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산책 -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고경남 지음 / 북센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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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책좀읽자님이 이 책을 구하고 싶어 하셔서 검색하다가 운 좋게 판매하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려드리고는 정작 나는 여태껏 잊고 있었다니. 도서관 서가산책 도중에 생각나 빌려와 읽었다. 북로그를 하면서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책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간보기’를 통해 직접 좋은 책을 가려내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참 중요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그만한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내 손맛보다 늘 이웃님들의 손맛을 얍삽하게 몰래 탐하기 일쑤다. 어쩌겠는가! 이미 인이 배길데로 배겨 끊을 수 없는 이 맛을!  


『남극산책』의 저자는 짜증(?)날 정도로 밉상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왔고, 학교를 다니면서 연극반에 들어가 연출을 담당했단다. 그리고 서울대 병원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여러 음악잡지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외과와 내과 그리고 소아과까지 두루 섭렵한 엘리트더라는. 또 있다. 사이버 신춘문예 디카 에세이 부문 당선, 한미수필문학상 대상까지. 이런 다재다능한 저자가 남극 세종기지 의료담당으로 1년을 보낸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이 첫 느낌이랄까. 첫 장의 구성과 느낌은 마치『블루데이북』을 연상케 한다. 귀여운 펭귄이 뒤뚱거리기도 하고 고민에 잠긴 듯 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내용이나 의미는 생각했던 것보다 깊다. 글도 참 맛깔나고 그 의미들 역시 곱씹을수록 맛이 우리난다고 할까.  


자명종이 없는 잠, 휴대전화의 알람에 방해받지 않는 잠. 인간은 시간을 구획 지으면서 오히려 시간에 구속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p74)  


얼마 전에 읽은 성전 스님의『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에도 위와 꼭 닮은 구절이 있다. 굳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혹은 타인이 규정한 것들로부터 구속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는 생각을 예전부터 막연하게 해왔던 터라 공감이 가는 구절이다. 누구는 참 성실해서 지각 한 번 안한다, 는 말에 구속당하고 또 누구는 은근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도시적 삶 속 편리성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규제당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어쩌면 거대한 흐름인 시간을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욕심과 효율이라는 착각 때문에 토막토막 내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은 인간을 위한 단어일 뿐이다. 자연은 인간의 희망을 평가하지 않으므로, 예측불가의 자연 앞에서 인간의 희망은 성공의 변수가 되지 못한다.(p85)  


언제부턴가 자연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할까. 아마도 호시노 미치오의『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와 팔리 모왓의 원작과 영화인『울지 않는 늑대』를 접하고 난 후가 아닌가 싶다. 이전까지 자연은 늘 안식처요, 아름다운 낙원이요, 엄마의 품과 같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은 악의 없는 잔혹함과 혹독한 순리 역시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보식도 그렇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한낱 나약한 자연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 역시 그렇다. 대자연의 아름답고 신비로우면서도 악의 없이 잔혹한 순리, 때론 노골적인 썩소 같기도 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인간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항상 모든 걸 너그럽게 보호하고 예외를 허용하지는 않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단순히 글이 좋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에 그치는 책은 아닌 듯하다. 멋진 풍경과 남극의 동식물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동식물의 종류와 특성까지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다양한 맛이 느껴진다. 또 남극의 경이로움을 통해 저자 자신을 비롯한 우리 삶을 그 속에서 투영해나간다. 자기반성과 성찰, 생태학적인 면모, 인문학적인 사유, 동식물학 등등이 한데 어우러져 흥미와 감동 그 이상을 담아 전하고 있다.

