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음악에 있어 낭만시대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게 문학에서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일명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할까. 베르테르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그 이전까지의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정표현’이라는 한계를 비로소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중심의 중세를 거치면서 억눌려있던 인간 내면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찬란한 청춘의 절정을 맞은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속 깊이 꽁꽁 묶어둔 슬픔, 분노, 공허, 절망, 허무 등을 과감히 표출한 것이다. 방황, 추방, 고립, 은둔, 상실, 자살 등 여러 모습으로 말이다. 찬란하기만 할 줄 알았던 청춘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속에 내재된 그 ‘암흑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며, 찬란한 빛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청춘을 잃어버린 청춘이랄까. 그런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해 알랭 드 보통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잃어가는 길과 빛을 되찾아주기 위해,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에 더 이상 무방비상태로 전락한 채 방황하는 일을 멎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통은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첨병으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내세운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에는 소크라테스를,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에는 에피쿠로스를, ‘좌절에 대한 위안’에 세네카를,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에 몽테뉴를,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에 쇼펜하우어를, 끝으로 ‘곤경에 대한 위안’에 니체를 첨병으로 내세우고 짧지만 긴 여정을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기후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규모 따위는 제쳐둔다해도-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p28)』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곧잘 해답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현상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함으로써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선택과 판단이 갖는 특수성이랄까)에서는 대체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늘 우리에게 당연하게 제공되는 많은 것들 즉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접하는 소위 일반적이라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그리 깊게 의구심을 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이미 다수들이 향유하고 있는 체제 혹은 문화, 사회시스템, 제도 등을 응당 옳은 것으로,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다수’ 혹은 ‘절대다수’라는 잣대가 어느덧 ‘옳은 것’ 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때문일지라. 그와 반대되는 입장들은 ‘그릇된 것’ 혹은 ‘일탈’이라 규정해버림으로써 우리가 의구심을 일으킬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끊임없이 치고나가는 의구심들 앞에 우리는 용기를 내 움켜 쥐어야한다. 내 주변에 있는, 도처에 깔린 다수의 간섭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것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젊음이라는 영혼을 가진 세대들은 더 이상 눈이 먼 채로 다수의 물결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시대의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냥했다면, 이젠 이 세상 속의 부조리라는 감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총구를 겨냥하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야하지 않을까 싶다.

고로, 우리는 ‘상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필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p96~p97)』

우리는 늘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만 정녕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늘 우리로 하여금 시야를 좁게 만들고 집중을 ‘집착’으로 변질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좀먹는다. 사고의 폭을 좁혀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용기와 의지를 구석진 곳에 처박아버린다. 더 나아가 불안에 떠느라 신경은 예민해지고 걱정과 불안은 날로 눈 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결국, 우리는 해결을 위한 노력도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잃은 채 그렇게 허약해져만 가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과감하게 절망(?)하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며 최악의 결과로부터 추측된 걱정의 단편이다. 그렇다면 미리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는 시간을 좀먹으면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절망에 빠진다는 게 아니라 현재 내 불안의 위치를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이미 결과로써의 불안으로 바꾸는 것이다.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롯이 불안에 잠식되느니 차라리 그 불안을 ‘이미 절망’이라는 상태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헤어날 궁리에 힘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로 불안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불안을 잠식시키고 좀더 이성적인 올바른 판단과 노력에 힘 쏟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는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사색이라는 처방전에 다름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뭔가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들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p241)』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조리는 존재했나보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도 대학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품고서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여놓지만, 방대한 지식들을 쉼 없이 노트에 빼곡하고 베끼는 작업에만 열중한 채 우리의 가슴이 아닌 머리를 그저 지식을 담는 그릇정도로 전락시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분명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인가를 담긴 담아야 한다.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말이다. 지식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하고도 고차원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담고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관이 없다면 쉬이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이끌어내고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때만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그간의 수고로움(시간적·정신적인)을 모두 보상받는 길이 아닐까싶다.

문제는 아주 값비싼 그릇에 담긴 구정물이냐, 아니면 질그릇이지만 값진 옥수(玉水)냐는 게 아닐는지.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p333)』

어떤 목표를 달성, 어떤 성취나 성공은 큰 의미에서 완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그 과정에는 탄탄대로만 있는 것도 아니며 진구렁이나 습지 혹은 고달픈 비탈길이나 비포장도로도 있을 것이다. 이를 대체로 고난이나 시련 그리고 고통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내가 계획한 ‘완성’에 도달하기 위한 좋은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써 인정하는 것.

어떤 고통도 없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설령, 내가 편하게 얻은 게 있다고 한들 이는 곧 누군가의 고통이면 피땀서린 고통의 한 조각일 것이다. 고통은 값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에 부딪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중심을 잃기 십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만족이라는 교훈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완성을 위한 값진 과정 혹은 중추적인 요소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철학은 결국 인간 잠재력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위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일이 그렇듯, 인간 완성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과 극단적인 고통(우리는 첫 번째 책을 쓰느라 10여 년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의 묘한 혼합으로 귀착되었다.
니체가 산을 이야기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정당성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p343)』


내일에 대한, 내 미래에 달성될 어떤 목표에 대한 막연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믿음과 그 과정에서 겪는 무수히 많은 고통의 쓴 맛이 자연스레 어우러짐으로써, 특히나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임으로써 좀더 나은 내일을, 꿀맛 같은 성취(완성)를 맛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걸을 수밖에 없다. 험준한 산세에 아찔해져도 우리는 걸어야한다. 발이 부르트고 비 오듯 오는 땀 때문에 탈진을 하게 되더라도 잠시 쉬어갈 뿐 절대 포기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정당성이란 결코 심오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내가 겪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은 불평등 불공평이 아닌, 정상에 대한 갈증과 소망으로부터 내려지는 가혹하지만 분명 정당한 고통, 그런 정당방위일 뿐일지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목표한 것을 포기하거나 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최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이정표일지 모른다. 이 이정표에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성취, 성공, 완성이라는 단물을 보람차게 마시게 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 한다고 느끼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최고의 희열을 맛 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슬픔’을 당당하게 ‘기쁨’으로 대치시켜 슬픔으로써 정체된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해나가는 그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과 과정을 잇고 유지하는 건 바로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순수하고 강인한 의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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