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희생》을 봤다.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화 속 인물들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제각각 무너져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물론 한 인간이, 인간의 의식이, 인간이기에 가능한 모든 행위들이 어떻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파괴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전쟁이란 것이 ‘파괴적 미학’에만 국한된 행위라고 한다면, 이는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 조금은 희망적인 이야기처럼 들릴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지 않다. 전쟁이, 전쟁이후의 삶,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 폐허 더미 속 희망이란 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뒤이을 완전무결한 파멸의 시간으로 가는 전조에 불과한 것이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작년쯤에 읽은 미셸 깽의『처절한 정원』을 읽고 관심을 두고 있던 책이었는데 데이드리머님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주신 책이다.(묵혀두기로서니 너무 오래다 싶어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기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저자 잉에 숄은 두 남매동생 한스 숄과 조피 숄이 활동한 나치저항조직 ‘백장미단’에 대한 자료와 증언,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짧았지만 불꽃처럼 강렬하게 주어진 삶과 임무에 충실했던 두 남매를 비롯한 백장미단의 활동은 감동적이면서도 처절한 아픔처럼 쉽사리 씻기지 않는다. 


“큰 위기가 닥치면 많은 문제들이 눈앞에 드러나게 된단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우선 1차 세계대전이 있었지. 전쟁이 끝난 직후에 많은 문제들, 엄청난 빈곤과 실업난 등이 터졌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마치 꽉 막힌 회색 벽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면, 그럴듯한 약속에 귀를 기울이게 된단다. 그 약속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따져보지도 않고.”(p30)  

 

나는, 감히, 상상해본다. 모든 곳곳은 폐허처럼 파괴되고 무너져 내렸으며, 당장의 끼니도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날이 솟구치는 것은 날카로운 신경이었을 테고, 짐승의 그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이성이란 오직 빵 한 조각을 갖기 위한 투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를 비집고 히틀러, 즉 나치정권이 들어선다. 이미 사람들은 ‘그럴듯한 약속’이 속삭이는 천국행 기차표를 거머쥔다. 그것이외에 그 무엇도 더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여물통만 가득 차면 만족하는 짐승이 아니란다. 인간은 자유로운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있지. 이러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는 존재해서는 안 돼.”(p32) 

 

결과는 참담했다. 천국행 기차에는 빵도, 자유도, 안락함도 없었다. 더 참담한 것은, 인권이라는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 기필코 존재해야할 인간이, 사람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혹시나 지금 우리가 몸을 싣고 있는 이 시대의 종착역 역시 저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치가 떨린다.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선물이 아니겠는가?(p33) 


모든 건 상대적이라지만, 동시에 절대적일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무탈하다는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행복이 아닐까. 행복이란 것은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상대치로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행복은 그저 절대적으로, 본질적으로 행복일 뿐이고 스스로 행복할 뿐이지 않을까. 계량화, 수치화, 현상화, 일반화 등등이 일반의 모든 가치의 척도일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숨이 붙어 있고 제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 오늘을 잘 버텨냈다는 그런 안도의 상대치일 뿐이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인간이 누리고 추구하는 모든 가치라는 상대치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의연해짐으로써 비로소 선물이라는 본질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다른 이유보다도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는 것,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 이 모든 것 앞에 너무 쉽게 굴복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전쟁이 생산하는 최대의 공포란, 도시가 파괴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사라져버린다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할 수 없는 데 있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존재 스스로의 파멸보다 더한 공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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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자만두 2009-12-27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감동감동+.+ 교보에서도 분명히 봤는데...다시 봐도 감동이에요. 특히 마지막 문단이요...저는 2012보면서 이런 생각했어요.(영화는 좀 별로...돈을 쏟아부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글구 투모로우랑 너무 똑같아서요..매사에 넘 삐딱한가..=.=;;) 지구 멸망하는 것보다...그 앞에선 사람들의 모습이...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요..슬펐어요..ㅠ.ㅠ

ragpickEr 2009-12-28 00:34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아..;; 그냥 자세하게는 모르고 제 생각만 끼적였어요..;부끄러워요~그런 반응..ㅋㅋ ^^*;; 2012..영화 좀 별로 인가봐요? ^^* 저는 외화를 잘 안봐서..;더군다나 그래픽 들어간 영화는 거의 안봐서..^^*; ㅋㅋ
사람이..인간이 제 모습..제 본성을 잃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인 것 같아요.. 서로가 못할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하구요..
그래도!! 희망은 그런 인간의 틈바구니 속에 있겠지요? ^^*
으라차차차차!! 남은 한 해도 으라차차차!! 마무리 잘 하셔요! ^^*
고맙습니다!! ^^*