덧붙여, 펭귄이나 바다표범, 새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담아냈는지 참 놀랍고 신기했다. 펭귄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새의 표정까지 담아낸 사진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경이로웠다. 비록 사진이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은 아주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다. 넘치는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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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스무 시간 도안이나 떠 있는 남극의 여름은 하루가 곧 사흘이다. 동이 트는 새벽 2시에서 아침식사할 때까지 하루, 그리고 저녁식사 때까지 하루, 마지막으로 해가 질 때까지 또 하루. 그래서 여름에는 3일 치의 일과가 필요하다. ······ 뭔가를 결심했다가 작심삼일로 끝나더라도, 실상은 단 하루가 지날 분이다. 남극의 여름은 세 배의 삶을 살고, 세 배로 나이 들어가는 계절이다.(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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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바다로 벚꽃놀이를 나간다.
바다가 녹으면 어디선가 수많은 유빙들이 몰려오고,
남극의 봄바다는 차갑게 빛나는 얼음 벚꽃으로 채워진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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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은 초라하지만 본능은 위대하다.(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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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바위처럼 단단한 관계라도 조그마한 균열이 생기면 그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간다. 그러다가 혹한의 시련이 닥치면 바위에 침투한 물이 얼면서 바위를 쪼개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쪼개져 버린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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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걷고 있으면 풍화된 먼지들이 몰려온다. 남극에서 살았던 동식물의 풍화된 먼지들. 오래된 고래뼈, 거친 자갈, 푸른 이끼의 풍화된 먼지가 바람을 타고 호흡기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글 바람에 풍화되어 미세하게 벗겨진 내 체세포는 남극의 먼지들과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남극을 호흡하고, 남극은 그렇게 나를 호흡한다.(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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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푸르다는 것은 푸른빛을 거부한다는 것.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빛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다.(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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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
성전스님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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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년이라. 이제 고작 삼십 년을 살아낼까 말까 하는 나로서는 짐작조차 힘든 시간이다. 고작 삼일 전에 일어난 일, 만났던 사람 혹은 그와 나눈 이야기들을 선명히 더듬을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일진대, 삼천 년이란 시간이기보다 거의 광대한 우주 그 자체의 흐름처럼 버겁게 느껴지는 듯하다. 내가 기억하건 못하건 간에 그 광대한 흐름을 타고 나와 연을 맺고 있는 모든 것, 모든 사람, 소소한 그 어떤 것들까지도 그리운 마음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지혜가『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속에 담겨져 있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성전 스님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청취한 바 없지만, 그를 꽤나 유쾌한 사람으로 상상해본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때론 단순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해본다. 수행자의 삶이란 어쩌면 복잡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비워내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성전 스님을 통해 해보게 된다. 그래서 사진으로라도 뵌 적이 없지만 그 얼굴은 늘 미소가 만연하리라. 그러니 미소 스님이라는 별칭이 있는 게 아닐는지. 복잡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스님의 말씀은 잔잔한 바다와 같은 고요를 닮았다. 
 

 

길은 끝을 전제하지 않는다. 길은 다만 가기 위해서 있다. 멈추지 않고 길을 갈 때 비로소 길은 그 의미를 회복한다. 길은 타성에 젖은 자는 갈 수 없다. 생을 포기하고 이상을 찾지 않는 자 또한 갈 수 없다. 길은 이상을 찾고 자신의 진실을 찾는 자만이 갈 수 있다. 길은 가는 자를 위하여, 모색하는 사람을 위하여 호흡한다.(p143) 


이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binsante님과 나눈 담소가 많이도 떠올랐다. 세 시간여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른 채 존재에 대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삶의 당위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었다. 위의 인용문은 내 가야 할 길과 꿈과 이상을 위해 binsante님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과 잇닿은 구절이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자신이 원하는 길에 시련도 있을 수 있고 절망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길을 포기한 후 가해지는 고통과 절망에 비할 바가 아님을. 그런 길을 성실히 가다보면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우리는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가오는 어떤 시간 앞에서도 그냥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고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시련과 아픔이 있기에 인생은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련과 아픔이 없다면 우리들 마음은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이겠는가.(p190)  


김용규의『숲에게 길을 묻다』에서도 우리는 태어남에 있어서 선택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 주어진 시공간에서 주어진 조건에서 우리는 먼저 그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초연하다는 것은 태생의 불공평·불합리에 대한 집착이나 분노를 비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초연하게 삶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찾는 그 첫걸음을 진정 떼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 하여금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음과 막연한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의미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둘러보고 비워내고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런 과정 없이 추상적이고 유명한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쫓아봐야 머리와 마음만 더 복잡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늘 변화해서 실체가 없고 인연 따라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존재의 참모습임을 알기에 떠남이 슬프지 않고 만남에 집착이 없다.(p265)  


존재의 참모습은 실체가 없고 인연에 따라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는 이 말이 참 와 닿는다. 나는 아직 어리석기 짝이 없는 중생이라 그런지 떠남이 슬프고 만남에 집착한다. 또한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다 못해 그걸 놓치지 않으려 머리와 마음은 늘 복잡하기 일쑤다. 결국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 것인가. 존재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늘 만남과 이별에 있어서 상대방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서 간직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변화하여 실체가 없다는 존재의 참모습을 마음이 아닌 눈으로만 보려하고 확인하려하며 비로소 안심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지.  


