람 독이 전달되어오는 것 같기조차 한데 집은 그러지 않어. 좋은 집도 인기척이 끊기면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내려. 사람이 비비고 눙치고 뭉개야 집은 살아 있는 것 같어.(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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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님 책 읽어보고 싶어요. 넝마님이 읽으셨다니 더욱더 읽고 싶네요.^^

ragpickEr 2009-06-09 11:27   좋아요 0 | URL
^^* 이달이 가기 전에 구입하려구요.. 읽은 책이지만 좋은 책은 갖고 싶기 때문에..혹시 한 권 보내드릴까요? ^^* 후훗..

에샬롯 2009-06-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닙니다. 보내주셔도 바로 못읽어요. 읽어야할 책들이 줄을 섰어요. 감사합니다.

ragpickEr 2009-06-15 08:10   좋아요 0 | URL
^^* 그러시군요~헤헤.. 전투식량(?)이 빵빵하시군요~^^*

에샬롯 2009-06-1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래요.; 그때 끄때 소진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 저의 소원이 책이랑 영화랑 이런 것 마음껏 즐기며 살긴데 쉽지 않네요.

ragpickEr 2009-06-16 12:04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을..^^*; 후훗.. 제가 묵혀 두고 읽기를 즐겨 하는 게으름 사람인데요.. ㅋㅋ 저랑 비슷하네요.. 맘껏 탐하는 삶~! ^^*
언젠가 꼭 이뤄요~!!! ^^* 빠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