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한국의 서정시 44
정일근 지음 / 시학(시와시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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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는 언젠가 김용택 시인의 시들을 보면서 감히(?) 그는 참 村스럽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 이후로 읽은 몇 안 되는 시집을 통해 어쩌면 대체로 시인은 죄다 ‘村스러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에 이르렀다.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 이름 모를 들꽃 하나, 새들의 지저귐, 마당 앞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무릉도원 같은 풍경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네들은 시인이면서 늘 村스러운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위 문명 혹은 문화라는 화려한 겉옷을 걸치고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삐 살아가는 이들은 아마도 村스러울 새가 없지 않을까 싶다. 다행이도 우리 곁에는 늘 村스러운 시인들이 있다. 뭔가 만들고 구축하고 짓고 생각하고 조바심내고 쫓기다시피 바쁜 우리들을 위해 시인들은 펜대를 버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일구는 꾸밈없고 가식 없고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러한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그곳에서 시인들은 싹이 움트고 꽃대가 나고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순리 그대로를 그저 겸허하게 받아 적을 뿐이다. 이런 시인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우리는 지친 육신과 영혼을 위로받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은 제목부터가 참 정겹고 마음에 쏙 든다. 그냥 ‘착한 영혼’이라든지 ‘낡은 것의 영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흐뭇함과 깊이가 있는 듯하다. ‘낡은 것’을 추레한 것쯤으로 방치하지 않고 ‘착하게’를 덧붙임으로써 어감은 물론 우리가 조금은 낡은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조금은 푸근한 마음으로 ‘낡은 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듯하다. 게다가 ‘영혼’이라니! 도대체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당장에라도 시집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눈 내리는 은현리 겨울들판을/전봇대는 걸어가신다/펄펄 날리는 눈보라 맞으며/푹푹 빠지는 외눈발자국 남기며/들판 건너 마을 지나/마을 지나 가파르고 험한 산길 따라/키다리 아저씨가 찾아가는 곳/솥발산 7부 능선에 웅크리고 있는/하늘 아래 저 먼 첫 집/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저녁마다 전봇대가 찾아가면은/녹슨 양철지붕 낮게 인 오막살이에/삼십 촉 알전구/참, 참 따뜻하게 켜진다

∥「겨울 전봇대」_ p17∥ 


나는 전봇대 할아버지처럼 늙을 수 있으려나. 그 우직한 모습 그대로 따뜻함을 언제도록 간직하며 늙어갈 수 있으려나. 그런 부지런함으로 누군가에게 내 남은 체온 1도씨쯤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저처럼 착하게 낡으멍 늙으멍 내게 주어진 삶을 노닐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생을 준비할 수 있으려나.

길가 낮은 곳에서 키 작은 그대는 붉은 화관을 쓰고 발레리나처럼 인사하지만/용서하시라, 나는 점잖은 척 눈인사 나누지만 그대 이름 모르는 시인의 부끄러움에 얼굴 화끈거리도록 미안하다 

∥「봄, 인사」부문 _ p20∥ 


가끔 이름을 모르는 나무나 풀, 꽃이며 곤충이며 새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목이며 마음에 갑갑증이 컥 걸린다. 그네들이 전하는 인사를 들을만한, 들을 수 있을만한 그릇도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없이 여태 내게 걸린 갑갑증에만 짜증을 내고 답답해한다. 가끔 이렇게 걸려드는 호기심이며 궁금증은 나를 아주 ‘예의 없는 것’들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시인처럼 ‘얼굴 화끈거리도록 미안’한 사람이 되려면 나는 얼마나 더 村스러워져야 한단 말인가. 


 나무는 자신의 몸 속에 둥근 시간 숨기고 산다/나이테가 둥근 것은 시간이 둥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시간이 둥근 것은 우리 사는 세상이 둥글기 때문이다/사람의 시간이란 직선의 속도는 아니다/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시간이 사람의 시간이다/둥글게 걷다 보면 당신은 어디선가 나무의 시간과 만날 것이다/하늘이 사람의 엄지손가락에 나무의 나이테 같은/사람이 걸어갈 둥근 길을 숨겨 놓은 것처럼

∥「둥근 길」_ p33∥ 

 