무던히도 해대는 내 모든 집착과 욕심은 결국 인생을 투철하게 살기 위함이었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오직 내 이기심으로 왜곡해 왔던 것이다. 나와 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소중한 존재의 참모습이 아닌 하나의 형상으로서 대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진다.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필요를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을 삼아보며······.  

 

*

책을 읽기 며칠 전에 있은 binsante님과의 담소가 참 많이도 생각난 책읽기였다. ‘몽중삼매夢中三昧’와 ‘우수憂愁’라는 단어에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binsante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눈이 촉촉이 젖어드는 걸 볼 수 있다. 때마침 존재에 대해 골몰하며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는 모습에서 더욱 그랬다. 존재에 대한 천착을 담아내는 그녀의 낯빛은 우수에 찬 한 송이 꽃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전 스님의 말씀처럼 존재에 대한 성찰과 물음을 이어가는 사람은 진실로 우수에 찬 모습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처음 binsante님을 뵈었을 땐 단지 눈빛의 떨림만을 느꼈었는데, 이번 담소에서는 마음의 절실함까지 전해진 듯하다.  


몽중삼매. 꿈에서 조차 꿈을 잃지 않고, 자신이 갈 길에 대해 골몰하고 몰두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몽중인이 아닐까 싶다. binsante님은 요즘 꿈에서도 여러 생각들을 붙들고 산다, 고 하신다. 아, 나는 어떤가! 대충 흉내만 내고 표정만 골몰하는 척 꾸미며 사는 건 아닌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무엇에 몰입한다는 것은 때때로 우리의 육신을 노곤하게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것은 그 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무화과 잎이 떨어지는 그 그림자에 뉘어 쉰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실은 만족과 행복의 순간일 뿐이지 영원하지 않다. 존재에 대한 확신 혹은 실존에 대한 확신과 인식의 과정은 삶을 더욱 풍요롭고 살만한 곳이 되게끔 이끌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

binsante님과 이 책의 저자 성전 스님 덕분에 더욱 풍요로운 책읽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일상은 참 오묘하고 신비롭다. 책이 내 손에 쥐어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리 화두를 던지듯 일상은 내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듯하다. 마침맞게 일상의 소소한 만남과 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건 정말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 순간, 조금은 내 삶에 초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바라고 바라는 것에 대한 기도를 올리고 내 길을 모색하며 성실한 자세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면, 내게 와 닿을 모든 연들은 나를 돕기 위해 자연스레 빛을 발할 것 같은 확신이 어렴풋 느껴지기 때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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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인 마음은 보배의 마음이고 비관적인 마음은 재앙의 마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마음을 더 쓰고 있는가.(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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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누군가 곁에서 힘듦을 나누어 주고 따뜻한 한마디의 말을 건넬 사람이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사람이 사람에게 아름다운 그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사는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마음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위안이 되는데 우리는 지금 사는 법을 너무도 모르는 것은 아닌지.(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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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같이 오래 있어만 주면 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아무런 바람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니던가. 그것이야말로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던가.(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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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다. 좀 모자란 듯 사는 사람들의 무딘 자리가 그립다. 악착같은 세상에서 좀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쩌면 그것은 새벽길을 비추는 별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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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은 욕구와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욕구와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행복한 찾아온다. 큰 나눔은 크게 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큰 행복과의 만남을 의미한다.(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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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디서나 당당하다. 그는 결코 생의 어떤 순간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 어느 조건에도 걸리지 않으므로 그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삶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놓고 비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p262~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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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발자국 소리도 없이
시간의 문턱을 넘는다.
가벼운 세월은
번뇌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늙음의 한숨에도 걸리지 않고
마른땅의 비가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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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24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 예뻐요.^^ 보통 사람들은 만나면 사물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잘 안하잖아요.;;

ragpickEr 2009-06-30 02:06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랜만에 왔네요..^^*; 잘 지내시죠?

책 속에 사진들입니다..예쁘죠? ^^*
아.. 제가 만난 분이 화가셔요.. 이번 작품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생각이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후훗..
 
쿠바를 찍다 - 사진작가 이광호의 쿠바 사진여행
이광호 지음 / 북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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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하고 싶은 곳은 어디어디일까. 사실 여행하고 싶은 곳이 어디 한둘이랴! 러시아, 알래스카, 남극, 핀란드, 네팔, 쿠바, 인도, 볼리비아, 몽골 등을 포함해 히말라야처럼 되도록 사람 손이 덜 탄 곳을 가보고 싶다. 어떤 친구는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한다. ‘또라이 아이가! 뭐 한다꼬 쌔가빠지게 고생하러 그까이 가노! 그런데 잘못 가면 총 마 죽거나 병 걸리가 죽는다 카두만.’ 그래도 나는 앞서 말한 곳들을 여행하고 싶다. 그냥 막연한 예감이랄까. 그곳이 아니면 구태여 걸음을 떼지 않을 것만 같은 확신이랄까.  


