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노나주는 유쾌한 인생사전 노나주는 책 1
최윤희 지음, 전용성 그림 / 나무생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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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하던 5월 어느 날, 바이올렛님으로부터 한 장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별다른 기별 없이 내게 날아든 이 엽서에는 조병준 시인의『따뜻한 슬픔』에서 발췌한「따뜻한 슬픔」이라는 시가 고운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어린왕자 스탬프가 서명처럼 혹은 낙관처럼 찍혀있던 이 ‘따뜻한 5월 어느 날의 작품’에는 어떤 짧은 인사말도 없었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 따뜻한 시 한 편과 이를 지켜내고 있는 듯 보이는 어린왕자뿐이었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를 걸으며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 그 너머의 따뜻한 안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책 속을 여행하면서 슬쩍 건져 올린 글귀를 무료한 어느 오후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보내는 이는 없고 오직 받는 이만 적어서, 어떤 겉치레격인 짤막한 안부인사도 없이 날리고픈 때가 있다. 내 평온한 시간이 방해받지 않으면서 받는 이에게 지금 이 시간대를 고스란히 담아 보내고픈 때가 있다. 급기야 부산하게 엽서를 찾고, 만년필을 끼적이는 사이 내 오롯한 오후나절이 깨어져버리고 달아나버릴지도 몰라 지금보고 있는 페이지를 살포시 도려내 날리고픈 충동에까지 이르는, 그럴 때가 있다. 


 *

『마음을 노나주는 유쾌한 인생사전』은 짤막하지만 유쾌한 삶의 의미를 전하는 글과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중한 맛이 우러나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장은 독립적으로 쉽게 떼어내 사용할 수 있도록 점선처리 되어있고, 글귀와 그림을 제외한 공간은 직접 채워도 될 만큼 충만하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를 적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진 않지만, 언제든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쉽게 전해질 수 있도록 예비된 책이다. 고로, 이 책은 읽는 나 자신을 위한 책이면서 나와 연결된 모든 이웃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노나주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책인 셈이다. 


말은 힘이 세다. 말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쁜 반대말을 입술에 달고 살자.

아, 신나라~

아, 행복해라~

거짓말처럼 지겨움이 증발해서 날아간다.

∥「이쁜 반대말」中 _ p30∥ 

 

말과 글이 힘이 세다, 고 느낄 때가 있다. 남을 설득하고 때론 굴복시키고 논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때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남몰래 숨겨둔 ‘바람문’을 서서히 현실화 혹은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느낄 때이다. 말은 내게서 나오지만 결국 나에게 다시금 돌아오기 마련이다. 다시 돌아오게 될 그 말에 다른 이들의 좋은 기운과 바람이 섞여있다면, 나는 좋은 말을 내뱉은 사람이고 그로 인해 내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자못 부끄럽지만 작으나마 기분 좋은 착각에 흠뻑 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결국 그 말은 나 자신을 조금 더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셈인 것이다. 기적이란 다름 아닌 내가 내뱉은 말이 무사히 좋은 곳을 여행하고 조금은 더 좋은 말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 


돈 없는 사람을 거지라고 부르지 마라.
진짜 거지는 추억이 없는 사람이다.
∥「거지」_ p39∥  


어쩌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거지’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허상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 내가 일말의 연민과 동정심을 발휘하는 그 순간, 이 세상 어떤 사람이건 간에 내가 만들어낸 허상의 누더기를 걸쳐 입게 되는 게 아닐까. 추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단지 지금 먹고살기 바빠서 잠시 추억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핑계뿐이어도 좋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아도 좋다. 어느 잘 차려입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조금은 불온한 눈빛을 내게 건네는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나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댈 것 없는 당당한 거지가 되겠노라. 


연꽃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는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면 미련 없이 털어버린다.

그래서 연꽃은 그윽하고 향기롭다.

∥「연꽃」_ p69∥  


몇 달 전에 연꽃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우북하게 모여 있는 연꽃은 생생한 장관을 연출함과 동시에 조금은 늙수그레한 기운도 함께 피워 올리는 듯했다. 가느라단 꽃대 위에 조금은 위태롭게 헤벌쭉하게 핀 연꽃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살짝 끼얹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꽃을 만나면 꼭 이렇게 물 한 손바가지 쯤은 끼얹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연꽃을 대할 때만 치러지는 신성한 의식처럼,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렴풋하게 학습된 어떤 의무감에 떠밀렸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끼얹은 물 한 손바가지는 금세 저 있던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꽃이, 연잎이 밀어내어서도 아니고 물 저 혼자 떨어진 것도 아닌, 이미 서로에게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 같았다. 이 둘의 약속이란 어쩌면 서로의 성질에 대한 배려심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끈함과 미끈함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제 무게로 서로를 짓누르지도 않을 것이라는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신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연꽃은 늘 그윽한 향기를 폴폴 날리는 것일지라. 그렇기 때문에 물은 그보다 낮은 곳에서도 평온하게 숨 쉴 수 있는 것일지라.

예술의 모든, 원재료는 그리움이다
∥p85 _ 삽화 캡션∥ 

 

작고 초라한 집 두 채 앞을 한 소녀가 바구니처럼 생긴 것을 들고 종종걸음 걷듯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작고 초라한 집 두 채를 합치고도 두어 배쯤은 더 큰 우람한 집이 있고, 그 안에는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있다. 나란히 앉은 네 식구 옆 아랫돌 근처에 ‘도꾸’가 한 마리 있고 마당에는 어미닭을 뒤따르는 네 마리의 병아리가 졸졸졸 지나간다. 또 집 옆에는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난 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어엿한 기와지붕 위에는 파수꾼처럼 지켜선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런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 아래쪽에 그린이의 서명과 함께 위에서 인용한 캡션이 달려있다. 


한참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예술이 뭔지, 그것을 오롯하게 이해할 수도, 받아들여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이 글귀를 해석할 재간이 없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던 것이라곤 작고 초라한 집과 우람한 집 사이에는 어떤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것만 어렴풋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리 머지않았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고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혹여나 한 번쯤은 되돌아가고픈 어쩌다 만난 망령된 상상 속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식구는 나란히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각각의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공허할 법도 한 시간 속에서 그리움은 만질 수 없지만 만나게 되는 것이고, 기억 속 혹은 상상 속 시간들을 오롯이 눈에 보이는 것 무엇쯤으로 보이게끔 하려는 것이 예술의 시작쯤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 책 속 글과 그림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제 각각 의미를 품은 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한 장에 들어찬 글과 그림은 하나의 격려와 용기, 유쾌함과 활력이 아닌 그 배로 작용한다. 가령, 글이 담백하면 그림은 싱긋거리는 듯 상쾌함을 주고, 글이 생기발랄하면 그림은 인생사의 담담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 하달까.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 더불어 생각하고 ‘노나주는’ 기쁨까지 맛 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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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 2009-12-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너의 글마저 노나주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것 같아. 너의 기분, 너의 생각, 너의 느낌들이...^^ 우린 진짜 거지는 되지 말자. 좋은하루 보내~ ^ㅡ^

ragpickEr 2009-12-28 00:23   좋아요 0 | URL
까까^^*
후훗..; 좋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어찌 얼굴이 화끈거리네^^*;ㅋ 교보에 올린 리뷰 재탕 삼탕하는 것이라서..;ㅋㅋ 그려그려!! 거지는 되지 말아야지! ^^* 후훗.. 감기 조심하고 올 한 해 수고 많았수! 마무리 잘 해서 힘차게 오는 한 해도 즐겨 맞이하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