둥글둥글 수더분한 시인의 얼굴에는 엄지손가락에 있는 생의 지문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는 표정만으로도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시간이 사람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언젠가 ‘나무의 시간과 만’나게 된다면 살포시 내 엄지손가락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엇나가버린 내 시간을 조율하고 싶다. 행여, 잘려나간 나무밑둥치를 만나게 된다면, 이젠 걸터앉지 않고 또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엄지손가락을 맞대보고 싶다. 그렇게라도 그네들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마당에 다 있다, 시를 쓰는 나는/마당에 나가면 시는 기다리고 있다/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 기다리고 있다/내가 아는 식물학자는/한 평의 땅에는/200가지의 식물이 산다고 했다/살아 있는 생명이 있어/마당 한 평에 200편의 시가/마당 한 평에 200컷의 사진이 있다/마흔 넘어 스무 평의 마당을 가진 나는/4000편의 시詩창고를 가진 부자/내게 시로 가는 길을 묻는 이여/그대 주머니 털어 마당을 사시라/대백과사전에/인터넷 검색창에서 찾을 수 없는 시가/마당에 있다, 미당도 김춘수도 쓰지 못한 시가/마당에 다 있다/마당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마당론論」_ p84∥ 


나는 마당을 잃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마당 한 평 없는 집에 살고야 말았다. 베란다에 갖가지 식물들이 있은 들, 그네들은 보기에는 좋아도 한 편으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처량하기도 하다.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마당’을 버린 셈이다. 그것도 탈탈 싹싹 털고 털어 빚을 내고 내어 죽어버리라는 듯이 마당을 죽인 셈이다. 누군가는 우리 전원주택에는 마당도 있고 정원도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하나, 내게는 그 정원과 마당에는 식물들이, 그것도 ‘한 평에 200편의 시’‘한 평에 200컷의 사진’도 자랄 수 없는 공간처럼 보인다. 그곳에는 오직 인간만이 자라고, 욕망이 자라고, 공허한 허상만이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도심 속 자연이니 숲이니 하는 곳마다 인간만이 우글거리는 끔찍한 모습처럼. 

 

**

이미 늙어버린 청춘이라고, 한탄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다. 술도 진탕 마셔보았고 욕지거리도 해봤다. 허나,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나아질 것도 없더라는. 그저 그러고 있는 내 모습에 욕지기만이 나오더라는. 이제라도 ‘착하게’를 조심스레 덧붙여보고 싶다. ‘착하게 늙어버린 청춘’이기를 바라는 삶을 갈망해본다. ‘착하게 낡아가는 젊은 영혼’이기를 소망해본다. 그렇게 내일을 향해 조용히 뒷걸음질 쳐본다. 


‡‡‡‡‡‡‡‡‡‡‡‡‡‡‡‡‡‡‡‡‡‡‡‡‡‡‡‡‡‡¨¨주워 담기¨¨‡‡‡‡‡‡‡‡‡‡‡‡‡‡‡‡‡‡‡‡‡‡‡‡‡‡‡‡‡‡

자주달개비꽃 속에 수술 여섯 식구 사는데/둥글게 모여 앉아 도란도란 아침 밥상 받는다/밥은 은현리 햇살로 지은 햇살밥, 국은/꽃잎에 맺힌 이슬로 끓인 이슬국이 전부지만/자주달개비 식구는 밥상 앞에 앉아/달그락 달그락 즐거운 수저소리 다정하다/아버지 젊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 다섯 식구/달개비같이 여섯 식구 되었을 것인데/그 사람 그렇게 떠나가지 않았어도/다섯 식구 앉은 밥상 그득했을 것인데/오늘따라 빈자리 그 빈자리는 바다처럼 넓다/큰 잎처럼 다 자라 객지에 나간 아이들/이 아침 따뜻한 밥에 더운 국 제대로 차려 먹는지/자주달개비꽃 곁에 쪼그려 앉아/산다는 것은 밥상에 빈자리 늘어나는 일이라고/마음은 우물처럼 깊어진다, 자주달개비꽃처럼/식구 다 모여 한 밥상에 앉고 싶은 아침/내 우물 속에서 자주색 깊은 슬픔 출렁거린다

∥「자주달개비꽃 앞에서- 식구·4」_ p41∥ 

 

*[어루숭어루숭] - 줄이나 점이 어지럽고 화려하게 무늬를 이루고 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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