『쿠바를 찍다』는 순전히 내가 동경해마지 않는 쿠바여행에 관한 책이라 무작정 집어 들었다. 쿠바에 대해 아는 거라곤 내가 좋아하는 야구(아마야구)의 최강국이라는 것, ‘체’아저씨의 숨결이 깃든 곳이라는 것, 그냥 쿠바사람의 인상이 참 좋아 보인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가보고 싶고 책으로라도 접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단지 ‘쿠바’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기분이랄까. 한 번도 가본 적 없어도, 아는 것도 없어도 설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 아닌가!  


이 책에는 컬러사진과 흑백사진의 비율이 3대 7정도 되는 것 같다. 흑백사진이 더 많아서 좋았다. 사진에 대해 무지한 나이지만 누군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진은 마음으로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냥 컬러사진도 좋지만 그보다는 흑백사진을 볼 때 전해지는 그 느낌이 참 좋다.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오랜 시간이 흘러서 다시 봐도 변함이 없을 것만 같은 시공간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쿠바를 흑백사진이 더 어울릴만한 곳이라고 말한 저자의 생각과 노력이 묻어있는 사진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좋은 느낌이다.  


참! 이 책은 여태 내가 본 몇 안 되는 사진집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 듯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기행적인 면이 부각되는 책이라 하겠다. 기행문 형식과 닮아서 조목조목 상세하게 여행준비과정이나 여행시작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반면에 글에서 풍기는 방랑적 감흥(?)은 조금 부족한 듯하다. 달리 말해, 조금은 지루한 감도 없지 않지만 사진이 참 좋아서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닌 듯하다. 여행과 방랑을 굳이 정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 책은 여행의 전형에 가깝다. 나는 방랑이 좋다. 시작도 끝도 명확하지 않은 채 길 위에 선 그곳이 시작이고 끝인 방랑이 말이다.  


사진작가 이광호 이 사람! 생각보다 투덜거림이 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말주변이 좀 부족한 건지 어떤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방랑객보다는 여행객이 좀 더 어울릴 법한 사람이랄까. 하지만 그가 담아온 쿠바의 모습들은 환상적이다 못해 거의 ‘환장하겠다!’ 싶을 만큼 마음에 든다. 그의 투덜거림이 조금은 거슬리긴 했어도 곧잘 울컥이는 기분에 잠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담아온 쿠바인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레콘의 멋들어지는 포말, 그리움이 가득 배어있는 쿠바 풍경 때문일지라. 어느 카메라 광고를 보면서 저 곳은 어딜까, 했었는데 이 책 속에서 그 답을 찾은 것도 하나의 수확이었다. 그가 담아온 말레콘은 거듭 말하지만 환장할 정도로 멋있다!  


중간 중간 저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한 그때의 상황과 감상, 그리고 카메라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하곤 한다. 핀트니 셔터속도니, 구도니 하면서 잘 이해는 안가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려주는 부분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진입문서’의 한 내용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때로는 부분이 전체를 말해주기도 한다.
그 상황, 그 사람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부분을 찾는 작업은 흥미롭다.(p87)
 

 

사진작가 최민식의 경우 ‘얼굴(표정)’이 그 사람의 전체분위기를 포함해서 인간 삶의 총체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고 했다. 생의 한 단면을 여실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요한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사진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이 선명한 작가정신,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까지. 이런 요소들이 갖춰지고 비로소 빛을 발하는 스냅숏! 그 손맛을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날 때도 있지만, 이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원. 아무튼 저자의 경우 ‘발’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기도 하더라는.  


