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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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수능대비모의고사 수리영역의 평균점수는 달력 한 장을 채운 날수에도 못 미쳤다. 80점 만점에 20점을 넘긴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이기에(물론 수능시험 당일에는 준비해간 연필이 영험靈驗한 능력을 발휘하며 잘 굴러주어서 생에 처음으로 60점을 넘기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수학이나 수리영역의 ‘수’자만 봐도 꼴 뵈기 싫었다.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는 내가 그토록 꼴 뵈기 싫어했던 학문의 길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히로나카 헤이스케라는 유명한 수학자이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받은 저자는 어릴 적부터 수학에 대한 남다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수학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단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살던 평범한 학생이, 그것도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수학에 발을 들여놓게 되다니.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보기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즐거움》은 이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가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나를 이 위치에까지 오르게 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고나 할까. 다분히 자신의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는 특별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치’에 관한 것들이다. 


『갓난아이가 유아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시기가 있는가 하면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시기도 있다. 부모가 예쁠 때만 아이를 키우고 밉다고 하여 키우는 것을 포기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출발 시점의 모습이 설령 갓난아이와 같이 유치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키워 가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아이들 다 키워 놓고서야 사회에 대한 그 아이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물건도 만들어 놓고 보지 않으면 그 실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p91)』 


창조? 일단 뭐 밑천이 있어야 창조를 하든지 오그리든지 할 것 아닌가.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말하는 창조의 밑천은 배움이다. 인간은 항시 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뭔가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분석하며 끝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분명 시시각각 배움의 길 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좀 엉뚱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이런 배움의 길에 서 있는 ‘나’‘발견’ 혹은 ‘의식화’하는 것이 창조의 밑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가. 세상에 이로운 걸 창조해야 할 것이고, 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창조해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창조의 그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들이 좀 어설프다고, 유치하다고, 보잘것없다고 하면 어떤가.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것, 충분히 스스로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통합되어 창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지 무엇을 배운다고 해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이 필요하다.(p124~p125)』 

 

 

그럼 어떻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미련스럽게, 차근차근 그렇게. 단, 즐겁게. 배움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도 필요한 자명한 것들이다. 누구나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렇게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 가능성으로 남겨두느냐,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루한 싸움에 첫 발을 들여놓느냐의 차이랄까. 


『지금까지 나는 나의 연구 태도 혹은 생활 태도로서 우선 사실을 그대로 파악할 것, 가설을 세울 것, 대상을 분석할 것, 그래도 길이 막혔을 때는 대국을 볼 것, 이상 네 가지를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더 나아가 사고하거나 창조할 때는 단순 명쾌하게 되도록 노력할 것을 중시하고 있다.(p136)』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저자처럼 나름의 과정이 없다. 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기 일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다보면 어느새 엉뚱한 물음을 잡고 있는 나를 본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려는 생각은 강하지만 늘 삼천포로 빠진다. 저자가 말하는 원칙대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 어떤 문제나 물음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p153)』 


남들이 보기에는 내 삶이 좀 고달프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가끔 서글플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누구나 삶이라는 것 자체에서 느낄 법한 그런 허무함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내 처지를 사랑하고 인정하며 살아간다. 몸은 ‘아, 고통스럽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조금이나마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겪는 모든 경험들로부터 배운다. 뭔가 깨달았을 때, 그것이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일지라도 흐뭇하다. 마냥 기쁜걸 뭐. 


『느긋하게 기다리고(鈍), 기회를 잡을 행운이 오면(運), 나머지는 끈기(根)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가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p187)』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그중에서도 끈기에 관한 것은 정말 깊게 반성해야함을 느낀다. 나는 좀 끈기가 없다. 아니 아주 많이 없다. 조금 성실한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차진 맛이 없다고 할까. 내 입맛에 맞는 것에는 미련하리만치 달려들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게 느껴질 때는 그냥 맥이 풀려버린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다른 것에 혹한다. 그래서 늘 나는 결과물이 없나보다. 이것저것 벌려놓기만 하고 도무지 수습을 못하니 원. 


『우리에게 앞으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력(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지혜)과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리나 원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어서는 다양성이나 변동에 대처할 수 없다. 변동과 다양성에 대처하기 위한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소심(素心)으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p230)』 


판단력과 생각하는 힘. 어디서 이런 힘을 길러야 할까.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뭐 유별난 책벌레는 못되지만 그래도 독서를 통해 우둔함을 많이 벗은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고, 생각의 중심은 늘 불안하다. 선택의 순간엔 늘 갈팡질팡하며 심장은 늘 두방망이질이다. 언제쯤 나는 주어진 내 삶 앞에 중심을 잘 잡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책 읽기가 나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마냥, 즐겁게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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