책은 뒤로 갈수록 인물사진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해맑은 아이들의 사진은 절로 미소 짓게 한다. 또 연륜이 배어 나오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사진 역시 미소와 함께 소소한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책은 이렇게 그리움이 짙어지는 오묘한 풍경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사색적인 성향이 짙어진다. 저자의 삶에 대한 철학이나 가치관도 여행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주 만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굳이 방랑과 여행을 구분하자면 이 책은 여행의 전형에 가까운 듯하다. 그렇다고 그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여태 본 몇 안 되는 방랑에서 길어 올린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편린들의 조합이랄까. 여행이면 어떻고 방랑이면 어떤가! 또 관광이면 또 어떤가! 그곳에서 사람들과 호흡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설레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쿠바여! 내가 가는 날까지 변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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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트가 정확히 맞는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 아니면 느낌이 좋은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반드시 핀트를 정확히 맞춰야 한다’는 공식에 얽매이면 때로는 그 순간의 바로 그 느낌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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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이 함께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 특히 인물 사진을 잘 찍으려면 마음을 열고 가까운 거리에서 찍어야 한다. 피사체에 과감하게 다가가야 한다.(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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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안을 들여다보니 빵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에 계속 기웃거리고 있는데 안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신다.
한 손에는 빵공장에서 지금 막 배급 받은 따끈한 빵이 담긴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까부터 내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배가 고파서라고 생각하셨나보다.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에 의지한 채 힘들게 몸을 이끌어 다가오시더니
따끈한 빵 한 덩이를 말없이 나에게 건네셨다.
이 빵을 받으면 할아버지의 빵이 하나 줄어들 것을 알기에 그의 내민 손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이방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푸는 그 따스한 마음을
단박에 거절하기란 더 힘들었다. 결국 나는 큰 미소를 보내며 그 빵을 받고 말았다.(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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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그 아기는 누구예요?”
“응. 내 손녀야.”
“지금 손녀 돌보고 계신 거예요? 날도 더운데 제가 맥주 한 잔 대접할까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쉿, 조용히 해. 우리 손녀 잠 깰라.
품 안에서 잠든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길이 마냥 따스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그냥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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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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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관심이 가고 손이 갈듯 말듯 한 책이 있는 것 같다. 덥석 짚어들었다가도 왠지 오늘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애매모호한 그런 기분이랄까. 진중권의『레퀴엠』은 그렇게 나와 어렵사리(?) 만난 책이다. 매번 도서관에서 만나면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이웃님이신 YJ님의 리뷰를 읽고서 겨우 만나게 되었다. 결국 사들이기까지 한 책이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 책의 집필 당시에 벌어졌던 이라크 전쟁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다. 다분히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인가의 물음을 넘어서, 저자가 말하는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현상과 의미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고찰함으로써 이것이 근대를 지나며 이룩하게 되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어떤 특징을 갖게 되고 어떠한 형태의 전쟁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깊이 있게 살피고 있다.  


솔직히 나는 사회, 정치, 예술,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아주 무지하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이 책의 정체성(?)은 뭘까 등의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아는 게 없다. 하지만 나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일단 호기심을 들 수 있겠다. 그보다 더 몰입하게 만든 요소는 진중권 특유의 서술(어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속된 말로 깔 때 제대로 까주는 센스(?), 조소를 흘리며 조롱하는 듯 한 어투(?), 얄미우리만큼 치고 빠지는 반복적인 술래잡기 같은 강약조절(?) 등이 흡입력 있게 나를 빨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을 들자면 ‘충격과 공포’에 관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 충격과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현재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의 특성과 인간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미적탐닉에 관한 저질성과 변태성을 깨닫게 한다. 더 나아가 그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쟁을 지켜보며 치졸한 욕망의 부스러기를 탐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 있다는 것까지 지적한다.  


원래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 생산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로 사람들은 강이 흐를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무리를 참호 속으로 흐르게 하고, 비행기로 씨를 뿌리는 대신 도시에 소이탄을 뿌려 댄다. 인간을 위해 탄생한 기술이 이제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 ······ 기술을 생산이 아니라 파괴에 사용하는 도착증. 이것이 파시스트 문명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스스로 파괴하며 미의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 이것이 파시스트들의 감성이다.(p53~54)  


어쩌면 ‘전쟁미학’에 관한 우리들의 몰이해, 무관심, 지각능력의 상실은 곧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계의 반란에 종속당한 인간의 광적이고 변태적인 미적 탐닉에 기인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인간의 한계성(관념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을 극복하기 위해 그릇된 욕망과 쾌락으로 스스로에게 씌운 올가미, 그런 올가미가 변태적인 탐닉과 파괴적인 도착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게 아닐까.  


이라크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는 끔찍한 일상이나,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미의 체험 대상일 뿐이다. 이라크 사람들이 찢어진 몸과 상처받은 영혼으로 고통받는 장면을, 멀리 떨어진 우리는 기껏 한 편의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리저리 쫓기다 사자 밥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맘껏 즐거워했던 로마인들의 야만은 동시에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진화를 했다 하나 야수의 수준에서 그리 멀리 나오지는 못한 듯싶다. 오늘날 우리는 발달한 기술의 힘으로 그 아기자기한 놀이를 대규모 스펙터클로 만들고, 발달한 미디어의 힘을 빌려 그것을 콜로세움에 모인 이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p63)  


인간의식의 잔혹성이란 이처럼 ‘미’라는 예술적 개념을 빌어 정당화, 합리화, 명분화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잔혹성은 욕망으로부터 피어나 현실공간을 배제함으로써 기술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상상 속 현실을 현실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로인해 우리는 대다수의 ‘방관자’들처럼 현실적 무감각에 도달하게 되며, 오락을 즐기듯이 ‘충격과 공포’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꼴이 된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쾌락이란 결국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파괴적 미학이라는 이름하에 죄의식 없이 오로지 탐닉의 대상으로 현실세계를 상상 속 세계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건 아닐는지.  


*
∥군사적 우위(패배)와 정치적 우위(패배)에 대한 엉뚱한 생각..∥  


이 이야기는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상대적인 약소국을 침략·점령한다고 해서 승리(?)한다는 게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 속에서 정치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야만 승리라 할 수 있다는 것. 가령,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우위와 정치적 우위라는 이 두 포지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군사적인 열세와 경제적인 열세로 인해 간섭이나 침략을 허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으로까지 패배한다면 속국으로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힘들다는 말이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사무라이 존재 미학에 대한 확신이 ‘시대적 착오’에 부딪혀 좌절했다는 부분을 보면서 어쩌면 그때는 현재보다는 조금이나마 살만 한 시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요즘의 권력은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에 겁을 먹지 않는 듯하다. 다시 말해, 하고 싶은 대로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들의 뜻을 현실화 해나간다. 아마도 자본의 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초에 시대적 착오를 겪는다할지라도 자본의 힘으로 시대의 주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했으리라. 물론 그 성공이 요즘 균열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은 희망적이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자본과 더불어 정치적인 우위를 선점했다는 것도 주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정부에 끌려 다니는 세력(?)들을 보면, 정치적 우위를 선점하는데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정치적인 우위가 정치적인 승리, 정의의 승리는 아니겠지만, 군사 혹의 무력이라는 힘의 논리로 게임이 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영향력을 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힘으로 밀어붙이는 억압·구속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어도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으려면 아마도 정치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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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책을 읽고서 ‘싸이코패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우리들의 무표정 속에 담긴 한줄기 선명한 증상은 어쩌면 싸이코패스를 정의하는 그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싶은 생각에서다. 단지 일반적 의미인 소수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불명예가 아닌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와 찬성, 용인에 기인한 ‘합법적’인 불명예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사회구성원의 집단적인 병폐가 싸이코패스라 할 만하지 않나 싶다.  


‡‡‡‡‡‡‡‡‡‡‡‡‡‡‡‡‡‡‡‡‡‡‡‡‡‡‡‡‡‡¨¨주워 담기¨¨‡‡‡‡‡‡‡‡‡‡‡‡‡‡‡‡‡‡‡‡‡‡‡‡‡‡‡‡‡‡

‘진정한 인간은 탈영병이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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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잔혹함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나, 그 한도를 넘어서는 압도한 잔혹함은 인간을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만든다.(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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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심판하겠다는 것인가. 남의 땅을 침공한 것이 누구인가. 남의 물건을 약탈한 것이 누구인가. 무고한 이들을 학살한 것이 누구인가. 수많은 아이들을 고통 속에 태어나 죽게 한 것이 누구인가. 대량 살상무기를 살포한 것은 누구인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외려 심판을 하겠노라고 나선다. 재림 예수 부시는 적그리스도다.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며, 진노하는 신이며, 복수하는 신이기에, 자신을 참칭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노한 원숭이들의 발광은 끝났고, 이제 그들은 언젠가 다가올 진짜 ‘진노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p66~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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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숨을 던져야 비로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증오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미움일까?(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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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물리적 존재, 즉 신체를 파괴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면의 도덕성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고로 도덕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연보다 위대하다. 기술의 발전 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 칸트는 이렇게 자연의 적대적인 힘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려 했다.(p85)  


==>미국의 광폭한 기술에 대항해 이라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렇듯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종교에 힘을 빌어서 애국을 강요하듯. 결국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주체는 죄 없는 선량한 국민이라는 점,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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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미학과 윤리는 정치적으로 겁탈당하여 전쟁의 원리가 되었다. 침략자와 독재자는 인간의 척도를 넘어선 이 두 개의 숭고함으로 서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려 했다. 하지만 이 숭고한 놀이의 대가를 몸으로 치러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결코 숭고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침략자의 파괴력을 방어할 고도의 기술도, 순교하라는 독재자의 요구에 부응할 광적인 신앙심도 없는 사람들. 그저 평균 수준의 합리성과 평균 정도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 그렇게 평범한 남자들,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 그리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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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어린 양. 그리스도는 목숨 하나로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예수보다 운이 나쁜 편이다. 2천 개의 목숨을 합하여 기껏 한 사람의 죄를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이 넘도록 아직 부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담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제사장 부시는 시퍼런 칼로 제단 위에서 양들의 멱을 딴다. 몇 마리의 목을 땄을까? 이 귀찮은 질문에 사제들은 대답한다. “희생양의 수를 집계할 계획이 없다.” 양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이 광경에 경악하는 우리에게 파월 사제가 태연히 말한다. 후세인의 죄를 씻기에 저 정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양들의 침묵은 기가 막혀서일까?(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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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는 러시아 인민의 어깨에서 공산주의의 멍에를 벗겨주러 왔다는 히틀러의 군대에 포위됐고, 바그다드는 사담에게 억눌린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주러 왔다는 부시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침공하는 부시와 침공당하는 후세인, 어느 편이 옳은가? 침략하는 히틀러와 침략당하는 스탈린, 정의는 어느 편에 있을까? 침략당한 독재자와 침략하는 제국주의자,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라크 민중의 해방자는 누구일까?(p140~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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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막을 수 있다. 문제는 평화주의 역량을 강화하여, 그것으로 국가가 저지르려는 전쟁에 대한 시민사회의 내성을 기르는 것뿐이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은가? 그럼 제발 ‘정치’를 하라. 내가 다니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화장실 벽에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정치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의 연장이다.”(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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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인 夢中人 - 사진, 내가 버릴 수 없는 이야기
이홍석 지음 / 바우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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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생각해도 사진집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보통 도서관에 가면 세 권의 책을 빌려오는데 그 중 많게는 두 권 정도가 사진집이니 말이다. 예전에는 죽어라(?) 안 보던 사진집을 요즘은 아예 코를 박고 사는 것 같다. 우리 집과 가까운 성서캠퍼스에는 사진집이 적어서 대명동캠퍼스(예술대학이 있는)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 때도 있지만, 그 귀찮은 것까지 감수하면서 사진집을 탐하는 요즘, 내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완전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夢中人』은 제목에서 먼저 끌렸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가 이홍석의 포스(?)에 매료되어 접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란 점이 있다. 먼저 사진가 이홍석의 나이에 놀랐다. 불혹을 넘긴 나이라니! 분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 멋진 포스를 봐서는 전혀 마흔을 넘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책을 반 가까이 읽고 나서 알게 된 이 충격적인(?) 사실이 이 책에 더욱더 빠져들도록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다음으로는 그의 사진과 글에서 풍기는 ‘데자부(?)’ 현상이랄까. 처음부터 나열된 사진들은 참으로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예전에 읽었던 조병준 시인의『따뜻한 슬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피사체가 동일한 것도 있고 그 구도까지도 흡사해서 ‘이거 내가 이미 본 책이던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사진이 한둘이 아니었다.  


글에서 역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사진가 김홍희의『방랑』,『나는 사진이다』에 녹아 있는 삶과 사진, 여행에 대한 철학과 잇닿은 느낌이랄까. 특히나 여행을 ‘자아를 방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홍석의 여행철학과 ‘어쩌면 나는 사진과 방랑을 통하여 나의 절대적인 善을 이루려 하는 구도자인지도 모른다.’는 삶에 관한 성찰적인 모습에서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각자의 길,
그 끝없이 이어진 여정 위에 서있는 외로운 여행자들이다.
너 나 없이 우리는 그렇게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안식처를 찾고,
또 아침이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외로운 여행자들인 것이다.(p16)  


그와 함께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 그는 이렇게 단정해버린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여행자’라고 단정함으로써 빼도 박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와 함께 여행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는 이처럼 영특한 듯, 조금은 간사하게 자신의 발걸음에 ‘우리’를 꼬리처럼 달고 여행을 시작한다. 이렇게 그와의 방랑은 하릴없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리가 더 텅텅 비어가는 그런 날이었기에 나는 내게 작은 휴식을 선물로 주기로 했다.
오늘은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무위도식을 즐기자!(p97)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책임한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그 힘과 용기는 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무위도식을 즐’기자니! 그렇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여행과 방랑이라는 이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대책 없음’까지도 삶의 여유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화끈함! 오직 방랑의 길을 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무모함이 아닐까. 온갖 것으로부터 사랑의 빛을 받아본 자만이, 그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스치는 모든 것들에게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길 위에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 그리고 흔들리는 잎사귀 밑에서 우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결코 우연한 스침은 없는 것이다!(p196)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차근차근 줄여나간다면, 우연이 아닌 작디작은 모든 것들의 바람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값진 ‘필연’임을 깨달아간다면,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삶 속에 위치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연이 줄고 필연을 늘여가는 것, 그것을 깨달아가는 것이 삶에 있어서 나 스스로가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게 아닐까. 내 삶에서 진정한 구도자가 되어가는 그 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우연의 참모습을 벗겨내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싶다.  


시인 조병준이 말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들과 그와 유사한 사진들, 그리고 사진가 김홍희와 닮은 방랑에 대한 철학과 확고한 생에 대한 신념. 이 모두를 합쳐 놓은 것만 같은 책이 바로『夢中人』이 아닌가 싶다. 이홍석은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그치지 않고 역시나 그만의 사랑과 외로움과 방랑의 흔적을 새겨놓았다. 흥미로움으로 시작해 놀라움 속으로 나를 매료시킨 책, 특유의 긍정하는 삶의 원칙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불혹의 나이. 그 흔들림 없는 나이에 단언컨대 그는 불륜을 저질렀다. 아직도 끊임없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리라. 세상과의 간통을 당당하게 낱낱이 적어 내려갔으며, 사진으로 증거까지 남기는 그의 대담함(?). 여전히 그는 세상이라는 ‘만인의 여인’을 탐하고 범하기에 여념이 없음을 안다. 여행자, 그것도 불혹을 넘긴 이 여행자의 방랑은 온통 찬란한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다채로우며 눈물겹기까지 한 몸부림을 닮은 듯하다. 그렇게 아름답고 때때로 쓸쓸하기까지 한 세상과의 떳떳하고 대담한 불륜행각에 과연 어느 누가 그에게 간통죄를 씌울 수 있을는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는 언제나 세상과의 불륜을 즐기며 방랑하는 한줄기 뜨거운 바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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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사랑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많이 가슴에 품을 수 있고, 더 오래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래야만 비로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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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어도 열대의 바다가 빙하로 뒤덮이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은 반짝이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의기소침한 예언 따위와 검은 월요일이 우리의 침대를 눈물로 적시지는 못할 거야!(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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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톡스는
세월의 주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가득한
미소일 것이다!(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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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中에 가진 것 없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꽃처럼 살고 싶다.
속내 붉은 꽃잎은 붉은 물로 흐르고,
속내 푸른 꽃잎은 푸른 물로 흐르는 솔직함.
가끔은 그런 꽃처럼 살고 싶다!

누군가 어여쁜 이의 손에 '툭' 꺾여서 낡은 화병에 담겨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도 좋을
그런 꽃으로 살고 싶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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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도, 허망한 죽음도, 나와 당신의 병약한 가슴속에도 우린 모두 무언가를 묻어두고 산다.
그것이 한때는 찬란했지만 패배해버린 꿈의 잔해든, 사랑의 기억이든······.
미련해 보여도 조금만 더 오래도록 기억해주고 쓰다듬어줄 수 있다면
가슴 헛헛한 날에도 미칠 듯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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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게 떠나지 않는 자에겐 가슴 시린 만남도 없다!
그리고 망설이는 삶은 언제나 그 자리일 뿐이다.(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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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되
결코 그 뿌리가 뽑히지 않는 지혜로운 파스칼의 갈대처럼
불혹이란 때로 그러해야 한다.(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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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것들은 외로운 것들끼리 서로 기대어 있을 때
세상은 비로소 세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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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사진과 방랑을 통하여 나의 절대적인 善을 이루려 하는 구도자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구도자라면 외로움쯤은 괜찮다!
세상과 조금 떨어져 고독하여도 괜찮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긍정이어야 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은 늘 뜨거워야 한다!(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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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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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잊혀지고 싶겠는가!
누군들 마지막을 생각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 봄, 나는 보았다.
너무 조촐하여 초라하기까지 한 꽃잎의 마지막 비행을 바라보며 나의 마지막도 그러하기를 소망한다.(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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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목적지는 단지 형식일 뿐,
진정한 여행이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를 방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떠나 왔다고 기뻐할 일도, 돌아갈 곳이 없다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닌
여행은 그저 느리게 걸으며 온전히 나를 사색하는 일이다.(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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